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장조(莊祖, 1735년 2월 13일(음력 1월 21일) ~ 1762년 7월 12일(음력 윤 5월 21일))는 조선의 왕세자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영빈 이씨이다. 정조의 아버지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heading>개요 </heading>
성은 이(李), 이름은 선(愃),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생후 1년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49년(영조 25년) 어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나 노론, 부왕과의 마찰과 정치적 갈등을 빚다가 1762년(영조 38년) 어명으로 뒤주에 갇혀 아사하였다.
사후 지위만 복권되었고, 양주 배봉산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아들 정조에 의해 수원 화성 근처 현륭원(융릉)에 안장되었다. 정조 즉위 후 장헌의 존호를 받았다.
정조는 재위 중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노론계열의 반발로 무산되고 만다. 한편 부인 헌경왕후는 후일 저서 한중록에서 그가 의대증과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진술했고, 실록에도 그의 병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우울증이나 화병 같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시호와 존호는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윤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였다가 후에 고종 때 국왕으로 추존되면서 장종(莊宗)의 묘호를 더하여 장종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莊宗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이라고 하였다. 대한제국 때 황제로 격상되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 비교적 근래의 무속 신으로, 무속 신앙에서 모시는 신의 한 사람으로 숭배되었는데, 이때의 호칭은 뒤주대감이었다.
정비는 후에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이다. 1736년 3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는 영조의 맏아들이며 이복 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었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었으므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heading>세자 시절 </heading>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다. 8세 때는 직접 친필로 동몽선습 등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베끼기도 했다.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10세 때 참봉 홍봉한의 딸 홍씨를 간택하여 혼인하였다. 딸이 세자와 가례를 올린 뒤 홍봉한은 과거에 급제하고, 홍봉한은 과거 급제 후 10년도 안돼 종2품으로 승진하여 광주부윤이 되는 등의 출세가도를 달렸다.
부왕 영조는 자신이 무수리의 자식이라 갖게 된 한이 있어 아들 사도세자에게서는 무수리의 자식스러운 모습을 결코 보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는게 세자의 도리라고 해서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이상궁과 한상궁이 칼과 칼집을 가지고 와 전쟁놀이도 하였다. 나이 어린 세자가 노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사도세자는 자기 어머니인 영빈 이씨한테 전쟁놀이를 하였음에도 소학과 학문을 하였다고 거짓을 고하는등 날이가면 갈수록 거짓이 심해졌다. 이를 안 영조는 매우 분노하였으며 몸소 저승전까지 가서 사도세자에게 꾸중을 했다고 한다. 영조는 이상궁과 한상궁을 추궁하는것을 마치지 않고 호된 형벌을 하여 궐 밖으로 내치라는 어명이 떨어졌고 결국 이상궁과 한상궁은 형벌을 받다 죽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의하면 이 일로 인해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극심한 불신과 가혹한 꾸중을 들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고 하고 영조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으며 영조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청심환을 먹지 않고서는 영조 앞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였으며, 그 상태에서 영조가 무슨 말을 하려고만 해도 곧바로 기절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하면 이는 공포증과 광증(狂症)으로 표출되었다고 한다.
15세가 되는 1749년(영조 25년) 승명대리(承命代理)로 대리청정(廳政)을 시작했다. 영조는 세자를 심히 못마땅히 여기면서도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까닭으로 세자에게서 대리청정을 거두지 않았다. 영조로부터 칭찬이나 격려는 커녕 호통과 때로는 폭설을 들으면서도 세자는 세자된 책임으로서 대리청정을 수행하였다.
1750년 혜경궁 홍씨로부터 첫 아들인 세손 정(琔)이 태어난다. 세손 정의 출생으로 갈등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영조는 새로 태어난 세손에게 각별하였다. 남자가 귀해진 왕실에서 그것도 늘그막에 본 귀한 손자라 퍽 이뻐하였고, 사도세자는 아들인 세손을 방패 삼아 영조의 불호령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라 전해진다. 그러나 세손이 유아임에도 병을 앓았고, 영조는 세자가 세손을 제대로 보양하지 못 함이라며 다시 세자에게 칼날을 세웠고 둘 사이는 다시 어긋나기 시작했다. 결국 세손 정은 생후 3년만에 요절하였고, 세자는 부왕과 갈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1752년 둘째 아들 산을 출산한다. 한편 세손 정을 각별히 아꼈던 영조는 어린 세손의 장지와 묘비문, 행장을 직접 지어서 남기며 애통해하였고, 둘째 세손 산을 원손이나 세손에 책봉하는 것도 의소세손의 3년상을 마친 뒤에 하도록 했다.
영조가 귀애하던 화평옹주의 상 중에 태어난 터라 영조는 혜경궁 홍씨의 출산을 도운 영빈 이씨에게도 책망 할 정도로 아기를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이에 세자는 나 하나도 버거운데 아이는 어찌하나 한탄했다고 한다. 이 아이가 후일의 정조가 된다.
<heading>대리청정 기간 >> [[대리청정]] </heading>
1752년(영조 28년) 훗날 정조가 될 세손이 태어난 해 영조가 병석에 눕자 사도세자는 부왕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세자는 노론의 의견을 일방 듣지 않고 소론도 일부 등용하였다. 이인좌의 난과 관련하여 소론 온건파 이광좌 등의 처벌, 추탈을 요구했지만 세자는 거절하였다. 노론은 영조에게 세자가 잘못된 정치관을 갖고 있다고 고해바쳤다.
