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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 document_id A22062320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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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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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context)
짐바브웨 공화국 (영어: Republic of Zimbabwe, /zɪmˈbɑːbweɪ, -wi/) (전 로디지아), 혹은 짐바브웨는 남아프리카의 내륙국으로, 잠베지강과 림포포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보츠와나, 잠비아, 그리고 모잠비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짐바브웨의 수도이자 최대도시는 하라레이며, 두번째로 큰 도시는 불라와요이다. 짐바브웨에는 대략 1,4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영어, 쇼나어, 은데벨레어를 포함한 16개의 공용어가 쓰이고 있다. 현재의 짐바브웨 지역은 11세기부터 이주와 교역이 오가는 주요 경유지의 역할을 하였으며, 로즈비 제국과 마트와카지 등 여러 조직화된 국가와 왕국들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1890년, 당시 세실 로즈이 이끌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가 군주국이 있었던 마쇼날랜드를 정복하고, 이어 1893년 제1차 마테벨레 전쟁에서 은데벨레 왕국을 이기며 마타벨렐란드를 정복하며 처음으로 현재 짐바브웨의 경계를 표시하였다. 1923년, 오랫동안 각각 나뉘어 통치되었던 마쇼날랜드와 마타벨렐란드 지역을 백인 식민주의자 세력 주도 하에 하나의 영국 자치령인 남로디지아로 통합하는 안에 대한 국민 투표를 실시했으나, 이는 흑인 원주민들을 제외한 소수의 백인 거주민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1965년, 소수 백인들로 구성된 보수주의 정부는 로디지아로 일방적인 독립 선언을 하였다. 그 이후 로디지아는 국제적인 고립과 15년 동안 흑인 민족주의 세력과의 내전을 겪어야 했고, 이후 보편적 선거권을 명시한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고 1980년 4월 짐바브웨의 공식 출범으로 이어졌다. 짐바브웨는 영연방을 가입했었으나, 2002년 당시 정부의 국제법 위반으로 회원자격을 박탈당하였으며, 2003년 12월 탈퇴하게 되었다. 짐바브웨는 현재 유엔, 남아프리카 개발 공동체, 아프리카 연합, 동남아프리카 공동시장의 회원국이다. 짐바브웨는 한때 크게 번성하였다고 해서 "아프리카의 보석"으로 불리었다. 로버트 무가베는 소수 백인 정권이 물러나고 소속 정당인 ZANU-PF가 선거에서 이겨, 1980년 짐바브웨의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는 1987년부터 2017년 사임할 때까지 짐바브웨의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무가베의 독재 정권 아래, 국가 안보 조직이 짐바브웨를 관리하고 광범위한 인권 침해 행위가 자행되었다. 무가베는 냉전시대의 사회주의 혁명적 문구를 인용하며, 짐바브웨의 경제불안을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탓으로 돌렸다.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무가베를 "만화에서 나올 듯한 전형적인 아프리카 독재자의 대명사"라고 칭했지만, 당시의 아프리카 정치 지도자들은 무가베의 반제국주의 정체성으로 인해 그를 비난하기를 꺼렸다. 짐바브웨는 1990년대 이후 경제 침체를 겪으며 여러 차례의 경제 파탄과 초인플레이션 현상을 겪었다. 2017년 11월 15일, 짐바브웨의 경제 침제와 함께 무가베 정권에 대한 시위가 1년 동안 지속되면서, 무가베는 짐바브웨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가택 연금되었다. 2017년 11월 19일, ZANU-PF는 로버트 무가베를 당 대표에서 해임하고, 에머슨 음낭가과 전 부통령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무가베 대통령은 2017년 11월 21일 탄핵 절차가 마무리되기 전 사표를 제출했다. 2018년 7월 30일 짐바브웨 총선이 시행되었고, 에머슨 음낭가과가 이끄는 ZANU-PF당이 집권 여당이 되었다. 짐바브웨의 제1야당인 MDC 연합을 이끌던 넬슨 차미사는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고 짐바브웨 헌법 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출했다. 