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 이순신(李舜臣)이 임진왜란 7년(1592년 ~ 1598년) 동안 군중에서 쓴 일기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76호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일기 7책과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까지 총 9권이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3년 6월 18일 광주에서 열린 '제11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의 권고를 유네스코가 받아들여,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개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서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수군을 지휘해 한산도, 명량 등지에서 왜병을 격퇴하고 전란의 전세를 조선의 승리로 이끌어, 사후 조선 조정으로부터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받았던 여해(汝諧)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13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선조 31년(1598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6일)까지의 2,539일간의 군중에서의 생활과 전란의 정세에 대해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일기이다.
난중일기라는 제목은 조선 정조 19년(1795년) 왕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서 처음 붙여졌다. 원래 제목은 연도별로 임진일기(壬辰日記), 계사일기(癸巳日記) 등으로 일기가 다루는 해의 간지를 붙여 표기하였다. 현존하는 난중일기의 판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친필 원본은 초서로 되어 있으며, 이충무공전서 편찬과 함께 원본 일기의 초서를 정자(正字)로 탈서(脫草)한 전서본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전서본은 친필 원본을 탈서편집한 것이나, 원본 일기에 빠진 부분(을미년 일기의 경우 전서본에만 존재)을 담고 있어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전서본과 친필본을 합본하여 난중일기초를 간행하였다.
7년 간의 전쟁 동안 출정한 낱, 이순신 본인이 항명죄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있던 시기에는 일기를 쓰지 못한 경우가 있었으나, 날짜마다 간지 및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내용은 시취(時趣)에 넘치는 일상생활, 동료 · 친척과의 왕래 교섭, 사가(私家)의 일, 수군(水軍)의 통제에 관한 비책(秘策), 충성과 강개의 기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식구와 관련된 내용은 물론,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간의 갈등문제를 비롯해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료(史料)이다.
내용 >> 두 개의 정유일기
난중일기에서 명량해전이 있었던 해인 정유년(1597년)의 일기는 두 개의 사본이 존재한다. 모두 이순신 본인이 쓴 것으로 정유년 4월 1일부터 10월 28일까지 쓴 제5책(전 27매)와 정유년 8월 5일부터 이듬해 무술년 1월 4일까지의 일을 기록한 제6책(전 20매)의 사본이다. 정유년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의 일기가 중복되어 있는데 양자를 비교하면 제5책에서 간지의 착오가, 제6책에서 기사의 상세한 확충이 확인된다. 김경수는 이에 대해 이순신이 처음 쓴 정유년 일기의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고 시간의 여유를 틈타 이순신이 기억을 더듬어 다시 쓴 것으로 추정하였다. 명량해전을 치르던 날인 9월 16일의 일기는 난중일기 분량 가운데서도 가장 긴 분량의 일기이기도 하다.
왜장 마다시(馬多時)
정유일기(丁酉日記) 후권(後券) 음력 9월 16일자에 기록된 명량 해전의 날, 12척의 배를 이끌고 울돌목에서 300여 척에 달하는 일본 함대와 맞닥뜨려 적선의 31척을 부수고 일본 함대를 격퇴하는 전승을 거둔 이순신에게 항왜 준사(俊沙)가 바다에 떠다니던 왜장의 시체를 가리켜 "저기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은 놈, 안골진(安骨鎭)의 적장 마다시라는 자입니다."라고 보고했고, 이순신은 사부 김돌손(金乭孫)을 시켜 마다시를 갈쿠리로 건져올려 재차 준사에게 확인시킨 뒤, 마다시의 시체를 토막내어 적 앞에 보임으로써 적의 기세를 꺾었다고 적고 있다.
