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조만식(曺晩植, 1883년 2월 1일 ~ 1950년 10월 1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종교인·언론인·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22세 이후 상업과 종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과 중국 출국실패 등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하에 교육활동과 물산장려운동·국내민간 자본으로 대학설립 추진 운동인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 YMCA 평양지회 설립, 신간회 등을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한국 전쟁 중 공산군의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산 물산장려운동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생애 >> 생애 초반 >> 유년기
1883년 2월 1일 아버지 조경학(曺景學)과 어머니 경주김씨 김경건(敬虔)의 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경학은 매년 벼 백 섬을 거둬들이는 평안남도 강서 출신의 향반으로, 평양에서 일종의 위탁판매업이라 할 수 있는 물산객주 일을 하던 상인이었다. 조만식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적은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이었다. 1888년 6세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96년 한문 수학을 마쳤다. 1905년 평양의 개신교 계열 학교인 숭실학교(또는 숭실중학)에 입학하였으며, 숭실중학에서 수학하면서 재학 중 개신교에 입문했다. 어린 시절의 조만식은 병약하였고,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강인한 정신력을 키워주려 노력하였다. 한번은 어린 동네 아이들에게 얻어 맞고 울면서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부친은 그때 울고 온 아들에게 "사내 자식이 창피하게 얻어맞고 다니려거든 밥도 먹지 말거라." 하며 벌을 세웠다 한다. 그 뒤 체력을 단련하고 무예를 연마하여 격투기의 일종인 날파람을 익혀 호신술로 활용하면서 어린 조만식은 날파람의 명수로 이름나도록 연마하기도 했다. 아버지 조경학은 "사람이란 의리가 있어야 한다. 절의(節義)를 존중하고 지켜야 하느니라"하며 의리와 절의의 중요성을 자녀들에게 역설하였고, 이는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보다 5살 아래인 누이 동생 조은식 역시 아버지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았는데, 은식은 열일곱에 결혼하여 결혼 3년 만에 남편을 잃고 청상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지조와 절개로 50년을 수절한 후 고고하게 생을 보냈다. 첫 아들 조칠숭이 태어났지만 정신박약아였고, 가정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생활 7년 만인 1902년 그는 첫부인 박씨와 사별하였다. 폭음으로 건강을 잃어 부모로부터 생활의 절제를 권유받았고 동료 한정교는 그에게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할 것을 권고하였다. 개신교에 입문한 한 후 조만식은 한정교를 따라 평양 장대현 교회에 출석했다..
금욕주의 =
숭실중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한 배위량 박사는 한국인이 술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폐단이 많은 것을 보고 학교의 교칙으로 금주령을 내렸다. 술이 신앙 생활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철저하게 금주 교육을 시켰던 것이며, 수업중에 술 주(酒)라고 써야할 대목이 나오면 그 글자를 일부러 피하여 ○표로서 술 ‘주’자를 썼다. 숭실중학교의 교장이자 은사였던 배위량 박사와 박자중 교사의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박자중 교사는 조만식이 숭실중학교 재학 중이던 1906년 6월 21일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본 도쿄 유학 중 1910년 여름 조만식은 잠시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머무르고 있을 때 8월 29일 경술국치 소식을 접하였다. 부회장으로는 저명한 변호사였던 한근조를 찾아가 초빙해서 영입하였다. 평양 YMCA 총무를 지내기도 하였다. 바로 숭인중학교(崇仁中學) 교장에 취임하였다.
조선일보 사장직에 물러난 이후 조만식은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조선물산장려회와 관서체육회의 회장으로 복귀하여 지역사회의 대소사를 챙겨 활동했다. 한편 이봉창·윤봉길 사건으로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수감되자, 여운형, 이광수 등과 함께 매일 안창호를 찾아 안부를 물었으며 그의 옥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증산교의 일파인 보천교와도 관계를 갖고 출입하였다. 독립자금 중 많은 부분이 보천교를 통해 종교자금 명목으로 모금되었으며, 이 때문에 조만식이 보천교와 관계를 맺고 출입한 이후, 조만식을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보천교를 출입했던 것으로 조선총독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만식이 출입한 이래 조만식 외에도 한규숙·장덕수·최팔용·송진우·백관수·조병욱·신석우·김철수·김철수(동명이인)·안재홍·백남훈·설태훈·임모, 김모 등이 보천교에 출입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그와는 동명이인인 조만식(趙晩植)도 보천교에 가담하였다.
