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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document_id A22062320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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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2일 ~ 1938년 3월 10일)는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그의 사후 1988년 3월 21일, 24일 도산 안창호 선생이 공부한 구세학당 , 즉 경신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에 소속한 장로교회 학교)에서 그에게 명예 졸업장이 추서됐다.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며, 본관은 순흥, 호는 도산(島山), 종교는 개신교이다. 구한 말 만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판이라 생각하여 1899년(광무 2년) 점진학교, 1908년(융희 2년) 대성학교, 1926년 중국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사령관을 지낸 항일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 선생과는 동성동본 친족척이기도 하며 1938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간경화를 비롯한 폐렴과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 복막염 및 피부염과 소화불량 등의 합병증으로 타계한 그는 생전에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 재미한인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1919년 4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주도하였다. 1921년부터는 임시정부 창조론과 개조론이 나뉠 때 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된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미국의 한인 교포사회의 지도자였던 그는 박용만, 이승만, 서재필 등과 경쟁, 갈등관계에 있기도 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 제국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형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소화불량과 간경화, 폐질환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합병증으로 출옥 직후 사망한다. 활동가로서의 의의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무력투쟁론, 민족개조론, 외교독립론으로 나뉠 때 민족개조론을 주창하였으며, 민족개조론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 의하면 스스로 힘과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기반으로 할 때만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또한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여 경제적, 사회적인 실력을 길러야만이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어 교육을 통한 교육 입국론을 제창하여 각종 학교의 설립과 양성에 노력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그의 실력 양성론은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 송진우, 안호상, 조병옥, 김성수 등에게 두루 영향을 주었다. 웅변술에 뛰어났으며, 연설과 웅변에 두루 능통하였다. 여러 청년들을 감화시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했다. 한편 그는 이상적인 정치인으로 유길준을 지목했다. 다른 이름은 창호(昌鎬)이고, 자는 치삼, 호인 도산(島山),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별명은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도산대로(島山大路)와 도산공원은 그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 생애 >> 생애 초기 >> 출생과 가계 도산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江西) 초리면 7리 봉상도(도롱섬)에서 1878년 11월 9일 농부인 순흥 안씨 안흥국(安興國, 족보상 이름은 안교진(安敎晋)과 제남 황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안치호(安致昊)와 형이 한명 더 있었고, 아래로는 그가 6세 때 여동생 안신호(安信浩)가 태어났다. 선대는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공조참의를 지낸 안종검의 17대손으로, 세조 때의 재상 안지귀, 중종대의 정승 안당은 그의 방계 선조들이었다. 안중근, 안공근 일가는 안종검의 형제인 전라도관찰사 증 병조참판 안종신의 후손으로 역시 그의 먼 친족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계는 몰락하여 평안남도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의 처음 이름은 치삼이었다. 그러나 10세가 되어 학교에 다닐 무렵 이름을 창호로 개명하였다. 할아버지 안태열(安泰烈)은 관직이 통덕랑에 머물렀고, 가세는 더 기울어서 아버지 안흥국은 관직을 지내지 못하고 가난한 농부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12세 때 아버지 안흥국을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안태열의 손에 자랐다. 9세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조숙했던 그는 서당에 함께 다니며 공부하던 몇년 연상의 필대은(畢大殷) 등과 함께 국내·외 서울서 결혼식을 올린 뒤 함께 도미한 이후 공립협회 시절의 5년간, 국민회 시절의 8년간뿐이었다. 