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리버풀 출신. 청소년기 피아노, 기타, 작곡을 독학하였고, 재즈 연주자인 아버지와 리틀 리처드, 버디 홀리 등 로큰롤 가수들에 영향을 받았다. 1957년 밴드 쿼리멘의 멤버가 됨으로써 커리어를 시작하였으며 1960년 이 밴드는 비틀즈로 발전한다. 별칭은 '귀여운 비틀(the cute Beatle)'. 비틀즈 활동 후기 런던의 아방가르드를 접하고 비틀즈의 정규앨범에 실험적 미학을 결합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967년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부터는 비틀즈의 사실상의 리더가 되어 그 음악과 영화 프로젝트에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매카트니가 비틀즈 시기 작곡한 〈And I Love Her〉, 〈Yesterday〉, 〈Eleanor Rigby〉, 〈Blackbird〉 따위는 가장 많이 커버된 노래의 명단에도 실린다.
비틀즈 해산 이후 1970년 앨범 McCartney의 발표와 함께 솔로 아티스트로 데뷔하였으며 부인 린다, 데니 레인과 밴드 윙스를 결성하였다. 매카트니의 리드에 따라 윙스는 70년대 가장 성공한 밴드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한 다스가 넘어가게 톱 10 싱글 및 앨범을 배출하였다. 1980년 솔로 커리어를 재개하여 89년까지 솔로 아티스트로서 투어를 돌았다. 윙스 없이도 영미 1위 히트곡으로 〈Uncle Albert/Admiral Halsey〉(린다 합작), 〈Coming Up〉, 〈Pipes of Peace〉, 〈Ebony and Ivory〉(스티비 원더 합작), 〈Say Say Say〉(마이클 잭슨 합작) 따위를 배출하였다. 음악 방면 외에서는 여러 국제적 자선단체의 홍보에 힘쓰고 있으며 동물권, 물개 사냥, 지뢰, 채식주의, 빈곤, 음악 교육 따위 주제에서 그 활동은 두드러진다.
빌보드 핫 100 정상에 단독, 공동 작곡한 곡을 총 32개 올려놓았으며 2009년 기준으로 미국에서 2,550만 장의 판매기록을 RIAA에서 인증받았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비틀즈로서 그리고 솔로 아티스트로서 2회 헌액되었으며, 1965년 대영제국훈장을 수훈하였으며 1997년 음악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최하위 훈작사에 임명되었다. 2020년 기준으로 그의 부는 8억 파운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heading>어린 시절 </heading>
매카트니는 1942년 6월 18일 리버풀의 월튼 구역에 자리한 월튼 병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메리 패트리샤(Mary Patricia)는 이곳에서 유자격 간호사로서 일하고 있었다. 아버지 제임스 "짐" 매카트니(James "Jim" McCartney)는 당시가 제2차 세계대전 중인지라 자원 소방수로 일하러 가는 바람에 매카트니의 태어나던 모습을 보지 못했다.p=75 매카트니에게는 피터 마이클이라고 하는 남동생과 아버지가 재혼하여 얻은 여동생 루스가 있었다. 가톨릭을 믿은 어머니를 따라 폴과 마이클 모두 세례를 받았으나 아버지가 신교도에서 불가지론자로 전향하여 종교의 큰 영향없이 자라났다.
매카트니의 전기작가 피터 아메스 칼린에 따르면 매카트니의 부모는 "노동자계급의 최하층" 출신이었으나, 그 생애 동안 다소의 계층이동을 경험해 보았다 한다. 전전 영국에서 짐은 목화를 파는 회사 A. Hannay and Co.에서 판매원으로 일하였으나 전쟁이 발발하자 회사는 문을 닫고 짐은 대신 네피어에서 선반공으로 일하였다. 밤에는 자원하여 소방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가족이 늘자 노슬리에 있는 플랫으로 이사하였고, 1946년 다시금 스피크에 있는 공영주택으로 옮겼다. 전후 짐은 목화 판매원으로 복직하였으나 임금은 줄은 상태였다. 메리가 방문 조산사로서 벌어들이는 돈이 더 많을 정도였다. 1953년 90명 가운데 3명만 통과한 11플러스 시험에 합격하여 그래머 스쿨인 리버풀 인스티튜트에 다니게 되었다. 1954년 스피크의 교외집에서 출발하는 버스에서 학우 조지 해리슨을 만났다. 둘은 빠르게 친해졌다. 매카트니는 후일 말하기를 "저는 그를 깔보듯 말하고는 했는데 그가 저보다 한 살 어렸기 때문이에요."라 했다.