1935년 12월 18일 부인 이의식 여사가 별세하였다. 그 뒤 아내를 잃고 혼자 살고 있었다. 이때 주변의 소개로 옛 제자인 전선애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전선애는 이 무렵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지 3개월 만인 은사의 부탁을 받은 주기철은 곧 평양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왔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조만식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주기철 목사가 옥사하고 산정현 교회가 강제로 폐쇄되자 그는 1945년 봄 가족들을 데리고 강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1940년대 후반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할 무렵, 서울에 있던 여운형이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로부터 통치권을 교섭을 받았던 것처럼, 총독부는 평남도에서는 조만식에게 차를 보내 평양으로 모셔오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은 이를 거부했고 대신 오윤선이 보내준 차를 타고 평양에 입성했다. 조만식은 1945년 8월 하순 여운형 등이 밀사 손치웅을 평양에 보내 그에게 남으로 내려올 것을 요청 받았지만 "뜻은 함께 하겠으나 몸은 여기 남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사양하였다.
1945년 8.15 해방 이후 조만식은 여운형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8월 16일 조선건국 준비위원회 평안남도를 조직하고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며 혼란기를 수습했다.
1945년 8월 25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한 이후, 소련군의 권고에 따라 현준혁은 연희전문과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나온 수재로 공산주의자였지만 조만식을 공대하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 하였고, 조만식-현준혁을 통한 좌우의 협력관계를 이끌어나갔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의 명단에는 준비위원: 김병연, 노진설, 김광진, 지창규, 김동원, 한근조, 총무부장에는 이주연, 재무부장에는 박승환, 선전부장에는 한재덕, 산업부장에는 이종현, 지방부장에는 이윤영, 교육부장에는 홍기주, 섭외부장에는 정기수, 치안부장에는 최능진 등이 각각 선임되었다. 그러나 미 군정 진주 후 인민공화국 내각이 와해되면서 사퇴하게 되었다.
9월 12일 평양 산수소학교에서 '인민 정치위원회'가 무장한 소비에트 연방군의 감시 속에 개최되었다. 10월 7일 조만식은 평양에서 '북조선 5도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스승 유영모의 동창이자 친구인 조만식과 안면이 있던 함석헌은 이날 조만식을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회상하였다.
해방 직후의 정국 수습
1945년 가을부터 전국의 지방의 농민연맹지국들이 실시하던 3·7제를 반대했다. 1945년 9월 21일 날짜로 소련은 민주정당, 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초를 둔 부르주아민주정권을 창설하라고 공식적으로 지시를 내린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민족주의자가 필요했는데, 민족주의자 인사들은 대부분 월남했고 북조선 지역에는 거의 남아있지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민족주의자는 조만식뿐이었다. 조만식은 '나는 노린내 나는 소련군이 싫다.'고 공언할 정도로 배타적인 민족주의자였다. 소련군정은 직접 나서지 못하고 김일성과 최용건을 통해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라고 권유했다. 9월 27일에는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는 3·7제를 적용했다. 조만식은 항의의 뜻으로 이틀 동안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인민위원회가 자본가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인민의 참여에 기초해서 밑으로부터 정권기관을 수립해 나가고 나중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답변했지만, 조만식은 “12월1일 이전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서 외국군대의 철수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김일성이 점령군의 철수를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1945년 10월 28일 북조선5도행정국이 설치되자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11월 3일 조만식은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뜻에서 민족·민주계열이자 최초의 개신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 선출되었다. 1945년 10월 조선민주당의 정강에서 조만식은 친일파들의 즉각적인 해임 조항에 반대했다. 