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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 document_id A220623203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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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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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李哲承, 1922년 5월 15일 ~ 2016년 2월 27일)은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정치인, 시민사회기관단체인이다.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경성부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전라북도 완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전라북도 전주부에서 성장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징집반대 등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았고, 백부 이석주의 권고로 인하여 인촌 김성수를 찾아갔다. 그 뒤 보성전문학교 내 반일 학생이며 강제 징집 거부 등으로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다가 1944년 1월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끌려갔다. 그 뒤 오사카의 병참부대에 배속되어 1945년 8월 자살특공대로 차출당했다가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군에서 탈출했다. 광복 직후에는 학병 동맹의 결성에 참여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그의 성향을 봤을 때 좌파 단체인 학병동맹에 실질적으로 참여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이후 군정기 때는 우익 학생 운동과, 신탁통치 반대 시위 당시 김구, 김성수 등을 도와 학생 반탁 집회를 주관하였고,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 친일 경찰 채용 등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6·25 전쟁 중에는 학생들을 모아 전국학련 학도의용군을 편성, 낙동강전선과 대구에서 참전하였다.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국민방위군들 병사들에게 전달해야할 50여억 환의 자금과 재물을 착복한 것을 국회에서 폭로하게 하였다. 제1공화국 기간 중 자유당에 반대하여 야당 정치인으로서 활동했다. 초대 제헌의원 선거에는 낙선하였으나, 3대, 4대, 5대, 8대, 9대, 10대,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7선 의원이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의 회유를 거부하고 반 군정 운동을 하였다. 1970년대 김영삼, 김대중, 윤보선, 유진산 등과 신민당의 당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었으며, 중도화합론을 주장했다 하여 '사쿠라'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 정계 은퇴, 우익 시민사회단체를 지도하였다. 야당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장면, 윤보선 등과 함께 제3공화국·제4공화국 시절 박정희의 경쟁자이자 잠재적인 대안자의 한사람이었다. 정치적 계보로는 민주당 신파 출신으로 훗날 한때는 1987년 김영삼과 결별할때까지 상도동계의 중진이었다. 호는 소석(素石). 생애 >> 생애 초기 >> 출생과 가계 소석 이철승은 1922년 5월 15일 경성부 종로방 수표동(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에서 이석규(李錫圭)의 2남 5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본적지인 전라북도 전주부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 이석규는 일제 식민 통치에 항거하여 3.1 만세 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불의를 참지 못하던 성격이었다. 그의 둘째 큰아버지는 훗날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이석주(李錫柱)였다. 그의 집안은 양반가문 출신으로 형조정랑을 지내고 사후 증 병조참판에 추증된 이직간(李直幹)의 18대손으로, 선조 영의정을 지낸 이탁(李鐸)은 15대 방조였고, 숙종 때 우의정과 판중추부사를 지낸 충정공 만암 이상진(李尙眞)은 그의 10대 방계 선조였다. 13대조 이정란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창의해서 전주성을 지키는데 참여한 전주부윤 겸 삼도 소모사를 지냈다. 11대조 이영선은 지역의 명망있던 인사로 사후 반곡서원에 배향되었다. 10대 방조 이상진은 서인 중진으로 우의정과 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등을 지냈지만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될 때 소론이 되었다. 