법원은 음낭가과의 당선을 확정하며, 무가베에 이어 새로 선출된 대통령이 됐다. <heading>어원 </heading> 짐바브웨는 남로디지아 (1898), 로디지아 (1965), 그리고 짐바브웨 로디지아 (1979)로 알려져 있었다. "짐바브웨"가 처음으로 국가를 지칭하는데 쓰인 것은 1960년 흑인 민족주의자 마이클 마웨마가 주조한 주화이며, 1961년 짐바브웨 국민당이 공식적으로 처음 짐바브웨라는 국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로디지아"는 19세기 말 짐바브웨 지역을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게 한 세실 로즈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에게 그 기원과 함축된 의미가 부적절하다고 인식되었다. 한편 마타벨렐란드의 민족주의자들은 불라와요 남쪽의 마토포 구릉에서 유래한 "마토포스"를 제의하였다. 현재 쇼나어의 원어를 사용한 집단사회는 9세기에 림포포 강 중턱 지역에 처음으로 출현하였으나, 이후 짐바브웨의 고원지대로 이주하였다. 짐바브웨 고원지대는 이후 10세기에 쇼나족 국가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10세기 초에 인도양 연안지역에 아랍 상인들과의 교역이 발달하게 되면서, 11세기에 마붕구브웨 왕국이 발전하는데도 기여하였다. 마붕구브웨 왕국은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현재의 짐바브웨 지역을 장악한 여러 쇼나족 문명들의 선구국가 역할을 하였고, 현재 그레이트 짐바브웨, 마스빙고, 그리고 여러 소도시에 소재한 유적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마붕구브웨 왕국의 주요 유적에서는 그만의 독특한 건석 건축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 포르투갈에서 온 유럽인 탐험가들이 짐바브웨에 도착하였을 당시, 마붕구브웨 왕국은 짐바브웨 지역에서 가장 먼저 무역국가로 발전하고 있는 국가들 중 하나였다. 짐바브웨의 무역국가들은 황금, 상아, 구리 등을 옷감과 유리로 물물교환하는 형태의 교역을 진행하였다. 1300년에서 1600년 사이 짐바브웨 왕국이 마붕구브웨 왕국을 능가하게 되였다. 짐바브웨 왕국은 마붕구브웨 왕국이 세워놓은 석조 문명을 정제하고 확장하여 현재의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을 남겼다. 이후 1450년에서 1760년 사이에 무타파 제국이 짐바브웨 지역을 장악하였다. 무타파 제국은 현재의 짐바브웨를 포함하여 모잠비크 중부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무타파 제국은 '므웨네 무타파', '모노모타파', 그리고 "문후무타파"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었는데, 아랍인과 포트투갈인들에게 제국 내의 전략적 무역로로 잘 알려져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이 무역로를 독차지하기 위해 여러차례 전쟁을 일으켰고, 이는 17세기 초 무타파 제국을 몰락하게 하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1840년, 음질리카지와 은데벨레인들은 남아프리카 지역을 잃게 되면서 현재의 짐바브웨 마타벨렐란드 지역에 영구적으로 정착하게 되면서, 불라와요를 수도로 건설하였다. 음질리카지는 은데벨레의 군사 조직을 연대 부락으로 정비하면서 이후 보어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음질리카지는 1868년에 격렬한 권력 투쟁 도중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인 로벤굴라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heading>식민지 시대와 로디지아 (1888-1964) </heading> 1880년대부터 세실 로즈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와 함께 유럽 개척민들이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888년 로즈는 당시 은데벨레 국왕 로벤굴라에게서 광산 채굴권을 허가받았고, 이후 이 채굴권을 토대로 당시 영국 정부에게 마타벨렐란드와 마쇼날랜드 지배에 대한 칙허장을 요구하였다. 로즈는 1890년 영국 남아프리카 경찰 (British South Africa Police, BSAP)과 파이오니어 칼럼 (Pioneer Column, 유럽인들로 구성)을 마테벨렐란드와 마쇼날랜드에 파견, 솔즈버리 요새 (현재의 하라레)를 건설함으로써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후 1893년과 1894년, 맥심 기관총이 새롭게 도입되면서, BSAP가 은데벨레와의 제1차 마테벨레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로즈는 이후 림포포강과 탕가니카호 사이를 가로지르는 "잠베시아" 지역을 점유하기 위해 추가적인 협상을 진행하였다. 