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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document_id A220623199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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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1965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개화파·독립운동가·언론인·정치인·교육자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을 거쳐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서훈되었다. 본관은 전주이고,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황해도 평산군에서 양녕대군의 방계 16대손으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절 독립신문과 협성회회보 주필, 독립협회 활동 등 계몽운동을 하였고,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수감 시절 기독교로 개종하고, 옥중 계몽활동을 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특별사면된 후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5년에 걸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 귀국하여 계몽교육을 하다가 일제의 체포 위협을 피해 1912년 미국으로 망명,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며 실력양성운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졌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 정부, 한성정부 등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 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부터 1925년까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19년부터 광복 때까지 구미위원부 위원장, 주미외무행서 외무위원장,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일제 강점기 중후반에는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의 패전을 확신하고 일제가 망하는 즉시 한국이 빼앗긴 주권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정식 승인해야 된다는 외교활동을 하였고, 미국의 소리 초단파 방송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으며, 임시 정부와 미군 OSS 간의 한미군사협력을 주선하였다. 1945년 광복 후 김구와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공산진영과의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38선 이남에 민족진영을 중심으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합법정부를 단독 수립한 뒤 38선 이북의 비합법정부와 공산진영 일체를 쫓아내고 한반도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그 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냉전시대에 발맞추어 반공주의,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대한민국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1949년 농지개혁법 제정,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안팎으로 대한민국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52년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사수하였다. 1952년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과 1954년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와 국가주의경제조항을 시장경제조항으로 바꾸는 사사오입 개헌을 하여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하야했고, 하와이로 망명한 후 귀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서거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대통령 취임 전 >> 유년기·청소년기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와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는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대왕의 맏형인 양녕대군의 방계 16대손이자, 양녕대군의 다섯 번째 서자 장평도정 이흔의 15대손이자, 장평도정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14대손이자, 장평도정의 손자 수주정(樹州正) 이윤인(李允仁)의 13대손이다. 이승만은 신분상 왕족이었으나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이승만의 13대조인 이윤인에서 끝이 났다. 이윤인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1대조 이원약(李元約)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전풍군(全豊君)에 추증되었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이승만의 6대조 이징하(李徵夏)가 음직(陰職)으로 현령(縣令)을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길이 끊기고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살아갔다. 이승만에겐 두 명의 형들이 있었지만 이승만이 태어나기 전 모두 홍역으로 죽어서 사실상 6대 독자로 자라며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다. 이승만은 "나는 6대 독자였다. 내가 자손이 없이 죽으면 우리 집안의 긴 핏줄은 끊어지게 된다. 내가 나기 전 우리 집안에는 딸이 둘이 있고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은 얼마 후에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에 후손이 없는데다가 어머니는 자꾸 나이를 잡수시니 모두들 퍽 근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어머니는 큰 용이 하늘에서 날아와 자기 가슴에 뛰어드는 꿈을 꾸고 깨어나서 가족에게 그 얘기를 하였는데, 그것이 나를 갖게 된 태몽이었다. 내가 태어날 때 우리 집안이 얼마나 기뻐했었는지 나는 그 얘기를 어머니한테서 여러 번 되풀이하여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하였다. 이승만의 증조부 이황(李璜)의 대는 한성부에서 황해도로 이주해 있었는데, 이승만이 2세 때인 1877년 아버지 이경선의 대에 다시 한성부로 이주하였다. 한성부에서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지역적으로 서북파 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승만은 "아버지는 한때 부자였지만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아버지 이경선은 자신의 둘째 아들이 죽자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대감 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한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이경선은 어렵게 얻은 아들에 대한 교육을 잊지 않았다. 이승만이 4세 때인 1879년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한성부 용산)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244 한편 이승만은 유년 시절 주변에서 본 일상풍경이 미개하고 미신이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나는 당시 어른들이 중국사람들과 일본사람들을 무슨 뿔달린 괴상한 짐승들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기억한다"고 회고하였다. 이승만은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조선왕실에 비판적이었고 자신의 가계를 밝히기를 꺼려했지만, 정작 조선 왕실 족보라는 이유로 왕정복고를 꿈꾼다는 의혹에 종종 시달려야 했다. 이승만은 "만일 16대 전의 나의 선조가 그렇게 관대하게 상속권을 그의 동생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고종의 위치에 놓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선은 고종 치하에서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나와 이씨 왕족과의 먼 관계는 나에게는 영예가 아니라 불명예이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성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바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고 회고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자신의 간단한 일대기를 로버트 T. 올리버 선교사에게 부칠 때 "나의 선조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정적들은 내가 민주제도를 세우려고 하지 않고 왕권을 회복시키려 한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의 족보를 캐내려고 애를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적은 것은 윤곽에 불과합니다"라고 하였다. 1890년 이승만은 동갑내기인 박춘겸(朴春兼)의 딸 음죽박씨(박승선)와 결혼하여 (光武戊戌)1898년 6월 9일 외아들 이봉수를 가졌다.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 그러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을 세웠다가(춘생문 사건) 사전에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하였다. 동시에 이승만이 왕정을 타도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협성회의 창립회원이자 동지의 한사람인 이승구는 이완용의 아들이었는데, 이완용은 '자식이 이승만 패거리와 뭉쳐 다니는 것을 걱정'한다며 미국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유학을 보내버렸다. 이승만은 학업과 협성회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방학예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어 이승만이 졸업생을 대표해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영어 연설을 시작하였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는 패기로 참석한 청중들, 정부 고관들, 주한 외국 사절들을 사로잡았다. 언론활동 및 독립협회 사건 (1898) 1898년 1월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발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이때 이승만은 열강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신문에 실었다. 이 고목가(枯木歌)가 신체시의 효시라는 주장이 있다. 1898년 3월 10일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자 이승만은 연사로 참가,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고,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에게 항의의사를 전달하는 총대(總代)위원으로 선발되었다. 1898년 4월 9일 협성회회보를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으로 발전시키고 사장 겸 저술인의 직책을 맡았다. 11월 21일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하던 중 수구파들이 보낸 보부상 2천여 명의 습격을 받았다. 11월 28일 고종은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이승만·남궁억 등 50여명을 중추원 의관(議官, 종9품)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12월 23일 고종이 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그는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Harry Sherman)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1899년 3월 27일 이승만의 처 박씨는 덕수궁 인화문 밖에서 상소문을 들고 이승만에 대한 선처를 빌었으나 책임관 외에는 직접 상소할 수 없다는 이유로 퇴송되었다. 1899년 7월 11일 평리원 재판소에 회부, 재판장 홍종우로부터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한성감옥서에 재수감되었다. 이때 탈옥 동지였던 최정식은 처형당하였다. 본래 성격이 성급하기로 유명했던 이승만은 오랜 감옥생활로 성격이 더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옥중 계몽운동과 석방 = 그는 옥중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틈틈이 했으며, 이때부터 이승만은 영어공부에 재미를 느끼면서 심심풀이로 혼자서 한영사전 등을 정리하기도 했었다. 그는 한성감옥에서 생활하면서 동료 죄수들은 물론, 간수들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많은 개화인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1900년 8월 한성감옥서에서 청일 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서적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 책은 1917년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1901년 2월부터 1904년 7월까지 옥중 생활 속에서도 가명으로 제국신문과 신학월보에 수시로 논설을 실었다. 1902년 12월 설립된 감옥 내 학교에서 이승만·양의종(양기탁)이 교사로 선발되어 죄수를 교육하였다. 어린이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옥중도서실을 운영하고, 기독교 포교 활동을 하였다. 1904년 6월 29일 국민계몽서인 독립정신의 원고를 완성하였다.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이뤄졌고, 서양의 선진문명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룩할 것을 백성에게 호소한 책이었다. 크게 근대 역사관과 정치관으로 이뤄진 앞부분과 당시 시대상황을 해석한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부분 상당수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대통령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이 실제로 원한 제도는 대통령제였지만, 집필 당시 사형수였다는 신분상의 이유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척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 당시 독립정신은 대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출간이 되지는 않아 필사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돌려봤다고 한다. 이승만이 도미한 1910년이 되어서야 로스앤젤레스에서 첫 출판본이 나올 수 있었다. 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이 일어났다. 민영환, 한규설 등이 건의한 끝에 7월 8일 조칙(詔勅)이 내려졌고, 이승만은 8월 4일 특별 사면령을 받아 8월 9일 석방되었다. 미국 유학 및 외교 활동 (1904~1910) 1904년 10월 15일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잠시 취임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하였다. 이승만은 고종을 만나보라는 민영환의 요청을 거절했고, 고종이 보낸 궁녀 역시 만나주지 않았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이승만을 만나기를 원하여 밀지(密紙)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고종이 왜 자신을 만나려 하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지를 들고 온 궁녀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 1905년 1월 15일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 지와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하였다. 1905년 9월 10일 대한제국 황실 시종무관장 민영환으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300달러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두 달 후에 민영환은 을사조약에 대한 울분을 못 이겨 자결함으로써 순국하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끝내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태프트를 보내 일본 총리 가쓰라와 식민지 분할에 합의한 뒤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 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한편 더럼 스티븐슨의 시신은 워싱턴 D.C.로 운구되었다가 기독교식 장례를 치른 후 워싱턴 D.C.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조화(弔花)를 보냈으며 일본 정부는 메이지 천황의 조화와 조문 사절단을 워싱턴 D.C.에 파견하였으며 훈1등의 훈장을 추서하고 더럼 스티븐슨의 유족에게는 위로금 및 조의금을 지급하였다. 전명운·장인환 의거 직후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 미 본토 안창호의 공립협회가 통합하여 1909년 2월 국민회가 탄생하였다. 1909년 재판에서 전명운은 증거 불충분과 더럼 W. 스티븐스에게 받은 역피해를 명목으로 무죄를 선고받아 선행(先行) 석방되었다. 장인환은 2급 살인죄로 2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0년으로 감형받고 1919년 가석방되었다. 1908년 7월 10~15일 이승만은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감리교회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 대표로 참석하였다. 덴버 리퍼블리칸지가 이 대회를 자세히 보도하였다. 1910년 3월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했다. 1910년 7월 18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Doctor of Philosophy) 학위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되었다). 이때 이승만은 다른 학교이지만 옆에 붙어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도 강의를 들었다.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Syngman Rhee, 또는 승만 리). 당시 박사(博士)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8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독립운동기 >> 귀국 및 교육 활동 (1910~1912) 1910년 9월 3일 국권을 빼앗긴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뉴욕 항을 출발, 리버풀,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1910년 10월 10일 한국에 귀국하였다. 5년 11개월 6일 만의 귀국이었다. 당시 들어온 신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라서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10년 10월 10일부터 1912년 3월 26일까지 종로 기독교청년회(한국YMCA)의 총무 겸 학감에 취임하여 교육,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였다. 망명길에 일본에 들러 1912년 4월 10일까지 도쿄 조선YMCA를 근거로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때에 도쿄 조선YMCA에 드나들던 유학생들은 조만식, 송진우, 이광수, 안재홍, 신익희, 최린, 조용은(조소앙), 김병로, 현상윤, 이인, 전영택, 윤백남, 김필례(金弼禮) 등을 포함하여 50~6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14년 이승만은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방침에 반발하여 한인중앙학원 원장직을 사임하였다. 1913년 9월 20일 태평양잡지를 창간해 '청일전기' 등의 홍보물을 간행하는 등 언론 출판활동을 전개했다. 1913년 12월 5일 이승만의 부친 이경선이 별세하였다. 1914년 7월 29일 '한인여자(성경)학원'을 설립하였다. 한인사회 장악 (1914~1918) 1914년~1918년은 대한인국민회에 커다란 혼란이 있던 시기였다. 1915년 중순부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은 안창호, 부회장은 박용만이었는데, 동아시아정세의 변화화와 더불어 연해주와 만주의 대한인국민회가 쇠약해졌으며 하와이에서는 이승만과 박용만의 갈등이 첨예화되어 갔으며 안창호의 영도역량에도 문제가 있어 3·1 운동 이전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실질적인 기반은 미국 서해안과 멕시코에 지나지 않았다. 1914년 6월 10일 박용만은 하와이 오아후섬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한인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일본과의 군사적 대결은 무고한 백성의 피만 흘릴 뿐 실질적 소득이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인류 양심과 여론에 호소해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도록 외교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하와이 한인사회가 이승만파와 박용만파로 갈리게 됐고 교회까지 분열하게 되었다.섬네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오른쪽 열한번째는 이승만, 가운데 단상에 선 이는 안창호)]]1915년 초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 재정 비리 의혹이 터졌다. 이에 이승만은 하와이지방총회를 혁신하겠다면서 하와이 한인사회에 임시의회 소집을 건의했고, 와히아와지방회 의원 3인이 이에 응답해 임시의회소집청원서를 총회장에게 보냈다. 1915년 5월 1일부터 수 차례의 임시의회가 열리고 회계장부도 조사되었다. 그 결과 김규섭, 이동근, 안영칠의 보고서에 따르면 총재무 홍인표가 1544원 67전을 횡령하고, 양흥엽, 홍진표의 보고서에 따르면 하와이지방총회장 김종학이 1345원 64전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김종학과 지도부 일동이 파면되었다. 한편 1915년 6월 이승만은 교육방침의 차이로 미국 감리교 선교단과 수시로 마찰을 빚어오던 중 자신이 운영하던 한인중앙학원을 감리교 선교부에서 독립시켰다. 1915년 6월 10일경 신규 하와이지방총회장 선거에 홍한식과 고석주가 후보로 출마하여 홍한식이 당선됐다. 이날 이홍기, 김규섭, 김윤배, 이정건은 대의원과 참의원 등에 당선됐다. 1917년 이승만은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과거 옥중에서 쓴 저서 독립졍신(제2판)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그해 10월 29일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소약국민동맹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2월 27일 고등재판소에서 배심재판이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당시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고발인 신분으로만 재판정에 출석하였다. 3월 8일 재판결과 박용만파의 무죄가 판결되었다. 그 직후에도 다툼은 계속됐다. 1918년 3월 11일 이승만파 안현경은 박용만파 유동면 등을 경찰에 체포시켰고, 3월 15일 안현경은 유동면 등을 고발하였다. 같은 날 안현경은 김순기를 경찰에 체포시켰다. 이에 3월 23일 김순기는 자신이 안현경에게 누명을 쓰고 체포를 당해서 5000달러의 손해를 봤다며 안현경을 고소했는데, 안현경은 "I am going to kill you"라는 살해협박을 받아서 경찰에 신고한 거라고 반박했다. 1919년 2월 28일 재판결과 원고측 김순기가 오히려 협박(threatening language) 혐의로 체포 영장(warrant of arrest)을 발부 받았고 피고측 안현경에게 재판비용까지 물어줬다. 이후 박용만파는 1918년 7월 1일 하와이지방총회에 대항하기 위해 '임시중앙연합회'를 결성하였는데, 이 단체를 흔히 '갈리히연합회'로 불렀다.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와 갈리히연합회로 양분되어 중앙총회의 위상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에 중앙총회장 안창호까지 나서서 갈리히연합회의 해산을 권고하였으나 갈리히연합회는 기관지 태평양시사를 창간하여 이승만의 태평양잡지와 여론전을 펼쳤다. 1920년 초 하와이지방총회장 이승만파 이종관 등과 박용만파손창희 등의 선거 불복에 관한 법정다툼도 이승만파가 승리하였다. 이후로도 박용만파와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지만, 이승만파는 언론을 통해 비폭력 저항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는 태도로 한인사회의 평판을 얻기 시작했고, 점차 한인사회를 장악하였다. 한인사회로부터 YMCA 한인지부를 위한 대규모의 기부금을 성공적으로 모금하자 미국 감리교 선교부와의 갈등도 해소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1919년 파리 강화회담에 보낼 특사로서 이승만을 신뢰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하와이로 귀환했을 땐 한인사회의 광범위한 축복을 받았다. 