매카트니의 아버지는 1920년대 짐 맥이 이끄는 재즈 밴드에서 트럼펫과 피아노를 맡아본 바 있었다. 그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거실에 두어 아들이 음악적으로 고무되게 하고 피아노 연습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매카트니는 귀동냥으로 연습하기를 선호했다.pp=22–23{{refn|group=nb|짐 매카트니의 아버지는 E플랫 투바를 연주했다.
매카트니의 아버지는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곡의 베이스 파트를 집어줄 수 있었으며 자주 아들을 현지의 브레스 밴드 콘서트에 데려다주곤 했다.pp=23–24}} 매카트니가 11살이 된 해 아버지가 리버풀 카데드랄 성가대 오디션을 보기를 권하였으나, 매카트니는 거절하였다. 대신 모즐리 힐의 성 바나바 교회의 성가대에 참가하였다. 14살 생일 때 매카트니는 니켈도금된 트럼펫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라디오 룩셈부르크로 인하여 로큰롤이 유행하자, 노래를 부르면서 연주하고 싶어 15 파운드짜리 프라무스 제니스(모델 17) 어쿠스틱 기타랑 교환하였다. 막상 기타를 잡아 보니 오른손잡이용 기타였던지라 자신이 연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후 슬림 휘트먼의 광고지에서 휘트먼이 왼손잡이용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현의 순서를 반대로 갈아끼웠다.p=21 제니스 기타를 사용하여 매카트니는 자신의 처녀곡 〈I Lost My Little Girl〉을 작곡하였다. 또한 피아노로는 훗날 〈When I'm Sixty-Four〉이 되는 소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리틀 리처드야말로 어린 시절 그의 우상이었다. 버틀리 파일리 휴가캠프의 장기자랑대회에서 이루어진 그의 첫 대중공연에서 노래한 곡이 〈Long Tall Sally〉였던 것이다.
<heading>1960–1970: 비틀즈 </heading>
1961년 섯클리프가 비틀즈를 탈퇴하고 매카트니가 억지 춘향으로 베이스 자리를 맡게 되었다. 함부르크 체류 당시 영국의 가수 토니 토니 셰리던의 싱글 〈My Bonnie〉의 배킹 밴드로서 처음 프로페셔널한 녹음을 하게 되었으며 그 명의는 더 비트 브라더스(the Beat Brothers)였다.pp=249–251 이것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엡스타인은 1962년 1월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어 차후 그들의 성장과 성공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pp=84–88 링고 스타가 8월 피트 베스트를 대체하게 되었으며, 10월 첫 히트곡 〈Love Me Do〉를 발표, 1963년 비틀즈는 영국에서 유명해졌으며 이듬해 미국에서도 그러했다. 히스테리 상태가 된 팬들을 일러 '비틀마니아'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했으며, 언론은 매카트니를 일러서 '귀여운 비틀'이라고 불렀다.pp=350–351}} 매카트니는 존 레논과 함께 많은 초기 히트곡들을 배출하였으며 그 예로는 〈I Saw Her Standing There〉, 〈She Loves You〉, 〈I Want to Hold Your Hand〉, 〈Can't Buy Me Love〉가 있다.
1966년 11월부터 시작된 앨범의 녹음 세션에서 밴드는 실험적 태도를 취한다.p=232 수록곡 〈A Day in the Life〉의 녹음에서는 40인조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었는데 이것은 마틴과 매카트니가 번갈아가며 지휘했다. 이 세션에서 두 곡이 만들어져 1967년 2월 더블 A사이드 싱글 〈Strawberry Fields Forever〉/〈Penny Lane〉으로 발표되었으며 6월 정규앨범이 그 뒤를 이었다.pp=350–351pp=161–162}} 매카트니가 그린 잉크 스케치를 기반으로 앨범의 재킷은 팝 아티스트 피터 블레이크와 잰 하워스가 콜라주 디자인하였다. 비틀즈가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의 코스튬을 입고 많은 유명인들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담아냈다. 이 앨범 커버는 사람들의 분석욕을 크게 자극하였다.