안골포에서 항복한 항왜인 준사가 알아보고 이순신에게 가리켰다는 왜장 마다시에 대해서는, 정유재란 당시 구루시마 수군을 거느리고 참전했으나 울돌목에서 전사한 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라고 알려져 왔으나, 양국임진실기(両国壬辰実記)의 찬자 야마자키 히사나가(山崎尚長)는 각주에서 아와지섬을 중심으로 활약한 또 다른 수군 세력인 간 씨(菅氏)의 간 헤이에몬(菅平右衛門)의 자제 가운데 마타시로(又四郎)라는 통칭으로 불렸던 간 마사카게(菅正陰)를 마다시로 거론하고 있다.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 또한 울돌목에서 죽었고 '마타시로'와 '마다시'의 일본어 독음도 서로 같다는 점이 주요 근거로, 징비록을 일역하기도 한 재일 사학자인 박종명(朴鐘鳴)도 이 설을 지지하였다. 일본측 자료로 명량 해전 당시 일본 수군 장수의 한 명이었던 도도 다카토라의 행장 기록인 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에는 "선봉에 섰던 배들이 적선에 당해 부서진 것이 몹시 많았다. 그 와중에 구루시마 이즈모노도노(来島出雲殿) 도 전사(討死)하였다."고 적고 있다.
주변 인물들에 대한 평가
이순신은 일기 속에서 자신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남기고 있다.
전장에서의 독서
난중일기 속에는 이순신이 전쟁 가운데, 혹은 전쟁 전에 읽었던 책에 대한 언급도 있다. 정유일기 말미에 이순신은 중국의 역사책 송사(宋史)를 읽고 느낀 소감을 적어두었고, 역사 속의 인물의 행적을 되새기며 구국에 대한 충정을 다시금 상기한다. 이순신의 오랜 지우인 류성룡이 보내준 증손전수방략(增損戦守方略)에 대해 "수전과 육전, 화공법에 대한 전술을 일일이 설명한 참으로 만고에 뛰어난 이론" 이라며 칭찬하고, 한국의 옛 역사를 읽고 개탄스럽게 느낀 자신의 생각을 일기에 적기도 했다.
또한 갑오일기말미에서는 '난도(難逃)',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재가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인재가 없으니 배를 더욱 늘리고 무기를 만들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外無匡扶之柱石 內無決策之棟樑 增蓋舟船 繕治器械 令彼不得安 我取其逸)'와 같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속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확인되어, 이순신이 일찍 삼국지연의를 접하고 읽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정유일기에는 백의종군 도중 한산도의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지원하기 위해 마침 남쪽으로 내려온 박천군수(博川郡守) 류해(柳海)로부터, 과천의 좌수(座首) 안홍제(安弘濟)라는 인물이 죄도 없이 억울하게 관에 잡혀가 여러 차례 형장을 맞아 거의 죽을 지경이 다 되었는데 말과 스무 살 된 계집종을 뇌물로 바치고 풀려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라 안팎에서 뇌물의 많고 적음을 갖고 죄의 경중을 정한다고 기가 막혀 하며 "이런 게 백 전의 돈이 죽은 혼도 살린다"(一陌金錢便返魂)는 것인가 하고 한탄하였는데, 이 구절은 명(明)의 구우가 지은 전등신화(剪燈新話)에 실린 '영호생명몽록' 중 내용의 부분이다. 류해는 이순신을 만난 다음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배설 및 가리포첨사에게 보내는 이순신의 문안 편지를 갖고 승평(순천)을 거쳐 한산으로 갔고, 두 달 뒤인 7월 16일 새벽,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거제 앞바다의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난중일기의 사본 및 간본
난중일기의 대표적 사본과 간본은 이순신 본인이 초서로 쓴 친필 원본과, 친필본을 토대로 조선 정조대에 초서를 정서하는 작업을 통해 정리한 전서본이 있다. 1932년 원본과 전서본의 내용을 합친 형태의 간본이 조선사편수회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빠졌던 부분과 누락된 부분이 계속해 이후 발견되면서 내용에 대한 추가 연구와 번역이 이루어졌다.