영조가 약내를 맡고는 이런 저런 흠을 잡아 면박을 주며 물리치자 세자는 밖에 우두커니 서서 미동도 하지 아니했다. 이에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이를 거절하고 이것으로 둘째 세손의 탄생으로 인한 화해의 기미는 날라가고 만다. 그는 자신의 후견세력이자 신뢰할 곳으로 처가인 홍봉한 가문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가학증의 대상이 점차 확대됐다. 후궁은 물론 아내인 혜경궁 홍씨까지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시강원에서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을 쫓아가 공격하려고 했다. 영조가 술을 마셨다고 의심했을 때였다. 아마 시강원 스승들이 일러바쳤다고 생각한 듯하다. 죽기 직전에는 생모 영빈까지 죽이려고 했다.. 한편 이 날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밤에 대신들이 입시한 상태에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양위를 발표하였다가 사도세자가 기절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빙애를 구타할 때 세자는 빙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돌이 갓 지난 왕자 은전군(恩全君)도 칼로 쳤다. 그리고 그는 칼 맞은 은전군을 문밖 연못에 던졌다.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수은묘(垂恩廟)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려 국왕의 생부로서 존대했다. 정조는 경모궁안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항상 아버지의 사당을 바라보게 하였다 한다. 이어 수덕돈경(綏德敦慶)의 존호를 올리고, 1784년 홍인경지(弘仁景祉)의 추가 존호를 올렸다. 1789년 10월 7일 정조는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국왕의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지었다. 정조는 생전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노론의 반대와 반발에 부딛쳐 무산되었다. 결국 고종 때 가서야 그는 왕으로 추존된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추존하려 시도했으나 여러번 반발과 반대에 부딛쳤다. 금등 문서를 공개한 뒤에도 사도세자 추존 상소문은 계속 올라왔고, 정조는 사도세자 복권 여론, 사도세자 추존 여론을 청하는 상소에 대해 읽어보고 비통해하면서도, 그들을 처벌하여 영조의 유지를 지켰다. 그러나 정조는 못내 아쉬워하여 서유린(徐有隣) 등에게 사도세자를 추존하고 싶어하는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이는 서유린의 아들 서준보(徐俊輔)와 증손자 서상조(徐相祖)에게도 전해졌다. 순조 때에 일각에서 사도세자 추존 여론이 나왔다가 오래된 일을 다시 꺼낸다며 거절당하면서 잊혀졌지만, 1855년(철종 6) 서준보가 사도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1899년 8월 3일 서상조가 다시 사도세자를 추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이 최종적으로 수락하게 된다.
<heading>황제 추존 </heading>
1899년(광무 3년), 고종은 개국 시조인 태조와 자신의 4대 조상인 장종(사도세자), 정조, 순조, 익종(효명세자)을 소급하여 황제로 추존하였다. 이때 장종의 묘호를 장조(莊祖)로 개칭하였다.
<heading>저서 >> 가족 관계 >> 부모 >> 왕비 >> 후궁 >> 왕자 >> 왕녀 >> 기타 </heading>
아들 정조는 부왕 영조의 명에 따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는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청나라에 상주하여 시호까지 받았으나 못내 못마땅해 했다 한다. 그는 사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였는데, 1800년 정조 사후 그의 묘소 아래에 매장되었다가, 현재의 건릉의 위치로 옮겨졌다.
그는 한국 민간과 무속에서 신으로도 숭배되어 군왕신(君王神)의 하나로도 모셔진다. 무속신으로서의 호칭은 뒤주대감이다. 그가 뒤주에 갇혀 죽은 것에서 연원하는 호칭이다.
화완옹주를 근친상간한 것은 사도세자를 모함하기 위해서 화완옹주 자신이 거짓으로 지어내어 영조에게 고했다는 논란이 존재한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장조(사도세자)가 대한제국 시기에 거둔 지위의 변화와 그 과정에서 부여된 묘호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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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장조의 대한제국 시기 지위 변화와 당시 사용된 묘호를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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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대한제국 시기 장조의 지위 격상 및 묘호 변경에 관한 정보를 추출한다.
- 대한제국 때 황제로 격상되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
- 이때 장종의 묘호를 장조(莊祖)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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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지위 격상(황제)과 묘호(장조)에 관한 구절을 선별한다.
- 대한제국 때 황제로 격상되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
- 이때 장종의 묘호를 장조(莊祖)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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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대한제국 시기에 황제로 격상되었으며, 묘호는 장조로 개칭되었다는 사실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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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장조는 대한제국 때 황제로 격상되었으며, 묘호는 장조로 개칭되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 대한제국 때 황제로 격상되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
- 이때 장종의 묘호를 장조(莊祖)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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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맞춰 지위 변화와 묘호를 명확히 기술한다.
- 황제로 격상
- 장조(莊祖)로 개칭
최종 답변 (final_answer)
대한제국 시기에 장조는 황제로 격상되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으며, 묘호는 장조(莊祖)로 개칭되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장조는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로 격상되어 묘호가 장조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