이상진의 동생인 이상민의 5대손이자 이철승의 6대조인 이진희(李鎭熙)는 정조 때에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에 합격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본적지는 전라북도 전주부 서신동 290번지였는데, 17대조 때 완주군 구이면 장판리 모악산아래에 정착하였고, 그 뒤 아버지의 대에 경성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유년기 그는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하였는데 할아버지 이시형은 전주지방의 3대 거유(巨儒)중 한 사람인 저명한 유학자였다. 아버지 가석 이석규는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 3학년에 재학 중 3∙1운동에 가담, 제적당한 후 형 이석주와 더불어 항일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절하며 일제에 항거하였다. 아버지 이석규는 후일 6·25 전쟁때 퇴각하는 남로당 공비들에 살해되었다. 중부인 우농 이석주는 후일 제헌국회의원을 지내는데 그를 인촌 김성수에게 찾아가게 한 사람이 이석주였다. 그에게는 1명의 남동생과 5명의 자매가 있었다. 중부 우농 이석주는 여수에 큰 광산을 갖고 있어서 밖으로는 비밀리에 상하이임시정부와 연계하고, 국내에서는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등과 연대하며 지하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소년기 1928년 전주제일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군산 소화보통학교로 전학갔다가 다시 전주로 돌아오면서 전주 제2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1936년 2월 전주 제2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북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중학교 재학 시절의 이철승은 운동을 좋아했는데, 축구, 야구, 농구, 철봉, 평행봉, 역도, 달리기, 검도, 투원반 던지기 등 여러 운동에 만능이었다. 전주북중 재학 중 그는 경성제국대학교가 주최한 전국중학교 축구대회에 골키퍼로 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업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주목 받은 문제 학생이었다. 전주북중학교(全州北中學敎, 전주고등학교의 전신으로 5년제) 재학 중 당시 인촌(김성수)의 주머니가 곧 이철승의 주머니라는 말이 있었다고도 한다. 1946년 1월 18일 이철승이 이끄는 반탁학련이 참여한 반탁 대회가 인민당 본부 습격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좌우익간의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7월 20일 이승만이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갖춰졌다. 열렬한 지지를 업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그는 건국 세력을 배제하고 친일 인사를 기용해 건국 공신들과 갈등을 빚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친일 경찰들을 타도하는데 나섰던 이철승이 친일파들의 음모로 정부 요인 암살자로 몰리기까지 했다. 이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을 국회에 출석시킬 정도로 파급이 컸다. 무죄로 풀려난 뒤 이 대통령과 재회하는 자리, 그를 보고 반가워하는 이승만에게 이철승은‘친일경찰들로 내각을 구성하면 안 된다’며 일침을 놓는다. 1950년 5월 2대 국회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49년 곽상훈, 신익희, 이청천 등과 함께 백민태 등 테러리스트들의 암살표적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1950년 6.25 이후 3일만에 서울이 공산치하에 점령되자 비밀리에 피난해 있다가 조병옥 박사와 합류해 학도의용군을 창설한다. 한편 6.25 전쟁 중 점령지인 서울에 있던 아버지 이석규가 퇴각하던 공비들에게 살해되었다는 비보를 접한다. 피난학생 3천여명을 모아 전국학련 학도의용군을 편성, 그가 조직한 학도병들은 낙동강 방어선과 대구 지역을 지켜내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의 가장 큰 공신으로 활약했다. 전쟁 중 그는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의복과 보급품을 횡령·착복한다는 첩보를 입수, ‘국민방위군 비리 의혹을 제기하였다. 우연히 국민방위군에 속해있던 친구를 만나게 된 그가 아사 직전인 친구의 사연을 듣고 진상 조사에 착수하여 의혹을 제기했는데 이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국민방위군들에게 전달해야할 50여억환을 착복했다는 의혹을 접한 뒤 조사, 그 결과 고위 간부들이 군인들의 의복, 식량 등에 관한 비용 약 72억원을 착복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 조사를 요구하며 자유당 정권을 비판,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실을 폭로하게 하였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내각의 신뢰는 실추하게 된다. 1952년초 휴전과 동시에 상경하였다. 1952년 4월 15일 대한역도연맹 이사장이 되었다. 53년 11월 16일 다시 역도연맹 이사장에 재선출된다. 사사오입 개헌 =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고향 전북 전주에서 출마하여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두 번의 낙선 끝에 3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한다. 이후 제4, 5대 민의원의원을 지냈다. 1954년 사사 오입 발췌개헌에 반대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해 대통령 중임제한을 철폐하고자 헌법 개정을 추진하던 때였다. 