당원 대부분은 조만식의 인품과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순수한 염원을 보고 입당하여 당원이 되었다. 특히 평안남도에서 압도적이었던 보수적인 미국식 장로교도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획득하고 있었다. 조만식은 광복 당시 북조선 지역에서 유력한 지도자였고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안에는 찬성했으나, 소련 측에서 후견제로 표현한 신탁통치안에 대해서는 강력히 반발했다. 만일 조만식이 협력한다면 조선 정부의 고위직으로 옹립하고 김일성을 군부에만 맡기겠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했다.김일성도 1945년 12월 말 이후 빈번하게 조만식을 방문하였으며, 조만식의 오랜 제자인 최용건은 조만식을 19번을 찾아가 설득하였지만 조만식은 끝내 모스크바 의정서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였다. 미군이 기록한 1948년 5월 남북협상차 방북후 귀환한 "김구, 김규식이 발표한 공동성명(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1948-05-06)"에도 "양인 모두 조만식을 만나지 못했는데, 그를 친일 반역자로 낙인찍어 재판에 회부할 서류들을 마련중으로 보였다 (Both reported that they did not see Cho Man Sick, against whom dossier is apparently being compiled, for possible trial, as died in wool pro-Japanese traitor.)"고 하였다.
북조선은 내외 방문객들에게 조만식이 고급호텔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이는 명백한 연금이었다. 조만식이 물러난 조선민주당 위원장에는 빨치산파 최용건이, 부위원장에는 홍기주가 선출되었다. 이렇게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쥠으로써 반탁운동의 중심이던 조선민주당은 찬탁의 거점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정계 축출 이후 >> = 연금생활 =
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전쟁 때까지 투옥되어 있었다. 1월 23일 김일성은 조만식을 반동으로 규탄하고 조선민주당을 접수, 2월 24일 최용건을 북조선민주당 당수로 임명하였다.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조만식은 김구, 김규식, 이승만,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미군정청의 브라운 소장이 방문하자, 그는 자신을 방문한 미군정청의 브라운에게 "나는 북한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 하겠소." 라며 월남권유를 거절하였다.
1946년 2월 9일부터 2월 11일까지 북조선을 방문한 여운형과 신탁통치 관련 안건에 관해 협의했다. 북조선의 저명 인사들은 조만식에게 월남할 것을 권하였지만 그는 '이북 동포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나 혼자만 월남할 수 없다'며 듣지 않았다. 조선민주당은 당수인 조만식이 연금상태에 있던 상황에서 부당수인 이윤영마저 월남하자 다른 부당수였던 최용건에 의해 장악되었다. 10월 남한 미군정의 경제고문 번스(Authur C. Bunce)는 평양 방문기간 중 조만식을 만났다. 소련군은 미군정 대표단의 대인접촉을 극심하게 차단했는데 예외적으로 허용해 주었던 것 같다.
1950년 6월 10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보름 전에 북조선에서는 김삼룡 및 이주하를 조만식과 38선에서 교환하자고 주장하며, 6월 23일을 협상기일로 제안했다. 이는 북조선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950년 6월 16일 이승만은 북에서 먼저 보내라는 요구를 했고, 6월 18일 북조선은 동시교환을 주장했다. 한동안 “먼저 보내라,” “아니다. 동시에 교환하자”라는 공방을 되풀이하였다.
죽음
1950년 5월 16일 북조선 당국이 조만식을 남쪽에서 활동 중 체포되었던 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이승만은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북조선이 고당선생을 먼저 보여주길 원했으나 북조선은 동시교환을 주장하여 결국 결론없이 끝이 났다. 한국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 15일 조만식은 북조선 내무성 안에서 일단의 내무서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정황은 비슷하나 총살된 날짜가 10월 18일이라는 설도 있다(박길룡 증언). 소련 출신으로 김일성의 통역과 북조선 외무성 제1부상을 지내다가 1959년 소련으로 돌아갔던 박길룡 등의 증언에 의하면 조만식은 1950년 10월 18일 퇴각 중이던 북조선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대동강변 내무성 정보처에서 한규만 소좌 등에 의해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공군과 함께 북조선 당국이 다시 평양에 들어온 이후, 그의 죽음은 유엔군 및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라고 주장된 바 있다. 이로보아 당시 미군도 조만식의 생사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없었던 것 같다.
