문맥 (context)
이완용(李完用, 1858년 7월 17일(음력 6월 7일) ~ 1926년 2월 12일)은 대한제국의 관료이다. 을사늑약, 기유각서,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을 포함한 주요 친일파로 평가된다.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이다.
<heading>개요 </heading>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였고 내각총리대신에 올랐으며, 을사조약, 기유각서,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폐망시켰다. 정미 7조약에 서명해 행정권을 일제에 이전하였고, 1909년에는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교환하여 일제에 사법권을 넘기고 결국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이르렀다.
창씨명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이며, 일본제국에서의 작위는 후작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소위 '일선(日鮮)의 융화'를 내세운 일제의 각종 내선일체(内鮮一體) 관련 정책에 찬동하여 전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강제하였다. 그는 사후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에 묻혔으나, 광복 이후 지속적으로 묘가 훼손 및 방치되다가 1979년 직계 후손들에 의하여 화장되었다.
<heading>출생과 가계 배경 </heading>
1858년 7월 1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22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이석준(본명은 이호석[李鎬奭])이고 생모는 신씨(辛氏)였다. 그리고 친형제로는 15살 터울의 큰형 이면용(李冕用) 등이 있었다.
그의 먼 직계 조상들은 고관을 역임했는데, 이는 이완용의 후견인이었던 아비 이호준이 발 빠르게 대원군과 손을 끊고 이미 민씨 정권과 손을 잡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호준과 함께 수구파로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하기까지 양무 운동을 근대화의 모델로 삼게 된다.
이완용은 당시 젊은 엘리트라면 출세 가도에서 반드시 거쳐가야 했던 규장각 대교(待敎-정7품, 겸직가능)를 겸직했고 그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정6품),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정5품) 등 핵심 요직을 거쳐 외직(外職)인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 로 나갔다. 해방영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호준과 이완용 부자가 원래 주군인 대원군과 완전히 손을 끊고 민씨 정권과 결탁한 상태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해방영 설치를 주도한 것은 민영환으로, 그의 부친 민겸호 대감이 문제의 별기군 때문에 2년전 대원군에 의해 주살을 당했었다. 또한 민영환을 위시한 수구 내각은 개화파들이 주장해 설치됐던 병조 산하 조련국을 취소시키면서 대신 해방영을 설치했다.
<heading>갑신정변의 위기 그리고 출세 </heading>
1884년 음력 10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때 이완용은 해방영 주둔지에서 개화파의 집권, 그리고 그들의 3일 천하, 민씨 정권의 재집권이라는 정치적 격변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민씨 정권과 이미 손을 잡고 수구파가 됐으려니와 이완용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와의 접점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후계 수업에 바빠 개화파가 주장하는 것이 뭔지, 세계 정세나 시대적 당위성은 무엇인지 전혀 인식되어 있지 않았다.
1886년에는 중앙정계로 복귀, 조선 최초의 근대적 관료재교육기관이었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해 초보적인 영어, 과학, 경제학 등으로 재교육을 받으면서 비로소 신문물을 접했고, 이 때 뛰어난 성적으로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정4품),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정4품) 등으로 승차했다. 이듬해엔 세자시강원(世子施講院) 보덕(輔德-정3품)에 보임돼 왕세자 순종(純宗)을 가르쳤다. 이완용은 갑신정변 실패후 떨려나간 급진개화파들과 달리 민씨 정권과 등을 지지 않으면서도 신문물을 이해하고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신세대 인재로서 고종의 눈에 들었다. 정3품 당상관에 오르기까지 과거 급제부터 5년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실로 유례없이 빠른 승진이었다.