친필본
전서본 일기가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하는 것과 달리 친필본은 5월 1일부터 시작하고 있다. 전문 7권 8책으로 군중에서의 일과를 비롯해 조정에 바치는 장계와 등본, 별책, 부록 등이 초서로 적혀 있다.
임진년에서 계사년, 정유년 일기는 일기의 양이 일정하지 않고, 갑오년에서 병신년의 일기는 비교적 일정하다. 긴박한 상황에서 심하게 흘려 적은 것으로 삭제에 수정을 반복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판독이 어려울 정도로 흘려쓴 초서 글씨들은 전서본 등 후대 활자본에서도 해당 부분의 오독 내지 탈자가 확인되기도 한다. 난중일기를 연구한 노승석은 필기 상태가 유난히 심하고 훼손된 부분이 많은 것에서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파직에 투옥, 백의종군에 이어 모친상까지 당하는 악순환 속에 있었던 이순신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런 만큼 이순신의 감정을 가장 자연스럽고 온전한 형태로 전하는 일기로써의 성격을 제대로 간직한 간본이라 할 수 있다.
전서본
조선 정조는 재위 12년(1788년), "우리 나라를 재건하게 한 큰 은혜를 길이 생각하고 충무공 이순신의 공업을 표창하고자 한다"며, 이순신의 사적을 모아 내각에 내려 전서를 편찬하고 활자로 인쇄되는 대로 한 본을 삼도수군통제사 본영이 있던 통영의 충렬사에 간직해두고 제사지낼 것을 명했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이순신의 보고서, 진중에서 남긴 7년간의 일기와 시문 등 이순신의 행적과 관련 기록에 정조 본인이 이순신을 추모해 쓴 글이 더해졌다. 간행은 윤행임과 유득공 등이 맡았으며, 초서로 쓰여 있던 친필본 일기의 내용을 정자체로 바꾸고 판각하는 탈초 작업이 이때 처음 이루어졌으며, 흔히 알려진 난중일기라는 제목도 이때 처음 붙여졌다.
이충무공전서는 초간본을 비롯해 후대에 이르기까지 총 6차례 간행되었고, 내용은 간본 모두 동일하다. 이충무공전서권5에서 권8에 해당하는, 이른바 전서본 난중일기의 내용은 날짜면에서 친필본보다 많으며, 총 7년 2,539일의 분량 가운데 1,593일의 기록이 실려 있고 946일은 누락되어 있다. 친필본에 실려있던 내용 상당수가 생략된 한편으로 친필본에 없는 을미년 일기 전문과 임진년 정월 초하루에서 4월 22일, 무술년 10월 8일부터 12일, 11월 8일부터 17일까지의 일기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난중일기의 정본을 제작하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난중일기초
1935년 12월 20일 경성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판독한 판본을 일본인이 경영하던 지카자와 인쇄부(近澤印刷部)에서 간행된 간본이다. 조선사료총간제6에 '난중일기초 임진장초'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는데, 그 이전인 1928년 5월에 이순신에 관한 유물 일체의 촬영은 조선사편수회에서 모두 마친 상태였으며 1934년 연차계획안 속의 사료총간목록 속에서 난중일기 초본과 임진장초(활판)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친필본과 전서본의 내용을 합치되, 친필본의 형태와 체재를 그대로 살려 날짜별로 나열, 친필본에서 마멸,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미상기호로 처리하였다. 수정된 내용은 오른편에 빠짐없이 표시하고, 관련 내용은 위에, 인명과 지명은 옆에 주석을 달아 놓았다. 후대 연구자들은 이 난중일기초를 가장 대표적 전범으로 삼았으며, 비교적 완벽에 가깝게 편집된 간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이전인 1916년, 조선연구회(朝鮮研究会)의 주간을 맡고 있던 아오야나기 난메이(靑柳南冥)가 전서본 난중일기를 토대로 일본어 해석과 함께 원문화역대조 이순신전집(原文和譯對照 李舜臣全集)에 수록한 간본이 존재하나, 이는 임진년 정월 초하루부터 을미년 5월 29일까지의 일부 내용만을 실은 발췌본이었다(이듬해 난중일기에 현토를 단 난중일기장이 이순신전집에 실려 간행됨).