중립적인 인사들은 그의 추종자가 되었고, 반이승만파 중 일부조차 이승만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반대자가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대한인국민회는 분쟁이 야기되는 속에서도 독립기부금은 잘 걷혀 1915년 1,523달러에서 해마다 늘어나 1918년도에는 3,775달러를 기록했다. 1918년 7월 29일 호놀룰루에 신립교회(新立敎會)를 설립하였다. 9월 한인여자성경학원을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으로 바꾸었다. 12월 23일 '신립교회'의 이름을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로 바꾸었다. 이로써 하와이 한인사회에 이승만이 이끄는 새로운 민족교회가 정식으로 탄생하였다. 한인기독교회는 태극기를 걸어놓고 한국어 교육과 민족교육에 열중하였다. 이들 학생과 후원자들은 뒷날 이승만 계열 또는 후원자가 되어 하나의 파벌을 이루었고, 뒷날 대한인동지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파리 강화회담 및 3.1 운동 당시 (1918~1919)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자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파리 강화회담(파리 평화회의)이 1919년 1월 18일에 개최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기한 민족자결주의에 전세계의 독립운동가들이 고무되었다. 1918년 12월 1일 이승만은 정한경, 민찬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파리 강화회담 한인대표로 선출되었다. 1919년 3월 3일 미국 국무성이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고 파리 강화회담에 기대할 것이 없어보이자, 이승만과 정한경은 안창호의 협조를 미리 받고 대한인국민회의 명의로 작성한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를 우드로 윌슨과 미국 신문사에 송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9년 4월경 김규식은 상해 임시 정부 대표 명의로 된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를 파리 강화회담에 제출하려고 했지만 프랑스 당국은 '정부가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며 대한민국 대표단을 문전박대했다. 1919년 3월 5일 미 국무부로부터 파리 행 여권 발급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위임통치 청원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지만, 얼마 후 이 일이 임시 정부 내에 알려지자 박용만, 신채호, 이동휘 등 무장독립론자들은 외교독립론자들을 두고두고 비난하게 되었다. 외세에 의존하였다는 비난도 컸지만 청원을 실시한 시점, 즉 3.1 운동 이후에 실시했다는 점 때문에 비난이 컸다. 그러나 사실 국외의 독립운동가들은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3월 10일이 되어서야 서재필로부터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걸 전해 들었다. 오늘날 이승만 등의 위임통치 청원은 민족의 독립을 외세의 손에 맡겼다는 평가와 1910년대 말 국내외 정세를 고려한 현실적인 차선책이었다는 평가가 상존한다. 7월 4일 국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를 발표했다. 7월 17일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6월 이후 미국 언론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한국의 임시 대통령(provisional president of Korea)’, ‘임시정부의 대통령(Presid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등으로 불렸다. 1919년 8월 15일 호놀룰루에서 대한독립혈전기(大韓獨立血戰記)를 발간했고, 8월 16일 대한인국민회가 연 이승만의 집정관총재 추대 축하식에 참석하였다. 8월 25일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열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승만의 '프레지던트(president)' 칭호 사용이 상해 임시 정부 내에서 논란이 되었다. 8월 25일 상해 임시 정부의 내무부 총장 안창호는 워싱턴 D.C.에 있는 이승만에게 "상해 임시 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 (중략)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세를 하시면 이는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라고 전보를 발송하였다. 이에 8월 26일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언급하지 마시오"라고 답신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한성, 상해, 연해주 중 한성정부만이 국내 대표자들의 헌법절차를 거친 정통 정부이자 이미 전세계에 통보된 대통령 정부이며, 이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를 영어로 표현하면 '프레지던트' 밖에 없다는 자세를 고수하였다. 문제의 호칭 갈등은 임시 정부 헌법 개정으로 일단락되었다. 1919년 9월 11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원칙 하에 상하이를 거점으로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 정부, 한성정부 등 국내외 7개의 임시 정부들이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개편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은 기존의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대폭 개정하여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하였다. 상하이 현지 취임 및 김구와의 만남 (1920~1921) =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미국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에서만 거주하고 있어, 임시 정부에서는 이승만의 현지 취임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임시 정부 및 임시 의정원의 명의로 워싱턴 D.C.에 발송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임병직, 이원순 등을 대동하고 1920년 6월 12일 워싱턴을 떠나 하와이를 거쳐 배를 타고 12월 5일 상하이 동부 푸둥에 밀입국 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가면서 배삯이 부족하여 중국인 시신 운반선에 밀항하여 고국으로 운반되는 중국인의 시신들 틈에 숨었다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었다. 상하이로 건너온 그는 일본제국이 자신의 목에 건 현상금 30만 달러 수배전단지를 발견, 한자를 잘 구사하는 점을 이용, 중국인 복장을 구한 뒤 중국인으로 행세하며 임시정부에 도착했다.250px섬네일1920년 12월 13일 임시정부 인사들을 처음 접견했고, 김구와 첫 대면을 하였다. 김구는 이승만이 참석한 행사의 경호를 담당했다. '이승만과 김구'를 쓴 손세일은 "이승만은 경무국장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김구에 대해 신뢰감을 느꼈던 것 같다.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독립운동 기간 내내 지속됐다"고 했다. 1921년 5월 29일 이승만은 워싱턴 회담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상하이를 떠나 다시 미국의 하와이로 건너갔다. 국제 연맹 위임통치안은 3.1 운동이 일어난 줄 모른 채 구상하고 실천했던 것인데다가 이미 실패로 끝난 일이니 굳이 철회할 의사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깔끔하게 해명하지 않자 무장독립론자들은 위임통치 청원 사건을 3.1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서라던가 국제 연맹이 아닌 미국에 청원한 것 등으로 오해하여 이승만을 끝까지 비난하였다.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가 개막되었다. 안창호를 임시의장으로 한 예비회의에서 본회의에 상정할 안건이 심의되고, 1월 31일부터 김동삼(金東三)을 의장으로 본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엔 200여 명의 지역 대표들이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존립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크게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창조파는 임시정부의 부진은 임시정부 조직 내 혁명 대중과의 연계장치가 조악하게 구성되었기 때문이라면서 임시정부의 해체와 재건을 주장했으나, 개조파는 임시정부의 체제보다도 개별적 인사들의 문제이니 인적 쇄신만 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기를 원했다. 또한 개조파는 임시정부를 해체하면서 그 대중적 권위도 함께 무너질 것을 우려하였다. 양쪽은 끝내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1923년 4월 28일 창조파 조덕률(趙德律 또는 조덕진趙德津)·김두만(金斗萬) 등 12명의 임시 의정원 의원은 대국쇄신안으로서 이승만의 탄핵안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보고에 의하면 이승만 탄핵안은 가결이 되었으나 그 실행은 일시 보류되었다. 임시 정부 대통령 탄핵 (1925) = 1919년~1921년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 1923년 국민대표회의 등을 거치면서 임시정부 내 공산진영이 대부분 이탈하고, 비슷한 시기에 이승만이 위임통치 청원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기 시작하자 이승만은 대통령제 임시 정부 제2기(1922년 9월~1924년 4월), 제3기(1924년 4월~1924년 12월), 제4기(1924년 12월~1925년 3월 23일)까지 유임되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의 고질적인 재정난과 임시정부 내 개조파·임정고수파 간의 갈등 등 내부 문제는 여전히 심각했으며 더 나아가 임시정부 외부의 3부(대한통의부, 의군부, 참의부) 갈등에도 휘말려 민심마저 흉흉하였다. 그러더니 임시정부 내 기호파와 서북파의 갈등이 폭발하여, 서북파 및 흥사단 계열이 이승만의 탄핵안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1925년 3월 23일 임시 의정원은 이승만에 대한 탄핵을 의결해 대통령직에서 면직시키고, 곧바로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당시 이승만의 탄핵에 결의한 임시 의정원 의원은 곽헌(郭憲 또는 곽중규郭重奎), 최석순(崔錫淳), 문일민(文一民 또는 文逸民, 文熙錫), 고준택(高俊澤), 강창제(姜昌濟), 강경선(康景善), 나창헌(羅昌憲), 김현구(金玄九), 임득산(林得山), 채원개(蔡元凱) 등 10명이었고, 탄핵심판위원장은 나창헌(羅昌憲)이었고, 위원은 곽헌(郭憲), 채원개(蔡元凱), 김현구(金玄九), 최석순(崔錫淳)이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약 1년 간 서북파 흥사단 안창호 계열이 장악하였으나 아무런 영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임시정부를 식물 상태로 만들었다. 임시정부의 지도체제는 1927년 8월 19일 이동녕 주석 국무위원 체제가 갖춰지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되었다. 이동녕과 이시영 등이 임시정부를 다시 장악하기 시작하자 같은 기호파인 이동녕파와 이시영파끼리의 주도권 경쟁도 있었다. 이에 1927년 12월 10일 조소앙은 이승만에게 임시정부로의 복귀를 희망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구미위원부 활동 (1919~1925) = 1919년 9월 12일 김규식과 함께 독립공채표(일명 애국공채표)를 발행하였다. 독립공채표로 거둔 의연금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송금되었다. 원래 독립공채표는 한국의 건국 시에 공채 형식으로 상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84년 6월 28일 [https://www.law.go.kr/법령/독립공채상환에관한특별조치법시행령/(11444,19840628) 독립공채상환에관한특별조치법](약칭 독립공채상환법)이 제정되어 채권에 명시된 액면가 금액에 소정의 이자를 합산하여 지불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 9월 28일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현지 취임을 위해 미국을 떠나 상하이로 가기 전에 현순에게 위원장대리(서리)를, 정한경에게 서기를 맡겼다. 1921년 3월 9일 구미위원부 위원장서리 현순은 이승만에게 보낸 업무보고에서 워런 G. 하딩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일관계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이승만에게 알리면서 구미위원부를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개편하여 미국 정부의 정식 승인을 얻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 후 현순은 독단적으로 '주미대사'라는 직함을 사용하였다. 이에 4월 14일 오전에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신규식, 신익희, 김규식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사저를 내방하였다. 이승만은 "지금 구미위원부 일이 매우 절박합니다. 현순은 마땅히 파면해야 하며 서재필 박사가 임시위원장에 피선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여러분들은 비록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에 찬동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규식이 사면장(辭免狀)을 내면서 "뜻을 결정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아직까지 지연되어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김규식은 "내가 이와 같은 문제에 답을 하지 못했는데, 나는 그 (내용)을 알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즉 당시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이 위원장서리 현순이 일으킨 파동에 대해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되었다. 4월 25일 김규식은 구미위원부 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4월 26일 현순은 구미위원부 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4월 29일 김규식은 임시정부 학무총장직을 사퇴하였다. 1925년 4월 15일 '구미위원부 통신 제9-5호'에는 구미위원부를 폐지하고 대한인국민회에 사무를 인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 미주 동포들이 분개하였으며 뉴욕, 로스엔젤레스, 시카고 대한인교민단 등이 임시정부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실렸다. 1925년 4월 29일 이승만은 '대통령 선포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포문에서 이승만은 "민국 원년에 한성에서 조직하여 세계에 공포한 아 임시정부는 해내외에 일반국민의 성복애대(誠服愛戴)하는 바이어늘 단 상해에 일부 인사들이 파괴를 시도하여 정부 소재지로 일장난국을 성함은 세인이 공지하는 바라. 도금(到今)하여는 전부 전복의 계획을 실현하기에 지하였스니 아 충애동포가 엇지 차를 용인하리오"라고 한 다음, "한성계통의 대표적 외교기관인 구미위원부를 유지하여 외교선전사업을 계속 진행함으로 부원(府院:행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말함)의 문제가 정경(政經)으로 해결되기를 시사(是俟)하라"고 했다. 요컨대 한성정부의 '법통'을 고수하여 구미위원부를 계속 유지해 나가자는 당부였다. 1925년 5월 11일 임시정부는 주미외교위원부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설치하였고,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최진하(崔鎭河)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활동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구미위원부에는 한국인 유학생인 조병옥·허정·장택상 등이 나타나 업무를 보좌하였다. 이승만이 단독으로 운영하면서 구미위원부가 언제 문을 닫았는지는 학자마다 주장이 다르다. 적어도 1930년 3월까지는 단독으로 활동하였음이 확인된다. 한편 1925년 12월 13일 대한인동지회는 동지식산회사를 창립하였다. 이승만의 일지에 따르면 이승만은 1925년 11월 20일부터 1931년 4월 7일까지 5년 반 동안 동지식산회사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동지식산회사가 위치한 동지촌은 비가 많이 오는 장소였기 때문에 포장이 안 된 도로를 이용하여 제재소와 숯가마에서 나오는 물자를 수송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결국 1931년 4월 대한인동지회의 동지촌은 파산하였다. 1926년 12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구미위원부에서는 삼만여원을 주고 뉴욕 '팍로도 1310호'의 새집으로 옮기고 새 활동에 착수하였는데 영문잡지 한국평론(Korea Review)도 계속 발행키로 하였다. 1926년 김현구를 기용하여 구미위원부의 살림살이를 맡기기도 했다. 김현구는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대소사를 총괄했는데, 1927년 1월부터 1928년 7월까지 1년 반 기간에 걸쳐 무려 131통의 간찰(편지)을 이승만에게 발송했고, 이승만으로부터 4통의 답변을 접수받았다. 1928년 4월 10일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에서 재만동포옹호 팜플렛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자신도 처지가 어렵다고 거절하면서도 자금의 일부를 임시정부에 꾸준히 송금하였다. 한편 1928년 10월 17일 박용만이 텐진에서 의열단 단원 박인식, 이해명 등에게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내의 언론과 방송 담화를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의열단의 경쟁세력인 임시정부의 김구가 나서서 이승만에게 '박용만은 총독부에 매수된 밀정'이라는 답신을 보냈으나 이승만은 그럴리 없다면서 비난 철회를 거부하였다. 1929년 10월 5일부터 1930년 1월 8일 사이 이승만은 미국 본토 전역을 방문하고 호놀룰루로 돌아 온 후 태평양잡지를 태평양주보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 임시 정부 복귀 및 외교활동 (1932~1933) 1932년 11월 10일,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의해 국제 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 면직 당한 이승만을 대표로 기용한 것은 임시 정부의 외교독립활동을 수행할 만한 적임자로서 이승만을 능가하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1932년 12월 미국을 출발하여 리버풀, 런던, 파리 등을 경유한 후 1933년 1월 4일 국제 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1933년 1월 26일 프랑스어 일간신문 주르날 드 제네바지와 인터뷰하였다. 2월 8일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공한(公翰)을 국제 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배포하였다. 2월 16일 국제 연맹의 방송시설을 통해 극동분쟁과 한국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2월 22일 제네바의 프랑스어 신문라 트리뷴 도리앙지에 그의 독립운동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고, 2월 23일 베른의 독일어 신문 데르 분트에도 활동 상황이 실렸다. 이로서 임시정부에서 탄핵된지 8년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하였다. 1933년 3월 서한발송 및 선전홍보 활동과는 별개로 이승만은 국제 연맹 리튼 조사단이 일본인의 만주침공을 조사한 리튼보고서의 내용을 발췌하고 여기에 자신의 논평을 가한 만주의 한국인들을 발간하여 배포하였다. 이러한 항일외교를 통해 이승만은 국제 연맹이 리튼보고서를 채택하고 이에 반발한 일본이 국제 연맹을 탈퇴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임시정부 일각의 반대에도 외교 활동을 위한 그의 역할이 크다는 이동녕, 김구 등의 주장에 의해서였다. 1934년 1월 12일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기사로 보도하였다. 1934년 7월 22일 미국 국무부의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와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9월 16일 장기영과 함께 몬태나주의 뷰트를 방문하였다. 이는 몬태나 스탠다드지가 기사에 게재되었다. 1938년 4월 24일 하와이주 호놀룰루 릴리하가(街)에 한인기독교회 건물을 낙성하였다. 1939년 3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이 보이자 워싱턴 D.C.에서 구미위원부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호놀룰루를 떠났다. 1939년 8월 30일 한국인과 중국인이 국제정세에 대해 몽매한 것을 한탄하며 한국의 독립에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강조하는 편지를 임시정부의 김구에게 발송하였다. 1939년 12월 10일 워싱턴 포스트지와 인터뷰에서 이청천 장군의 독립운동을 알렸다. 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이승만을 워싱턴 D.C.에 위치한 주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대미교섭의 전권(全權)을 위임하는 '신임장'을 교부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대미외교의 전면에 다시 나설 수 있었다. 1941년 7월 뉴욕에서 일본의 미국 침공을 경고하는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를 출간하였다. 12월 진주만 공격 이후 큰 설득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이 책은 대지의 저자 펄벅에게 "무서운 진실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들었다. 진주만 공격 이후 이 책을 통해 조선이 왜 독립해야하는 미국사회에 알릴 수 있었다. 항일단파방송 선전활동 (1942) = 미국 정부는 1942년 2월 24일 전 세계의 청취자를 대상으로 태평양 전쟁의 전쟁상황을 알리기 위한 방송인 미국의 소리(VOA, Voice of America)를 개국하였다. 이승만은 1942년 6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 1942년 6월 13일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단파방송으로 한반도에 소식을 전하였다."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중략) 아직은 미국이 몇 가지 관계로 하야 대병을 동하지 아니하였으매 왜적이 양양자득하야 온 세상이 다 저희 것으로 알지마는 얼마 아니해서 벼락불이 쏟아질 것이니 일왕 히로히토의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에 있어 애국 열사 김구,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제씨가 합심 행정하야 가는 중이며, 우리 광복군은 이청천, 김약산, 유동열, 조성환 여러 장군의 지휘하에서 총사령부를 세우고 각방으로 왜적을 항거하는 중이니,... (중략) 이순신, 임경업, 김덕령 등 우리 역사의 열렬한 명장, 의사들의 공훈으로 강포·무도한 왜적을 타파하야 저희 섬 속에 몰아넣은 것이 한 역사에 한 두번이 아니었나니 우리 민족의 용기를 발휘하는 날은 지금도 또다시 이와 같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그러므로 이 희망을 가지고 이 소식을 전하니 이것이 즉 자유의 소식입니다. (중략)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 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중략)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 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이승만의 항일단파방송 육성원본은 오늘날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1942년 8월 29일 이승만의 제안으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이 개국하였다. 미국과의 군사협력 활동 =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정보조정국(COI, Coordinator of Information)은 중국을 통한 일본침투라는 특수첩보작전 계획을 수립하면서 1942년 3월 제1기 대원을 모집했고, 이승만의 추천으로 한국인 COI대원 제1호로 장석윤이 선발되었다. 하지만 COI부대 계획은 1942년 6월 공식적으로 중단되었고, 1942년 7월 11일 미국 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으로 개편되었다. 장석윤은 OSS소속으로 1942년 7월 인도 뉴델리에 도착해 미얀마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중경 임시 정부와 이승만의 한국위원부를 연계시킬 계획으로 이승만과 김구 간의 비밀문서 연락업무도 은밀히 수행하였다. 1942년 7월 28일 이승만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부위원장 김병연에게 한인 적임자를 물색하여 지원서를 작성케 한 후 워싱턴 D.C.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여 50명의 명단을 받았다. 9월 30일 이승만은 OSS의 로센봄 중위, 미국 국무부 차관보실의 로스토우 등을 만나 중국 내 한국인 게릴라 부대 조직의 후원 문제를 협의하였다. 10월 10일 이승만은 한국인 선발요원 50명의 명단을 OSS의 프레스턴 굿펠로우에게 통보하였다. ‘FE-6 프로젝트(Project)’라고 불린 이 계획은 11월 17일 OSS 극동과 책임자인 찰스 레머(Charles Remer)의 승인을 받았다. 이승만은 한인 24명의 명단을 승인하고 OSS 특별 작전과(Special Operation Branch)로 발송하였다. 