<heading>1970–1981: 윙스 </heading>
비틀즈가 1969-70년 해산되면서 매카트니는 우울증에 빠져들어갔다. 부인 린다는 그런 매카트니에게 그의 작곡을 칭찬하고 또 계속 곡을 쓰고 녹음하도록 설득함으로써 그 기분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왔다. 비틀즈가 해산되던 때 쓴 〈Maybe I'm Amazed〉가 그녀 덕에 쓰였다고 매카트니는 설명한다. "그게 내 진심이었어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놀라고 있나 봐 ... 나는 하나의 남자고, 당신은 나를 건져줄 단 하나의 여자인가 봐. 내가 이해하도록 도와주지 않겠어? ... 나를 그 시간에서 빼내주고 내 손을 잡아준 데 대해, 그리고 당신이 정말로 필요하다는 감정에 놀라나 봐."라고. 또 "모든 사랑 노래는 린다에 바치는 것이었다."고 매카트니는 부연한다.
1970년 매카트니는 첫 솔로 앨범 McCartney를 발표함으로써 음악 커리어를 계속 이어나갔다. 이 앨범은 미국에서 1위를 달성했다. 린다가 보컬에 일부 참여한 것을 제외하자면 McCartney는 원맨 앨범으로서 매카트니가 작곡에서 연주, 보컬까지 전부 다 했다.McCartney는 영국에서 2위를 달성했으며 차트에서는 32주간 머물렀다. 1971년 두 번째 솔로 앨범 Ram에서는 린다와 드러머 데니 세이웰과 합작하였다. 영국에서 1위 미국에서 5위 성적이었다. 또한 미국 1위 싱글 〈Uncle Albert/Admiral Halsey〉가 여기서 배출되었다. 이해 말 전 무디 블루스 기타리스트 데니 레인이 매카트니와 세이웰에 합류하여 밴드 윙스가 결성된다. 매카트니는 윙스의 결성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윙스는 참으로 어려웠던 아이디어였습니다 ... 어느 그룹이 되었든 [비틀즈의] 성공을 이어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 제가 그 입장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렇지만 계속 진행할 건가 그만둘 건가의 기로에 섰을 때 저는 그만두기에는 음악을 너무 사랑했던 거예요."p=7윙스의 첫 앨범 Wild Life는 미국에서 톱 10을, 영국에서 톱 20을 달성했다. 영국 차트에서 9주를 머물렀다. 1971년 9월 딸 스텔라가 태어난다. 이름은 린다의 할머니 이름에서 따온 것.
Band on the Run을 뒤로하고 각각 1975년과 1976년 발표되어 차트 1위를 달성해낸 Venus and Mars, Wings at the Speed of Sound로써 윙스는 성공을 이어나간다.Wings at the Speed of Sound는 영국에서 최고 2위, 차트에서 35주 머물렀다. NME에서는 이 앨범을 차트 1위로 쳐줬다. 이 앨범은 미국에서 세 개 차트에서 1위를 달성해냈다. 1975년 14개월에 걸쳐 윙스 오버 더 월드 투어를 개시, 영국, 호주, 유럽, 미국을 두루 돌아다녔다. 이 투어에서 매카트니는 처음으로 비틀즈 해산 이래 비틀즈 노래를 라이브로 윙스와 공연했으며 2시간짜리 세트리스트에서 〈I've Just Seen a Face〉, 〈Yesterday〉, 〈Blackbird〉, 〈Lady Madonna〉, 〈The Long and Winding Road〉 이렇게 다섯 곡이 선택되었다. 이후 두 번째 유럽 투어와 런던에서의 대규모 리허설을 마무리하고 윙스는 미국 아레나 투어에 착수, 미국 1위 라이브 트리플 앨범 Wings over America를 배출해낸다.
1978년 앨범 London Town으로 윙스는 계속하여 성공 가도를 걷는다. 미국과 영국에서 톱 5에 들었으며 수록곡 〈With a Little Luck〉이 미국에서 1위에 올랐다. 다만 평론가의 평은 좋지 못했으며 폴 매카트니 자신도 실망스럽다는 평가였다.pp=122–125p=79}} 1979년 앨범 Back to the Egg에서 매카트니는 '로케스타'라고 이름한 록 슈퍼그룹을 조직하여 두 트랙에 동원해 썼다. 이 밴드에는 피트 타운젠드, 데이비드 길모어, 게리 브루커, 존 폴 존스, 존 본햄 등이 있었다. 플래티넘까지 따낸 앨범이었으나 평론가의 평가는 사뭇 박했다. 1979년 윙스에 있어 마지막이 되는 투어를 다녀온다. 영국에서 20회 공연을 펼쳤으며 비틀즈 노래 〈Got to Get You into My Life〉, 〈The Fool on the Hill〉, 〈Let it Be〉가 라이브 데뷔하였다.