충무공유사본 일기초
이순신의 집안인 덕수 이씨 집안에는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라는 이름의 문헌이 전해져 왔다. 저자도 확실하지 않은 이 문헌은 이순신 집안과 관계있는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며,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서 초록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제목이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 알려지기도 했다. 성립 시기는 재조번방지가 완성된 숙종 42년(1716년) 이후로 보인다. 친필본 난중일기를 옮겨 적은 유일한 판본이자 325일치의 분량 가운데 친필본과 전서본에 누락된 32일치(을미년 30일, 병신년 1일, 무술년 1일치 분량)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1967년 난중일기 도난 사건이 일어나고(후술) 이듬해 3월, 한국의 문화재관리국은 난중일기와 함께 충무공유사를 영인 발행하였다. 2000년 정신문화연구봄호 제23권 1호에 실린 박혜일(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외 3인의 ‘이순신의 일기 일기초의 내용 평가와 친필초본 결손부분에 대한 복원’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충무공유사의 원문 일기초 내용의 일부가 발표되었으며, 난중일기의 훼손된 부분을 복원할 수 있는 판본으로 평가되었다. 분량이 적긴 하지만 친필본의 마모되고 확인불능 글자, 빠진 부분이 정확히 적혀 있으며, 전서본 제작 과정에서 누락된, 상관과 동료에 대한 이순신 본인의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2008년 6월 현충사에서는 충무공유사의 번역문과 영인문의 합본을 간행하였다.
난중일기 도난 사건
1967년 12월 30일에 아산 현충사 전시관에서 1.5mm 두께의 전시관 철문을 송곳으로 뚫어 너비 7cm, 길이 23cm로 도려내고 다이얼을 맞추어 문을 열고는 내부에 소장하고 있던 임진일기 전권과 임진장초, 서간첩을 훔쳐 달아난 것이 다음날인 12월 31일 아침 숙직인에 의해 발견되었다. 온양경찰서는 현충사에 임시수사본부를 마련하고 수사에 착수했고, 덕수 이씨 충무공파 직계와 방계간의 다툼에 초점을 맞추어 사건 발생 3일 전 온양에 왔고 사건 전후로 현충사를 자주 드나들었으며 평소 종친회 모임에 참석하지 않다가 12월 중순에 불쑥 나타나 "난중일기 한 장만 떼어 팔아도 10만 원" 운운한 적이 있는 서울 거주 이재용(당시 33세, 무직)을 연행하고 일본인으로 사건발생 얼마 전까지 온양을 자주 드나들었던 이와오 기요시(岩尾淸, 당시 27세)의 수배를 내렸지만 도박판에 자주 드나들고 문중 안에서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 외에 이재용에게서 어떠한 혐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으며 그의 자택에서 발견된 4만 원짜리 보증수표도 난중일기 도난 사건과 연결지을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이와오 기요시도 사건 발생 이틀 전 오전 11시에 출국한 사실이 확인).