1895년,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는 식민지 건설에 크게 기여한 세실 로즈를 기려 "로디지아"라고 새롭게 지역을 명명하였다. 1898년 잠베지 남부 지역을 공식적으로 "남로디지아"라고 명명하였으며, 이는 이후 다시 "짐바브웨"로 국명을 변경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잠베지 북부 지역은 별도의 관리를 받게 되며 북로디지아 (현재의 잠비아)로 명명되었다. 이후 트란스발 공화국에서 세실 로즈가 개입한 제임슨 습격 (1895년 12월 - 1896년 1월)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은데벨레인들이 종교 지도자 믈리모를 중심으로 백인 정권에 대항하였다. 제2차 마타벨레 전쟁은 1896년 영국 측이 믈리모를 암살하며 마테벨렐란드에서 마무리되었다. 한편 쇼나족 세력은 1897년까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지배에 대항하며 몇차례의 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몇차례의 소요 사태가 발생한 이후, 로즈 정부는 은데벨레인과 쇼나족 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고 토지를 유럽인들을 중심으로 배분하였으며, 이를 위해 많은 토착민들을 원래 거주지에서 쫓아내었다. 1923년 10월 1일, 새로운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선포된 남로디지아의 첫 헌법이 발효되었다. 남로디지아는 새로운 헌법 아래 1922년 실시한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대영 제국의 자치령이 되었다. 20세기 초에 발생한 두번의 세계 대전에서 남로디지아는 인종과 관계없이 모든 국민들이 영국군에서 복무하였다. 남로디지아는 1차와 2차 세계 대전 기간 모두를 포함하여 대영제국에서 영국 본국을 포함해 가장 많은 1인당 기여도를 기록하였다. 1930년 제정된 토지 분배법은 흑인의 토지 소유권을 남로디지아의 일정 지역으로 제한하였고 소수의 백인들에게만 국토 대부분의 토지에 대한 매매를 허가하였다. 토지 분배법 제정은 곧바로 급격한 불평등 심화로 이어졌고, 이후 토지개혁이 빈번히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53년 영국은 남로디지아와 북로디지아, 그리고 니아살랜드 (현재의 말라위)를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으로 통합하였다. 이 조치는 1968년에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같은 해 6월 12일, 미국 상원이 로디지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데 결의하였다. 1979년 8월 1일에서 7일까지 잠비아 루사카에서 개최된 제5차 영연방 회원국 수뇌회담 (Commonwealth Heads of Government Meeting, CHOGM) 직후, 영국 정부는 무조레와, 무가베, 그리고 은코모를 런던의 랭커스터 하우스에서 열리는 헌법 회의에 초청하였다. 당시 회의의 목적은 독립 헌법의 조항에 대한 논의와 합의를 도출하고, 짐바브웨 로디지아가 영국으로부터의 합법적인 독립을 위해 영국 당국의 감시 하에 선거를 진행하는 것이였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 피터 캐링턴이 함께 참여하면서 회의는 1979년 9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47차례의 총회로 계속되었다. 1979년 12월 11일, 로디지아 의회는 로디지아의 영국 식민지로의 회귀에 만장일치하였다. 법안은 이후 상원을 통과하고 대통령의 동의를 받았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 2시경 크리스토퍼 소임스 총독이 도착하면서, 영국은 짐바브웨 로디지아를 남로디지아 보호령으로 공식 발표하였으나, 12월 13일 소임스 총독이 자신의 임기 동안 로디지아와 짐바브웨 로디지아의 국명을 계속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12월 12일 영국이 로디지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해제하였고, 유엔이 12월 16일 잇따라 제재를 해체하며, 12월 21일 유엔 회원국들에게 로디지아에 대한 제재 해제를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잠비아, 모잠비크, 탄자니아, 앙골라 그리고 보츠와나가 12월 22일과 23일에 제재를 해제하였고, 호주 정부는 12월 18일 경제 제재를 제외한 모든 제재를 해제, 12월 21일에는 경제 제재를 해제하였다. 1980년 2월 총선에서 로버트 무가베와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ZANU)이 압승하였다. 