1994년부터 매카트니는 해리슨, 스타, 마틴과 애플의 비틀즈 앤솔로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자 솔로 커리어를 4년간 접게 된다. 1995년 매카트니 자신이 "와이드스크린 라디오"라고 표현한 라디오 시리즈 Oobu Joobu를 미국 방송사 웨스트우드 원에서 진행하였다.pp=218–219 같은 해 웨일스 공 찰스가 왕립음악대학의 명예회원자격을 수여하였다. 매카트니의 소감은 "악보조차 읽을 줄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좀 놀라운 일"이라고.
<heading>2000–2009 </heading>
2000년 슈퍼 퓨리 애니멀스와 유스와 일렉트로니카 앨범 Liverpool Sound Collage를 발표했다. 1960년대 중반 매카트니가 매료된 바 있던 사운드 콜라주와 구체음악 기술을 사용한 것이었다.pp=528–529 동년 클래식, 합창음악 앨범 A Garland for Linda의 수록곡 〈Nova〉에 참여, 돌아간 자신의 아내를 추모하였다.
매카트니는 JFK 공항 타맥에서 9·11 테러를 목격했다. 매카트니는 이에 더 콘서트 포 뉴 욕 시티를 주도하여 조직케 된다. 11월에 나온 정규앨범 Driving Rain에 수록된 〈Freedom〉은 이 공격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담은 것이다.p=255}} 이듬해 매카트니는 러스티 앤더슨, 브라이언 레이를 기타, 폴 "윅스" 위켄스를 키보드, 아베 라보리엘 2세를 드럼으로 하여 밴드를 얼러 투어에 나섰다. 2002년 4월 시작된 드라이빙 월드 투어는 미국, 멕시코, 일본 등을 거쳐 진행되었다. 이 공연의 결과물이 더블 라이블 앨범 Back in the US으로, 전세계적으로는 2003년 Back in the World으로 발매되었다.pp=517–518Back in the US는 미국에서 8위, Back in the World는 영국에서 5위를 차지했다.p=512}} 투어의 총수익은 1억 2,620달러로 추산되며 하룻밤에 평균 2백만 달러를 번 것으로 계산된다. 빌보드는 이를 올해의 톱 투어로 선정했다. 이 투어에서 이루어진 라인업은 쭉 계속되었으며 브라이언 레이, 러스티 앤더슨, 아베 라보니엘 2세, 윅스 위켄스와 같이 공연한 시간이 비틀즈와 공연한 시간보다 많을 정도가 되었다.
<heading>2010–현재 </heading>
2010년 매카트니는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의 콘솔 에너지 센터의 개장식에서 무대를 열었다. 1990년 구 시빅 아레나가 매카트의 수송적 필요를 충족지 못한다고 판단된 이래 피츠버그에서의 첫 콘서트였다.2010년 아이튠스가 비틀즈의 정규앨범 전집과 Past Masters, 1962–1966, 1967–1970를 공개하여 비틀즈를 중대한 클래식 록 아티스트 가운데 디지털 시장에 그 음악을 판매하게 된 아티스트의 후발주자로 만들었다. 2011년 7월에는 신 양키 스타디움에서 2회의 전좌석 매진 콘서트를 진행하였다. 뉴욕 타임스의 첫 콘서트에 대한 비평기사에 따르면 매카트니는 "작별을 고하지 않으면서 스타디움을 돌며 마라톤같은 콘서트를 열고 있었다." 한다. 매카트니는 뉴욕시티 발래단의 주문을 받아 2011년 9월 춤을 위한 곡으로는 처음이 되는 음악을 발표했으며 피터 마틴스와 협력한 것으로 앨범명은 Ocean's Kingdom이다. 같은 해 낸시 쉬벨과 결혼하였다. 2012년 2월 스탠더드 곡 모음집 Kisses on the Bottom를 발표. 동월 국립 녹음 예술 및 과학 아카데미에서 올해의 뮤지캐어스 인물로 선정하였다. 제54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공연하기 이틀 전 일이었다.