<heading>미국 외교관 생활 </heading>
1887년에는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발령됐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등을 따라 요코하마, 하와이를 거쳐 미국 워싱턴 D.C.에 가 대한제국주미공사관을 설치 후, 이듬해인 1888년초 병으로 박정양과 함께 소환됐다. 박정양은 청나라에 약속한 영약삼단(另約三端)을 지키지 않아 문책성 인사를 당했는데, 그들은 귀국 후, 미국이 일본, 러시아, 중국과 달리 한반도 지배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독립을 위해 미국을 적극 이용해야 한다는 조정 여론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그렇지만 정작 미국 문명의 가장 빛나는 업적이라 할 노예제 등 신분차별철폐, 헌법, 참정권 등의 입헌,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할 그 어떤 의견 표명, 노력도 하지 않았다. 불과 3~4년 전 갑신정변 실패후 신분차별 철폐, 양반 조세, 입헌군주정 도입, 의회 정치 논의를 했던 급진개화파들이 일본, 중국, 미국 등지에서 망명객이 돼 어떤 꼴로 고생하고 있는지 뻔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이완용은 집권 세력이 자주 바뀌는 불안한 정국에서 이호준과 함께 보신에 급급한 정치적 입장에 섰고, 근대 국가 건설과 국제 사회에서 독립을 인정받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절실한 인식이 결여된 상태였다.
1888년 음력 5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임명을 시작으로 이조참의·외무참의 등을 지냈다. 1888년 음력 12월에 주차미국참찬관에 재임명돼 이하영 부부, 부인 양주 조씨와 함께 부부동반으로 다시 워싱턴 D.C.에 갔다가 이듬해 12월에 주미대리공사로 승진 후 총 2년간 근무했다. 주미공사관의 이전을 지휘했고 재임시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회담하기도 했는데, 당시 미국 워싱턴에 체제중이었던 윤치호가 <워싱턴 이브닝 스타紙>등 현지 신문에 실리는 이완용 및 대한 제국 공관 소식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한 것이 남아있다. 역적으로 몰려 미국으로 망명간 문과 동기 서재필이 거지꼴에 갖은 인종차별을 견디고,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배리에서 다시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다.
<heading>1890년대 활동 >> 귀국 및 교육 개혁 </heading>
1890년 음력 10월에 귀국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교환서총판(交換署總辦)·형조참판)·공조참판·동지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동지춘추관사·전환국총판·우부승지·내무참의등 각종 요직을 역임했고 대한제국 내각의 대미협상을 도맡았다.
특히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정3품) 재임당시 미국에서 겪은 것을 바탕으로 근대교육개혁을 주도했는데,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제도화하고, 근대적 교사 양성사업 계획을 지휘했으며 조선의 국립대 격인 성균관의 커리큘럼을 개편해 지리, 산술, 과학등 서양 학문 이수 과목을 신설하고 정기적인 시험 제도의 개정을 주도했다. 이는 정부 주도로 이뤄진 최초의 교육 근대화 시도였다 할 수 있었다. 용인에서 친어머니 산소를 지키고 있는 이완용으로서도 위기가 감지됐으나 양아버지 이호준의 처분과 결단을 잠자코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1894년 6월 고부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수구파 일색의 조선 조정은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고, 이에 호응하여 청군이 조선에 진주하자 청일 양국 군대의 조선 반도로부터 동시 철수를 주내용으로 하는 톈진 조약이 자동 파기되면서 일본이 참전했다. 조정 대신들은 외세를 끌어들여 조선의 국제적 위신을 크게 실추시켰고 이제 사태는 그들의 손을 떠났다. 경쟁하듯 동학 농민군을 죽이던 청일 양국은 곧 직접 충돌했고, 육해전에 걸친 몇번의 공방전 끝에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청의 패전으로 양무 운동식 근대화의 한계가 드러났고, 12년전 명성 황후 환궁때부터 청나라와 결탁 중이었던 수구파 정권은 붕괴했다. 이완용 부자 역시 수구 정권의 핵심 인물들로서 일련의 사태에 책임을 져야 했으며, 과거 대원군을 버렸듯 다시금 말을 갈아타느냐 아니면 같이 몰락하느냐의 기로에 놓였다.