프랜시스 데블린(Francis T. Devlin) 대위는 이들 가운데서 다시 12명을 선별하였는데, 이들이 ‘코리안 프로젝트(Korean Project)의 핵’으로서 특수 작전 훈련을 받은 후 충칭 지역으로 배치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계획은 미국과 한국 간의 역사적인 첫 군사 협력 활동이었다. 선발된 12명이 워싱턴 D.C.로 차출되어 12월 4일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들의 군사 훈련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섬에서 진행되었다. 12월 7일 이승만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하지만 이승만과 OSS가 추진한 첫 사업의 성과가 어떠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943년 2월 17일 미국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편지를 보내, 항일 게릴라 조직계획서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의 전황이 미국에게 유리해지자 미국은 한인들을 이용한 직접 행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44년 7월 18일 이승만은 합동 참모 본부에 편지를 써서 태평양 근역 섬에서 포로가 된 한인 노무자나 군인들을 훈련하여 일본과 한국 침투 공작에 사용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주미외교위원부가 포로 중에서 적당한 인원을 선별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OSS는 중국에서 직접 한인들을 훈련할 계획이라고 내부 문서를 돌렸다. 미국은 이승만과 한길수 계열이 아닌 재미 한인을 이용하여 한국 내에 침투시키려는 냅코 작전(Napko Project)을 계획하였다. 임시 정부 승인 운동 (1941~1945) =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패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일본 제국이 망하는 즉시 한국이 일본 제국에게 빼앗긴 주권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미국 등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정식 승인해야 된다는 외교활동을 하였다. 1942년 3월 23일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을 찾아가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였다. 이승만과 임시정부 측에서는 1882년 체결된 조미 수호 통상 조약과 임시정부의 정통성, 한국인들의 대일본 전쟁에서의 공헌 가능성 등을 설득하며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미국대로 임시정부 승인이 불가능한 이유를 여러 가지를 들면서 반대하여 양자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1944년 8월 21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승인을 거듭 촉구하였다. 1944년 9월 11일 이승만은 제2차 퀘벡 회담에 참석한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다시 카이로 선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 패망 후 한국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이승만의 독립 승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무부 내의 반대파와 공산주의자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승인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루스벨트는 1943년에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한 한국의 독립을 번복하고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해 합의하였다. 1945년 2월 5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 차관 조셉 그루에게 전보를 발송,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야욕을 막는 방법으로 임시정부를 즉시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3월 8일 미국 국무부 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에게 4월에 열릴 샌프란시스코 유엔창립총회에 임시정부 대표를 초청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3월 9일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대동하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를 면담하였다. 1945년 5월 유엔창립총회에 참석하려는 한국인들에게 중국의 외교부장 쑹쯔원(송자문)이 좌우합작을 주장한 데 대해 맹렬히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창립총회에서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얄타에서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해 주었다는 정보를 접한 뒤 소련을 맹공격하는 선전을 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돌린 반소 전단지가 소련측 대표들의 수중에도 들어가게 되어 소련 외상이자 소련 수석대표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극도로 적대시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즉시 귀국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국 국무부가 쉽게 여권을 내주지 않아 2개월간 발이 묶여 있었다. 귀국 직후 = 1945년 10월 4일 뉴욕을 출발해 하와이와 괌을 거쳐 10월 12일 도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맥아더를 만나 며칠 머문 다음, 태평양지구 미 육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전용기 ‘바탄(Bataan)’호를 이용하여 10월 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33년만의 귀국이었다. 조선호텔에 투숙하였다. 저녁 7시 30분 경성중앙방송국에서의 환국 후 첫 방송에 3천만 동포가 일심협력하고 자주독립의 양성에 전국민이 대동단결하기를 부르짖었다. 1945년 10월 20일 경성시민주최 연합군환영회에서 이승만은 "오냐 힘을 합치리라 한 깃발 아래로 목숨을 바치리라"고 맹세를 하였다.섬네일, 이승만은 그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이승만이 귀국후에 벌인 첫 번째 대미교섭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문제였다. 이승만은 존 하지에게 임시정부를 정부 자격으로 귀국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하지는 답변을 회피한다. 윤석오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은 측근들에게 "존 하지가 임시정부를 불한당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여러번 했다. 귀국 당시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모두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모여든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미군정 또한 그의 지도력을 원했다. 그가 귀국하자 국내의 후견인이자 독립협회 때부터의 동지였던 윤치호가 만나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윤치호를 만나지 않았다. 한국민주당 영수 및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취임 거절 = 1945년 10월 16일 오후 허정은 미 군정 당국의 연락을 받고 이승만이 여장을 푼 조선호텔로 찾아갔다. 허정은 이승만과 대좌, 국내 정세를 설명했다. 허정은 '무엇보다도 이 박사가 겨레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좌익의 움직임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 자리에서 허정은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창당을 알리고 그에게 영수 추대를 수락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수락을 거절했다. 허정은 여러번 설득했지만 이승만은 한 정당 정파의 리더가 되기는 싫다고 답했다. 이승만의 성품을 알고 있던 허정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1945년 9월 7일 이승만은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다. 10월 21일 허헌, 이강국 등 좌익인사들이 방문해서 조선인민공화국에 주석 취임을 요청하였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1945)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미군정 종료 후 정권을 인수할 수 있는 권리를 불인정하였다. 과거 임시정부 내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자유시 참변 등 극심한 좌우갈등을 이유로 들었다. 이에 이승만은 좌익, 우익, 임시정부 요인이 총망라된 단체를 만들어 미군정의 정권을 인수하고자 하였다. 1945년 10월 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초기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에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 공산당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 1945년 10월 24일 윤치영 등의 독지가들의 주선으로 돈암장에 입주하였다. 그가 미국에 체류했을 때 이미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허정, 장덕수가 돈암장에 출입했고, 윤치영, 이기붕 등은 그의 비서역을 자처했다. 10월 31일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을 돈암장에 불러들였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건국기관으로 추대하기 위한 두 사람의 이날 회담은 원만하게 타결된 듯 보였다. 이 날 이승만이 "성스러운 건국사업에 친일파를 제외하자는 원칙을 시인하며 그러나 지금은 바쁜 때이니 그들을 처단할 수는 없지 않나"고 묻자 박헌영은 "우리도 지금 그들을 처단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직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성스러운 건국기관에서 친일파만 제외하면 우리들은 얼마든지 이선생과 함께 손을 잡겠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1945년 11월 3일 조선공산당은 금새 입장을 바꿔 '先친일청산'을 주장하면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대한 비판성명을 발표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이승만은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문을 발표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환국 제1진이 귀국하였다. 이승만은 친히 김포비행장으로 나가 김구, 김규식 등 환국 요인들을 영접하였다. 1945년 12월 13일과 14일 극좌익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임시정부 세력 역시 임시정부 인사들을 독촉에 참여시킨 후 임시정부를 해산한다는 이승만의 계획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별정치위원회라는 독자적인 조직화 방안을 모색했다. 1945년 12월 17일 이승만은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하여 민족을 분열시키는 친소 반민족주의 극좌세력에 대해 통렬히 비판하였다.1945년 12월 19일 오전 11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정개선환영대회에 참석하였다. 15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11시 정각이 가까워오자 김구 이하 임정요인 일동의 입장에 뒤 이어서 각 정당대표 및 기타 인사의 입장이 있었고 장엄한 취주악에 맞추어 일동 총기립으로 환영대회가 개막되었다. 36년간 잊었던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일동의 애국가 제창, 이화여전의 환영가 제창, 홍명희의 환영사, 러취 군정장관의 축사 후 김구의 답사와 이승만의 답사가 있었고, 만세삼창으로 환영회는 폐회되었다.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에 추대되었다. 그런데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공화국 등 좌익진영은 3상회의 직후인 1946년 1월 2일 기점으로 신탁통치 찬성(찬탁)으로 일제히 돌변했다. 이로써 좌익과 우익의 분열이 노골화하였다. 좌익의 찬탁표명에 대해서는 모스크바와 평양으로부터의 지령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민족진영은 외세를 적이라고 보았고, 공산진영은 동족을 포함한 지주·자본가를 적이라고 보았다. 1946년 1월 14일 이승만은 정례기자단회견에서 신탁통치 찬성으로 급선회한 공산주의자들을 친일파와 다름없는 매국노라고 단정하고 결별을 선언하였다.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예비회담이 개최되자 각 정당과 사회단체는 서둘러 반탁진영과 찬탁진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반탁진영은 1946년 1월 20일 임시정부 중심의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비상정치회의주비회를 개최하여 전국의 정당과 사회단체를 소집하였다. 1월 21일 비상정치회의주비회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합류시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로 개칭하고 이승만·김구를 공동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월 23일 임시정부 측 혁신계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성주식(成周寔),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등 3명은 '임시정부가 중립을 지키지 않고 반탁에 가담해 우익 편향화하고 있다'면서 비상국민회의주비회 탈퇴성명을 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장건상도 임시정부와의 결별을 고하였다. 또한 공산진영 산하단체도 모두 참가를 거부해왔으므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는 우익진영만의 집결체가 되었다. 1월 30일 안재홍, 조소앙, 조완구 등으로 비상국민회의 상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로부터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위임 받은 이승만·김구는 28인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개편에 따라 비상국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유명무실해졌다. 한편 민주의원이 결성된 이날 조선인민당의 여운형, 개신교의 함태영, 유교의 김창숙·정인보, 조소앙은 결석하였다. '임시정부의 우익 편향화'를 운운하며 비상국민회의를 탈퇴했던 세력들은 고스란히 찬탁진영이자, 민주의원의 반대진영이자, 좌익진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였다. 1946년 2월 8일 이승만 계열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 계열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라는 공통 분모 하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통합 결성하였다. 이승만은 총재, 김구는 부총재에 추대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중앙조직을 끝내고 전국의 시·도·군까지 지부조직을 확대하는 동시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청년대를 설치하여 전위부대로 활동하게 하는 등 정당 아닌 국민운동단체로서 방대한 조직이 형성되었다. 1946년 3월 1일 기미독립기념회와 3·1기념회가 주관한 3.1절 기념식에 참석해 개회사를 하였다.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은 미국의 예상대로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을 과도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련측은 “북한 주민도 모스크바 협정문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되었다. 미소공위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민족주의진영 통합에 나선 한독당은 1946년 3월 22일 국민당과의 통합을 선언하였다. 4월 7일에는 한독당, 국민당, 한민당, 신한민족당 등 4당 합동교섭위원 합당 협의를 하였는데, 한민당측이 '중앙위원수와 인선배치가 명확치 않아 당을 헌납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여 통합에 난항을 겪었다. 이에 김구는 4월 9일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당에 얽매이지 않은 거국적이고 초당적인 국민운동의 필요'하다며 거부하였다. 4월 18일 한독당으로의 통합에 국민당, 신한민족당만이 참여하였고 한민당은 이탈하였다. 이후 미소공동위원회는 난항을 거듭하다가, 4월 18일 과도정부 수립에 참여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 즉 '공동성명 제5호(제5호 코뮤니케)'가 발표되었고, 이어서 4월 27일 존 하지가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하더라도 반탁의견 발표를 보장하겠다는 특별성명을 냈다. 이에 5월 2일 비상국민회의, 독촉국민회,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한국독립당, 한국민주당 등 25개의 우익 정당과 사회단체가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되 탁치를 전제로 한 일체 문제는 절대 배격한다"고 발표하며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했어도 신탁 통치 반대를 포기하지 않는 한 협의할 용의가 없다고 하였다. 결국 5월 6일 미소공동위원회는 무기 휴회에 들어갔다. 1946년 5월 23일 이승만은 민규식(閔奎植)등 경제보국회 소속 10명으로부터 1천만원을 '독립자금' 명목으로 제공받았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 (1946) 1946년 2월 8일 북한은 남한과의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사실상의 단독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입각한 농지개혁과 산업시설 국유화를 시작했고, 1946년 4월 중국에선 제2차 국공 내전이 발발해 공산당과 국민당이 다투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 소련에 의해 좌우합작 정부를 세웠던 동유럽도 공산화되기 시작했다. 국내에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군정과 조선공산당이 극단적인 대립에 놓인 상태였다. 그런데 1946년 5월 6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중단되고, 5월 11일 이승만이 지방순회 소감에서 "자율적 정부수립에 대한 민성(民聲)이 높은 모양이며 나도 이 점에 대하여 생각한 적은 있으나 발표는 아직 못하겠다"고 언질을 하고, 5월 12일 독립전취국민대회에서 김규식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면 우리 손으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발언을 하자 남한단정론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우리 손으로 세운다는 정부'가 어떤 정부냐를 놓고 관심이 집중되자, 5월 16일 김규식은 통일 정부로 해명하였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전북 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부터 남한단정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1946년 6월 5일 전라북도 이리(익산)에서는 "일반민중이 초조해서 지금은 남조선만이라도 정부가 수립되기를 고대하며 혹은 선동하는 중이다"라고 말했고, 이러한 주장은 6월 25일 경기도 개성에서도 이어졌다. 6월 11일 미군정의 아처 러취도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였고, 6월 12일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은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이승만이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도 헛소문인 것 같다고 입장을 밝혔다. 한국민주당 등 소수만이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1946년 6월 12일 이승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재에 취임하였다. 이승만은 이날 '가까운 시일 내에 민족통일사령부를 중앙에 설치하고 국민운동의 최고영도로서 독립전취운동(獨立戰取運動)을 조직적으로 강력하게 전개하겠다'고 하였다. 1946년 6월 29일, 새로운 민족통일기관의 설치구상과 단독정부 수립 준비 및 지지기반 확보를 위하여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하였다.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 1946년 7월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계승한 형태로든지, 선출된 실행위원회에서 임명된 형태로든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촉구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 도전했다. 그러한 정부의 지위는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단순한 과도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이승만은 밝혔다. 그리고 여러 정치써클에서 논의된 정부구성에 관한 의견들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고 우리 손으로 신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미소공위의 결과가 우리의 기대와 일치한다면 그때는 정부를 구성하려는 계획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좌우합작운동과의 경쟁 (1946) 1946년 7월 25일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우파 김규식이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당시 미군정은 이승만의 남한단정론을 외면하고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원하였는데, 이는 좌익진영을 극좌익과 중도좌익으로 구분하여 조선공산당과 같은 극좌익을 고립시키고 여운형 중심의 중도좌익을 견인하여 우익 주도의 정국 구도를 짜기 위해서였다. 1946년 8월 3일 이승만은 여운홍의 사회민주당(1946) 결성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에서 열린 8·15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하지 중장에 이어 인사말을 했다. 1946년 9월 10일 민주의원은 한반도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유엔으로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에서 열릴 제2차 유엔 총회에 파견하였다. 1946년 9월 12일 이승만은 차량 이동 중 돈화문 앞에서 김광명(金光明, 본명 김영수 金永洙)의 권총저격을 당했으나 총알이 차체를 뚫지는 못하였다. 10월 1일 체포된 저격범 김광명은 10월 4일 범행 일체를 자백하였다. 1947년 1월 24일 김영수에게 무기징역이 구형되었다. 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 7원칙' 발표 등 좌우합작운동이 활발해지자 이승만은 "좌우합작이 성립되어 38선이 철폐되고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그 정부가 어떠한 정부던 그 정부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던 나는 일시민으로 이를 무조건으로 지지하겠다"고 말해 남한단정론과 좌우합작운동 간의 마찰을 피하고자 하였다. 1946년 부산에서 9월 총파업이 일어나고, 이어서 대구 10.1 사건이 발생되었다. 대구 10.1 사건은 10월 3일부터 경상북도, 경상남도로, 10월 초순에 충청도로, 10월 하순에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로, 10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전라남도로, 12월 중순에 전라북도로 확산된 후에 끝났다. 이를 두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대구 10.1 사건을 '동학농민운동, 3.1 운동과 함께 조선의 3대 위대한 인민항쟁'이라 평가했다. 김성수의 민주당은 '이번 파업투쟁은 박헌영 일파의 모략 선동에 기인한 것'이라며 일제히 맹비난했다. 여운형,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는 '10·1 폭동이 경찰에 대한 반감, 군정 내 친일파의 존재, 일부 한국인 관리의 부패, 파괴분자들의 선동 탓에 일어났지만, 사태를 살육과 파괴로 몰고 간 책임은 과격한 투쟁 노선으로 기운 조선공산당에 있다'고 비판했다. 오늘날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의 근본원인은 미군정의 실정(失政)에 따른 국민적 반감 및 소군정의 명령에 따른 조선공산당의 선동이 종합된 것으로 평가된다.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을 계기로 '한반도에서 극좌를 쫓아내야 된다'는 이승만의 남한단정론의 위상이 올라가고 '한반도에 극좌도 포함해야 된다'는 좌우합작운동의 위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북한과 조선공산당 등 극좌익이 우세한 한반도에 극좌부터 극우까지 아우르는 통일정부가 수립될 경우 우익은 결국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외면하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정국이 극좌익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좌우합작운동의 대중적 동력 또한 급속히 약화되었다. 