사후
1970년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이 추서되었다.
1965년 '고당의 날' 기념준비위원회가 주최한 '고당경모회'행사가 거행되었다. 1966년 평남민보사 발행으로 일대기인 <고당조만식>이 발간되었다. 1976년 1월 21일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초대 회장 한경직(韓景職), 상임위원장 박재창(朴在昌))가 창립되었다. 1976년 12월 7일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1992년 10월 20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도 동상이 건립되었다.
1991년 11월 5일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열린 고당선생 추모-안장식때 시신 대신 유발이 안장되었다. 6.25사변 전에 강제노동소로 끌려간 후 그는 질병으로 남평양의과대학병원에 옮겨졌고 다시 미림리에 있는 치안국에 이감된 이후 소식 불명이다. 전선애가 월남할 때 데려온 자녀들 중 조연흥은 조선일보 전무와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평가 >> 정치노선
조만식의 사상이나 정치노선에 대해서는 반공주의 성향보다 중도우파 성향에 가까웠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과 무신론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사회주의 사회정책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는 중산계급의 입장만을 대변하려 한 기존의 보수 우파와 달리, 그는 일찍부터 도시서민과 소농민의 입장을 폭넓게 대변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외모
작은 체구에 무명 두루마기를 주로 입었는데 함석헌의 묘사에 의하면 무릎 을 왔다갔다 했다고 한다. 머리는 박박 깎고 물 수 물 얽은 얼굴에 수염도 별로 없었다. '조만식의 징병 호소 의혹'은 후에 해방정국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당에서 당시 민중들로부터 많은 신망을 얻었던 그를 '민족반역자'라고 선동하여 일방적으로 정치적 악용으로 몰아붙였으며, 조선민주당이 조만식에서 최용건으로 바뀔때 정적 숙청과 비판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친일청산 문제 연구가인 김삼웅(전직 독립기념관장)은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에서 이 학병권유문 글이 매일신보 평양지사장 고영한 등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고 규정짓고 있다. 그러나 고당은 실제 일제말기 총독부로부터 끊임없이 감시와 협박을 당하기만 했었다. 즉, 고당 조만식의 '친일 의혹설'은 사실과는 전혀 다른 '이름 도용'된 것이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조만식의 정치적 성향과 그가 사회주의 정책에 대해 가졌던 입장은 어떠한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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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조만식의 정치적 노선(성향)과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태도를 묻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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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본문에서 조만식의 정치 노선과 사회주의 관련 언급을 찾는다.
- 조만식의 사상이나 정치노선에 대해서는 반공주의 성향보다 중도우파 성향에 가까웠다.
-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과 무신론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사회주의 사회정책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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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정치 성향(중도우파)과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입장(호의적)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구절을 선별한다.
- 반공주의 성향보다 중도우파 성향에 가까웠다.
- 사회주의 사회정책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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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두 정보를 결합하여 정치적 정체성과 구체적인 정책 태도를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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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조만식은 중도우파 성향을 띠었으나, 사회주의의 유물론/무신론은 반대하고 사회정책에는 호의적이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 중도우파 성향에 가까웠다.
- 사회주의 사회정책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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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명확하고 구체적인 문장으로 답변을 작성한다.
- 중도우파 성향에 가까웠다.
- 사회주의 사회정책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조만식의 정치 노선은 반공주의 성향보다는 중도우파 성향에 가까웠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과 무신론에는 반대했으나, 사회주의 사회정책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조만식의 정치 노선은 중도우파 성향에 가까웠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과 무신론에는 반대했으나 사회주의 사회정책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