<heading>갑오경장과 개화파 내각에 참여 </heading>
1894년 8월 청일전쟁에서 청국군대를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승기를 잡은 일본의 비호 아래, 박영효 등 갑신정변 실패 후 도쿄서 망명 중이던 개화파들이 조선에 돌아왔다. 그들은 청에 의존했던 민씨 정권을 쫓아내고 2차 개혁을 추진했다. 이를 갑오경장 혹은 갑오개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개화파들은 이호준과 이완용을 같이 숙청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완용 부자는 아직 개화파 내각이 불안정하고 또 그들이 단 3일만에 몰락했었던 10년 전 갑신정변의 예도 있으므로, 이완용이 아직 친모 산소를 지키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고 일단 정국의 혼란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승리를 확정한 일본의 보호 속에 개화파의 개혁이 자리를 잡아가는 듯 하자, 이완용은 1895년 음력 5월 학부대신(學部大臣) 겸 중추원의관으로 내각에 참여한다.
1895년 음력 7월, 갑오개혁이 실패로 끝났다. 고종과 민씨 외척 등 친위 세력들은 박영효와 개화파에게 명성황후 시해 책모 등 역적 누명을 씌워 조정에서 쫓아냈다. 갑오개혁 당시 박영효의 13만 8천 자(字)에 달하는 개혁 상소문은 고종과 조정 대신 및 지방 민심을 전혀 잡지 못했고, 외형상 개혁이 진행되는 듯 보였던 것은 일본의 눈치를 본 수구파들이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삼국 간섭으로 요동 반도를 러시아에 뺏겼다. 조선 조정에 일본의 위신이 크게 떨어졌고 자연히 개화파의 위세도 땅에 떨어졌다. 졸지에 다시 역적들이 된 개화파들은 기약없는 일본 망명길에 올랐고, 조정의 관심은 이제 외교적 위압만으로 일제를 누른 러시아와 미국으로 쏠렸다. 새로운 근대화 모델도 찾아야 했다.
<heading>을미사변과 아관파천 </heading>
1895년 8월, 고종의 어심(御心)을 읽은 이호준은 국제 경험이 있는 이완용을 보내 러시아에 접근시켰다. 이에 이완용은 정동파에 가담해 러시아 세력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별안간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개화파가 조직했던 훈련대 소속 사병들이 민씨 정권의 탄압에 반발, 일본과 공모해 일을 벌였다. 스스로 낭인으로 자처하는 일본 극우들의 칼에 경복궁 건청궁 마당에서 명성황후가 목숨을 잃었고 나라의 존엄인 궁궐은 처참하게 유린됐다. 수구파 이완용 부자도 목숨이 위험했는데, 사변 당시 그는 주한미국서기관 호러스 뉴턴 알렌의 도움으로 미국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했다.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친일 개화파 내각을 복귀시키면서 을미개혁을 추진했지만, 직후 러시아가 사태에 적극 개입하면서 다시 물러났다. 고종과 수구 내각은 일본과 개화파를 조선에서 축출하기 위해 1896년(건양 1년), 미온적인 미국 대신 주한러시아공사 카를 베베르와 함께 아관파천을 기획했다.
이완용은 아울러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등을 겸직, 제국 근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데 이는 러시아를 이용, 일본을 견제하고 근대화를 이뤄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인정받으려던 고종과 신내각의 위기감 때문이었다.
<heading>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참여 </heading>
이완용은 과거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1차로 개화된 문물을 접하고, 이후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의회 제도나 공교육 체계, 그리고 불과 5일만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까지 갈 수 있게 해준 대륙횡단철도 등 미국식 문물을 경험하면서 친미파가 됐지만, 수구파답게 서구 열강의 무력에 의한 강제 개항 방식에는 그 역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도 당연히 멀리했으며 왕정을 지지했고 공화정 모의를 경계했다.
한편, 일본이 조선 반도에서 영향력을 잃고 러시아의 개입이 본격화되기 직전까지 조선 반도에는 잠시나마 힘의 공백이 생겼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광무 연호와 제위를 허락했다. 이에 수구 내각은 대한제국을 급히 수립하고 러시아와 프랑스 등 각국의 승인을 얻었으며 대내적으로는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그리고는 국모를 죽인 일제에 대항하고 유교 질서를 수호하며 조선인다운 근대화에 대한 여론을 일으키고 계몽하자는 취지로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수구 내각은 갑신정변 때 쫓겨났던 개화파들 중에서도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 친미국파에 한해서만 독립협회에 가담시켜 이완용 등과 계몽강연 활동에 나서게 한다. 이완용은 특히 독립협회 내 정부측 인사로서 독립협회 제2대 위원장으로까지 활동했는데, 다음은 그의 연설 중 일부분이다.