사건 발생 당시 진해에 있었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국보가 도난당했다는 소식에 이후락 당시 비서실장을 통해 "전 수사력을 동원해 범인을 잡으라"는 지시를 전달하고, 1월 8일에는 대통령 본인이 나서서 도난범에 대해 자수를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청와대 당국에서도 난중일기의 행방을 제보하는 자에 대한 포상과 함께, 범인에게는 "오는 1월 17일까지 자수할 시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을 약속하겠다"는 성명을 내놓기도 했다. 1월 8일 오후 현충사를 방문한 문홍주 당시 문교부장관과 하갑청 당시 문화재관리국장은 경찰의 브리핑을 듣고 "전국에 산재한 개인 소장 국보가 난중일기와 같은 변을 당하지 않기 위해 국가에서 이를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금년내로 제정토록" 할 것을 발표했고, 같은 날 박보영 당시 치안국 수사2계장이 현충사를 방문한 데 이어, 다음날인 9일에는 치안국장 채원식이 현충사로 내려와, 초동수사의 미스가 원인이라는 분석에 따라 원점에서 다시 수사할 것을 결정했다. 전시관 철문을 부순 방법이 너무 우악스럽고, 아무렇게나 철문을 찢고 일기를 훔쳐서는 기왓장을 떨어뜨려가며 담을 넘어 도망친 범인의 행적을 두고 종친회 내부 인물보다는 단순한 초범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런데 1월 9일 오전 11시에 부산시경(당시 국장 정석모)에 난중일기가 부산 온천동에 있다는 제보가 접수되었다. 제보자는 부산 주민인 박정웅(당시 30세)과 황규하(당시 29세) 두 사람으로, 동래 온천장의 모 다방에서 우연히 국보 운운하는 사람들(제보자 본인과 서로 안면은 있었음)의 이야기를 듣게 된 박정웅은 "요즘 자주 드나드는 수상한 사람들"이라며 아버지가 가리켜 말한 사람들을 수상하게 생각하고 미행, 온천동 시장에서 "이렇게 하면 잡히기 쉽다"고 하는 데서 확신을 얻고, 당시 아버지가 드나들던 복덕방과 같은 사무실을 쓰던 온천표구사 사환 김영선(당시 17세)을 중국집에 데려가 식사를 사주며 표구사 안에 드나드는 사람들 사이에 난중일기 절취와 이동의 사실을 알아내고 부산시경에 신고했다. 부산시경 수사 3계(당시 계장 박유수)는 정오에 표구상 주인 강찬순을 자택에서 검거해 자백을 얻어내고, 이어 4시 20분경 온천동 급행버스정류장에서 범행 주모자인 류근필(당시 37세, 골동품상)을 검거하는데 성공하고, 밤 11시경 인쇄업자 이일환(당시 35세)의 사촌형 이영환의 집 연탄창고에서 난중일기를 회수하는데 성공한다.
경찰 조사 결과 범행을 주동한 류근필은 이미 1966년에 통도사에서 동은사마법병을 훔쳐내 재벌 이 모씨에게 팔아넘긴 혐의로 9개월 징역형을 살고 나온 적이 있는 전과자였고, 출소 후 온천동의 모 다방에서 사기전과자 이남출(당시 30세), 정선찬(당시 35세)과 함께 "일본에 난중일기를 가지고 가면 천만 원을 받을 수 있다"며 범행을 제의했으며, 이남출과 정선찬 두 사람은 범행 6일 전인 12월 24일에 현충사에 방문해 현지답사를 하는 등 치밀하게 사전 계획을 세운 사실도 확인되었다. 1월 11일에 피의자들을 동반해 현장검증이 이루어졌는데, 범행 시간은 40분도 걸리지 않았으며 훔쳐낸 난중일기는 온천동의 류근필 자택에서 강찬순의 표구상으로, 부전동의 박훈태(당시 33세, 인쇄업자) 자택에 맡겼다가 다시 부민동 3가 57번지의 이일환의 집에 맡겨두었는데 그 사이 이즈하라를 오가는 외항선원들을 매수하느라 많은 돈을 뿌린 사실도 확인되었다.