찰스 영국 왕세자는 1980년 4월 하라레에서 열린 공식 행사에서 영국 대표로 참석하여, 새롭게 출범한 짐바브웨에 공식적으로 독립을 승인하였다. <heading>짐바브웨의 독립 이후 (1980-현재) </heading> 짐바브웨의 독립 직후 카난 바나나가 초대 대통령으로 부임하였으나 당시 대통령의 역할은 국가 원수로서의 의례만을 담당하였다. 한편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합 (Zimbabewe African National Union, ZANU) 대표 로버트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첫 총리이자 행정수반으로 부임하였다. <heading>구쿠라훈디 대학살 (1983-87) </heading> 짐바브웨 마테벨렐란드 지역에서 무가베 정권의 출범을 쇼나족의 정권 탈취로 바라보게 되며 반정부주의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후 마타벨레란드 지역에서 은데벨레인들과 쇼나족간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이는 '구쿠라훈디' (쇼나어: "'봄비가 내리기 전에 일찍 겨를 씻어내는 비'") 대학살로 이어졌다. 짐바브웨 총리가 직접 보고를 받으며 북한의 군사훈련을 받은 정예부대인 짐바브웨 제5여단은 마타벨렐란드에 진입하여 수천명의 민간인들을 "반체제 인사"들을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학살하였다. 5년 동안 지속된 구쿠라훈디 작전 동안 사망자 수가 3,750명에서 80,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외의 또다른 수천명들이 군 수용소에서 고문받았다. 무가베와 ZANU-PF당은 1990년 3월 총선에서 120석 중 117석을 차지하였다. 1990년대부터 학생, 노동조합, 그리고 노동자들이 무가베 정권과 ZANU-PF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커지며 시위가 잦아졌다. 1996년, 공무원, 간호사, 그리고 의사들이 봉급 문제로 파업을 시작했다. 잇따라 짐바브웨 국민의 전반적인 건강이 현저한 변화를 보였고; 1997년에는 전체 인구의 25%가 당시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유행하였던 HIV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 토지 재분배 문제도 다시 한번 ZANU-PF 정권의 주요 국정 과제로 떠올랐다. 1980년대부터 토지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해왔으나, 여전히 전체 인구의 0.6%가 짐바브웨 전체 농지의 70%를 차지하였다. 2000년, 무가베 정권은 토지를 소수 백인 인구에게서 대다수의 흑인 인구로 재분배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토지를 매입하는 패스트트랙 토지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다. 백인 소유의 농지를 몰수하고, 가뭄이 지속되며, 외부금융과 기타 지원이 크게 감소하면서 짐바브웨의 주요한 수출품이었던 농산물의 생산량도 크게 감소하였다. 2003년, 짐바브웨의 경제가 붕괴되었다. 당시 짐바브웨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1,100만여명의 인구가 짐바브웨를 떠났다. 한편 짐바브웨에 남은 3/4의 인구는 하루에 미국 달러 $1보다도 적은 돈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2005년 짐바브웨 총선 직후, 짐바브웨 정부는 "무람밧스비나 작전"을 시행하였다. 이 작전은 짐바브웨의 도시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불법 시장과 빈민가 문제를 해결하는 일환이였으나, 작전으로 인해 도시의 상당한 인구가 무주택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짐바브웨 정부는 이 작전을 짐바브웨 국민들에게 양질의 거주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시도라 표현하였으나, 국제앰네스티 등과 같은 단체들은 당국이 이와 같은 주장을 제대로 입증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2008년 3월 29일, 짐바브웨는 총선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함께 실시하였다. 선거결과는 2주동안 보류되었는데, 이는 당시 민주변화운동 - 창기라이 (Movement for Democratic Change - Tsvangirai, MDC-T) 정당이 짐바브웨 의회에서 1석 차이로 과반수를 차지하였다고 알려진 이후에 발생한 조치였다. 2008년 7월 10일, 러시아와 중국은 영국과 미국이 함께 발의한 유엔 짐바브웨 제재에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당시 미국이 작성한 결의안에는 무가베 정권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 남아프리카 그리고 리비아 등의 국가들은 짐바브웨에 대해 '국제 평화와 안전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당시 위원회의 15개국 중 9개국이 이에 반대하였다. 