여기서 서로 싸우거나 해치지 말자는 의미는 협회내 대다수인 수구파 출신과 소수 친미 개화파 출신의 단합을 요구하는 의미가 크다. 그는 조선 시대 중국 사신을 영접했던 모화관(慕華館)의 정문으로, 조선 사대주의 구태(舊態)의 상징으로 지목됐던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설립하도록 뜻을 모았다. 독립협회 위원장을 맡았던 시절에는 독립신문의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그야말로 독립협회 내 핵심요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점차 친미 개화파 계열의 윤치호, 서재필 등이 국민 투표를 통한 미국식 참정권을 주장하며 황실과 유생(儒生)들의 경계와 이목을 끌자 독립협회 내에는 균열이 생기고 계속 파열음이 들렸다. 원래 왕정 지지자였던 데다가 자칫 역모의 죄까지 뒤집어쓸까 저어한 이완용은 협회 명단에 이름만 남긴채 모든 간부직을 자진 사퇴했다. 독립협회의 모토이자 하부 청년조직인 협성회에는 장남 이승구(李升九)도 창립회원으로 활동중이었는데 이완용이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도피 유학까지 보내 버렸다.
<heading>러시아와의 갈등과 좌절 그리고 이호준의 죽음 </heading>
얼마안가 아관파천 등으로 자신감을 얻은 러시아 제국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됐다. 그들은 대한제국 승인 대가로 각종 이권을 요구하고 사사건건 내정간섭했다. 당시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더이상 국제 사회에서 위신이 떨어져서는 안됐다. 이완용과 대한제국 내각은 자칫 러시아의 침공 위험을 무릅쓰고 영흥·길주·삼수·단천의 금광 및 석탄채굴권 양도 요구를 거부했으며, 군사교관을 보내겠다 일방적으로 통보해왔을 때에도 강력히 거부했다.
황실과 내각은 미국통이었던 외부대신(外部大臣) 이완용의 주장대로 미국 쪽으로 줄을 댔다. 아관파천 때 이완용을 도왔던 주한미국공사 호러스 뉴턴 알렌을 통해 각종 이권을 헐값에 넘겨 어떻게든 미국의 영향력을 이용해보려 했고, 아울러 러시아 세력 일소 목적의 2차 파천 계획, 소위 “미관파천”(美館播遷)을 제안했다. 그러나 남북 전쟁 이후 미국의 외교기조는 고립주의였고 러시아 제국과의 충돌을 우려,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각종 이권을 매우 헐값에 마구 넘겼음에도 미국이 제 잇속만 차리고 대한 제국 황실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이완용의 능력은 결정적으로 의심받게 됐다.
한편, 러시아는 조선의 대미 접촉에 분노와 위기감을 느꼈고, 이에 주한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는 고종에게 압력을 가해 1897년 7월 20일 이완용을 학부대신(學部大臣)으로, 재차 9월 1일자로 외직인 평양 관찰사로 좌천시켜 중앙 정계에서 축출시켰다. 좌천 이튿날인 9월 2일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의 후임으로 주한 러시아 공사로 부임한 스페에르(Speyer, A. de.)는 고종(高宗)에게 '(이권을 넘기지 않으면)궁궐 경비병을 철수한다','제2의 아관파천을 하겠다'는 등 협박했다. 미국인 헤링턴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스페에르는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1898년 3월 11일 러시아의 압력에다 대미 협상 실패의 책임을 지고 내각에서도 차츰 밀려난 그는 급기야 전북 관찰사로 좌천됐다. 부임 5일만에 직무태만 혐의로 감봉 처분을 받았고, 공금횡령죄까지 뒤집어써 그나마도 파직될 뻔했으며 그해 7월 11일에는 아예 독립협회로부터 제명당하기까지 이른다.