개헌안이 한 표 차이로 부결이 되자 자유당 소속 의원이 '수학자들 이야기로 사사오입하면 통과됩니다. 계산 착오로 시정하고 가결된 것으로 합니다.' 하자 그는 사사오입의 비논리성을 따지다가 바로 단상에 올라 최순주 민의원부의장 멱살을 잡고 '이게 무슨 짓이냐'며 항의하였다. 그러나 사사오입 개헌안은 그대로 통과된다. 1955년 3월 대한역도연맹 부회장이 되었다. 야당 정치인 >> = 민주당 신파 활동 = 이후 1955년 11월 민주당이 결성되자, 장면(張勉)을 찾아 민주당의 신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56년 10월 13일 배재학원 운동장에서 열린 제1차 여야 민의원의원 친선 야구대회에 참가했다. 이후 장면이 부통령이 되면서 민주당 신파의 리더가 되었다. 이때 그는 신파 내에서도 청년 소장파의 리더격으로 활동한다. 3.15 부정선거와 4.19 전후 = 1960년 3월 15일의 3·15 부정 선거를 한 자유당 정권을 규탄하고, 부정선거 진실 규명 운동에 동참하였다. 4월 부정선거 원흉에 대한 학생 시위대를 독려하였다. 마산 시위에서 실종된 학생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끔찍한 모습으로 바다에 떠오른다. 국민들은 분노는 극에 달했다. 곧이어 고려대 학생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민의원의사당 앞을 점거한 학생들의 시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총장까지 나서봤지만 소용없었다. 이철승은 자유당의 무력 부대가 투입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학생들 앞에 나섰다. 반탁 운동 때부터 함께했던 후배들은 그의 설득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1960년에는 다시 민주당 신파가 노장파와 소장파로 나뉘자 그는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의 리더로 활약했다. 1960년 5월 전주 을구에서 제5대 민의원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자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제5대 민의원의원직은 1년만에 5.16 군사 정변으로 물러나게 된다. 8월 18일 장면 내각이 출범한다. 그는 장면, 박순천, 곽상훈, 정일형 등과 함께 민주당 신파의 일원이었으며, 민주당의 소장파 리더로서 그는 장면을 적극 지지했던 것이다. 이후 장면 총리의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며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해 9월 장면이 장도영을 육군 참모 총장에 기용하려 하자, 이철승은 장도영을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양다리를 걸칠 수도 있음을 들어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장면은 말을 듣지 않았다. 장도영은 후에 박정희 등과 결탁하여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한다. 1960년 민의원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대한체육회의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61년 3월말 제15차 UN총회의 한국 대표로 임명되어 출국, 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하였다. 그해 대한역도연맹 회장이 되었다. 5.16 군사 정변 직후 = 5·16 군사 정변 직후 박정희는 사람을 보내 야당인사들을 회유하려 했고 이때 이철승에게도 사람을 보내 회유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도와달라던 박정희의 회유를 거절하였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군사 정변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이어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 대학원 국제정치학과에 진학, 1962년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최경록, 강문봉, 전규홍, 이철승, 양일동 및 전 주미 대사관 참사관 부인들은 1963년 3월 21일, 미국 대통령 관저 앞에서 "군대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 "박정희 군사독재타도", "한국인은 군부정치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박정희 장군의 군정연장제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어 군사 정권에서 사람을 보내자 그는 군사정권의 무력 대응에 맞서 이들을 지켜내기도 했다. 그는 1964년 미국에서 귀국하게 된다. 3공, 4공 시절 >> = 제3공화국 기간 = 5.16 이후 정치규제에 묶여 강제로 정계은퇴당하면서 정계에 떠나있었으나 여러 강연, 계몽 활동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1964년 고려대학교 교우회(동문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64년 귀국, 그러나 귀국 직후 의문의 방화 사건이 발생한다. 