2008년 짐바브웨는 콜레라 사망자가 500명에 달하기 시작하면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짐바브웨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인근 국가들로 퍼지기 시작했다. WHO는 짐바브웨 콜레라 사태의 근본원인은 훼손된 배관 시설의 박테리아이며, 물을 통해 전염되고 있다고 밝혔다. 2008년 말, 짐바브웨는 열악한 생활조건, 공중보건 (12월에 발생한 콜레라 유행), 그리고 여러 기초적인 문제에서 위기상황을 겪었다. 또한 짐바브웨의 식량부족 문제가 대두되자, 비정부단체들이 정부를 대신하여 짐바브웨에 식량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2008년 9월, 창기라이와 무가베 대통령과의 권력 분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전직 총리가 계속하여 총리직을 역임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양측의 소속 정당간의 의견 차이로, 합의 내용은 2009년 2월 13일까지 완전히 이행되지 않았다. 2010년 12월 즈음, 무가베는 "서방의 제재"가 해제되지 않으면 짐바브웨의 모든 민간 소유 회사들을 강제 몰수할 것이라 밝혔다. 2011년 프리덤 하우스의 조사에 따르면 짐바브웨는 권력 분담의 합의가 이루어진 후 국민들의 생활조건이 개선되었다고 한다. 유엔 인도주의 업무 조정국은 2012-2013 연간 계획서에서 "2009년 이후 짐바브웨의 인도주의 상황이 크게 개선되었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정한 상황이다"라고 밝혔다. 2013년 1월 17일, 당시 짐바브웨 부통령 존 은코모가 하라레 세인트 앤 병원에서 78세의 나이로 암으로 사망하였다. 2013년 짐바브웨 국민선거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는 내용의 새로운 헌법이 통과되었다. 무가베는 2013년 열린 짐바브웨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당시 이코노미스트는 "조작된",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도둑맞은" 선거라 표현하였다. 한편 민주변화운동은 대규모 조작 가능성을 제기하며 법원을 통해 이를 호소했다. 한편 2014년 12월 열린 ZANU-PF 당 회의에서 무가베 대통령이 연설 도중 실수로 야당이 2008년 선거 당시 73%를 득표한 사실을 밝혀 논란이 일었다. 무가베와 ZANU-PF 정권은 재집권 이후 일당제를 재도입하고 공무원 수를 2배로 늘렸다. 2016년 7월 짐바브웨의 경제 붕괴를 두고 전국적인 시위가 열렸고, 당시 재무부 장관은 "현재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시인하였다. 2017년 11월, 당시 짐바브웨 부통령 에머슨 음낭가과가 해임된 직후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무가베를 가택연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군부는 자신들의 행동이 쿠데타가 아니라고 부인하였다. 유엔세계식량계획에 따르면, 최근 짐바브웨가 겪은 여러 차례의 가뭄에 의해 200만 명의 인구가 기아 상태에 직면하고 있다고 한다. <heading>행정 구역 >> 경제 </heading> 2008년 미화 1달러에 대한 짐바브웨 달러화의 가치는 무려 200억 달러이다. 이렇게 화폐가치가 워낙 빠른 속도로 떨어지다 보니 지폐에 올 해 말까지만 사용하도록 유통기간을 표시할 정도이며, 또한 짐바브웨 정부는 돈을 한꺼번에 찾지 못하도록 하루 인출 금액을 1000억 짐바브웨 달러(미화로 5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로 제한하고 있다. 이렇게 화폐가치가 땅에 떨어지면서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연평균 물가 상승률이 220만%에 이르렀다. 2009년 9월 24일(한국 시각), KBS 뉴스 보도에 따르면 짐바브웨 정부는 자국의 화폐(짐바브웨 달러)를 없애고 미국과 유럽 등지의 다른 나라 화폐를 통용시킴으로써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폐만이 통용되고 있어 거스름돈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으며, 농촌 지역에서는 화폐 사용 대신에 물물교환이 거래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주요 공산품 가격이 여전히 주변 국가들의 3~4배에 달하는 상황이어서 안정이 깨질 것처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짐바브웨 