1901년 2월 의정부(議政府) 참정(參政-정1품)이던 아비 이호준이 노환으로 갑자기 쓰러졌다. 고종 황제는 총신 이호준의 후계를 잇게 하려고 급히 이완용을 사면복권시켜 궁내부(宮內部) 특진관(特進官)으로 불러 올렸다. 이호준은 얼마안가 81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이완용은 3년 부친상을 위해 의원면본관(意願免本官) 해 정계를 다시금 떠났다. 이호준은 양아들이나 적장자인 이완용에게 자신의 모든 정치적 지위와 집안 제사를 잇게 했고, 서자이긴 하나 친아들인 이윤용에게는 자신의 장남으로서 막대한 재산을 모두 물려줬다.
<heading>을사늑약 전후 >> 친일파 로 전향 </heading>
1904년 2월 이완용은 3년상을 치르고 상복을 벗었다. 그는 곧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자 보호자였던 아버지를 대신해 수구파의 좌장자리에 올랐다. 인생 최대의 기로였다. 이때까지 이완용의 정치적 행보가 전적으로 이호준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제부터의 정치적 결단은 이완용이 독자적으로 내려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굳어져가는 시점으로, 당시 세계 어느 누구도 감히 예상치 못했던 일본의 승리에 국권을 침탈당할 위험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 시간이 없었다.
일제에 대한 마지막 보루로 대한제국은 다시 한 번 미국을 택했고, 이완용을 재기용해 미국공사관으로 재차 파천할 목적으로 미국과 비밀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의 전리품이었던 필리핀과 북태평양의 지배를 굳히고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동맹할 필요가 있어서, 이미 몰래 가쓰라-태프트 밀약까지 체결한 상태였다. 이권을 마구 넘겨줬던 보람도 없이 미국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발을 뺐다. 대한제국은 더이상 빌릴 외세의 힘조차도 없었다. 이완용이 스스로 내린 결론과 정치적 결단은 이랬다.
그러나 을사늑약으로 이완용이 과거 1888년 1월 19일 손수 마련했고 1889년 2월 13일에 이전할 때도 직접 참여했었던 대한제국주미공사관이 단돈 5달러라는 푼돈에 일본에 강제 매각됐다. 워싱턴 뿐만이 아니었다. 영국 일본 등 10여 개의 모든 재외 공관이 일본에 즉시 양도 폐쇄되는 국가적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대한제국과 일제의 강제 병합은 시간 문제였다.
<heading>총리대신 임명 </heading>
1905년 12월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의정대신(議政大臣)을 겸직하고, 1907년 초 대한제국 내각 최고직이었던 의정부 참정대신(정1품)에 올랐으며, 조선 근대화 작업을 위해 겸하고 있었던 농상공부 대신서리·광산사무국총재에 유임됐다.
1907년 6월에는 일본과 본격적인 강제병합 준비를 위해 내각 체제가 개편됐다. 이완용은 개각 후에도 총리대신 직에 추천됐다. 처음엔 거부했지만 이토의 거듭된 권유에 결국 수락한다.
<heading>1차 가택 화재(火災) </heading>
1907년 6월 내각총리대신으로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하면서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가 됐다. 하루는 이완용이 어전회의에서 항일 의병장 허위의 처형을 순종황제에게 주청했다. 허위는 황실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의 간부 출신으로, 1898년 6월 30일부터 같은 해 11월 황국협회와 독립협회가 동시 해체될 때까지 보부상 등을 시켜 서구식 참정권을 주장했던 독립협회를 해체하기 위해 각종 사보타주를 가하는 등 황실의 더러운 심부름을 했던 전력도 있었다. 어찌보면 황실로서는 공이 있는 인물이었으나 정상은 참작되지 않았다. 이완용의 사형 주청 사실이 알려지자 옛 황국협회 지지자들과 화가난 민중들이 몰려와 그의 집에 불을 놨다. 그래도 이때는 조기에 진압하여 조상들의 위패와 재산의 대부분을 지켰다.