1946년 11월 30일 월남자 단체와 반공주의자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이승만, 김구, 한민당은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는데 대부분 일회성이었다. 도미 외교 및 임정법통론 일시보류 (1947) 1946년 12월 1일 아침 김규식을 병문안 하고, 12월 2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유엔에 직접 호소하기 위해 동경을 거쳐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한편 1월 16일 서울로부터 '전국학련 산하의 학생들이 1월 18일 반탁데모를 전개시키고자 계획하고 있다'는 전보를 받은 이승만은 "조선에는 여하한 데모도 전개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행동이 외국배척운동으로 오해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답장을 보냈고, 1월 18일 민주의원에도 시위를 자제하라고 전보를 보냈다. 이에 전국학련은 기존 계획이었던 매국노소탕대회, 반탁의 재계몽운동, 학생운동사 보고대회, 반탁웅변대회 등을 전면 수정하고, 1월 18일 오후 2시 경운동 천도교강당에서 '반탁학생투쟁사 발표대회'만을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김구 등도 참석하였다. 이철승의 '반탁이냐 죽음이냐', 최성의 '이북학생투쟁사', 송원영의 '·18 반탁학생의 투쟁사' 등의 발표가 있었다. 1월 26일 이승만은 전국학련 위원장 이철승에게 "君은 나의 지시를 받들어 반탁시위를 중지한 데에 대하여 대단히 나는 기뻐하는 바이다"라고 전보를 보냈다. 1947년 1월 24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김구가 위원장, 조소앙, 김성수가 부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월 26일에는 이승만이 최고 고문에, 조성환이 부위원장에 추가로 추대되었다. 2월 14일 오후 1시 경운동 천도교대강당에서 '반탁독립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김구와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 및 방청객 2천여 명이 참가하였다. 반탁독립궐기대회는 "남북통일된 독립의 국가를 완성하기 위하여 현단계에 적합한 과도적 독립정부를 서울에 수립케 할 것"과 아울러 "신탁통치내용의 여하와 기간의 장단을 불문하고 이를 결사반대할 것을 결의함" 등이 포함된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같은날인 1월 24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지지한다고 밝힌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해 "찬탁을 종용한 것이니 이를 분쇄하여야 하며 좌우합작이란 미명하에 기실 민족진영의 분열을 책동하는 결과가 되었고 (중략)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으로 규정하여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할 것"이라고 결의하였다. 한편 이승만이 미국에 있는 동안 국내 임시정부 지지세력은 미군정을 인수하기 위한 운동을 빠르게 추진하였다. 1947년 2월 17일 민족통일총본부·독촉국민회·비상국민회의를 통합하고 비상국민회의를 국민의회로 개칭하였다. 3월 1일 독촉국민회는 국민의회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법통을 승인하고 임시정부를 봉대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3월 3일 국민의회는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였다. 오세창·김창숙·박열·이청천·조만식·이을규(李乙圭) 등 6인을 국무위원에 보선하였다. 그리고 3월 5일 미군정 브라운 소장에게 임시정부의 권능을 인정해달라 요구했으나 거부 당했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이를 쌍수로 환영하면서 이것이 모든 나라에 서광을 비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리 트루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한국에 이 정책을 수용케 함으로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미군정의 정책을 포기토록 권하였다. 또한 '미국 지역 내에서 즉각적인 과도독립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진출에 대한 방파제를 구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47년 4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귀국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은 '미국이 공산주의와 합작을 단념하였으므로 우리는 총선거법안을 빨리 만들어 남한과도정부를 수립하고 UN을 참가시켜 소련을 설득한 후 통일을 이뤄야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제 김구와 김규식은 임정법통론과 좌우합작론을 단념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할 것'이라고 요구하였다. 이승만이 임정법통론을 일시보류한데다가 4월 29일 임시정부 주석 취임까지 거부하자 급기야 5월 2일 경교장에서 이승만, 김구, 조소앙, 조완구, 이청천, 김창숙 등 국민의회 국무위원들과 독촉국민회 지방대표 여러 명이 모여 회담을 하였는데, 이승만의 '임정봉대가 필요할 시기가 올 때까지 보류하자'는 의견과 임시정부 일부요인의 '임정봉대가 필요하다'는 이견을 좁히지 못하였다. 1947년 5월 9일 이승만은 "대한임정법통관계는 지금 문제삼지 말고 아직 잠복상태로 계속하였다가 정식국회와 정식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임시 의정원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정당히 전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1947) 1947년 5월 20일 돈암장에서 이승만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문에서 신탁조항을 삭제할 것, 소련은 의사표시의 자유를 보장할 것, 과도정부는 민주주의로 하되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민주주의가 연립하는 과도정부는 반대함, 만약 그러한 과도정부가 수립되면 남조선 공산화를 방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정도에 따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를 놓고 우익진영이 분열되었다. 5월 30일 이승만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방문한 한국민주당 장덕수에게 참가보류를 강경히 주장하였다. 6월 4일 반탁진영 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참가 불참 여론이 반반으로 갈렸다. 이때 미소공위 참가를 주장한 단체와 대표는 한국민주당 장덕수, 大韓勞總 전진한, 靑年總同盟 유진산, 全靑 이성수(李成株), 全女總盟 황애덕(黃愛德), 獨促婦人會 박승호(朴承浩), 天道敎輔國黨 이진해(李鎭海), 己未獨立 류홍, 儒道會 이재억(李載億), 黃海會 함석훈(咸錫勳)이었다. 이승만은 "공위 참가할 사람은 5호 성명에 서명(찬탁)하기로 되었는 즉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키 곤란하다. (중략) (5호 성명에)서명해서 (신탁통치를)지지하기로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이니... (후략)"라며 한국민주당을 비판하였다. 6월 10일 한국민주당은 재차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우익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였다. 6월 20일 한국민주당은 우익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권위를 앞세운 임정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하였다. 한국독립당 등 임시정부 측은 임정수립대책협의회에 참여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6월 22일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한국독립당 내에 이견이 생겨 3당으로 분열되었다. 즉 한국독립당이 미소공위에 불참한다고 하자, 이에 반발한 안재홍·박용희(朴容羲) 등 혁신파는 신한국민당을, 권태석 등 민주파는 민주한독당을 각각 분리 결성하고 임정수립대책협의회에 합류했다. 이렇게 우익진영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임정수립대책협의회 가입단체, 이승만·김구 계열, 유림 계열의 3파로 분립하였다. 이 외에 경무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오류동(200명), 평택(150명), 춘천 단양대(1만명), 대전(2천명), 김제 석수각(300명), 전주(3천명), 이리(익산)(3천명), 고창중학교정(3천명), 군산(5천명), 임실(400명), 진주(1천명), 광주(2만명) 등에서 반탁시위가 이루어졌다. '비폭력 무저항'을 표방한 반탁시위는 대체로 평온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초기의 신탁 통치 반대 운동 때와는 달리 국민들은 좌우합작운동에 기대를 걸고 있었고 반탁시위에는 저조한 지지만을 보냈다. 1947년 7월 3일 조선일보가 서울 2,49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6월 23일 반탁시위는 '독립의 길이다' 651표, '독립의 길이 아니다' 1,736표를 받았으며, 미소공위와의 협의에서 제외할 정당 사회단체로 한민당 1,227표, 한독당 922표, 독촉국민회 309표, 남로당 174표 등이 나왔다. 그러나 정작 좌우합작운동은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선언된 이후로 미군정에게 소외된 상태였으며,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1947년 7월 19일에는 여운형이 암살되기까지 하면서 사실상 좌초되었다. 1947년 7월 8일 소련은 제1차 미소공위 때와 마찬가지로 반탁세력을 과도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된다고 주장해서 미국과 이견을 보였다.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될 조짐이 보이는 가운데 1947년 7월 10일 제1회 한국민족대표자대회(민대)가 개최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를 공동영수로 추대하였다. 한국독립당 선전부는 "자율적 법통임시정부 수립"과 "미소공위도 유령상대를 버리고 이 진정한 3천만 총의의 자율적 민주주의임정수립 대업성취를 원조 승락하기 바란다" 등의 대회의 요지를 발표하였다. 1947년 8월 12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양진영의 반목으로 완전 결렬되어, 한국에 독립적·민주적 통합정부를 수립한다는 목적이 무산되고 말았다. 단선단정론 대 남북협상론: 김구와의 갈등 (1948)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파탄나자 1947년 8월 28일 미군정은 한국문제를 미·영·중·소 4개국 외상회의에 넘겨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38선 이북에서 확고한 정권기초를 마련한 소련은 4개국 외상회의를 거부하였다. 1947년 9월 17일 미국 국무부 장관 조지 마셜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했다고 발표했다. 즉 유엔 한국 위원회 감시하의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실시하고, 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군은 철수하고 그 정부의 권능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제2차 유엔 총회에 상정되었다. 1947년 9월 21일 이청천이 단장으로 있는 대동청년단의 총재로 취임하였다. 1947년 10월 18일 돈암장을 떠나고 윤치영 등 측근들과 독지가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이화동의 이화장 사저에 입주하였다. 11월 30일 오전 10시 김구는 이승만을 방문한 뒤 1시간 정도 요담한 결과 "독립정부수립 견해에 완전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하였다. 의견 일치를 입증하듯 오후 1시경 이승만과 함께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 12월 1일에는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12월 4일 김구는 "국민의회와 민대와의 완전합작은 민족단결 공작에 기초를 주는 것이며 심히 경하할 일이다. 나와 이승만 박사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즉시 실현하자는 목적에 완전한 합의를 보았다"고 하였다. 1947년 12월 12일 수도경찰청 장택상은 '국민의회측의 간부 몇 사람이 장덕수 피살 사건에 관계된 사실이 있다'며 국민의회와 민대 합동회의에 대한 집회금지조치를 내렸다. 이에 12월 14일 김구는 이승만을 방문하여 12월 2일 발생된 장덕수 피살 사건 때문에 한독당원들이 구속된 문제에 관해 요담을 나눴다. 12월 20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을 맞이할 한국민족대표단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공동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집회금지조치로 인하여 한국민족대표단 선정이 보류된 상황에서 12월 21일 이승만의 민대가 일방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결정 발표하자 김구의 국민의회측이 반발하였다. 하지만 12월 26일 이승만과 김구가 이에 대해 원만히 합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1948년 1월 8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이들을 마중 나가 환영군중대회에서 연설하였다. 1월 12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그러나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단장인 크리슈나 메논이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요구하는 발언을 시작하자, 연설 중 즉각 대회장을 박차고 퇴장하였다. 이 무렵부터 이승만의 단선단정론과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론 간 대립이 심화되고 국론도 분열되기 시작했다. 1948년 1월 16일 "영도적 문제와 이념의 차이로 아직 원만한 합동을 보지 못하고," "합동이 된다 하여도 국민의회측에서 임정법통을 고집하고 민대측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함이 부동한 쌍방의 근본 주장인만큼 장래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보도가 나왔다. 한편 한국민주당은 장덕수 피살 사건 직후인 1948년 1월 21일에 임정수립대책협의회를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로 개칭, 자신들의 당론이던 임정봉대론을 철회하고 이승만의 단선단정 노선에 탑승하였다. 1948년 1월 23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 소련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거부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러자 1월 28일 김구는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에게 '미소양군이 철수하여 군정의 간섭없이 유엔 치안 하에 자유스러운 선거를 치러야 하며,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2월 9일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크리슈나 메논에게 남북한 동시 총선거 성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재차 제안하였다. 이는 남한 단독 총선거를 통해 국제적으로 공인된 정부를 수립한 뒤 압도적인 득표율을 근거로 소련을 쫓아내고 통일을 이루려던 이승만의 계획에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승만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단체와 언론이 남북협상에 회의적이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은 남한 단독 총선거를 가결하였다. 1948년 3월 1일 김구는 '초대 대통령은 나의 숭배하는 선배인 이승만 박사를 추대하나 남한 단독 총선거에는 응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1948년 3월 8일 미국 군율재판 위원회는 북미합중국대통령 트루만의 명의로 1948년 3월 12일 오전 9시에 출정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 하였다. 같은 날인 3월 8일 이승만은 "김주석 부하에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범죄로 김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라고 말하며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1948년 4월 1일 김구와 김규식의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 참가는 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판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8년 4월 25일 선출되지 않은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대표의 자격이 없으며, "남북협상은 소련에게 이용당한 결과"라고 혹평했다. 5월 5일 오후 8시경 김구·김규식 등은 일행 60여명과 같이 서울에 무사히 돌아왔고, 5월 6일 김구는 '큰 소득은 없었다', '첫술에 배부르는 법은 없다', '기초를 튼튼히 닦아 놓았다'라고 소감을 밝힌 후 남북협상의 성과에 대한 김구·김규식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5월 7일 이승만은 남북협상을 재차 악평하였다. 한편 이승만과 김구가 장덕수 피살 사건 때문에 결별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를 입증할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윤경빈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의 갈등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남북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노선 차이 때문이었다. 이 갈등조차 1949년 5월 19일 덕수궁 회동을 통해 점차 봉합되어 갔다. 그러나 1949년 6월 26일 김구의 피살로 인해 화해의 결실을 맺진 못하였다. 국회의장이 된 이승만은 윤보선을 자신의 국회의장 비서로 채용했다. 그러나 한민당에 의해 내각책임제가 언급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책임제를 고집하며 6월 16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책임제 의사를 강력히 전달하였다. 1948년 7월 17일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에 제헌 헌법 전문이 게재되었다. 1948년 7월 20일 실시된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 안재홍, 서재필 등을 누르고 제헌 국회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7월 24일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직전인 8월 11일 파리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장면 등을 대표로 지목, 한국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이때 장면을 선택한 이유는 영어에 능한 몇 안되는 인사임과 동시에 로마 교황청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에서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윤보선을 특별히 채용하여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삼기도 했다. 내각인선 작업과 한국민주당과의 갈등 (1948) 1948년 7월 27일 이승만의 국무총리 지명을 앞두고 국회의 3대 파벌인 독촉국민회, 한민당, 한독당계 무소속 의원들은 각각 신익희, 김성수, 조소앙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날 국회에서 조선민주당의 당수 이윤영을 국무총리 지명자로 발표하며 인준을 요청하였고, 이에 각 파벌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이승만이 이윤영을 지명한 이유에는 통일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국무총리라도 이북 출신을 지명해야 한다는 판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원내 3대 파벌의 후보를 일부러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한민당 측 인사를 지명할 경우 탄탄한 원내 기반을 바탕으로 강력한 국정 운영이 가능하지만 친일세력인 한민당계에 대한 비토 여론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심각한 국론 분열이 예견되고, 한국독립당 계열의 인사를 기용하면 다수의 임시정부 인사들이 새 정부의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명분 및 국민 지지를 다질 수 있으나 임정계와 비임정계의 갈등이 격화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승만의 인준 요청 후 곧바로 이윤영 국무총리 임명 승인안에 대한 무기명 표결을 진행한 결과 총 투표수 193표 중 찬성 59표, 반대 132표, 기권 2표로 부결되었다. 이윤영의 총리인준이 실패하자 이승만은 이윤영을 지청천과 함께 초대 내각의 무임소 장관에 입각시켰다. 내각 인선시 이승만은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출신 전향자였던 조봉암의 발탁은 파격인사였으며, 이후 이승만은 조봉암 등을 통해 농지개혁법을 추진하였다. 농지개혁을 통해 한민당과 토착 지주세력의 기반인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분배하여 한민당과 지주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상공부 장관에는 그의 측근이었던 임영신이 발탁되었는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관이다. 1948년 7월 28일 이화장에서 이승만은 국무총리인선 문제에 관해 "이 국회에서는 두 정당(한민당 및 한독당)이 각각 내정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국회를 결박 부동하게 만들어 놓아..."라고 비판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총리에 내정하였다. 그러자 1948년 7월 30일 김성수는 이범석을 자택에 초대하였다. 김성수는 이범석에게 한민당 전원이 이범석 국무총리 인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내각의 8석을 요구했고, 이범석은 그 제의를 수용하였다. 1948년 7월 31일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총리에 내정하였다. 1948년 8월 2일 국회는 총 투표수 197표 중 찬성 110표, 반대 84표, 무효 3표로 이범석 국무총리 임명 승인안을 통과시켰다. 1948년 8월 2일 이승만은 이범석이 건의한 김성수 천거 8명 중 3명만을 기용하였고 나머지는 무산시켰다. 심지어 한민당계는 김도연 1명만을 입각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밀월관계를 갖던 이승만과 한민당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협조하였음에도 이승만이 후하게 대해주지 않자 한민당은 이번 내각은 실패한 내각이라며 즉각 반발하고 야당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승만 정부 초대 내각의 대부분은 독립운동가 출신자로 기용되었다. 제1공화국 연인원 96명의 각료 가운데 30자리 이상을 구연수 등 친일파 또는 친일파 후손에게 주었다는 견해가 있다. 초대 내각을 구성한 장관으로는 외무 장택상, 내무 윤치영, 재무 김도연, 법무 이인, 국방 이범석(겸임), 문교 안호상, 농림 조봉암, 상공 임영신, 사회 전진한, 교통 민희식, 체신 윤석구, 무임소국무위원 이청천(지청천)·이윤영 등이 임명되었다. 김성수도 무임소 국무위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국회 내 친일 기득권 세력인 한민당의 횡포 뿐만 아니라,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등 좌우 동족상잔까지 빈번해지자 이승만도 한발 물러서, 1950년 11월 23일 개각 시 장면, 김준연 등 민주국민당(한민당) 인사들을 대거 입각시켰다. 대통령직 수행시 이승만은 1948년 7월 24일부터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하기 전까지의 시기(제1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제1차 이승만 정부 (1948~1952) >> 임기 내 각종 행적 1948년 정부수립 후, 미군정 하의 국방경비대를 국군으로 전환하였다. 이때는 대통령령으로 '호국병역에 관한 임시조치령'에 의해 의용병제 형태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8개월 후인 1949년 8월 6일 최초의 '병역법'이 공포되면서 징병제를 원칙으로 하면서 보충적으로 지원제를 병용하는 병역제도가 실시되었다. 1949년 12월 18일 징병제 실시 축하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1949년 1월 6일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이 이범석을 중심으로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던 그는 족청을 해산하여 대한청년단에 통합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범석은 족청을 완전히 해산하지 않고 일부 보존하였다. 1949년 2월 18일 유엔이 북한과 협상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유엔-북한 협상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49년 3월 23일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이 제안한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안을 지지하였다. 1949년 7월 1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추가 원조를 요청했다. 7월 20일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의 체결 협의를 위해 퀴리노 필리핀 대통령,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을 초청하였다. 