중정부와 닿아있는 선배로부터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자신을 없애라고 명하는 것을 들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그는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그 뒤 다시 정계에 복귀, 재건된 민주당 내에서 민주당 신파 계열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5.16 군사 정변과 장면의 와병으로 거의 소멸, 와해상태에 있던 민주당 신파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다시 설득, 민주당 신파를 다시 재건하였으며 1967년 통합 야당으로 신민당이 창당되자 그는 신민당내 민주당 신파 계열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965년 2월 8일 다시 대한역도연맹 회장이 되었다. 1965년 박정희, 김종필 등의 한일회담에 반대, 이를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그해 4월 26일 대일굴욕외교를 비판하던 중 그의 집에 의문의 방화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66년 아시아 역도연맹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해 7월 5일에는 대한역도연맹 임시이사회를열고 선수강화위를 개편할 때 역도선수강화위원장이 되었다. 그 뒤 야당에서 8,9,10대 국회의원을 하면서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조직위원장을 맡았고 제9대 국회부의장,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하는 등 야당 중진의 반열에 올랐다. 1965년 2월에는 대한역도연맹 회장에 위촉되었다. 1968년부터 박정희측의 삼선개헌안이 나오자 삼선개헌의 비민주성을 지적, 원내외에서 적극 반대하였다. 1969년 4월 19일에는 4.19 10주년 기념 강연을 마친 뒤 침묵 시위에 들어가기도 했다. 야당 지도자의 한사람이던 그는 윤보선, 장면, 유진산, 유진오, 장준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과 함께 박정희의 정적이자 잠재적 대안자의 한 사람으로 주목되기도 했다. 역도연맹 내 갈등과 대권 도전 = 그는 1949년부터 오랫동안 대한역도연맹의 일을 보았고 1955년부터는 대한역도연맹의 부회장에 연임됐으며 1961년부터는 역도연맹 회장이 되었다. 그런데 1966년 9월에는 그해 10월 13일부터 10월 15일까지 동독 동베를린에서 열리는 세계역도연맹총회에 참가신청을 하였으나 외무부가 허락하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 1967년 1월 22일 대한역도연맹의 비상 회의로 갑자기 대한역도연맹 회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연맹 간부이던 이모는 그가 "정정법에 묶여있는 야당계 인사이기 때문에 활발한 움직임을 할 수 없고 재정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재력이 풍부한 모당의 실력자로 바꿔야 한다. 유신 시절 = 그 뒤 1971년에 있을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김대중 등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우고 대선후보자 경선에 참여하였다. 그러자 신민당내 원로들은 구상유취론, 젖비린내론을 내세워 젊은 소장파들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민주당 신파 출신 원로였던 곽상훈이나 박순천 등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국가원로로 대접받으면서 여당에 호의적으로 변했다. 장면의 사후 정치적 후견인이 없던 그에게는 여야 내부에서 견제와 불이익이 가해졌다. 김영삼과 이철승이 당내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 나오자 김상현 등은 유진산이 지지하는 사람(김영삼을 가리킴)에게 당수직을 주었으니 대권은 줄 수 없다며 반발하였고 경선 초기에 잡음이 있었다. 71년 1월 당수인 유진산을 대신하여 다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결선 투표에서 김대중에게 패하였다. 당수 유진산으로부터 김영삼에게 양보하라는 권고를 받고 일단 대선후보자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1차 투표 결과는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로 김영삼은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무효표는 이철승의 표였는데, 이철승이 유진산의 지명에 따른다는 약속을 파기한 것이다. 2차 투표에서 김영삼 410표에 김대중 485표가 나왔는데, 이는 이철승이 김대중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중도통합론과 미군철수 사태 중재 1972년 국제테니스클럽 회장이 되었다. 1972년 이후에는 "중도통합론"을 제창하여 유신독재에 대한 투쟁을 주장하는 윤보선, 장준하, 김영삼, 김대중 등과 대립하면서 박정희 정권과의 타협을 도모하였다. 1973년 신민당 부의장에 선출된 뒤 그해 야당몫의 제9대 국회부의장에 피선되었다. 그는 야당 인사의 신분이었으나 이후 미국, 일본 등을 수시로 방문하며 한국에 대한 고립정책을 철회해줄 것을 적극 설득하였다. 1975년 3월초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내 고립주의자, 주한미군 철수론자들과 기타 미국 정치 인사들을 설득, 3월 15일에는 일본 도쿄에 들러 주일특파 기자들과 면담 뒤 일본 정치인들을 만나 한국에 대한 고립정책을 철회해줄 것을 설득하고 3월 28일에 귀국했다. 1975년 5월 13일에는 국제문제공동연구소의 초청을 받고 일본 도쿄를 방문, 국제문제공동연구소 강연회에 참석한 뒤 5일만에 되돌아왔다. 그해 10월초 제30차 국제연합 UN총회 한국대표단의 자문위원으로 특별 선임, 대표단과 함께 뉴욕 시 파견되었다가 10월 11일 귀국했다. 또한 국제사회의 시선을 인식한 박정희 정부는 특별히 UN총회대책 고문에 임명하기도 했다. 이후 1976년 신민당 대표 최고위원에 피선되었다.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는 비주류의 대표로 주류인 김영삼 총재측에게 대립하였으나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76년 당수에 선임된 뒤 중도통합론을 내세웠다. 