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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document_id A220623203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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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金昌淑, 1879년 음력 7월 10일 ~ 1962년 5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가, 시인 겸 교육자이다.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자(字)는 문좌(文佐)이며 호(號)는 직강(直岡), 심산(心山), 벽옹(躄翁)이다. 일제 강점기의 유림 대표로 독립운동을 주관하였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부의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을 역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유도회 회장 겸 성균관(成均館) 관장을 역임하였고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김우(金愚)'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heading>생애 </heading> 일찍이 유학을 배워 조예가 깊었고, 1909년 성명(星明) 학교를 창립하였으나 '을사 5원흉 매국 성토 사건(乙巳五元凶賣國聲討事件)'으로 피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 대표들이 서명한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내는 독립 진정서를 가지고 중국 장쑤성의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우송한 후 임시 정부에 참여하였다. 1919년 광복 운동 모금 중 체포되었다. 그 후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임정 의정원(臨政義政院) 등에 관계하다가 1927년 상하이 일본 영사관에 체포되어 만주국 펑톈 성의 다롄(大連)에서 복역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곧 유도회를 조직, 재단법인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 학장으로 교육에 힘썼으나,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여 수난을 겪으면서 유도회의 분쟁에 말려들었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이날부터 아버지 김호림은 귀천을 따질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 농업에 동참하게 하였다. 또한 여자아이를 시켜서 밥을 보냈는데, 장유유서(長幼有序)로써 늙은 종과 일꾼들에게 먼저 주고 그와 학동들에게는 나중에 주었다. 가족들은 그에게 변호사 선임을 의논하였다. 징역 14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heading>독립운동 </heading>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 대표들이 연명으로 서명,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에게 우편으로 제출하였으나 좌절되었다. 이 사건으로 수백 명의 유학자들이 체포되는데, 이를 파리 장서사건(제1차 유림단 사건)이라 한다. 4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참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을 지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교통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때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의 파벌 다툼을 조정하는 데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 쑨원(孫文)을 비롯, 이문치(李文治)·임복성(林福成) 등 중국 국민당의 여러 인사들과도 만나 접촉하면서 '한국 독립 후원회', '중한 호조회'(中韓互助會)의 조직, 결성에 기여하였다. 망명한 한국인 청소년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외국어 교육을 받도록 후원하였다.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여, 1920년 박은식과 사민일보(四民日報)창간, 신채호와 협력해 독립 운동 기관지 천고(天鼓)를 발간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임시 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유엔에 위임 통치를 청원하는 성명서를 제출하자, 신채호와 함께 이승만을 성토하는 활동을 했다. 신채호·신성모 등은 이승만을 성토했고, 김창숙은 그들의 이승만 성토에 지지를 보냈다. 1921년 4월 19일 이승만을 비판하는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지은 성토문에는 김원봉, 이극로, 신채호, 오성륜, 장건상 등 54명이 서명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부의장(1925년), 서로 군정서의 군사 선전 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교류하여 '한국 독립 후원회', '한중 호조회(韓中互助會)' 등을 결성하고, 이들의 협조를 받아 만주와 몽골의 황무지에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1925년 8월 독립운동 기지의 개간 자금 마련을 위해 김화식과 함께 국내로 잠입해 모금 활동을 펼쳤으나 계획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 때의 모금 운동으로 600여 명의 유림들이 투옥되는 제2차 유림단 사건이 발생했다. 1926년 이동녕, 김구 등과 협의해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 일제의 통치 기관을 파괴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의열단의 나석주가 1926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한 사건이다. <heading>체포와 송환, 석방 </heading> 1927년 5월 병으로 상하이 공동 조계(共同租界)의 영국인 병원 입원 중에 일본인 밀정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 뒤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 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 옥중 투쟁을 벌였고,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자 형 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에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거부하였으며, 이해 모친 인동 장씨가 사망하여 21년 만에 다시 고향인 성주로 돌아왔다. 1943년 아들 김찬기를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비밀리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김찬기는 곧 병으로 사망한다. 1945년 여운형이 조직한 지하 비밀 결사인 건국 동맹(建國同盟)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 발각되었다. 왜관 경찰서에 구속되어 수감 중, 일제 패망으로 광복을 맞이하였다. <heading>광복 이후 >> 해방정국의 정치 활동 </heading> 1945년 8월 광복 직후 여운형·박헌영에 의해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비판을 가하였다. 