1919년에 상해로 간 뒤엔 가정을 다시 돌볼 기회가 없었는데, 1926년에 잠시 미국에 들렀을 때 로스앤젤레스의 YMCA 도산 송별식장에서 도산은 자기 가족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 외에도 1904년 의친왕, 정재관(鄭在寬) 등과의 공립협회(共立協會) 창립, 1909년 김좌진·이갑(李甲) 등과의 서북학회 창립을 하였고 또한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신민회, 대한협회 대성학교 설립 등을 위해 서울과 평양 등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했다. 도산은 탁월한 웅변력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곤 하였다. 을사 보호 조약 이후 그는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유길준의 계몽 강연 활동에 감명받아 깊이 공감하게 된다. 이후 그는 실력양성을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며, 민중들의 의식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독립운동과 사회 활동 1907년(광무 10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한 강연에 참여해 연설을 하였는데, 그의 연설을 듣고 감동받은 여운형·여운홍 형제와 조만식은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기로 한다. 그런데 대성학교의 아침 체조시간은 군사훈련을 방불케 한다고 알려져 당국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각 사립학교에서도 체조시간을 강건한 신체와 정신을 단련하는 과목으로 중요시 하고 있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어서 많은 학생들과 교육자들, 한국통감부조차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됐다. 어느 날 대성학교 학생들은 체육 수업 시간에 운동장에서 곤봉을 둘러메고 '행보가'를 부르며 행진하던 학생들은 '일본의 무력 앞에 힘없이 쓰러지는 망국의 비운을 눈앞에 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강병이나 군대는 이미 해산되어 강병정책의 수행이 불가능하니 학교교육의 체조시간을 통해서나마 이러한 민족적인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며 우렁찬 기상을 선보였다. 또한 안창호는 가끔 학생들에게 야간에 비상소집령을 내려 험산준곡 이나 공동묘지가 있는 산에 올라가게 하여 담력을 기르게 하기도 하였다. 한국통감부는 이를 두고 눈 덮인 광야나 폭염을 가리지 않고 전술강화훈련을 시키고 있다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고,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는 사립학교의 병식교련을 두고 통감부와 수시로 마찰을 빚게 되었다. 한일병탄 전후 1909년 청년학우회의 창설에 가담하였으나, 같은해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경성부 용산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수감당하였다. 그러나 혐의점이 없어 곧 풀려났다. 제2차 도미 = >> 흥사단 창설과 독립운동 그는 한인 개개인을 선비처럼 만든다는 유길준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여 흥사단의 부활을 준비하고 청년을 규합하였다. 이는 국민회 활동과는 별도로 추진하였다. 1913년 그는 자신이 세운 청년학우회를 기반으로, 유길준의 흥사단을 재건하였다. 흥사단은 국내에서 그가 세웠던 청년학우회와 유길준의 흥사단의 취지를 계승한 것으로 민족운동의 간부를 양성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훈련단체였다. 흥사단은 미국에 본부를 두었으며 3·1 운동 후에는 중국과 일제 강점기 조선에도 회원을 확보하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국민회, 흥사단 활동 그러나 국민회의 주도권을 놓고 이승만, 박용만과 경쟁하게 되면서 국민회 내에는 다시 안창호파, 이승만파, 박용만파로 다시 사분오열되고 만다. 국민회의 파벌다툼이 심해지자 서재필과 정순만은 한발 물러서서 방관하게 된다. 1913년 자신이 창설한 청년학우회와 유길준이 창시한 흥사단을 통합하여 흥사단을 재창립하였으며, 발기인은 전국 8도를 대표하는 25인의 대표자를 지명하였다. 이후 박용만, 정순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4년 대한인국민회의 인가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 캘리포니아 주지사로부터 정식 사단법인(社團法人) 인가를 받았다. 이때 로스앤젤레스로 가족과 이주하여 LA 한인사회 활동과 국민회 조직 정비 활동에 착수하였다. 1917년 송종익, 임준기 등과 함께 로스엔젤레스에서 북미 실업주식 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주로 캘리포니아 관내와 멕시코 교민사회, 캐나다 등을 방문하며 대한인국민회 조직 운동을 강화한다. 1918년말, 1919년 4월에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의 대표자로 이승만, 서재필을 파견하였으나 미국 국무성에서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실패하였다. 