그는 월남패망을 지켜본 그는 남북대치상황에서 국가의 안보와 자유는 대립적 개념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조화의 개념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흑백논리나 선명론이 이나라 헌정사를 후퇴시켜 왔다는 주장을 하였다. 따라서 국내정치는 서로 경쟁하되, 정치적으로 협력할 것이 있다면 협력을 하고 외교 안보 문제는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민당내의 극한투쟁론자들은 그를 사쿠라로 몰면서 장면의 유약함과 유진산의 사쿠라와 엮어서 그를 비방하였다.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는 자신의 공약이었던 주한미군 철수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1978년 박동선의 미국 상하원 의원 로비 사건 이후 박동선 게이트 사건을 계기로 미국내 주한미군철수론자들은 미군철수를 감행하였고,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하던 박정희는 미군철수하라고 맞불을 놓았다. 그는 야당의원들을 모아 일본과 미국을 돌며 미군 철수는 안 된다며 미군철수 정책 추진을 막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일본 총리, 미국 상원 의원들을 만나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뉴욕타임즈에 그의 인터뷰 내용이 실렸는데, 미국 상원의원 의장인 험프리는 당과 노선을 떠나 국방과 국익을 위해 애쓴다며 특별히 이철승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철승은 양측을 설득하며 미군철수 불가론을 주장, 미국내 강경파 인사들을 설득하여 미군철수를 철회시키게 했다. 이후 10대 총선에서 신민당이 공화당을 근소한 차인 1.1%로 앞지르는 승리를 거두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주, 완주 지역구에서 당선되었고 1979년 신민당 총재경선에서 중앙정보부의 은밀한 후원을 업고 김영삼과 맞붙었으나, 김대중계가 이철승을 저버리고 김영삼을 지원하면서 그는 경선에서 패했다. 생애 후반 >> 5, 6공때의 정치 활동 1984년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총재에 추대되고 1985년 대한체육회 고문이 되었다. 신군부 집권 후에는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잠시 정치규제에 묶여 11대 국회에 참여할 수 없었으나, 1985년 정치 규제가 풀리면서 그해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신한민주당 소속으로 전주, 완주 지역구에 출마하여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5년말 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민주화를 위한 몇가지 선행 조건을 수행한다면 내각제를 고려해볼 수도 있다'며 '이민우 구상'을 발표하였다. 김대중과 김영삼 양 김 세력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철승은 양김에 맞서 이민우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 뒤 이민우 총재와 함께 변절자, 사쿠라, 유진산, 장면 등과 함께 비난을 받고 수모를 당했지만 이민우를 지지하였다. 1987년 당시 직선제 개헌을 위해 선명투쟁을 주장하는 양김씨 틈새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던,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당론과 같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였고, 이에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때 다시 "사쿠라"라는 별명이 언급되었고 양김 세력은 이철승을 제명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결국 이민우 총재는 양김 세력의 압력에 '해당 행위'를 이유로 이철승을 제명하려 하였으나, 정치깡패 김용남의 방해로 인해 제명하지 못했고 이는 통일민주당의 창당으로 이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87년 자유민주총연맹 총재로 추대되었다. 이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이듬해 1988년 4월 26일의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고향 전주에서 신한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호남지역을 휩쓴 이른바 황색바람(김대중의 평화민주당 돌풍)에 휩쓸려 낙선하고 말았다. 이후 신한민주당은 와해되어 통일민주당에 흡수되고 만다. 그는 통일민주당에 입당하라는 권고를 물리치고 정계에서 은퇴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에 위촉되었고, 1989년 서울평화상 심사위원이 되었다. 1990년 다시 서울평화상 심사위원이 되었다. 정계은퇴 후 시민사회단체 활동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한 이후로 정계 일선을 은퇴하고 각종 우익운동과 반북반공운동에 앞장서면서 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총재,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이사,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 등에 선출되었다. 이후 제3대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민족정론소식 회장을 맡고 있다. 