8월 8일 장제스와 진해에서 회담하였다. 10월 18일 대통령관저 담벼락 근처에 폭발물 장치를 매설한 것을 터지기 전에 경관이 발견하였고, 이승만도 이를 확인하였다. 1949년 서정주가 쓴 우남이승만전에 아버지 이경선에게 공(公)이라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여 판매금지조치 시켰다. 1950년 1월 26일 이승만 정부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했다. 1952년 이승만은 김병로 대법원장이 요청한 판사 임용 후보 중 이태영을 제외시켰다. 이승만은 "야당집 마누라를 판사 자리에 앉혀 놓았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라며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 있던 정일형의 아내라는 점을 들어 임용을 거부하였다. 반민처벌법 제정 (1948) = 1948년 8월 16일 국회 특별법기초위원회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때 제정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안'을 근거로 반민족행위처벌법 초안을 작성하여 국회본회의에 상정하였다. 8월 17일 김웅진 국회특별법기초위원장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의 대강을 국회본회의에 보고하였다. 1948년 8월 20일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국회에서 친일파에 대한 건의안을 정부에 보냈다는데?"라는 질문에 "건의안은 바로 본 것으로 나도 동의한다. (중략) 확실한 증거가 있는 친일자를 정부 요직에 두어서 동포들의 감정을 악화시킬 수 없다. 앞으로는 그런 인물을 등용 안 하겠다"고 답변하였다. 이어서 "현정부 고관 중에도 친일자가 있다는데 개조할 의향은 없는가?"라는 질문에 "수 일 내로 교정될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1948년 8월 20일 민주당 선전부장 김준연은 "일제치하 36년 동안에 경제·산업·교육·행정·문예 등 각 방면에 있어서 그 세력과 접촉되는 부면이 너무도 광범하였기 때문에 그에 관련되지 아니한 편이 극히 적었던 것은 부인치 못할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문제를 너무 심히 추궁하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폐를 각출할 염려가 있을 것이니, 이 점에 있어서 국회의원 제씨의 특별한 주의를 요청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8월 21일 임영신 상공부장관과 일부 국회의원이 친일파 처벌 축소를 주장하였다. 임영신은 "병신자식도 자식은 자식이니 국제적 승인을 얻을 때까지는 국무회의에 불만이 있더라도 자중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장병만은 "세부까지 처벌하면 오히려 국가에 해가 된다"고 말했다. 곽상훈은 "친일파를 자처하는 자는 벌써 자포자기하는 점이 있다. 그러므로 법안 범위를 더 축소하여 악질자에 한하자"고 말했다. 이정래는 "초안에 규정된 자 중에는 애국자도 있다. 애국자일수록 관대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8월 26일 국회에서 친일파숙청법안이 활발히 논의되자 일부 친일파 재벌이 한국민주당에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고 친일파 구명운동을 펼쳤다. 8월 23일 김성수는 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을 강경히 주장하는 의원들에게 회견을 청하여 친일파 문제를 광범하게 취급할 것이 아니라 범위를 좁게 취급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이들 중엔 친일파로 밝혀진 자들도 있었으나 비타협적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1948년 8월 27일 신익희 국회의장이 반민족행위가 있는 정부위원들의 임명을 승인하자 이에 반발하여 반민특위 전원이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날 국회 본회의장에 반민족행위처벌법 반대 삐라가 살포되는 사건도 있었다. 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이 찬성 103표, 반대 6표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다. 여수·순천 사건과 국가보안법 제정 (1948) = 같은 시기 1948년 9월 9일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그 전후로 각종 대남공작이 이뤄졌다. 4월 3일부터 이미 제주 4.3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5월 14일부터 남한으로의 송전을 끊어 남한 산업과 민생에 고통을 주었고, 9월 14일 중앙청·독립문 등 시내 여러 곳과 9월 29일 경상북도 각지에 인공기 게양사건을 일으켰다. 10월 5일 38선에서 남북 간의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김지회와 지창수를 중심으로 일으킨 소위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되었다. 여수·순천 사건은 발생 9일만인 10월 27일에 진압되었지만, 공산진영이 같은 민족을 대상으로 전에 없던 대규모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여수·순천 사건으로 인한 피해에 관해서는 다양한 통계가 확인되며 대략 2,000~5,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8년 기준 재산 피해는 약 100억 원, 가옥 소실은 2천 호 가량으로 집계되었다. 반란군은 여수은행과 순천은행에서 3억 8천만원 가량의 돈을 털어가기도 했다. 여수·순천 사건은 반란군과 진압군 양측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로 논란을 빚었는데,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결정한 여순사건 당시 순천 일대의 민간인 희생자는 439명이고, 2010년에 결정한 여수 일대의 민간인 희생자는 124명이다. 단 일부 시민단체는 민간인 희생자가 10,000여 명이라고 보고 있다. 1948년 11월 6일 국회 제1당인 한국민주당은 여수·순천 사건과 관련하여 남로당을 패싱하고 이승만 정부만을 공격하였고, 정부가 요구하는 긴급한 법안의 통과도 지연시켜 세간의 원성을 샀다. 1948년 11월 6일 국회에서 여수·순천 사건에 따른 시국대책안을 놓고 이승만과 한민당의 조헌영이 격론을 벌였다. 조헌영은 '여수·순천 사건은 공산주의자의 선동과 모략과 파괴적 계획이긴 하나, 즉 폭발물에다가 불을 대는 것은 공산주의자지만 그걸 폭발시킨 건 이승만 정부에 대해 불만과 불평을 가진 대한 민중'이라며 이승만을 비판했다. 또한 '친일경찰들이 친공파뿐만 아니라 반공반일파까지 공산당몰이를 하고 있는데 이를 정부가 묵시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1945년 10월에 여기에 들어온 이후로 이 친일파에 대해서 말한 것이 제일 말 많이 한 것이 공산당 사람"이라며 친일경찰이 잡은 반일파 중 대부분은 반공반일파가 아니라 친공반일파라는 식으로 경찰을 옹호했다. 또한 "공산당들이 시방 국방군이든지 들어가서 살인을 하고 있는데 민족의 생명이 없어지고 하는 이 때에 그런 악질분자라고 반역분자라고 경찰에서 잡아 내놓면 당신들의 생명은 어떻게 되며 당신들의 어린 자녀 부모의 생명은 어떻게 될까 생각해 주셔야 할 줄 압니다. (중략) 그러므로 해서 우리는 먼저 할 것을 먼저 하고 나중 할 것을 나중에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일 것입니다."이라고 말해 先공산철퇴 後친일청산 입장을 강조하였다. 즉 이승만은 친일청산과 친공청산이 병행될 수 없다고 봤으며, 친일청산보다 친공청산이 더 시급하다고 봤다. 실제로 1950년 북한은 6.25 전쟁을 일으켜 민족을 배반하고 수백만명을 학살하는 반민족행위를 자행해 민족사를 넘어 세계사에 대서특필되었다. 이후에도 '친일관료들이 자리잡은 건 미군정 탓인데다가 치안문제상 당장 갈아 엎을 수도 없다'는 친정부 인사들의 입장과, '민의를 따르지 않는 건 독재이니 당장 갈아 엎자'는 반정부 인사들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체제를 구축하였다. 군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숙군작업'을 벌이는 한편, 1948년 12월 1일에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처벌에 나섰다. 경무대 폭파 음모 사건 (1948) = 1948년 10월 19일 오전 2시경 효자동 전차 종점 근방에서 정체모를 전기줄을 발견하여 근방을 조사해본 결과 약 70미터 가량의 땅굴과 그 속에 다이너마이트 6통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1948년 11월 8일 수도관구 경찰청장 김태선은 경무대 앞에 폭발탄을 매장하여 이승만을 암살하려던 박춘석(朴春錫)과 공범 김상기, 정우섭, 황보원(皇甫源), 황보경순(皇甫景淳)의 암살음모사건 전모를 발표하였다. 박춘석 등 5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는 미명하에 이영으로부터 좌익정당 가담, 이승만과 정부 및 정계 요인 암살, 대한민국 정부 전복,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방해하라는 지령을 받았으며, 8월부터 10월 17일까지 경무대 앞과 장택상 사택 앞에 폭탄을 매장하고 여수·순천 사건에 호응하여 이승만과 정부 및 정계 요인을 일시에 암살하려던 것이었다. 유일합법정부 승인 및 민족진영 재결합의 노력 (1948~1949) = 한편 1948년 초 단선단정론과 남북협상론 노선 차이로 인해 틀어졌던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의 관계는 우여곡절을 거쳐 점차 회복되고 있었다. 1948년 5월 29일까지만 해도 김구는 "당분간 이승만과의 합작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어 8월 14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하루 앞두고 김구는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라며 "강력한 통일독립운동을 추진하자"고 하였다. 반면 김규식은 점진적 통일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9월 6일 장제스는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의 합작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1948년 12월 7일 장면 한국유엔대표는 유엔 총회에서 한국승인을 요청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후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총회 결의 195(III)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에서, 대한민국 정부(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 1948년 12월 11일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국제적으로 승인됐으니 이제 북한에 총선거를 실시시켜 선출된 인원을 남한 국회에 참가시켜 남북통일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12월 15일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3영수 합작운동 태동이 보도되었다. 1949년 1월 1일 김규식이 신년인사차 경무대의 이승만을 방문하였다. 반민특위 활동 방해 (1949) = 1949년 1월 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사무를 개시하였다. 1949년 5월 노익환, 서용길 등 반민특위 위원과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한 국회의원 13명이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구속되는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들 다수가 반민특위에서 활동하거나 반정부 성향의 소장파 의원들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6.25 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민족진영 재결합의 가시화 직후 김구 피살 (1949) = 1949년 5월 말 민족진영 3영수의 재결합이 가시화되었다. 1949년 5월 19일 김구는 "일반국민들이 3영수의 재합작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현 시국에 비추어 있음직한 일이나 본래부터 대통령과 김박사와 나의 사이에는 별반 간격은 없었던 것이므로... (중략) 과거 우리들의 노력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과 공간은 차차로 이러한 차이를 해소하고 합일점으로 도달케 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 (중략) 대통령과 金박사와는 앞으로도 종종 만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남북통일에 앞서서 민족진영을 재결합하는 데에 실패했고, 반민특위는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 암살의 배후에 대한 서로 간의 추궁이 이어졌으며 민족진영은 끝내 재결합하지 못하였다. 김구 서거 후 한국독립당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김규식 세력은 1950년 6.25 전쟁 때 그가 납북 당하면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결국 그 즈음으로 하여 대한민국의 주류 세력으로는 개화파 및 임시정부 우익의 정통성을 잇는 계보(보수계 정당)와 한민당을 전신으로 하는 계보(민주당계 정당)만이 남아 현대의 양당구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김구가 피살된 1949년 6월 26일, 이승만은 저녁 9시가 넘어서 서울중앙방송국 방송을 통하여 애도방송을 하였다. "...나와 백범 선생 사이의 사분(私分)으로 말하면 호형호제하고 의리는 실로 사생을 같이하자는 결심이 있던 터이며, 임시정부 주석으로 내가 절대 지지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가 귀국했을 때에 나는 무조건하고 지지하여 온 것입니다. 중간에 와서 정치상 관찰의 약간 차이로 말미암아 정계에 다소 의아하는 점이 없지 아니해서 우리 두 사람이 양편으로 시비를 듣고 있었으나 내가 믿고 바라기는 백범 선생이 조만간에 나의 주장하는 것이 아무 사심이 아니요 민국 대계에 유일한 방침으로 각오될 날이 있을 것을 믿고 있었으며, 근자에 와서는 이런 희망이 점점 표면에 나타난 것을 보고 나는 마음에 기뻐하는 중인데 졸지에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어공어사에 원통한 눈물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후략)" 1949년 10월 4일, 반민특위·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가 모두 해체되었다. 오늘날 반민특위 실패의 일차적인 원인은 이승만 정부 및 한국민주당 국회의 방해와 친일세력의 이념공세로 본다. 그러나 반민특위에도 문제가 있었다. 반민특위·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 내에 친일파가 일부 있어서 큰 방해가 되었고, 본인은 친일파가 아니더라도 직간접적으로 가까운 친일파를 봐주는 경우도 있었다. 친일반민족행위와 무관한 사람들에 대해 주거침입, 감금, 폭행을 했다가 고소 당하기도 했다. 가짜 특별조사위원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회계비리도 있었고,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이 과실치사 및 암매장 범죄를 지어 자질을 의심 받은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반민특위·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 간의 관계도 나빠 마찰이 잦아서 반민특위에 대한 정부와 친일세력의 공격을 자초하였다. 훗날 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친일진상규명법)이 제정됐을 때 보수계 정당은 친일파와 친공파의 후손이 친일진상규명위원이 될 수 없도록 "본인의 부모 및 조부모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지 않았고,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친공반민족행위를 하지 않았음을 소명해야 한다"는 문구를 법안에 넣었다. 이는 한민당의 직접적인 후신이자 DJP연합의 파탄으로 NLPDR계열을 대거 흡수하기 시작한 민주당계 정당으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문구였다. 민주당계 정당은 해당 문구가 연좌제이자 위헌이라면서 삭제해버렸다. 이 밖에 상대 정당 인사들의 조상을 욕보이려고 조사대상과 범위를 늘였다 줄였다 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결국 친일청산은 재차 실패하였다. 대일배상요구와 영토 환수의 노력 (1948~1949) = 이승만은 대통령 임기 내 초지일관 반일 외교를 하였다. 그래서 당시 제1당이었던 한민당과 함께 반민특위를 무력화한 일이나 친일 경력이 있는 인사를 등용한 일 때문에 막연히 친일적인 대통령이라고 호도 당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일본에서는 이승만을 역대 대한민국의 대통령 중에서도 가장 반일적인 대통령이라 인식하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동시에 기획처·법무부 등 정부 일각에서는 장래의 한일관계에 대비하기 위하여 필요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태동하였고, 이에 따른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1948년 8월 19일 이승만은 일본에 대마도와 반출문화재 반환 등을 요구하였다. 1948년 10월 19~20일 주일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1박2일의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으나, 대한민국 주권 회복 후 초대 대통령이 일본 땅을 처음 밟는 것이었다. 맥아더와 연합국 최고사령부와 교섭할 대한민국 외교사절단 파견에 대한 문제, 주한미군에 대한 문제, 재일동포 보호 및 귀국 문제 등을 논하였다. 1949년 2월 이승만 정부는 대일강화(對日講和)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기획처 기획국 산하에 대일배상청구위원회(對日賠償請求委員會)를 설치하여, 은밀하게 배상청구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이 작업은 기획처장인 이순탁(李順鐸)의 총괄 하에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물이 대일배상요구조서였다. 1949년 4월 7일 정부는 이 조서를 동경의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보냈으나, '이 문제는 장래 한일 간에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는 회답을 받았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부터 6.25 전쟁 때까지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것이 60여차례나 되었다. 당황한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워 회피하다가 1950년 북한이 6.25 전쟁을 일으키자 "김일성이 일본을 살려준다"며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농지개혁법]] 제정과 한국민주당과의 결별 (1949) = 1949년 6월 21일, 이승만 정부는 농민들의 농지 및 토지개혁에 대한 목소리에 부응하여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였다. 이승만의 승인 하에 농지개혁법을 주도한 사람은 조봉암 농림부장관이었다. 농지개혁법은 한민당의 재정적 기반이던 친일지주층을 한 방에 박살낼 결전병기였다. 1948년 내각 구성 당시 이승만이 김성수의 천거를 무시했던 일에 더하여 농지개혁법 제정으로 인해 친이승만이던 한민당의 정치노선은 반이승만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농지개혁법은 일제 강점기의 봉건적인 지주-소작인 관계의 사회를 자작농-자유인의 사회로 바꾸는 혁명적인 계기로 평가된다.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낡은 요소는 사라지고 지주 대신 자본가가 새로운 경제의 주역으로 급성장하였다. 자기 땅을 일구게 된 농가에서는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춘 미래의 노동자들이 배출됐다. 6.25 전쟁 직전 (1949~1950) = 1949년 6월 29일 미군이 유엔 총회 결의(1948. 12. 12)에 따라 500여 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완전 철수하였다. 1949년 10월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무력을 통한 북진통일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권은 북진을 할만한 군사적 능력이 없었다. 주한미군이 철수한 상황 하에서 국군은 병력, 장비, 훈련 등에서 매우 취약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은 실질적 전쟁노선이라기보다 미국의 관심을 한반도에 집중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더 큰 주장이었다. 1949년 11월 25일 이승만은 AP통신과의 회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괴뢰정부 해체 후 유엔 감시하 북한 총선거 실시'를 촉구하였다. 1949년 12월 16일 군사원조에 비행기 등의 포함을 미국에 요청하였으나 묵살당하였다. 1950년 1월 10일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여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 밖에 있다고 밝혔다. 그 당시 한반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한국 전쟁 발발 6일 전의 CIA 보고서에선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저평가되어 있었다.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라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1950년 5월 11일 이승만은 5~6월이 위기이므로 미국의 방위원조가 필요하다고 외신기자회견을 하였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익희, 김성수의 민주당이 24석으로 제1당이 되었다. 210석 중 126석이 무소속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민심 이반, 반민특위 실패로 인한 친일세력 득세, 민족진영 재결합 실패로 인한 민족진영 약화 때문이었다. 1950년 6월 7일 북한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은 38선 인근에 병력을 집결한 첫째 단계가 완성된 이후 '평화통일 호소문'을 발표하여 (북한 총선거가 아닌)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8월 5~8일까지 실시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협의하기 위하여 '남북제정당·사회단체협의회'를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해주나 개성에서 열자고 하였다. 6월 9일 유엔 한국 위원회는 이를 수용하였지만, 이승만 정부는 "모략선전에 속지 말라"고 비난하였다. 유엔 한국 위원회는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다. 1950년 6월 15일 북한은 남한에서 체포된 김삼룡, 이주하와 북한에 연금된 조만식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조만식을 먼저 보내라고 했고 북한은 이를 거부하였다. 1950년 6월 17일 북한의 남북한 동시 총선거 제안에 "남한에서는 다시 선거할 필요도 없고 또 하지도 않을 터"라고 말했다. 그리고 "공산당과 중간당의 합작 운운은 민주주의국가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다만 파괴 도배의 수괴인 김일성과 박헌영도 회개하고 우리 민족의 진정한 정부인 대한민국을 지지 육성하겠다는 실증을 보여준다면 포용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1950년 6월 19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는 전조선 입법기관, 즉 국회통합을 제의하였다. 그런데 이 주장이 있은 1주일 뒤 북한의 남침이 시작됨으로써, 이 모든 제의가 위장평화공세였음이 드러났다. 6월 27일 오후 4시, 국방부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은 특별발표를 하였다. "맥아더 사령부에서 전투사령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이튿날부터는 공군을 위시하여 미군이 참전할 것이고, 국방군이 현 전선을 고수할 것..." (Daily Report, No.124, Korea, June 27 1950, ccc 16(RG 263, Box 330)) 헌데 직후 주민들은 육군사령부가 시흥으로 남하하고, 국군이 남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으나 이 방송을 직접 혹은 알음알음 전해듣고 두려움을 잠재웠다고 한다. 6월 27일 밤 9시, 이승만의 육성 방송이 이루어졌다. "지난 몇 달간 나는 미군의 군사 원조가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나 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한 원조를 실현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적군은 전차, 전투기와 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싸울 것들이 전무한 상황이다. 이 암울한 상황에 직면하여 나는 도쿄와 워싱턴에 연락하여 현 상황을 설명했고, 마침내 나는 오후에 맥아더 장군의 전보(미군참전)를 받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 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며 이는 빠른시일에 도착할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방송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고, 모든 우방국들이 우릴 지지하고 있다. 나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용감한 군경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을 공화국의 충실한 시민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Daily Report, No.125, Korea, June 28 1950, ccc 5(RG 263, Records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DailyReports, 1941-1959, Box 330)) 이는 흔히 와전된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서울은 안전합니다' 등의 내용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후 1시, 4시에 방송된 공보처와 국방부 발표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오후 방송과 연결해서 들은 당시 국민들로서는 서울이 안전하다거나 사수될 거라는 내용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그 직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고 서울이 점령되었다. 