매카트니의 인기는 아직도 대단하다. 5월 멕시코 시티에서 100,000명이 운집한 2회의 공연에서는 6백만 달러를 벌어들였다.2012년 5월 8일 매카트니의 밴드는 멕시코 시티에서 37개곡을 공연했으며 그중 23곡이 비틀즈 노래였다. 2012년 6월 버킹엄궁에서 열린 엘리자베스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 콘서트를 〈Let It Be〉, 〈Live and Let Die〉 등을 불러 닫았다. 2012년 7월 27일 2012 하계 올림픽의 오프닝 세레모니 때는 〈The End〉와 〈Hey Jude〉를 불렀으며 종결부에서는 관중을 불러모아 같이 불렀다. 매카트니는 올림픽 조직위원회로부터 1 파운드밖에 받아가지 않았다.
2012년 12월 12일 매카트니는 너바나의 전 멤버(크리스 노보셀릭, 데이브 그롤, 게스트 멤버 팻 스미어)와 함께 12-12-12: 더 콘서트 포 샌디 렐리프에서 마지막 공연을 장식했으며, 전세계에서 20억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를 지켜보았다. 2013년 8월 매카트니는 곧 나올 신보 New의 타이틀 트랙을 선공개하였으며 앨범의 정식 발표는 2013년 10월 이루어졌다. 2014년 1월 27일 에드 설리번 시어터에서 프라임타임 엔터테인먼트 스페셜을 촬영하였으며, 이는 2014년 2월 9일 CBS에서 방영되었다. 이 방송은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를 초청하여 비틀즈의 유산과 그들의 전설적인 1964년 에드 설리번 쇼에서의 공연을 기리는 목적에서 만들어졌으며 제목은 더 나이트 댓 채인지드 아메리카: 어 그래미 살루트 투 더 비틀스(The Night That Changed America: A Grammy Salute to The Beatles)이다. 비틀즈의 22개곡을 여러 아티스트가 돌아가며 불렀으며 매카트니와 스타도 참여했다.
2014년 5월 바이러스에 걸려 전좌석 매진된 일본 투어 및 10월에 에정된 미국 투어를 취소하였다. 2014년 7월 5일 뉴욕시 올버니에서 쾌차한 모습으로 3시간 공연을 소화해냈다. 2014년 8월 14일 샌프란시스코 캔들스틱 파크에서 공연장이 철거되기 전 마지막 콘서트를 베풀어주었다. 이곳은 1966년 비틀즈가 마지막 콘서트를 했던 바로 그 장소이다. 2014년 비디오 게임 데스티니의 엔딩 곡으로서 〈Hope for the Future〉를 쓰고 불렀다. 2014년 11월 다종다양한 아티스트들이 매카트니의 솔로곡과 비틀즈 시절의 곡들을 커버해놓은 42개곡 트리뷰트 앨범 The Art of McCartney가 발표되었다. 동년 12월 31일 미국 래퍼 카녜이 웨스트와 같이 작업한 〈Only One〉을 발표하였다. 2015년 1월 매카트니는 웨스트와 바베이도스 가수 리한나와 공동 작업한 싱글 〈FourFiveSeconds〉를 발표하였다. 그 뮤직 비디오가 역시 1월에 공개되었으며, 2015년 2월 8일 제57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라이브로 공연되었다. 2015년 웨스트의 싱글 〈All Day〉에서 테오필루스 런던과 애런 킹덤과 함께 참여했다.
2020년 12월 18일 18번째 솔로 앨범 McCartney III이 캐피틀 레코드를 통해 발표되었다. 이 앨범을 "재해석하고, 리믹스하고, 또 커버한" McCartney III Imagined이 2021년 4월 16일 발표되었다.
<heading>어릴 적의 영향받음 </heading>
매카트니는 리틀 리처드를 자신의 아이돌로 삼았으며 그의 팔세토 발성은 매카트니 자신의 보컬 기법에도 영향을 주었다.p=33 매카트니는 〈I'm Down〉을 리틀 리처드를 흉내낼 수단으로서 삼아 썼다고도 했다. 1971년 매카트니는 홀리의 전곡에 대한 출반권을 매입했다. 1976년에는 홀리의 40번째 생일이 되던 날 영국에서 매년 열릴 '버디 홀리 위크'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이 행사에는 유명 음악인들의 게스트 공연과 작곡 경연대회, 사생대회, 크리케츠 본인들의 스페셜한 공연 이벤트가 마련되어 있다.