정부는 불편하긴 해도 짐바브웨 내의 경제가 제 궤도에 오를 때까지 자체 화폐 사용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짐바브웨 정부는 당분간 자국의 화폐를 대신하여 US 달러로 화폐를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짐바브웨 달러화의 가치는 수직하강을 하고 있기 때문으로, 2010년에는 달걀 한개가 3500억 짐바브웨 달러, 즉 1조 짐바브웨 달러로 달걀 3개조차 구매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015년 6월 11일(현지시간) 짐바브웨 준비은행은 자국의 화폐를 폐지하고 미화로 교체한다고 밝혔다. 3경5000조 짐바브웨달러가 미국 1달러로 교체된다. 현재 짐바브웨의 새 통화는 RTGS 달러로 대체되면서 기존의 미국 달러, 유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랜드, 보츠와나 풀라, 나미비아 달러, 영국 파운드, 오스트레일리아 달러, 인도 루피, 일본 엔, 런민비, 대한민국 원, 러시아 루블, 스위스 프랑 등 여러 통화가 짐바브웨 달러의 대체 통화들을 이용해야 하는 불편을 안긴 적이 있었다. <heading>지리 </heading> 짐바브웨는 남아프리카에 자리잡은 내륙국이며 남쪽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서쪽으로 보츠와나, 북서쪽으로 잠비아, 동쪽으로 모잠비크와 접한다. 또한 나미비아는 짐바브웨랑 서쪽에서 딱 한 부분 만난다. 북서쪽 국경은 잠베지 강으로 나뉜다. 짐바브웨의 가장 높은 곳은 냥가니 산(Mount Nyangani)이며 해발 2,592 m이다. 동쪽 부분에는 냥가니 국립 공원이 있다. 가장 낮은 곳은 룬데 강, 사베 강과 접한다. 빅토리아 호수는 가장 중요한 관광지이다. 강수가 불규칙적인 탓에 가뭄이 잦으며 폭풍과 같은 기상 피해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heading>환경 문제 </heading> 가장 중요한 환경 문제는 무분별한 삼림 채벌으로 인한 토양 침식과 화전민으로 인한 대기 오염, 수질 오염 등이 있다. 또한 짐바브웨 일대에서 가장 많은 개체수를 누렸던 검은코뿔소가 사냥으로 인해 개체 수가 급감하면서 이 또한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외에도 광물 채취와 이에 대한 대책 부재로 폐기물이 처리되지 않고 방치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heading>기후 </heading> 국토의 대다수가 열대기후이지만 고도차이가 나서 기후가 달라지기도 한다. 11월에서 3월까지가 우기로서 비가 잦다. 짐바브웨 국토의 대다수가 고원 지대이고 이 고원에도 고도 차이가 나다보니 산 지대 인근에는 비가 많이 오는 경향이 나타나며 동쪽 지대에 그래도 비가 잦은 편이다. 짐바브웨는 전국이 사바나로 덮여 있고 이 나라의 별명은 '동물의 왕국'이다. 이렇게 짐바브웨가 동물의 왕국이다 보니, 많은 동물학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heading>사람과 언어 </heading> 2000년 2월의 헌법안의 4조 1항에 보면 "공용어는 영어, 쇼나어, 은데벨레어, 벤다어, 남뱌어, 샹간어, 칼랑가어, 수투어, 퉁가어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동조 2항에 보면 "영어는 기록 언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위 헌법안은 2000년 2월 12일과 13일에 걸쳐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54.68%가 반대하여 부결되었다. 현행 헌법은 일부 수정을 하여 2005년 9월 14일에부터 효력이 발생한 것인데 위 2000년 헌법안에 포함된 언어에 관한 4조는 폐기되었다. 다만,‘판사의 자격’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는 82조와 87조에 “영어는 하나의 공식어다.”는 규정만 있을 뿐이다. <heading>문화 >> 종교 </heading> 짐바브웨는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기독교, 이슬람, 전통종교를 믿고 있다. 짐바브웨 기독교 교파로는 개신교(최대교단 짐바브웨 하느님의 성회), 짐바브웨 성공회(남아프리카 성공회에 속해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 아프리카 토착 기독교(아프리카 사도교회)가 있으며, 전 종교인의 61.7%가 기독교인이다.이슬람은 인도사람과 렘바족이 믿고 있으며, 전 종교인의 1.6%를 차지한다. 전통종교는 전 종교인의 32.6%가 믿는다. <heading>대한관계 </heading> 로디지아로 독립한 후 이 나라는 국제적으로 제재 대상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이 나라를 승인하지 않았다. 1980년 짐바브웨가 건국되면서 대한민국은 곧바로 짐바브웨를 승인하였으나, 이 나라는 곧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만 수교하고 대한민국과의 외교관계는 수립하지 않았다. 