난중일기 도난 사건의 죄를 물어, 특수절도 및 문화재보호법 등 위반 등의 죄목으로 주모자 류근필을 포함, 이남출, 강찬순, 허세조(당시 46세, 골동품상), 박훈태, 이일환 등 여섯 명이 검거되었고, 무직에 주거지가 정해져 있지 않아 도주한 뒤 수배령이 내려진 정선찬은 1월 13일 아침 7시경, 금정산 금강공원 중턱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극약을 탄 사이다를 통한 음독자살로 부검 결과 밝혀졌고, 사체가 발견되기 전날 금정산의 복수암으로 친형을 찾아가 "자수하던지 아니면 자살하겠다"며 2백 원을 받아간 것을 확인하였다. 범행 구상 단계에서 현충사까지 사전 조사를 왔다가 포기하고 물러나, 1월 9일에 청와대 민정비서관실에 범인의 신상을 제보한 김세명(당시 32세)은 특별히 사면되었다. 박정웅과 황규하, 김세명 등 제보자 세 사람에게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금일봉 포상이 주어졌고, 부산시경 수사과 3계 김문오 경사(당시 43세)와 문종황(당시 42세), 이장길(당시 30세), 동래서 송중학, 박재평(당시 33세) 순경에 대해서도 1계급 특진과 함께 표창장이 주어졌다. 박정웅에게 범인들의 행적을 알린 표구사 사환 김영선에게도 1월 12일에 대통령의 금일봉이 전달되었고, 동래경찰서의 사환으로 특채되었다.
난중일기 도난과 수사, 범인 검거까지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경찰의 수사 태도가 언론에 의해 질타를 받았다. 1968년 1월 5일의 경찰의 1차 현장검증에서 사건 당일 현충사 숙직원이 순찰을 제대로 돌지 않았고, 범인이 현충사 뒤쪽 철망을 절단하고 도주한 사실을 확인했지만, 범행추정시간인 30일 오후 4시 30분에서 31일 오전 7시 사이의 시간과 신고된 시간 사이에 틈이 너무 길었던 탓에 초동수사가 미흡했다는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1월 8일의 2차 현장검증에서 경찰은 범행도구로 쓰인 뒤 버려졌을 도구들을 찾아 현충사 주변에서 탐색을 벌였지만 찾지 못했다. 또한 수사 초기 경찰이 유력 용의자로 보아 체포했던 이재용은 연행 이틀만인 1968년 1월 6일에 알리바이가 확인되어 방면되었지만, 이틀 뒤 경찰은 다시 이재용을 사기 및 도박 등의 혐의로 구속시키고, 성역(현충사) 경내의 고사목 벌채 문제로 현충사 관리사무소와 감정이 좋지 않았던 동생 이재천(당시 30세)도 산림법 위반으로 연행하여 무리하게 자백을 강요했다.
애초에 경찰은 덕수 이씨 충무공파 문중 내부의 감정대립이 사건의 원인이라 단정한 채 종친 관계에 집중해 수사를 행했지만,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며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또한 범인이 검거된 뒤 풀려난 이재용은 "누명을 벗어 기쁘기는 하지만, 하마터면 경찰의 육감수사에 희생될 뻔 했다" 고, 확실한 증거 없이 심증만으로 수사를 강행한 당시 경찰의 터무니없는 수사 태도를 질책하기도 했다. 난중일기가 발견된 곳이 이영환의 집이고 이영환이 범행 가담자 이일환과 사촌간이자 당시 부산지검 밀양지청 입회서기였다는 점에서 고위 관료가 이 사건의 배후에 연루되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으나 조사 결과 배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경찰은 발표했다.
류근필 등 피의자 6인은 1월 16일 대전지검 천안지청으로 이송, 구속송치되었고, 21일 오전에 대전지법 천안지원에서 열린 재판(당시 판사 최영도)에서 주모자 류근필에게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이남출은 징역 3년, 강찬순은 2년의 징역이 선고되었고, 박훈태는 1년 6개월에 3년 집행유예, 이일환은 10개월 징역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는데 류근필 등 3인은 항소했고 이는 한 번 기각되었지만, 8월 31일에 열린 항소심에서 대전법원 형사항소부(당시 재판장 최병규)는 주모자 류근필에게 원심 판결을 깨고 형량을 대폭 감한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한편 주모자 류근필이 골동품중개상이자 역사학도로써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동국대측이 나서서 "해당 인물은 본교 졸업은커녕 입학조차 한 사실이 없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회수된 직후 난중일기는 부산대학교에 보관 중이던 영인본과 비교 대조 중에 서간첩 6장 세 통이 빠진 것이 확인되었고, 2월 3일에 강찬순의 집에서 발견되었는데, 강찬순이 범행 과정에서 빼돌린 것을 강찬순이 검거된 뒤, 강찬순의 부인이 후환이 두려워 태워버리려 했으나 소각 직전에 모두 간신히 수습되었다. 서울의 국립박물관으로 옮길 것에 대해 덕수 이씨 충무공파 문중의 임원 30명은 결사반대하며 되찾은 난중일기를 아예 창고에 넣고 봉해버리기도 했다. 원본 열람 자체가 금지되었다.