이 탓에 국민들은 대통령과 정부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하였다. 이승만 본인이 직접 '안심', '서울사수' 같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이승만 정부가 맥락상 그러한 의미로 해석되는 방송을 송출해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을 기만한 것은 사실이고 최고통수권자로서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다만 흔히 와전된 내용, 즉 이승만이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라고 방송하고는 피신하면서 한강 인도교를 폭파를 지시했다는 것은 거짓이다. 이승만은 그런 식의 방송을 하지 않았고 한강 인도교 폭파도 이승만의 지시가 아니다. 훗날 한국전쟁 휴전 후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 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 북한의 인민의용군 징집과 국군의 보도연맹 학살 (1950) = 1950년 7월 1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은 만 18세부터 36세까지의 주민을 동원 대상으로 하는 '전시동원령'을 선포하였다. 같은 날 인민의용군조직위원회를 설치하고,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훈련소를 설치, 인민의용군 입대자들에 대한 단기군사정치훈련을 시켜 북한군에 편입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북한 노동당도 7월 6일 ‘의용군 초모(招募) 사업에 대하여’라는 결정서를 각급 당조직에 하달하였다. 이 결정서에서는 “의용군은 18세 이상의 청년군으로 하되 빈농 출신의 청년을 많이 끌어 들일 것, 각도에 할당된 징모 수는 책임을 완수할 것, 전 남로당 당원으로서 변절자(국민보도연맹 가입자)도 의무적으로 참가시킬 것” 등을 밝히고 있다. 인민의용군 모집 대상과 모집 방식은 개전 초기에는 주로 출옥한 좌익사범, 지하활동가, 보도연맹원 등을 대상으로 ‘자원’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다가, 7월 2일부터는 일시에 다수의 인원을 모집하기 위해 군중대회, 궐기대회, 신문, 방송, 강연회, 가두연설 등 조직적인 선전과 홍보활동 등을 통한 집단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 북한은 인민의용군 모집을 위해 복구된 당조직과 노동·청년·학생·여성단체들을 총동원했다. 이렇게 징집된 인원은 재교육을 위해 북한으로 보내지는 경우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최전방인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전투병 또는 노무자로 편성되었다 이를 보도연맹 사건이라 한다.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보도연맹원 처형자들의 유해나 유적 발굴조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2009년 11월 26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6·25전쟁 기간에 정부 주도로 국민보도연맹원 4934명을 학살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하였다. 단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 등 민간단체들은 "6만명의 보도원이 학살됐다는 증언과 자료를 확보했으며 실제 희생자 수는 2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군은 곧 서울을 넘어 대구, 부산, 포항 일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피난가지 못한 수많은 서울시민들은 북한군에 의해 강제동원되었는데, 전쟁 후에는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사실에 의해 소위 잔류파로 분류되어 처벌당했다. [[서울 수복 전투|9.28 서울 수복]] 당시 (1950) = 1950년 9월 15일 실시된 인천 상륙 작전 성공 후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였다. 서울시와 경찰은 서울이 완전히 탈환된 28일 낮부터 시정을 재개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공공시설을 급속히 복구하기 시작하였다. 9월 29일 오전 10시 맥아더 사령관과 일행이 도쿄에서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고, 잠시 후 이승만 대통령 일행도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여 함께 서울시내로 향하였다. 수도 서울 환도식은 9월 29일 12시를 기해 거행되었고, 이로써 3개월간 북한의 점령하에 있던 수도 서울은 탈환되었다. 1950년 10월 30일 수복된 평양을 방문하여 열광적인 환영대회에 참가하였다. [[1·4 후퇴]] 당시 (1951) = 중화인민공화국이 궁지에 몰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도와 참전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200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38선 이북의 수복지역에서 부득이 후퇴하였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고, 유엔군은 원산 등의 지역에 폭격을 가하였다. 1951년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5일 38선은 공산군 남침으로 이미 없어졌으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북진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3월 24일 한만국경 진격 전에 정전은 안 된다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1951년 9월 8일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때 대한민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서명국으로서 참가가 좌절되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로 일본의 주권이 회복됨으로써 일본의 오래된 야심이 재발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일본인들은 한국이 또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미국과 그 밖의 지역에 있는 한인 친일분자들은 일본인들의 생각에 맞장구를 칠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전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계를 놀라게 했다. 1월 20일 일본은 평화선 선포를 비난하였다. 2월 12일 미국은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 그는 이를 묵살하였다. 1952년 2월 15일 제1차 한일회담에서 이승만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4조 B항을 근거로 일본에게 8개 항목의 재산청구권 요구를 제기하였다.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발효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한 일본의 군정기가 끝나고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였다. 동시에 맥아더 라인이 무효화되면서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했다. 이어 1952년 10월 14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2호 [http://law.go.kr/lsInfoP.do?lsiSeq=4323 포획심판령]을 제정 공포하고 포획심판소 및 고등포획심판소를 개설하였다. 1951년 11월 19일 이승만은 자유당 창당과 총재직을 수락하였다. 그러자 국회 권력 강화를 위해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하던 민주국민당 등은 강력히 반대하였다. 1952년 1월 13일 이승만이 원외자유당 지지를 선언하자, 원내자유당은 원외자유당과 합동하려는 '자유당 합동파'와 이에 반대하고 민주국민당에 합세한 '자유당 잔류파'로 분열되었다. 1952년 1월 18일 국회는 찬성 14표, 반대 143표로 정부개헌안을 부결시켰다. 이로써 직선제측(원외자유당, 자유당 합동파 등)과 내각제측(민주국민당, 무소속, 자유당 잔류파 등)의 알력이 표면화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정부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관제시위를 획책하기도 하였다. 1952년 4월 25일과 5월 10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이승만 세력이 압승하여 직선제 및 양원제 개헌을 위한 동력을 얻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의 국회조사단장으로 활동하던 민주국민당 서민호가 1952년 4월 25일 대위 서창선(徐昌善)을 살해하는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5월 10일 한격만 검찰총장의 기소사실 발표에 따르면 서민호와 그의 장남 서원룡 등이 전남 순천시내에서 술자리를 갖고 있었는데, 서창선 대위가 우연히 이들을 발견하고 주시하자 서민호측과 시비가 붙었다. 서원룡이 박치기를 하여 서창선 대위의 치아를 부러뜨렸고, 이에 서창선 대위는 "해볼 테면 해보자, 쏜다, 비켜라, 서민호가 나를 때렸지"라며 공포탄을 바닥에 1발 쏘고는 대문 밖으로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주방에 숨어있던 서민호가 떠나던 서창선 대위의 등에 총을 쏴 죽이고선 자신의 범행을 정당방위로 우긴 사건이었다. 그런 서민호를 5월 19일 국회가 석방결의로 풀어주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구실로 1952년 5월 25일 계엄을 선포하였다. 이날 서민호를 포함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야당 의원과 국제구락부 사건 연루 의원 등 총 50여 명이 헌병대에 의해 연행되었다. 직선제측과 내각제측의 갈등이 극심하자 1952년 6월 12일 장택상을 중심으로 한 '신라회'는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 안과, 의원내각제와 국회 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절충한 '발췌개헌안'을 제시하였다. 1952년 6월 25일 이승만은 6.25 전쟁 2주년 기념식에서 유시태에게 암살 당할 뻔했으나 권총 불발로 모면하였다.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민국당원 유시태를 포함해 민주국민당 김시현, 서상일, 노기용, 정용환 등이 체포되었다. 이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민주국민당의 지청천 등 탈당자가 속출하였고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측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1952년 7월 4일 오후 2시, 15명의 발췌개헌안 반대파가 국회에 불출석 하였다. 오후 6시 30분에 이르러서 개헌파 65의원들은 정치의 책임을 논함보다도 □□급을 고하는 현실의 타개에 다른 도리가 없었음인가 드디어 □□수를 피하여 뜻을 굽히고 말았다. 형세가 이에 이르게 되매 아침부터 국회 金의장실에서 숙의를 거듭하고 있던 개헌파(민국·무소속·자유원내파) 65의원들은 하오 6시 반 동 발췌조항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하게 되자 그 순간은 눈물을 흘렸다. 7월 7일 공포되었다. 비상계엄은 7월 28일 해제되었다. 이승만은 서민호에 대한 사형선고를 재심하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에 최초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으며, 대한민국 국민은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뽑게 됐다. 제2차 이승만 정부 (1952~1956) >> 임기 내 각종 행적 6.25 전쟁 중에도 부분적 지방 자치를 실시하는 등의 정책을 폈다.섬네일 참전군인 위문 순찰 중 정일권과 함께]]1954년부터 문해교육 정책, 문맹퇴치 5개년 사업 등을 진행하여 1945년 78%였던 우리나라 문맹률은 1958년 4.1%로 급감했다. 1954년부터 '초등 의무교육완성 6개년 계획'을 실시하고 교육예산 약 80%를 의무교육비에 배정할 정도로 주력했다. 그 결과 초등 의무교육 취학률이 1957년 90%를 넘겼고, 1959년에는 96% 목표를 달성하였다. 1954년 4월 20일, 제1차 교육과정이 제정되었다. 최초로 우리 손으로 만든 국가수준 교육과정 체제를 확립하였다. 1954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을 방문했고 모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도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년 3월에는 자유수호에 힘쓴 공로로 미국 금영자유훈장을 받았다. 1956년 2월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되자, 2월 5일 직접 헌병 총사령부내에 김창룡 중장 피살사건 전담 수사본부 설치를 지시하였다. 2월 21일 국회 연설에서 판사의 월권행위에 유감을 표명했다. 1956년 7월 8일 환율 고수 및 공무원 인력 감원을 단행하였다. 휴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1952~1953) 한국 전쟁이 2년 이상 장기화되고 중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미국 본토에서는 '무의미한 전쟁, 질질 끌지 말고 휴전협정 맺고 빨리 끝내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소련 및 중공과 휴전을 논의한다. 이에 이승만은 1952년 3월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대해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세 가지 정책 대안을 수립했다. 첫째, 에버레디 작전을 통해 이승만을 축출하고 유엔군사령부하의 군사정부를 세우는 방안. 둘째, 유엔군사령부를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방안. 셋째, 한국 정부가 휴전협정을 준수한다는 조건을 걸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방안. 결국 미국 정부는 세번째 대안을 선택했다. 유엔이 합법 정부로 인정한 이승만 정권을 전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3년간 공산화를 막기 위해 크나큰 피해를 감수하며 지켜온 나라를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겨줄 수도 없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한국 정부가 이를 인정하는 즉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임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약속했다. 반공포로 석방 직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일련의 회의를 통해 이승만 제거, 미군철수 등을 포함한 미국의 대응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전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원하지만 한국의 공산화를 방치할 수는 없다는 정책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또한 미국의 적(敵)은 엄연히 공산주의자들이며 이승만은 반공의 선봉에 서 있다는 점에서 미국은 이승만을 저버릴 수 없었다. 결국 미국의 현실적 대안은 예정대로 특사를 파견해 이승만에게 그가 원하던 안보공약을 제공하는 대신 휴전에 대한 한국 정부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된 이후에도 이승만은 북진통일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이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경제적 원조를 확보하기 위해 단독 북진 위협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종결됐으며 미국이 이승만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함에 따라 이승만의 북진 위협은 점차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됐다. 일본의 전통적 팽창주의 야욕에 대한 경계와 미국의 일방적인 친일정책에 대한 이승만의 심각한 우려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닉슨 부통령에게도 여러 차례 전달되었다. 1953년 10월 15일 제3차 한일회담에서 일본의 구보타 간이치로는 '구보타 망언'을 내뱉으며 과거 한국민족에게 저지른 죄악에 대한 반성은커녕 오히려 미군정령(美軍政令)에 의해 소멸된 재한 일본재산에 대해 역청구권(逆請求權)을 주장했다. 이에 회담이 결렬되었다. 1954년 2월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재건시켜야 되겠다는 미국의 정책은 한국민의 마음을 엄청나게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미국정부는 일본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는 한국의 우정어린 경고를 무시하면서, 한국의 입장은 옹호하지 않고 일본의 편만 들어왔다고 비판했다. 1956년 2월 13일 일본의 공산국가들에 대한 타협정책에 경고를 보냈다. 1956년 3월 17일 존 덜레스 미국 국무부 장관이 한국을 방문, 이승만과 통일방안을 협의하였다. 1954년 5월 21일 외신과의 회견에서 한국군의 인도차이나 파병을 제안하였다.(「I.N.S. 통신사에 제공한 성명서」,1954년 5월21일,『담화집』2, 33-36쪽) 6월 미 군사원조프로그램을 검토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밴 플리트 전 미8군 사령관에게 베트남에 국군 3개 사단을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7월 브릭스 주한 미 대사에게 2~3개 사단을 파병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사사오입 개헌]] (1954) 이승만과 자유당은 이승만의 대통령 3선을 노린 제2차 개헌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1954년 5월 6일 제네바 회담에 참석한 6.25 전쟁 참전 16개국 대표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를 해체하고 유엔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남한 측은 이미 1948년에 자유선거가 실시되었으며 나머지 과업은 정권을 참칭하고 있는 북한지역에서 동일한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5월 12일 미국은 로버트 올리버 박사를 통해 이승만을 설득하려 했으나, 이승만은 유엔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맹렬히 반대했고 이에 유엔은 한반도 재선거안을 철회하였다.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3선개헌안에 찬성하는 사람을 후보로 추천하여 다수 당선시켰고, 무소속 의원들도 다수 유인하여 개헌 작업을 진행하였다. 1954년 10월 26일 뉴델리 밀회 사건이 발생하였다. 민주국민당 선전부장 함상훈이 '민주국민당 대표 신익희가 1953년 7월 26일 인도 뉴델리에서 한국전쟁 당시 납북 당한 조소앙을 비밀리에 만나 영세중립화를 꾀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사건으로, 무혐의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는 국내 반공 분위기를 고조시켜서, 개헌을 추진 중이었던 자유당에게 정치적 호재로 작용하였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이러한 국내외 정세를 이용하여 3선개헌안을 작성하였다. 대통령 3선금지조항 폐지, 국무원의 연대 책임제 폐지, 개별 국무원 불신임 인정, 부통령의 대통령 승계권 부여, 그리고 여기에 국민투표제 도입안을 더하여 개헌의 명분과 타당성을 선전하였다. 1954년 11월 27일 국회 비밀투표 결과 재적의원 203명,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가 나왔다. 당시의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는 재적의원의 2/3 이상이었으므로 이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한 충분한 선은 136명이어야 했다(재적의원 2/3는 135.33…명이므로, 자연인은 136명이어야 함). 따라서 당시 사회자였던 국회부의장 최순주는 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은 수학의 4사5입(반올림)을 적용하여 135.33명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0.33이란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반(半)도 안되는 소수점 이하는 삭제하는 것이 이론상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954년 11월 29일 자유당은 의원총회에서 이 안을 채택하여 국회에서 재론하기로 하였고 이에 반발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국회의사당에서 퇴장하였다. 자유당 의원들만 남은 자리에서, 자유당 의원 125명 중 찬성 123명, 반대 2명(김두한, 민관식)으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이를 정부로 이송하여 개헌안을 공표·발효하였다. 사실 사사오입이라는 논리 자체는 오늘날의 헌법에도 적용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은 임신 22주 내외'라고 설정하고 임신부의 자기결정권에 따라 그보다 어린 태아는 죽여도 합법이라는 2019년 헌법재판소의 선고가 있다. 그러나 사사오입 개헌의 경우, 개헌안의 표결 결과에 대한 의장 또는 사회자의 의사 표시가 취소 또는 번복되려면 먼저 타당한 법적 근거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고 또 그 근거에 따라 절차대로 진행돼야 하는데, 그런 근거와 절차가 없었던 당시 법의 허점을 이용해 즉석에서 표결을 번복하였다. 또한 대통령의 지위를 영구적으로 헌법적 보장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이념과 조화될 수가 없다. 이러한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이승만의 압도적 권위 하에 자유당 정권의 독재적 행태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3선 대통령의 뜻을 이루었고, 자유당은 집권 연장의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자유당 내 양심적 의원들이 탈당하면서 점차 당의 정당성과 위력이 붕괴되어 갔다. 반대로 야당세력은 호헌동지회를 설립하면서 한데 뭉쳐 강력한 야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1955)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은 나재하 등 9명이 이종태를 사주해 1955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 때 이승만에 대한 수류탄 암살을 기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된 사건이다. 재판 결과 나재하, 김병호, 민영수, 김재호, 김익중, 유성연, 김동혁에게는 징역 15년형이 선고됐다. 수류탄을 구해준 김재호의 아들 김동훈과 이종태를 포섭했다는 혐의를 받은 이범륜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들은 4.19 혁명 이후 출감되었다. 1955년 10월 14일 대한민국 공보실은 이 사건은 월북한(납북된) 조소앙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훗날 피고인들의 후손들은 이 사건이 육군특무대장 김창룡과 이종태의 함정수사였다고 주장하였다. 제3대 대통령 선거 출마 당시 (1956) 1956년 3월 5일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추대하자 이승만은 "내 나이 이미 팔십이 넘어… 물러가는 것이 옳을 줄로 생각한다"라며 불출마 서한을 전달했다. 그러자 1956년 3월 6일 국민회·대한노총·부인회 등이 궐기대회를 갖고 민의를 전하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서울로 상경했다. 3월 9일 전국 각지에서 측근들과 자유당, 국민회, 애련, 노동조합 등 친위단체들 주최로 '이 대통령 3선 출마 호소 궐기대회'가 열렸다. 3월 11일부터 민의가 전국 각지에서 발동되었다. 영화인, 무대예술인, 댄서도 가만 있지 않았다. 3월 13일 대한노총이 이승만 재출마를 요구하며 정치파업을 하였다. 대한노총에 소속된 우마차조합에서 우마차 800대를 동원하여 소와 말까지 출마를 원하는 우의마의를 이승만에게 알렸다. 이날 이승만은 민의는 글로 써서 해도 된다고 타일렀다. 3월 15일 자유당·국민회·애련·노동조합 등이 합동주최한 이승만·이기붕 재출마 요청 궐기대회가 열렸다. 3월 20일 이승만은 공보실을 통해 민의는 글로 써서 해도 된다는 말을 다시 전달했다. 1956년 3월 23일 이승만은 3백만명 이상이 날인한 탄원서와 혈서가 들어와 할 수 없이 민의에 양보하기로 했다며 입후보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이 담화에서 '대통령 후보 한 사람의 선거 비용으로 백만 환 이상 쓰지 못하도록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3월 25일 공보실을 통해 재출마 결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후의 선거전은 정치공세와 정치음해가 심하였다. 1956년 3월 28일 민주당(1955)은 '이승만 대통령 3선지지 데모는 조작 민의'라는 성명을 냈다. 3년 29일 민주당은 정부통령후보 지명 전국대회에서 민의운동 진상규명을 추진하였다. 1956년 4월 4일 민주당 대통령 입후보자 신익희는 한일회담을 제의하였다. 이에 4월 12일 이승만은 선거자금 외부유입 엄금 및 선거에서 대공협상과 친일 주장 불가를 언명하였다. 4월 6일 야당연합전선 구성이 추진되었다. 4월 13일 야당 연합구성 관련 민주당과 진보당의 성명이 있었다. 4월 16일 진보당의 민주당 공격으로 야당연합은 파국에 직면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4월 25일 야당계 연합전선을 위해 신익희·조봉암 비밀회담이 이루어졌다. 4월 27일 민주당과 진보당은 야당연합 결렬을 선언하였다. 4월 29일 민주당에 중국 통화를 동봉한 괴서한 발송되었다. 그러나 다음날인 4월 30일 서울시경은 민주당 괴서한 사건이 민주당의 중상모략으로 확인되었다고 발표했다. 1956년 5월 2일 이승만은 논산훈련소와 논산, 대선 등 7개 역 플랫폼에서 유세를 벌였다. 