<heading>통기타 </heading>
매카트니는 통기타를 연주할 때 대개 플랫피크를 이용하지만 핑거피킹의 요소를 사용할 때도 있다.p=22 비틀즈 음악에서 매카트니가 통기타를 연주한 트랙의 예로는 〈Yesterday〉, 〈I'm Looking Through You〉, 〈Michelle〉, 〈Blackbird〉, 〈I Will〉, 〈Mother Nature's Son〉, 〈Rocky Raccoon〉 따위가 있다. 매카트니는 〈Blackbird〉를 콕 집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 했으며, 자신의 기타 파트에 대한 기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제게는 [핑거피킹]을 연주하는 사도(邪道)적 방법이 따로 있답니다 ... 사실은 두 현을 한번에 당겨요 .. 포크 가수들을 모방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지요."p=22 매카트니는 그와 비슷한 기술을 〈Jenny Wren〉에서 보여준 바 있다.p=79 통기타 녹음에서는 주로 에피폰 텍산을 쓰지만 마틴 D-28을 쓸 때도 있다.
이런 기타들 외에도 매카트니는 다양한 전기 기타를 보유하고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펜더 에스콰이어와 그 후속 모델인 펜더 텔레캐스터를 선호하며 후자는 1970년대 윙스의 선버스트 엔딩 때 사용했다. 레어한 암페그 댄 암스트롱 플렉시 기타를 소유하고도 있으며, 이것은 이 기타에서 유일한 왼손잡이용이다. 〈Helen Wheels〉의 뮤직 비디오에서 들고 나왔다.
<heading>보컬 </heading>
매카트니는 벨트의 강하고 다양하고 폭넓은 음역대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네 옥타브에 걸쳐 있다. 매카트니는 롤링 스톤 역대 최고의 가수에서 11위에 등재되었으며, NME 독자 투표의 가장 위대한 가수에서는 8위를 기록하였다. 또한 뮤직 레이더 투표의 '역대 최고의 리드 싱어 30인'에서는 10위에 등재되었다. 매카트니의 보컬에 영향을 받았다는 유명인물 가운데에는 크리스 코넬, 빌리 조엘, 스티븐 타일러, 브래드 델프, 액슬 로즈 등이 존재한다.
매카트니의 보컬은 그 커리어를 지나는 동안 많은 음악 장르를 거쳐왔다. 〈Call Me Back Again〉에서는 베니테스에 따르면 "매카트니는 블루스스러운 솔로 보컬리스트로 반짝이고 있다" 하며, 맥도널드는 〈I'm Down〉을 "매카트니의 보컬과 스타일리스틱한 다양함으로 채색된" "로큰롤 클래식"이라고 일컬었다. 맥도널드는 〈Helter Skelter〉를 헤비 메탈의 초기 시도로서 보았으며 〈Hey Jude〉에 대하여는 "팝/록의 하이브리드"라면서, 매카트니의 "가스펠 스타일의 멜리스마의 사용"과 "페이드아웃에서의 가짜 솔 비명"이 존재함을 지적하였다. 베니테스는 〈Hope of Deliverance〉와 〈Put It There〉를 매카트니의 포크 음악에 대한 시도로서 보았으며, 음악학연구자 월터 에버렛은 〈When I'm Sixty-Four〉와 〈Honey Pie〉를 보드빌의 시도로서 보았다. 맥도널드는 비틀즈의 12마디 블루스 〈She's a Woman〉의 "스윙잉 비트"를 "지금껏 그들이 만들어낸 가장 익스트림한 사운드"라고 추켜세웠다. 또한 매카트니의 보컬은 "상한치까지 그의 흉성성역을 쥐어짜내 금방이라도 갈라질 것만 같다"고 평했다.pp=133–134 맥도널드는 〈I've Got a Feeling〉의 보컬에 대하여는 "팔팔하고 영혼이 담긴" 보컬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선정적인 중간 템포의 로커"라 묘사했으며, 〈Back in the U.S.S.R.〉을 "[비틀즈의] 마지막 업템포 로커"라 하며, 매카트니의 "벨팅" 보컬은 〈Drive My Car〉 이래 3년만에 최고라고 했다.