<heading>사태 무마 목적의 남인, 북인등의 복권 </heading>
1907년(융희 1년) 총리대신 취임 초 자신들에게 향하던 양반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역대 당쟁 희생자들로 역적의 오명을 쓰고 축출됐던 남인, 북인등의 복권을 시도한다. 비록 노론이 벽파 시파로 갈린 것도 백여년 전, 그나마도 외척 세도 정치를 지나 아예 조선의 문을 닫을 때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직 문벌들의 뿌리가 되는 노론계의 집단 반발이 잠시 있었다. 그러나 숙종의 환국 정치를 모방한 사면 이벤트에 국권 침탈을 놓고 고조되던 양반들의 분노를 흩어놓는데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단, 정여립의 대동계와 서학(천주교) 관련자 등은 배제됐다.
1908년(융희 2년) 4월에는 예정대로 77명의 명예를 회복시킨다. 이완용 등의 건의로 사면복권된 명단은 아래와 같다.
<heading>정미7조약 </heading>
순종이 즉위한 뒤, 정미칠조약에 서명하여 내정권을 스스로 일본에 넘겼다. 정미조약 체결의 원흉인 정미칠적 명단에는 이완용의 맏며느리 임건구의 친삼촌인 사돈 임선준(任善準)의 이름 역시 확인되고 있다.
<heading>영친왕 이은 황태자책봉 주도 </heading>
순종(純宗)이 정식으로 황제가 되자 이완용은 왕실의 왕위 계승 문제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이완용의 추천대로, 후사가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로 순종황제의 막내 동생 영친왕을 결정했다635~641. 당시 차기 대권의 유력 주자였던 흥선대원군의 적장손(嫡長孫)이자 자신의 장조카 영선군과333 장성한 아들 의친왕을 견제해, 막후에서 실질적 권력을 쥐려했던 고종의 노욕과 이완용의 정략(政略)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1909년 12월 22일에는 앞서 17일에 사망한 벨기에의 왕이자 콩고의 인간도살자인 레오폴 2세의 명동성당 추도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인력거에 올랐다. 성당 정문 근처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던 이재명이 이완용을 덮쳐 그의 옆구리와 어깨등을 순식간에 3차례 찔렀다. 그는 자신과 실랑이를 벌이는 인력거꾼 마저 찔러 밀쳐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순사의 군도에 넓적다리를 맞고 체포됐다. 인력거꾼 박원문은 그 자리에서 절명, 이완용은 곧바로 대한의원으로 후송됐다. 이재명은 이듬해 9월 이완용에 대한 살인미수 혐의 및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이완용은 칼에 왼쪽 폐가 관통됐는데, 마침 일본인 치료목적으로 파견 와있던 일본인 외과의사들과 당시의 최신의료기술을 총동원,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구사일생으로 아쉽게 살아났다. 다만 이때부터 얻은 폐쪽의 지병이 천식과 폐렴으로 발전하여 평생 동절기마다 크게 고생했고 훗날 사망 원인이 된다.
<heading>1910년대~1920년대 활동 >> 한일 병합 조약 </heading>
1910년 8월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일본의 각본대로 내각회의를 소집해 한일병합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에 올려 뻔뻔하게도 황제의 면전에서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회가 설치되자 22일에는 스스로 전권위원에 올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관사에서 한일 병합 조약에 직접 서명했다.
조약체결후 곧 관직을 사퇴한 이완용은 조약문 5번 조항의 혜택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伯爵)의 작위와 잔무처리수당 60여 원('당시 일본돈 2원은 조선엽전 1천닢과 같은 가치였다고 한다'), 퇴직금 1,458원 33전, 조선총독부의 은사공채금 15만 원을 지급받았다.
<heading>경술국치(한일병합) 이후 </heading>
한일병합 이후, 백작이 된 그는 1912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일선융화'(日鮮融化)를 진행시켰다. 그는 정기적으로 일본천황에게 조선귀족 대표로 직접 문안인사를 갔으며, 신사 참배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인 귀족들을 모아 두고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 그해 7월 11일 농사장려회 회장으로 추대됐다.