그는 역 구내에 가득 모인 군중 앞에서 "일본과 회동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발전케 하겠다든가 또는 공산당과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겠다든가 하는 것은 다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겨도 좋다는 것이고, 또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 류의 언동이다."라고 역설했다. 같은 날 5월 2일 신익희는 한강 백사장에서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일본 지도자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먼저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유세하였고, 이승만과 자유당은 신익희를 친일분자라고 비난하였다. 1956년 5월 5일 신익희는 호남 유세를 다녀오던 중 열차 호남선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이승만은 경쟁자 없이 무난히 3선에 성공하였다. 제3차 이승만 정부 (1956~1960) >> 임기 내 각종 행적 1956년 9월 17일 기자회견에서 야당의 지나친 반정부적 태도를 비난했고, 9월 22일 대통령령으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하였다. 11월 4일 동해안 시찰 도중 이북동포 구출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해 4월 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 1959년 6월 24일 UPI 기자를 면담하고, 기자의 서면질문에 북진통일을 강조했다. 1959년 9월 2일 국무회의에서 학원(학교)에 잡다한 부과금 등을 근절할 것을 지시하였다. 경제 정책 1956년 8월 16일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3기 첫 국무회의에서 군비 증강과 경제 부흥을 강조하였다. 1957년 미국은 개발차관기금(Development Loan Fund)을 설치하여 대한민국 정부, 기업과 개인 사업자가 미국으로부터 낮은 이자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하였고, 1959년 3월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는 시장 경제 원칙 하에서도 국가가 개입하여 사회기반시설을 조성하고 중화학 공업 중심의 자립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목표로 하는 '경제 개발 3개년 계획(1960~1962)'의 초안을 완성했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계획은 전면 중단되었고, 제2공화국에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재수립된다. 1958년 10월 28일 이승만은 에너지를 발전을 위해 핵력(원자력)이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핵력 공학과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계획은 전면 중단되었다. 외교 활동 >> = 대미·대일 외교 = 한국전쟁을 통해 재정적자가 심각해진 미국은 1950년대 중반부터 국방비 감축 및 대외원조 축소 등을 통해 정부 지출을 줄이고자 했다. 1950년대 중반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 및 군사 지원 액수는 1년 평균 10억 달러 안팎이었다. 이 상황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줄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는 한일관계 개선이었다. 대한민국과 일본이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수교하면 일본이 미국 대신 대한민국에 원조할 수 있고 한미일 삼국조약(tripartite treaty)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방안의 하나는 주한 미군 핵무기 배치 후 병력 감축이었다. 1950년대 중반 북한 병력은 약 35만 명이었는데 남한 병력은 두 배가 넘는 72만 명이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로 거대한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미국이 재정 적자를 줄이려면 남한 병력을 감축해야 했다. 파병은 1964년에 가서야 첫 파병군이 지원된다. 12월 12일 CBS 방송국과의 기자회견에서 기자에게 UN군 철수 불가,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을 언명하였다. 미국이 한국군의 감군을 직접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1958년에 가서 이승만은 다시 한번 인도네시아 파병을 제안하고, 비밀리에 우익 반군 지도자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1958년 라오스에서 좌익쿠데타가 일어나 내전이 벌어지자 이승만은 '국군을 파병, 라오스 우익정권을 돕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국방부에 지시하였다. 이에 연합참모본부는 1959년 9월 21일 국군을 파견하여 라오스 왕국 내 공산군을 격퇴한다는 내용의 '라오스 파병계획'을 작성하였다. 파견군 규모는 사단·여단·대대급이 모두 검토대상이었고, 군 수뇌부는 정글작전에 적합하게 파견군의 편제를 구성할 것을 지시했다. 또 해상수송 기동전단과 수송비행대를 만들어 라오스 파견군을 지원토록 했다. 또한 비밀리에 국방부 내의 정보기관인 '79호실' 책임자 이후락을 라오스에 보내어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이후락은 당시 베트남 대사 최덕신의 도움을 받아 푸미 노사반을 만난 결과를 이승만에게 직접 보고했다. 하지만 국군의 라오스 파병은 깊이 있게 검토되다가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59년 6월 8일에는 대한민국 국내에서 열리는 제5차 아시아민족반공대회 대표들을 환영하는 시민대회에 환영과 반공 메시지를 전달했다. 측근들에 의한 고립 1958년 1월 1일 자유당과 민주당은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를 앞두고 서로의 선거전략을 절충한 이른바 협상선거법(協商選擧法)이라고 불리는 선거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3월 8일 이승만은 북한을 비난하며 북한에 납북된 KNA 민간여객기 기체 송환을 요구했다. 한편 이승만의 4선을 원한다며 자유당에서 사람을 고용하여 대통령 선거 출마를 원하는 관제 시위를 주도했다. 허정에 의하면 이승만은 자신이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측근들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그는 자신이 국민의 절대적지지 위에서 민의를 대표하고 있다고 믿었다. 국민과 이승만을 격리시킨 일부 측근들에 의해 그는 현실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1958년 5월 2일 협상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자유당과 민주당은 의도한 대로 압도적 의석을 차지했고, 무소속과 군소정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협상선거법의 언론 규제 조항 삽입은 자유당이 본격적으로 3.15 부정선거를 기획할 수 있도록 기초를 제공했으며, 언론과 국민의 기본권이 규제를 당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1958년 8월 11일 자유당은 국가보안법 개정을 국회에 상정하였다. 야당은 야당 탄압의 수단으로 사용될 법이라고 주장하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여당은 12월 24일 무술 경관을 국회에 투입하여 야당 의원들을 감금하고 국회의사당 정문을 폐쇄시킨 채 여당인 자유당만이 출석한 국회에서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비롯해 1959년 예산안 등 10개 법안 27개 의안을 통과시켰다. 자유당 일파의 속임수를 얄밉게 생각한 이승만의 최측근 윤치영은 일부러 4대 부통령 선거와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이기붕의 표를 갉아먹는다. 윤치영에 의하면 '내가 자유당 사람들의 미움을 산 것은 3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하여 이기붕과 맞서서 결국 장면으로 하여금 당선이 되도록 한 사실이며'라고 밝히기도 했다. 윤치영은 부통령 후보로 나서되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 하고, 이기붕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출마한다고 호언하였다. 이기붕 일파의 행동을 미워한 이승만의 또다른 측근인 이윤영 역시 부통령에 출마한다. '이기붕을 떨구기 위해서'였다. 1959년 이윤영은 나라의 운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승만에 진언을 하러 경무대로 찾아갔다. 이기붕은 사람을 보내 이윤영에게 돈 1억원을 보내드릴 터이니 사퇴하고 자기를 밀어 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윤영은 크게 나무란 후에 되돌려보냈다. 이승만의 하야 권고를 하러 간 허정은 하야 성명을 구술하는 이승만을 문전에서 보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날 이승만은 시위대 대표 5명과 면담 후 하야를 약속하였다. 그 직후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 정부통령 재선거, 이기붕의 공직 사퇴, 국민이 원하면 본인이 책임지겠다'를 약속하였다. 1960년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하였고 즉시 수리되었다.이승만 대통령 하야성명한편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4월 28일 경무대에서 이기붕의 장자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에 의해서 가족들과 함께 타살되었다.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4·19 혁명은 일본의 민중운동인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1960년 4월 28일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에 있을 때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으로부터 위로 편지가 왔다. 이승만은 '정의를 사랑하는 우리 청년학도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라고 답신하였다. 대통령직 하야 이후 >> 미국 망명 (1960)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처음에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허정 과도내각과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은 이승만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망명생활 중이던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렸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3월 17일 박정희는 특별지시를 통해 입국을 거부, 이승만의 귀국을 막는다고 알려졌지만 진실은 아니었다. 3월 18일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다. 이승만은 실어증에 걸려서 고생했다. 영어에 유창했던 이승만은 실어증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의 간호를 받으며 약간의 한글과 한문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 거주지를 정하지 못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는 하와이 한국인 교포단체의 유지인 최백렬(崔伯烈), 오중정(吳重政), 윌버트 최 등의 도움으로 한 빌라에 머무르다가 이승만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하와이의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서거 (1965) 1960년부터 심장병이 있던 그는 트리폴리 육군 병원에 자주 진료하였다. 이승만은 망명생활중 병세가 악화되면서 망명지 하와이에서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시간 0시 35분 (한국 시간 19시 35분) 하와이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심장병으로 운명하였다. 향년 90세였다. 이승만이 남긴 마지막 기도와 유언은 다음과 같다. 장례 서거 직후 데스 마스크를 만든 뒤 유해는 전 주한 미군 사령관 벤프리트 장군이 마련한 특별비행기편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였다.허정 전 국무총리 추도사 전문1965년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효상 국회의장, 조진만 대법원장, 정일권 국무총리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 그밖에 내외 귀빈으로 윤보선, 허정, 장면,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이 김포공항에 나와 이승만의 시신을 영접했다. 허정이 직접 지은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이승만의 시신이 운구되자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박정희 대통령 추도사 전문양자의 의견 조율이 안되자 박정희는 이승만의 유족에게 국민장을 권유하였으나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여 결국 장례는 가족장으로 결정되었다. 시신은 운구차량과 경찰의 호송을 받고 서울 이화장에 안치되었다가 가족장으로 호상기간을 마친 뒤, 1965년 7월 27일 서울특별시 정동교회에서 영결식을 갖고 서울 시가행진 후 국립서울현충원에 도착하였다. 정일권 국무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弔辭)를 대독하는 간단한 영결식을 갖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사상과 신념 >> [[자유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또는 서구식 민주주의(Western democracy)는 고전적 자유주의 원리 하에 대의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형태의 정치 이념 및 통체 체제를 말한다. 이승만은 초지일관 미국을 모델로 한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1904년 6월 29일 국민계몽서인 독립정신의 원고를 완성하였다.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이뤄졌고, 서양의 선진문명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룩할 것을 백성에게 호소한 책이었다. 크게 근대 역사관과 정치관으로 이뤄진 앞부분과 당시 시대상황을 해석한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부분 상당수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대통령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다. 1921년 4월 21일 이승만은 워싱턴 포스트에 '한국인들은 스스로 통치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는데 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일본은 우리 한반도에서 결코 독립운동을 꺾지 못했다. 만약 일본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분쇄시켰다면, 왜 이미 많은 수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한국에 다시 새로운 부대를 보내 병력을 증강하겠는가? 그러나 그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도 일본은 아직 2천만 명의 한국인들을 영원한 노예로 만들지 못했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정당한 경고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위험천만한 프러시아의 군국주의적 정책을 포기하고, 거의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근대적 원칙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디 임정법통론은 일본 제국, 창조파, 개조파, 사회주의자(여운형 등),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 등), 한국민주당(내각책임제) 등으로부터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키기 위한 이승만과 김구의 주된 주장이었다. 김구와 이승만 등 임시정부 계열 우익인사들은 임시정부 수립 초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까지 임정법통론을 제기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패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일본 제국이 망하는 즉시 한국이 일본 제국에게 빼앗긴 주권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미국 등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정식 승인해야 된다는 외교활동을 광복이 올 때까지 계속하였다. 1946년 1월 8일 임시정부는 1941년에 이미 채택, 공포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1948년 6월 7일 제헌 헌법 제정에 관한 논의가 활발할 때 김구는 대통령책임제를 지지하면서, 내각책임제를 거론하는 한국민주당 중심의 국회는 임시정부 법통 계승과 무관함을 시사하였다. "대통령을 군주같이 앉혀놓고 수상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비민주제도일 것이다. 민중이 대통령을 전출한 이상 모든일을 잘하던지 못하던지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일을 하여나가야 할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사리에 맞지않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날 이승만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책임제와 임시정부 계승을 언급하였다. "현재의원 형태(내각책임제)로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고 본다." 1948년 6월 25일 한국민주당이 "헌법초안(내각책임제)을 대체로 지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으나, 제헌 헌법은 대통령책임제를 기초로 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https://www.law.go.kr/%EB%B2%95%EB%A0%B9/%EB%8C%80%ED%95%9C%EB%AF%BC%EA%B5%AD%ED%97%8C%EB%B2%95/(00001,19480717) 대한민국 헌법 제1호](제헌 헌법)에는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명시되었고, 제헌 국회 의장 이승만은 국회개원식 축사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임시정부 계승을 확실히 밝혔다. 1962년 12월 26일 개정된 [https://www.law.go.kr/%EB%B2%95%EB%A0%B9/%EB%8C%80%ED%95%9C%EB%AF%BC%EA%B5%AD%ED%97%8C%EB%B2%95/(00006,19621226) 대한민국 헌법 제6호]에는 제헌 헌법 시기부터 전문에 수록된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부분이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이라고 바뀌었다. 이는 박정희를 위시한 군부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박정희 정부는 그런 한편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크게 선양하였다. 1962년, 1963년, 1968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오늘날 김구 등 우리가 아는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에게 대대적으로 건국훈장을 서훈하였다. 또 한편 박정희 정부가 헌법에서 임정법통론과 관련된 부분을 없애자 1948년 장덕수 피살 사건 이후 임정봉대론을 철회했던 민주당계 정당이 보수계 정당보다 오히려 더 임정법통론(그들 입장에선 임정봉대론)에 적극적이게 되었다. 1987년 10월 29일 개정된 [https://www.law.go.kr/%EB%B2%95%EB%A0%B9/%EB%8C%80%ED%95%9C%EB%AF%BC%EA%B5%AD%ED%97%8C%EB%B2%95 대한민국 헌법 제10호]에는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 부분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이라고 바꾸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직접 명시하였다. 정파,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 이승만은 정당 정치 자체를 파벌싸움이나 일으키는 갈등의 요인으로 해석하였다. 이승만은 정당정치를 조선시대 당파 싸움 개념의 연장선으로 이해하였다. 이승만은 한민당의 영수가 되어달라는 허정의 주장에 대해 '나는 일당 일파의 영수가 아니라 온 국민의 벗이 되고 싶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민족을 단합시켜 한 뜻을 갖고 일하게 하는 것이오. 지금 내가 한 정당에 소속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전민족의 단합이라는 더 큰 일을 버리는 것이오'라고 답했다. 허정은 이러한 정책을 높이 평했다. 반면 이승만의 정당정치 혐오를 두고 신익희와 윤보선 등은 비판을 하였다. 1949년 2월 민주국민당 창당 사실을 이승만에게 알리기 위해 신익희와 김성수는 경무대를 방문했다. 그런데 신익희는 이승만이 창당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자 이를 불쾌히 여긴다. 면담은 오래 걸렸고 그 날 오후에 나왔다. 나온 후 김성수는 차에 오르자 마자 벌레 씹은 우거지상을 하고 말이 없었다. 신익희는 "정당은 무엇 때문에 조직하는 건데 이 어른 정당을 조직했다고 인사온 사람보고 정권에는 도전하지 말라니... 모든 것을 혼자서 도맡아서 두고두고 하시겠다는 말씀이야. 우리들을 아간지(兒看之), 어린아이 보듯 하시는 말씀이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신익희에 의하면 김성수 역시 정당 정치를 비판하는 그의 태도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이승만이 자유당을 창당한 것을 두고도 반응은 엇갈렸다. 신익희는 국회의원들이 간접선거로 하면 당선이 어려우니까 재선을 위해 수를 쓴 것으로 해석하였다. 허정은 귀국 초기의 입장처럼 중립적인 시각을 보이라며 촉구했다. 만사에 직접 개입, 결재 이원순은 이승만이 사소한 것까지 관여, 간섭하면서도 일면 사소한 것은 대강 넘겼다고 했다. 그는 정사의 세부에까지만 관여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행정부의 자세한 사무에는 초연하였고, 원칙상 기본적이고, 전체적인 정책에 주의를 집중하도록 하였다. 이승만, 김구, 유관순, 안창호 등 한민족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평가 >> 긍정적 평가 >> 독립운동가 장면은 "이 박사 밑에 국무총리로서 1년 가까이 지낸 내가 본 그분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았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평생 독립 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對日)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고 평가하였다. 또 '우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만을 보고 그의 전부를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그의 슬기와 용단 만으로도 우남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것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농지개혁법 시행 농지개혁법은 일제 강점기의 봉건적인 지주-소작인 관계의 사회를 자작농-자유인의 사회로 바꾸는 혁명적인 계기로 평가된다.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낡은 요소는 사라지고 지주 대신 자본가가 새로운 경제의 주역으로 급성장하였다. 자기 땅을 일구게 된 농가에서는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춘 미래의 노동자들이 배출됐다. 또한 6.25 전쟁 중 남한에 공산주의가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였다. '토지개혁을 통해 주인의식이 생긴 농민들이 많아져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박헌영 등이 주장하던 '100만 봉기설'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김일영 교수는 "농지를 받은 농민은 이승만의 지지기반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구성원으로 포섭되었다”며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만든 첫째 계기가 농지개혁"이라고 주장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땅을 갖게 된 소작농들은 한국전쟁 동안 북한의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충실히 남을 수 있었다.'라고 평하였다. Students for Liberty(SFL: 자유를 위한 학생들) 한국지부 전계운 대표는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주의를 품으며 자유민주제도를 통한 대한민국의 번영을 꿈꾸었다고 평했다. 민족주의가 한국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인 경제적 자유의 보장을 함으로써 눈부신 번영을 이루어 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부연 설명을 그 평가 다음에 덧붙였다. 문맹 퇴치와 초등 의무교육 도입 문맹을 퇴치하고 국민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했다는 점에 있어서 한국 근현대 교육사에 획을 그었다는 평가가 있다. 1954년부터 문해교육 정책, 문맹퇴치 5개년 사업 등을 진행하여 문맹률을 1945년 78%에서 1958년 4.1%로 급감시켰다. 그는 영어를 제1언어처럼 사용했으며, 심지어 영어로 연설문을 써서 한국어로 번역을 시켰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그는 약간의 독일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부부 간에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오스트리아의 언어인 독일어도 어느 정도 익혔다고 한다. 