난중일기의 번역
난중일기의 가장 오래된 국역본은 1960년 4월에 이은상이 친필본의 원문교열을 마치고 문교부에서 간행한 이충무공난중일기라는 제목의 국역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보다 앞서 1953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언론인 설의식이 수도문화사에서 간행한 이순신 수록(手錄) 난중일기의 존재가 알려졌다. 2년 뒤인 1955년 11월 30일에 북한에서 월북문인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리순신장군전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평양 소재 국립출판사 주필을 맡고 있던 이상호가 5천 부를 간행하였다.
홍기문의 번역은 신문관본과 통영본, 두 개의 이충무공전서 판본을 기초로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 난중일기초를 토대로 하여 번역한 것으로, 이충무공전서의 내용 가운데 충무공의 저작이 아닌 것을 삭제하고 번역하였다. 홍기문은 이 번역본에서 "친필본보다 전서본이 간략하게 된 것은 윤행임이 삭제하고 이두문을 임의로 수정한 것이다."라며, 난중일기의 판본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홍기문의 번역은 친필본과 전서본의 최초의 합본 번역이라는 의의가 있지만, 북한에서 발행한 덕분에 북한 사투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친필본 난중일기를 확인하지 않은채 활자본만을 토대로 번역해 친필본의 미상, 오독 부분을 밝혀내지는 못했다는 한계도 있었다(이후 중간본이 간행).
이은상은 1960년 난중일기 간행본에서 "공의 초고와 전서 중의 채택되어 있는 난중일기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10월 7일까지만 남아 있던 무술일기의 빠진 부분을 장예초본 별책(충무공유사일기초)에서 10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의 친필 일기초 2면을 찾아내 수록했고, "공의 친필초고를 완전 채록했다"고 자부하였다(다만 이은상은 장예초본 별책이 충무공유사일기초와 동일한 것임은 몰랐다). 이은상이 난중일기를 번역한 1960년 부산대학교에서 총장 윤인구에 의해 충무공연구실이 설치되어, 당시 친필 난중일기 초고 7책 215장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당시 경무대(청와대)와 부산대 도서관, 현충사에 각각 한 부씩 비치했었다.
1968년에 이은상이 번역한, 친필본과 전서본이 합본된 난중일기가 현암사에서 크라운판(版)으로 간행되었다. 공교롭게도 지문각에서 이석호가 역주한 난중일기도 이은상 번역본과 같은 날(1968년 4월 2일)에 발행되었는데, 이석호 역주본은 갑오년 7월 13일과 병신년 8월 2일, 정유년 7월 2일 등 전체 분량 가운데 126일치가 빠졌고 이순신이 지은 한시가 부록되었고, 가격도 현암사판(8백 원)보다 저렴한 390원이었다. 한편 이은상 번역본 난중일기는 원문과 함께 난중일기 속 지명과 현대의 지명을 대조해 표로 정리한 것을 부기하였다.