이후 중경 임시정부의 법통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자신을 당수로 추대하려는 군소정당들의 손길을 모두 거절하였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 주위에서 이승만을 찾아갈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승만과는 거리를 두었다. 10월 21일 미국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가 미국외교정치위원회 회합에서 한국은 지금 자치를 행할 준비가 되지 않았으므로 신탁관리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신문에 보도되자, 김창숙은 이승만을 찾아 여러번 물었으나 이승만은 답변을 회피하고 건국사업에 급한 재정문제를 들고 나왔다. 김창숙은 민족의 단합이 시급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였으나, 이승만은 금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순국선열추념대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에 추대되었다. 1946년 1월 비상국민회의 특별위원에 선출되었다. 1946년 1월 23일 김구가 정국의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 소집한 비상정치회의 주비회의에서 좌파계열 임정 국무위원인 성주식·장건상·김성숙 등이 탈퇴하자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중경 임정 측이 과도정부 역할을 하려고 1947년 3월 3일 이승만을 주석으로, 김구를 부주석으로 선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재보선할때 김창숙도 오세창·박열·조만식과 함께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민주의원 회의에서 이승만과 정면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이후 민주의원에서 활동하며 정당난립과 신탁통치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 문제 등으로 다른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교육과 유림계 재건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창숙은 이때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만식, 권동진,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47년 3월 3일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오세창, 조만식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다. 1951년 한국 전쟁 이후 대통령 이승만에게 하야경고문(下野警告文)을 보냈다가,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났으며, 1951년 5월 16일의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낙선하였다. 1차 지명전에서 1표를 받고, 2차 지명전에서는 1표를 받았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는 이시영 · 조병옥 · 김성수 등과 반독재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해 이승만정권과 계속 투쟁하였다. 1953년 성균관대학이 4년제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여 초대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56년 이승만 정권에 기생하던 친일유림의 강압으로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을 강제 사임하게 되었다. 1957년 성균관 관장, 유도회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당하였다. 1959년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이승만 대통령 사퇴권고서한을 발송했다. 1960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로 추대되었고,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초대회장,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0년 이승만 퇴진 이후 대통령 후보자로 지명되어 출마하였다.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출석의원 263명 중 259명의 출석으로 열린 1차 투표에서 29표를 얻어 낙선, 208표를 얻은 윤보선에게 패하였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그 해 5월 10일에 노환으로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사망하였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heading>사후 </heading>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마을에는 심산 김창숙의 생가, 청천서당, 청천서원 등 동강 김우옹과 그 후손들의 흔적이 있다. 김창숙의 생가(경상북도 기념물 제83호)는 청천서원 200m 아래쪽 사도실마을 어귀에 있다. 현재의 건물은 옛 건물이 화재를 당하여 안채는 1901년, 사랑채는 1992년 중수한 것이다. 김창숙 생가는 90세가 넘은 선생의 둘째 며느리 월성 손씨손응교 종부가 2016년까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며느리의 생활은 고단했지만, 그녀는 수절을 택했다. 이런 며느리를 위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까하여 담뱃불을 붙여달라면서 시아버지 김창숙은 담배 피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한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김창숙이 1921년 이승만의 유엔 위임 통치 청원 성명서에 대해 취한 태도는 신채호, 신성모 등과 비교했을 때 어떠한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1921년 이승만의 유엔 위임 통치 청원 성명서에 대한 김창숙과 신채호, 신성모의 대응 방식을 비교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신채호, 신성모의 활동과 김창숙의 활동을 각각 추출한다.

    • 신채호·신성모 등은 이승만을 성토했고, 김창숙은 그들의 이승만 성토에 지지를 보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두 집단이 모두 이승만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행동했음을 보여주는 구절을 선택한다.

    • 신채호·신성모 등은 이승만을 성토했고, 김창숙은 그들의 이승만 성토에 지지를 보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신채호와 신성모가 직접적으로 이승만을 성토하였고, 김창숙은 그 성토 행위에 지지를 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같은 입장에 있었음을 파악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김창숙은 신채호, 신성모와 마찬가지로 이승만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었으며,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성토에 지지를 표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 김창숙은 그들의 이승만 성토에 지지를 보냈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해 신채호, 신성모와의 공통점(이승만 성토/비판)을 중심으로 답변을 작성한다.

    • 신채호·신성모 등은 이승만을 성토했고, 김창숙은 그들의 이승만 성토에 지지를 보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신채호와 신성모가 이승만을 직접 성토한 것과 마찬가지로, 김창숙 또한 그들의 이승만 성토에 지지를 보냄으로써 같은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김창숙은 1921년 이승만의 유엔 위임 통치 청원 성명서에 대해 신채호와 신성모 등의 이승만 성토 활동에 지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