매카트니는 클래시컬한 보컬도 많이 건드렸다. 비틀즈에서 〈Besame Mucho〉를 부른 것도 그의 일환. 비틀즈 이후의 커리어에서도 다양한 음악, 보컬 스타일의 실험은 계속되었다. 피치포크의 제이슨 그린은 〈Monkberry Moon Delight〉를 두고 "완전히 혼란한 보컬 테이크로서 폴은 당신의 내이(內耳) 바로 옆에서 꿀꺽거리고 엉엉거린다"며 "톰 웨이츠 공연의 현대판일는지 모른다." 덧붙였다.
<heading>건반 >> 드럼 </heading>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노래 〈Back in the U.S.S.R.〉, 〈Dear Prudence〉, 〈Martha My Dear〉, 〈Wild Honey Pie〉, 〈The Ballad of John and Yoko〉에서 드럼을 연주하였다. 아울러 자신의 솔로 앨범 McCartney, McCartney II, McCartney III에서 전 드럼 파트를 혼자 연주하였으며, 윙스의 Band on the Run에서도 그러했다. 솔로 앨범 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에서는 다는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파트를 자신이 연주했다. 그 밖에 매카트니가 드럼으로 참여한 곡에는 1968년 폴 존스 버전의 〈And the Sun Will Shine〉, 스티브 밀러 밴드의 1969년 노래 〈Celebration Song〉과 〈My Dark Hour〉, 푸 파이터스의 2017년 앨범 Concrete and Gold의 수록곡 〈Sunday Rain〉이 있다.
<heading>테이프 루프 </heading>
1960년대 중엽 아티스트 친구 존 던바의 런던의 플랫에 매카트니가 찾아와 곧 여자친구로 발전하는 제인 애셔의 집에서 가져온 테이프로 편집을 했다. 이들은 매카트니에 의한 다양한 곡들, 음악작품, 말소리 등을 믹싱했다. 딕 제임스가 이를 데모로 만들어주었다.pp=217–218 미국의 아방가르드 음악인 존 케이지에 크게 영향을 받아 매카트니는 목소리, 기타, 봉고를 브레넬 테이프 레코더로 테이프 루프를 만들거나 다양한 루프를 잘라 이었다. 그는 완성된 작품을 일컬어 "일렉트로닉 교향곡"이라 했다.pp=219–220 매카트니는 테이프를 되감거나 속도를 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하여 다양한 효과를 창조해냈으며, 이 기법은 나중에 비틀즈 노래 〈Tomorrow Never Knows〉와 〈The Fool on the Hill〉에 쓰이게 된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비틀즈 활동 후기 시절 폴 매카트니가 비틀즈의 정규앨범에 기여한 음악적 의의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
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비틀즈 후기 활동 중 폴 매카트니가 앨범에 기여한 핵심적인 음악적 역할과 의의를 파악해야 한다.
-
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본문에서 비틀즈 후기 활동 및 실험적 미학에 관한 내용을 추출한다.
- 비틀즈 활동 후기 런던의 아방가르드를 접하고 비틀즈의 정규앨범에 실험적 미학을 결합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
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매카트니의 공헌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을 선택한다.
- 비틀즈의 정규앨범에 실험적 미학을 결합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
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런던 아방가르드 접촉이 실험적 미학 결합으로 이어졌음을 연결한다.
- 비틀즈 활동 후기 런던의 아방가르드를 접하고 비틀즈의 정규앨범에 실험적 미학을 결합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
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매카트니는 런던의 아방가르드를 접한 후 비틀즈의 정규앨범에 실험적 미학을 결합하는 데 큰 공헌을 한다.
- 비틀즈의 정규앨범에 실험적 미학을 결합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
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문맥에 근거하여 서술형으로 답변을 작성한다.
- 비틀즈 활동 후기 런던의 아방가르드를 접하고 비틀즈의 정규앨범에 실험적 미학을 결합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활동 후기 런던의 아방가르드를 접한 후, 비틀즈의 정규앨범에 실험적 미학을 결합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활동 후기 런던의 아방가르드를 접하고 비틀즈의 정규앨범에 실험적 미학을 결합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