한편 2004년부터 문화재에 대한 디지털 정보화 사업의 일환으로 난중일기 원문과 원본사진이 국가기록유산에 게재되고, 친필본 탈초와 원문 해독을 맡았던 노승석이 10여 곳의 오류를 발견하였다. 노승석은 자신이 발견한 오류의 수정을 반영하여 2005년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동아일보사)을 출간하였고, 충무공유사해독 과정에서 찾아낸 32일치를 첨가한 표정교감본 임진일기를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를 통해 2007년 3월에 간행하였다. 5월에 박해일 교수 외 3인이 친필본을 활자로 옮긴 이순신의 일기초를 간행하였는데, 원문에 구두를 넣지 않았고 본서 속에 수록된 장계와 서간문의 출처를 밝히고 내용과 형식을 친필본 형태로 상세편집하였다.
문학으로써의 난중일기
5만 명의 조선 군민이 왜병과의 분전 끝에 몰살당한 제 2차 진주성 싸움(1593년)이 있었던 해에 쓴 계사일기 7월 2일자에서 이순신은 진주성(晋州城)이 왜병에 포위되어 위태롭다는 소식을 김득룡으로부터 전해 듣고 놀라고 걱정스럽다면서도 그럴 리 없다고 애써 부정하는 투로 적었지만, 7월 6일에 광양으로부터의 보고를 통해 진주성 함락의 소식을 전해듣고, 9일에는 광양과 순천이 왜병에 함락되었다는 비보가 이어지고 난 뒤에 "이 날 밤은 바다의 달이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색을 이루었고,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었다. 홀로 뱃전에 앉아 있었고,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고 썼다. 소설 칼의 노래(2001년 발행)를 발표한 한국의 소설가 김훈은 "홀로 뱃전에 앉아 있었다"는 이 난중일기 문장을 두고 「이것은 죽이는 문장입니다. 슬프고 비통하고 곡을 하고 땅을 치고 울고불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혼자 앉아 있었다는 그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것이죠. 거기에 무슨 형용사와 수사학을 동원해서 수다를 떨어본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를 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전연 수사학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강력한 주어와 동사의 세계죠. 내가 사랑하는 주어와 동사의 세계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에 입각해 있습니다.」 라 평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난중일기의 판본 중 친필 원본과 전서본은 내용 측면에서 어떠한 차이점과 상호 보완 관계를 가지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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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난중일기 친필 원본과 전서본의 내용적 차이점 및 상호 보완성을 비교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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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친필 원본의 특징과 전서본의 특징을 각각 추출한다.
- 친필 원본은 초서로 되어 있으며
- 전서본은 친필 원본을 탈서편집한 것이나, 원본 일기에 빠진 부분(을미년 일기의 경우 전서본에만 존재)을 담고 있어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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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두 판본의 차이점과 보완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 구절을 선별한다.
- 원본 일기에 빠진 부분(을미년 일기의 경우 전서본에만 존재)을 담고 있어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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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친필 원본은 초서 형태의 원형이며, 전서본은 이를 정자로 탈서한 것이지만 원본에 없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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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전서본이 원본의 내용을 정자로 옮긴 것이면서도 원본에 누락된 부분을 포함하고 있어 상호 보완적임을 도출한다.
- 원본 일기에 빠진 부분(을미년 일기의 경우 전서본에만 존재)을 담고 있어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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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두 판본의 차이와 보완 관계를 명확히 기술한다.
- 친필 원본은 초서로 되어 있으며
- 전서본은 친필 원본을 탈서편집한 것이나, 원본 일기에 빠진 부분(을미년 일기의 경우 전서본에만 존재)을 담고 있어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최종 답변 (final_answer)
친필 원본은 초서로 작성되어 있으며, 전서본은 이 초서를 정자(正字)로 탈서하여 편집한 것이다. 두 판본은 내용 면에서 상호 보완 관계에 있는데, 전서본은 친필 원본에 빠져 있는 부분(예를 들어 을미년 일기 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난중일기의 친필 원본은 초서로 작성되어 있고, 전서본은 이를 탈서편집한 것으로 원본에 누락된 부분을 담고 있어 상호 보완 관계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