총리와 대통령이던 로버트 무가베는 1980년대에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하는 등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계속하여 대한민국과의 수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민국과는 경제·문화 교류를 하였으며, 1988년 서울 올림픽에도 참여하였다. 양국은 수교 이전부터 비교적 활발한 무역 거래를 하였으며, 1994년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짐바브웨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1995년 주 짐바브웨 대사관을 개설하였으나, 북한은 1998년 주 짐바브웨 대사관을 폐쇄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꾸준히 증가되어 2006년 한국 교민 127명, 체류자 70명이다. <heading>스포츠 </heading> 축구는 짐바브웨에서 가장 인기있는 종목이다. 국가대표팀은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에 세 차례 진출했고, COSAFA 컵에서 네 차례, CECAFA 컵에서는 한 차례 우승한 이력이 있다. 올림픽 수영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커스티 코벤트리가 이 나라 출신이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짐바브웨의 건국 초기 로버트 무가베와 카난 바나나의 역할은 각각 어떻게 다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짐바브웨 독립 직후의 두 인물인 카난 바나나와 로버트 무가베의 역할 차이를 비교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카난 바나나와 로버트 무가베에 관한 정보를 본문에서 추출한다.

    • 짐바브웨의 독립 직후 카난 바나나가 초대 대통령으로 부임하였으나 당시 대통령의 역할은 국가 원수로서의 의례만을 담당하였다.
    • 한편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합 (Zimbabewe African National Union, ZANU) 대표 로버트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첫 총리이자 행정수반으로 부임하였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두 인물의 구체적인 직책과 역할 범위를 선별한다.

    • 카난 바나나가 초대 대통령으로 부임하였으나 당시 대통령의 역할은 국가 원수로서의 의례만을 담당
    • 로버트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첫 총리이자 행정수반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의례적 역할(대통령)과 실질적 행정 역할(총리/행정수반)의 차이를 대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카난 바나나는 의례적 국가 원수였고, 무가베는 실질적인 행정수반이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 카난 바나나가 초대 대통령으로 부임하였으나 당시 대통령의 역할은 국가 원수로서의 의례만을 담당하였다.
    • 로버트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첫 총리이자 행정수반으로 부임하였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두 인물의 역할 차이를 명확히 기술하여 답변을 작성한다.

    • 카난 바나나가 초대 대통령으로 부임하였으나 당시 대통령의 역할은 국가 원수로서의 의례만을 담당하였다. 한편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합 (Zimbabewe African National Union, ZANU) 대표 로버트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첫 총리이자 행정수반으로 부임하였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짐바브웨 독립 직후 카난 바나나는 초대 대통령으로 부임하였으나 국가 원수로서의 의례적인 역할만을 담당하였고, 로버트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첫 총리로서 행정수반의 역할을 맡았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짐바브웨 독립 직후 카난 바나나는 의례적인 역할의 초대 대통령을 맡았고, 로버트 무가베는 행정수반인 첫 총리로 부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