1915년 10월 13일 조선농회 회두(會頭)로, 16년 7월 30일에는 이무회의 회두로 선출됐고, 1918년 5월 25일에는 조선귀족회 부회장에 선출됐다.
1919년 1월 15일에 고종 황제가 붕어했다. 시중에 독살설이 떠돌았는데, 고종 양위를 강요했던 친일파들, 특히 이완용이 그 배후로 지목됐다.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는 고종의 승하(昇遐)와 국제 연맹의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년 12월 28일 ~ 1924년 2월 3일)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호응해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 역시 민족 지도자들로부터 동참을 요청받았으나 오히려 당시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탄압 필요성과 그 방안에 관한 편지를 수차례 보내기도 했다. 이완용은 공식적으로 경고문을 연달아 3회 발표하고, 3·1 운동이 불순세력에 의한 불순한 난동에 불과하며, 약육강식의 시대에 조선의 독립 기도는 허망할 뿐이라 발언했다.
<heading>친일관료 및 사회단체 활동 </heading>
1920년에 일제는 3·1 운동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를 백작에서 후작으로 올려줬다. 일제 치하에서 그의 입지는 일본 황실로부터 훈장과 작위를 받으면서 더욱더 확고해졌다.
1921년에는 조선인 귀족 명부 관리 기관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을 지냈다.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일본어 보급을 독려했으며,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총독부 교육조사 및 산업조사위원, 조선농업교육연구회 고문, 선만노몽연구협회 고문 등등 친일단체들마다 깊숙히 간여해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한반도 수탈을 음으로 양으로 돕는다.
1922년 3월 14일에는 조선미술전람회 서예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1923년 1월 6일에는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으로 한국 역사를 일본의 시각에 껴맞춰 해석, 왜곡하는 이른바 “친일사관”을 정립하는 데 힘을 보탰다.
1924년에는 그의 아들 이항구도 남작이 되어, 조선인으로는 거의 드문 부자(父子) 귀족이 되기도 했다.
이완용과 핵심 친일파들 몇몇은 일제시대 내내 승승장구했던 반면 다수의 귀족들과 나머지 양반들의 형편도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비참해졌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상당수의 귀족들이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상금을 받았지만, 일본의 수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일어난 인플레이션으로 가만히 있어도 금방 돈의 가치가 떨어졌고, 그나마도 무위도식하거나 타락해서 방탕한 생활로 몰락해 가는 판이었다.
국화대수장은 일본 황실이 현재도 수여하고 있다. 역대 수훈자 목록에서 한국인의 이름은 현재까지 4명이 확인되는데, 영친왕 이은(李垠), 의친왕의 장남 이건(李鍵), 차남 이우(李鍝) 등 왕족 3명을 제외하면 이완용이 유일하다.
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사설란에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의 기사다.
이완용은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의 산에 묻혔다. 해당 지역을 묘지로 택한 이유가 일설에 의하면 매국 행동에 대한 앙갚음으로 인한 묘소 훼손이 두려웠던 나머지 1926년 당시에는 굉장히 궁벽한 벽지였던 낭산리 임야를 일부러 택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해방 이전에도 훼묘 사건이 종종 있어 일본 순사가 묘를 지켰고 해방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끊이지 않아 급기야 1979년, 직계 후손들이 아예 파묘(破墓)하여 그 유골은 화장했다. 현재 그의 묘터는 이후 채석장으로 바뀌어 그나마 옛 흔적조차 사라져 버렸다.
1935년 당시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됐다.