그 뒤 우파 단체의 원로로 우익 청년들을 지도하였고,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 반대하는 우파 단체들의 후견인이 되었다. 여러 우익 단체 활동을 지원하고 강연 활동 등을 하였다. 1995년 한국노년유권자연맹 고문, 1996년 2002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고, 1997년 11월 21일 서울특별시 서울역광장에서 민족진영애국단체연합 등 범 우파단체를 소집, 민족진영구국안보총궐기대회를 주관하였다. 1998년 대한민국건국5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회장에 선임되고, 1999년 운석 장면박사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이 되어 장면 기념사업회 창설에 참여하였다. 2002년 2002 월드컵조직위원회 조직위원에 재위촉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이 되었다. 2008년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고, 2010년 1월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에 연임되었다. 사망 2016년 2월 27일 지병으로 새벽 3시 항년 9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학력 >> 명예 박사 학위 >> 약력 >> 기타 이민우는 그를 애국자라고 칭찬하였다. 과거 민주당할 때 그는 민주당 신파였고 나는 민주당 구파를 했고, 그 후 같은 야당 신민당을 하면서도 자주 부딪쳤었다며, 나는 그의 「中道통합노선」을 반대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사람만큼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도 드물다. 그는 나이를 먹어도 아주 건강하다며, 그런 분이 아직도 자유민주주의 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해 주어서 참 다행이여. 고맙다고 칭찬하였다. 2009년 5월 국가원로회의에서 발언 중, 노무현의 국민장 결정에 반대하여 '퍽 안타깝게 생각해요. 나는 국무총리 주최 원로회의에서 이렇게 얘기했소.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자살은 퍽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일이오. 그러나 과례(過禮)도 비례(非禮)라는 말이 있듯이 투신자살한 대통령을 이승만 대통령이나 김구 선생과 같은 배열로 국민장을 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관례에 두고두고 혼란을 줄 수 있다'라 하였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이철승이 속했던 민주당 신파 내에서 그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당시 장면 총리와는 어떤 관계였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이철승의 민주당 신파 내 역할과 장면 총리와의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민주당 신파 내에서의 이철승의 역할과 장면과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추출한다.

    • 장면이 부통령이 되면서 민주당 신파의 리더가 되었다. 이때 그는 신파 내에서도 청년 소장파의 리더격으로 활동한다.
    • 그는 장면, 박순천, 곽상훈, 정일형 등과 함께 민주당 신파의 일원이었으며, 민주당의 소장파 리더로서 그는 장면을 적극 지지했던 것이다.
    • 이후 장면 총리의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며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신파 내 역할(소장파 리더)과 장면과의 관계(적극 지지 및 정치적 조언자)를 뒷받침하는 구절을 선별한다.

    • 민주당의 소장파 리더로서 그는 장면을 적극 지지했던 것이다.
    • 장면 총리의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며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이철승은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 리더였으며, 장면 총리를 적극 지지하고 정치적 조언을 제공하는 돈독한 관계였음을 통합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추출된 정보를 바탕으로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구성한다.

    • 민주당의 소장파 리더
    • 장면 총리의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며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맞게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 민주당의 소장파 리더
    • 장면 총리의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며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이철승은 민주당 신파 내에서 청년 소장파의 리더격으로 활동하였으며, 장면 총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며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는 관계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이철승은 민주당 신파 내에서 청년 소장파의 리더격으로 활동하였으며, 장면 총리를 적극 지지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적 조언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