개신교 보급 역사학자 이주영은 그를 윤치호와 함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개신교와 문명 개화의 연결 고리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대표적 인물로 평가했다. 이주영은 이승만에 대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통치 기간에 모두 135명의 장관과 장관급 부서장을 임명했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절반에 가까운 47.7%였다. 그리고 군대와 감옥에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군목제도와 형목제도를 도입했다”고 말했다. 또 사회 전반의 미성숙으로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개인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자유선거제도의 확립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다고 덧붙였다. 부정적 평가 >> 친일파 등용에 대한 비판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 미수 사건 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고 한다. 노덕술, 이구범, 최운하 등은 일제 강점기부터 고문을 잘해서 출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고 한다. 이승만도 친일파청산 주장은 공산당의 연관성이 긴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역사학자 한영우는 "이러한 이승만의 친일파 포용은 민족문화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남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각종 민간인 피해의 책임 비판론자들은 제주4.3사건, 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발생된 대규모 민간인 피해에 대해 대통령 이승만의 책임을 제기한다. 또한 6.25 전쟁 시기 한강 인도교 폭파, 보도연맹 학살,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 등에도 대통령 이승만의 책임을 제기한다. 1960년 4.19 혁명에서는 어린 초등학생들만으로 구성된 열도 여러 개 만들어져서 시위대 언니 오빠들에게 총을 쏘지 말라며 시가 행진을 하는 행렬에 동참하여 행진을 하였고, 그런 초등학생들에게도 시위 진압 경찰들이 발포를 하여서 다수의 초등학생들도 이승만의 관사 경무대 앞에서 사망하였다. 국가 보안법 남용 1948년 여순사건이 발발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이른바 국가 보안법이 제정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일제시대 독립투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었던 그 악명높은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했다는 사실이다. 1949년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해체하려고 했을때, 국가보안법 제정에 극렬 반대했던 노일환 의원 등 반대파 소장의원 13명을 이 국가 보안법을 통해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했으며, 1949년 한 해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잡아 가둔 사람의 숫자가 12만 명이 넘었다.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라는 비판 1954년 제2차 개헌의 의도가 국익보다는 이승만과 자유당의 사리사욕에 있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개헌안의 표결 결과에 대한 국회의장 또는 사회자의 의사 표시가 취소 또는 번복되려면 먼저 타당한 법적 근거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고 또 그 근거에 따라 절차대로 진행돼야 하는데, 자유당은 그런 근거와 절차가 없었던 당시 법의 허점을 이용해 즉석에서 표결을 번복하였다(의결정족수 135.33석을 135석으로 사사오입 적용). 이에 따라 제2차 개헌은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부정선거의 책임 1958년 1월 1일 자유당과 민주당은 협상선거법을 통과시켰다. 협상선거법의 언론 규제 조항은 위헌 시비가 있었으나 민주당이 이를 묵인함으로써 통과되었다. 1959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 등, 일련의 사건을 일으켜 언론을 탄압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받는다. 외교력 평가 >> 대미국 관계 이승만은 미국을 불신하면서도 강력한 동맹상대로 미국을 지목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에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1905년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대한국 정책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품어왔다. 미국은 비밀리에 대통령 루스벨트가 파견한 윌리엄 태프트 국무장관과 일본 총리 가쓰라가 비밀 회담으로 일본이 한국 점령을 용인하는 대신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을 일본이 침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1940년대에도 임시정부 승인을 미루거나 회피하는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불신은 계속되었고, 한국 전쟁의 원인도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대일본 관계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은 시종일관 반일노선과 경계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대표부를 파견하여 연락을 유지하였고, 이는 이승만 퇴진 후 주일한국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6.25 전쟁 당시 미국에서 일본군의 개입을 천명하자, 이승만은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군이 개입하면 일본군부터 먼저 축출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군 참전을 취소시켰다. 한편 서울이 점령되었을 무렵, 이승만은 일본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도 고려하고 있었다. 1954년 3월 27일에는 국내에 유통중인 일제상품 몰수를 지시했고, 55년 6월 20일에는 일본제품 특혜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한편 일본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국무총리 장택상을 해임시키기도 했다. 대아시아 관계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후원한 중화민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장제스를 방문하여 면담하기도 하였고, 내한한 장제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과도 우호관계를 수립하였고, 응오딘지엠 방한 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친히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의 네루와는 사이가 안 좋았는데, 네루는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다. 네루는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표단인 조병옥의 설득으로 반대에서 기권으로 돌려놓게 되었다. 동시대 인물들에 의한 평가 >> 허정의 평가 1920년대부터 1960년 망명 전까지, 중학교 재학때 기독교청년회 영어학원에서 배우고 이후에도 이승만의 측근으로서 가까이에 있었던 허정에 의하면 이승만은 대단히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었다. 허정은 이승만이 사리에 옳은 말이라면, 누구의 말이라도 수용하는 담박한 면이 있었다고 하였다. '내가 아는 우남은 유순한 호호야(好好爺)였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면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마음씨였고, 자신보다 20~30세 어린 연하자들에게도 반드시 공대를 하며, 사람의 방문을 받을 때엔 꼭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평소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 하여 인사를 받거나,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 존재를 하고 맞인사를 했다. 부정이나 거짓을 보면 육친이라도 용서함이 없는 반면 옳은 일, 곧은 말이면 삼척동자의 말이라도 곧이 듣는 성미였다. 또한 부드럽고 자애롭고 유머 센스가 풍부한 사람이면서도 한번 화를 내면 호랑이처럼 무섭기도 했다"고 했다. 조크를 잘 하기로도 으뜸이었다고 한다. 허정은 이승만이 농담도 잘 하고, 장난도 잘 쳤으며 성격이 유머러스했다고 한다. "그는 근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매우 유머러스한 성품이어서 학관에서는 재치 넘치는 농담으로 학생들을 잘 웃겼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기분이 좋을 때의 일이고 화가 나면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며 "기분이 좋을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성격이 되어 유머를 연발했다"고 한다. 허정은 '그는 주권재민을 앞세우면서도 카리스마적으로 군림하려는 태도가 있었다. "그러나 통일은 내손으로 라는 결코 나무랄 수 없는 그의 고집이 결국 슬픈 결말을 초래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면은 "그분의 성격 소치인지 자존심이 너무 지나쳐 ‘나’ 이외에는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안중에 보이지 않는 양 정치 면에 나타난 그분의 개성은 독재의 전형적인 감을 주었다. 정적을 용서 않고 때로는 고도의 술책과 잔인성을 주저 않고 드러냈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도 비위에 안 맞으면 공포 안하기가 일쑤이며, 그의 유시나 담화가 법률 이상의 위력을 휘둘렀다. 구속된 국회 의원에 대한 석방 결의도 아랑곳없고, 헌법 기관인 참의원, 헌법 위원회, 탄핵 재판소 등도 필요 없다고 구성해 주지 않았다. 장기 집권을 위하여 때로는 비민주적인 방법의 정치 파동도 일으킨 사실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바다"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승만은 신익희의 건의가 끝나자 벌떡 일어서 방안을 빙빙 돌면서 손을 입에 갖다 대고는 훅훅 불면서 "안 돼요,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하고는 국회의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사무원을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는 사환들 까지도 내가 일일이 간섭해야 해요. 그래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 해공은 모르시는 말씀이야."라고 하였다. 신익희는 "우남 대통령 저 어른 큰일났다. 아직도 하와이의 사탕수수 밭에서 노무자로 이민간 무식한 교포들과 비서 몇 사람 데리고 일하시던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니, 앞으로 정형(情形)은 어려워 질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기타 박용만(1924)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장택상은 이승만의 결점으로 "이승만에게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택상과 조병옥은 각각 사석에서, 그리고 자신들의 회고록에 이승만보다는 안창호가 진정한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감인데 일찍 가셨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윤치영에 의하면 '돈암장과 이화장을 출입했던 최기일은 충분히 자기 편으로 만들수 있었으며, 인격자인 김성수와 안재홍 조차 적으로 만든 것은 이승만의 실책'이라고 평가했다. 최기일은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가 손님으로 찾아온 안재홍을 몇번 문전박대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기도 했다. 논란과 의혹 >> 단독정부 수립 정당성 논란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이 한국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는 주장과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민주주의 반공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독재자 여부 논란 허정에 의하면 '우리가 독재라고 부르는 그의 행동이 얼마나 엉성하고, 어설프고, 불철저했던가. 만일 그가 스스로 독재자가 되려고 결심했다면 그는 이렇게 불철저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이 글은 의도가 다분하다) 독재자는 우남과는 다른 유형임을 이제 국민들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심신이 쇠약한 노령에 이르러 행정수반으로서의 과오와 실정을 저지른 바 없지 않았지만 그가 평소에 쌓은 공적과 대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그러나 실질적으로 독재를 하였기에 독재자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윤치영은 이승만이 평소 '부정과 부패를 싫어하고 자유민주주의적 공명선거를 믿고 있었다며 이승만 몰래 자유당 측근들이 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사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보고되자 깜짝 놀라, 그렇다면 학생과 국민이 일어선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며 자진해서 하야한 이박사였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진상이 드러나자 '드디어 이승만은 4월 27일 행동으로 당신의 뜻을 보여주었다.'라며 이승만이 독재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최기일은 이승만이 말년에 잘못된 측근들이 눈과 귀를 가려서 오도했다고 보았다. 최기일은 박정희를 한국 최초의 성공한 쿠테타이자, 한국 최초의 독재자로 보았다. 측근들의 부패와 오도 측근들이 그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설도 있다. 이승만이 돈암장, 이화장에 있을 때부터 비서관이며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윤치영은 이기붕의 수하들이 눈과 귀를 가리고 이박사를 속였다고 진술했다. 윤치영은 '가슴아픈 것은 면종복배판 측근들에 대한 이박사의 심정이었다.'며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에는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을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장면 후보의 집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등교케 했다. '최인규가 각급 행정관서와 경찰, 그리고 지방선거관리위원회에 내린 비밀지령은 이기붕 후보를 필사적으로 당선시키려고 무리를 담고 있었다'며 윤치영은 '이러한 부정선거운동의 양상을 보며 더군다나 장막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의 평소의 소신과 철학대로 민주주의적인 절차가 잘 진행되고 있으려니 하고 믿고 있을 이승만 박사의 처지가 가엾고 통분할 노릇이었다. 허정 역시 이승만이 소인배들의 농간에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음을 은연중에 인식했다고 한다. 윤치영에 의하면 1958년 이승만을 찾아갔을 때 '당신의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는 가운데 뭔가를 암시하는 듯 '철창에 갇힌 호랑이'에 비유해서 혼잣말처럼 독백하시던 일로 미루어 나로서는 여러 가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며 이승만이 뒤늦게 자신이 부하들의 농간에 놀아남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동상 건립 논란 2011년 8월 25일 서울특별시 장충동 자유총연맹 광장에 이승만 동상이 51년만에 건립되었다. 이에 한국자유총연맹 정문 앞 인도에서 사월혁명회·한국전쟁유족회 등 단체들은 동상 제막식 반대 집회를 열었다. 미국의 이승만 제거 음모설 3.15 부정선거 자체를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미국의 계략이라는 주장도 있다. 윤치영은 이박사의 빛나는 독립투쟁의 업적을 이 기회에 일거에 실추시키고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고 있다는 모측의 계획된 공작 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윤치영은 미국 국무성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3.15 부정선거 규탄 데모로부터 변질되어 이승만 박사를 기꺼이 하야하도록 만든 일관된 계략이 있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였다. 윤치영은 '미 국무성의 이승만 제거작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나 안다고 해도 지금에 와서 그 진상을 자세히 밝힌다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윤치영은 1950년대부터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공작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승만이 1919년 초 대한인국민회의 특사로서 파리 강화회담에 참가하기로 했는데 이때 미국으로부터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일본 국적의 서류를 한 개 만든 것이었다. 기타 일화 >> 이승만과 김구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승만과 김구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낙방 후 이승만은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던 중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김구는 젊어서 동학교도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 28세 때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이승만과 김구 모두 우파였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화민국(대만) 노선으로 갔다. 이승만과 김구는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 김구의 말년에 발생한 장덕수 피살 사건 때문에 이승만과 김구가 결별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1948년 3월 8일 김구가 장덕수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정에 출석하자,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이상재는 독립협회와 YMCA에서 그의 활동을 도왔고, 옥중에 있을 때는 이승만이 준 성경을 보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상재는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이승만의 미국 유학비와 생활비를 지원, 후원하였다. 가난한 한인 고학생들이 찾아오면 찾아가서 끼니와 차비와 숙박비도 지불해주었고, 학생들의 학비까지 직접 건네주기도 했다. 서재필이나 김규식은 한국인 고학생을 거절했는데, 자기 좋아서 유학을 왔으면 그만한 고생도 감내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며 거절하였다. 미국, 프랑스, 영국 유학생들에게 용돈과 학비를 부쳐주던 인물은 안창호와 이승만이 유일했다. 이승만과 김일성 이승만은 김일성에 대해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끝이 안 보이는 욕심과 잔악무도한 천성을 이승만은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이승만은 김일성에 대해 말이 절대로 통하지 않는 인물이며 성정이 매우 고약해서 차라리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일성과는 일절 말을 섞지 않으려 했으며 이 때문에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김일성은 이승만에게 무조건적인 적대감만 갖고 있었으며 이승만을 포함한 남한의 정치인들을 전부 다 죽이고 적화통일을 이룩하려는 욕심에만 눈이 멀었다. 그래서 한국전쟁을 일으켜 북한은 남한을 상대로 전면전을 치르게 되었다. 군 견제 정책 한국 전쟁 이후 급격하게 성장한 국군 세력을 이승만은 경계했다. 1954년 5월 정일권 참모총장이 그와 친밀한 사이에 있던 공국진을 육군 헌병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내 부패의 척결과 수사기관 사이의 갈등 해결 등을 주요 과제로 지시했다. 공국진은 이 과제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무한계를 자의로 무시하는 김창룡 특무대장과 잦은 갈등을 빚게 되었고, 김창룡은 이 과정에서 공국진이 탄피를 일본에 밀수출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해임을 기도했다. 소위 경무대 유시를 근거로 하는 김창룡의 공세 앞에 정일권 참모총장도 역부족으로 그가 임명한 헌병사령관의 해임을 명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후 공국진이 강문봉이 군단장으로 있는 2군의 참모장으로 발령되는 것도 김창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창룡은 참모총장 정일권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공국진의 보좌관을 체포, 연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김창룡의 월권행위에 분노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1955년 10월 진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의 전근 내지는 유학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김창룡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하였다. 김창룡은 정일권과 강문봉의 비리에 대한 집중 수사로 이에 대응하였고, 이는 정일권과 강문봉의 김창룡 암살음모와 교사 라는 극단적인 대응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정일권의 비리를 수사하게 했고, 정일권에게는 역으로 김창룡의 비리를 수사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것이다. 이혼 후 박승선은 고아원에서 아이 한 명에게 이은수라는 이름을 주고 입양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호적에 이은수라는 아이가 양자로서 나타나자 1949년 서울지방법원에 '처의 관계부존재확인 판결'을 제기하여 양자 이은수를 파양하였다.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에 의하면 박씨 부인은 진남포에서 사업을 하다 해방 직후 인천으로 내려와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피살되었다. 박씨 부인의 집에 들이닥친 북한군이 '이승만의 본처가 숨어 있다는데 누구냐'고 하자, 박씨 부인은 숨지도 않고 '내다, 어쩔테냐'고 당당하게 말하는 바람에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취향 그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굉장히 대단한 미식가였고, 독서가였고, 재담을 즐기고, 낚시, 테니스, 정원 손질, 개를 데리고 산책하기, 서도 등을 즐겼다. 문화에 나타난 이승만 >> 화폐 속의 이승만 옛날에 사용하던 환화에 그려진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도 처음 발행된 1953년에는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으나, 1957년에 발행된 새 환화의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에 있던 한복은 양복으로 바뀌었다가 1962년에 들어서 돈에서 이승만의 초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이승만이 지역적으로 서북파가 아닌 기호파로 분류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이승만의 지역적 분류(기호파)에 대한 근거를 찾는 질문이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이승만의 지역적 분류와 관련된 문장을 본문에서 추출한다.

    • 그 때문에 그는 지역적으로 서북파 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분류의 원인이 되는 성장 배경 정보를 선별한다.

    •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지역적으로 서북파 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성장 지역인 우수현이 기호파 분류의 근거임을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이승만이 우수현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기호파로 분류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지역적으로 서북파 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해 성장 지역을 명시하여 답변을 작성한다.

    •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이승만이 우수현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서북파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된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이승만이 우수현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서북파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