1945년 해방후 이완용의 가족과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거나 돌팔매를 맞고 다녔다.날짜=2018-05-06 장손주 이병길은 앞서 말한대로 6.25 전쟁때 행방불명되었으며 둘째 손주 이병주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이기지 못하고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해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했다고 한다. 또한 큰증손자 이윤형은 남은 재산을 정리해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등 이완용의 직계후손은 거의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아들 이항구와 함께 이름이 올랐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6.25때 행방불명된 장손자 이병길의 이름도 올라있다.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1992년부터 이완용의 후손들은 캐나다로 이민간 장손주 이윤형을 대표로 조상땅찾기 소송을 시작했다. 그들은 1992년 서울대학교를 상대로 경기도 고양시 임야 2만 5천평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고, 다시 1998년 7월에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일대 토지 2372m^{2}(약 712평)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을 내 승소했다. 반환받은 토지는 즉시 제3자에게 매각, 약 30억원의 매매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아직도 이완용과 송병준 등 친일파의 후손들은 친일 환수 재산 반환 소송을 여러 개 준비중이다.
2008년 12월,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인 옛 대한의원 때 일본인 의사가 작성한 흉부외과 수술 차트가 발견됐다. 해당 기록은 1909년 12월 22일 피습 당일 이완용의 것이라고 서울대학교병원 흉부외과 김원곤 교수가 18일 언론에 밝혔다., 단순의료기록이라기보다 검사 측 요구로 재판에 채택된 감정서 성격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마저 기록돼 있다.
그런데 친일파 문제를 연구해온 윤덕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에 따르면, 이완용이 며느리와 불륜을 저질러 아들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사실이다. 윤덕한 연구원에 따르면, 이승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 자살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이승구는 사망 당시 26세였다.
며느리와의 불륜설도 잘못된 사실이다. 친일파이자 매국노인 이완용을 배척한 민중들의 감정이 담긴 이야기일 뿐, 술과 이성을 멀리하고 서예와 독서를 하는 사람이었다.
이완용의 손자이자, 자식없이 죽은 큰아들(이승구)을 대신하여 장손으로 입적한 자인 이병길도 친일파였다.이완용이 죽은 뒤, 일제 후작 작위와 전재산을 상속 받은 병길은 조선귀족회 이사와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등을 지내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넷째, 아래의 이른바 '긍정적 평가'의 이면엔 과연 무엇을 위한 타협이었나라는 근본적 의문이 존재한다. 나라가 없이 왕실이 무슨 소용이며 대다수 양반들 역시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구차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고, 더욱이 일제에 착취당하며 곧 강제징용 및 일본군위안부 등으로 학대당하게 될 백성들의 삶은 애당초 친일파들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완용은 현재까지도 한국인 사이에서 매국노의 대명사로 알려져있으며, 그 이름은 중국에까지 알려지기도 했다.
<heading>긍정적 평가 </heading>
일단, 그는 조선의 문을 닫은 장본인이고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맞으나, 같은 친일파 박중양(朴重陽)은 1945년 해방이후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15 한데 이어,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 당연히 수구파의 좌장격인 이완용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을 터였음에도 칭찬한 것이다. 물론 이완용이 이후, 서구식 참정권을 주장하는 개화파 계열 독립협회원들을 공격하고 이내 협회내 모든 간부직에서 자진 사퇴하자 둘 사이의 틈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수구파들을 대동하여 친일 개화파들과 짬짜미해 임금과 백성을 속이고 일본에 나라를 팔자 서재필은 더 큰 증오와 멸시를 보내게 된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이완용이 정미7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일제에 이전하게 된 권한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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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정미7조약 체결과 관련하여 이완용이 일제에 넘겨준 구체적인 권한(구성 요소)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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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본문에서 '정미 7조약'과 '이전'에 관한 내용을 검색한다.
- 정미 7조약에 서명해 행정권을 일제에 이전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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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조약 체결의 결과로 이전된 권한을 명시한 구절을 선택한다.
- 정미 7조약에 서명해 행정권을 일제에 이전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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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정미7조약 체결이라는 사건과 행정권 이전이라는 결과 사이의 관계를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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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이완용이 정미7조약에 서명하여 일제에 넘긴 것은 행정권임을 도출한다.
- 행정권을 일제에 이전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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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인 '행정권'을 작성한다.
- 행정권
최종 답변 (final_answer)
행정권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특정 조약(정미7조약) 체결이 국가 권력의 구성 요소(행정권)의 귀속 주체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