임시정부 참여 =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부 총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국무총리 대리에 선출되었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임시정부 내무부총장인 안창호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 참석 중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로부터 내무부 총장에 선출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안창호도 연사로 참여하였다. 그 뒤 여러 곳 각지에 선출된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일은 안창호의 주도하에 추진되었다. 5월 25일 미국으로 출국, 그날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아래의 조건을 이렇게 제시했다. 자신이 맡을 수도 있었으나 기호파의 반발을 예상한 그는 다른 사람을 수반으로 하고 자신은 내무나 실무부서 자리를 원하였다. 임정에서는 그의 조건을 수락하였고 그는 바로 취임하였다. 임시정부 활동과 사퇴 = 1919년 도산은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서 나랏일을 보았다. 모두 그를 대통령 대리의 후보로 추천하였다. 도산은 그 자리를 끝내 사양하였다. 그러나 결국 도산을 대통령 대리로 선정하였다. 그가 보기에 한국이 문명개화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실력을 갖춘 인재를 키우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창호는 “우리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자신이 왜 인물될 공부를 하지 아니하는가?”, “개인이 제 민족을 위해서 일함으로 인류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으며, 민족이 천대받을때에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라고 말하며 기독교 믿음에 뿌리를 둔 애국심을 고취하는 설교를 하였다. 상하이의 공산주의자들이 도산을 비판하다가도 하숙비가 떨어지면 도산을 찾아왔다. 그런데 그들이 찾아오 안창호는 시계라도 풀어서 주었다. 구연흠(具然欽) 같은 공산주의 운동가는 자기 딸의 취직을 도산에게 부탁할 정도로 도산을 존경했다. 상하이 재방문과 국무령 낙마 = 안창호는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 따는 일을 계속 하다가 삼일운동으로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설립되려하자 모은 성금을 가지고 상하이로 떠났다. 1924년 중국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하고, 북경에 ‘동포에게 고하는 글’ 작성하여 보냈다. 1925년 미국으로 잠시 돌아왔다가 1926년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 1928년 민족유일당운동에 동참하여 이동녕, 이시영, 김구 등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는데 참여하였고, 대공주의를 제창하였다. 1926년 5월 3일, 그가 상하이로 도착하기 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를 국무령으로 선출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5월 16일 상해로 돌아온 뒤 그는 국무령직에 취임하지 않았다. 안창호가 국무령을 사퇴한 배경에는 임시정부 내 기호파의 반발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직계와 이승만을 지지하던 조소앙 외에도 기호파 계열은 그의 국무령 취임을 극렬 반발했다. 5월 임시의정원에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김규식은 기호파는 아니었으나 기호파와 함께 연대하여 안창호의 취임을 반대했다.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지 13일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7월 임시의정원의 집정 최창식(崔昌植)에 의해 국무령으로 추대된 홍진(洪震)이 내각을 구성했을 때에 기호파인 김구, 조소앙, 중가파의 안공근, 오영선 등이 입각을 반대하여 결국 안창호가 내각 구성을 도왔다 한다. 민족 개조론과 이상촌 건설 추진 독립운동의 방략을 놓고 무장투쟁론, 외교독립론, 민족개조론으로 나뉘었을 때 안창호는 민족개조론을 주창하여 실력의 양성을 역설하였다. 그의 민족개조론은 뒤에 이광수, 안재홍, 김성수, 송진우, 조만식, 최남선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광수는 그를 찾아와 활동을 보조하기도 하였고,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에도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1923년부터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될 것을 예상, 그는 대독립당 (大獨立黨) 창당 운동과, 독립 운동 근거지 겸 자원 조달처, 한국인 이민자들의 정착촌 등 복합적 목적의 이상촌(理想村) 건설 계획을 세웠다. 1924년에는 경제적 자원을 마련하고자 북중국 화북 지역과 만주 방면을 답사, 시찰 여행하며 이상촌 후보지를 탐사하고 부동산 등에 토지를 물색했으나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바로 남경에 동명학원 (東明學園)을 개설한다. 그 뒤 미국에 건너가 서재필, 이승만, 박용만, 정순만 등을 면담하고 재미 한인사회와 국제정세의 동향을 파악하고 1926년 다시 중국에 건너가 가을부터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며 이상촌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적당한 장소도 찾지 못하고, 비용 마련도 어려워서 실패하고 만다. 1927년 길림성에서 군사 행동 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의 결성을 토의중 권총과 칼, 장총 등 무기들의 반입을 수상하게 여긴 중국 경찰의 추적으로 동지 200 여명과 함께 중국 길림성 경찰에 체포, 길림성 경찰청 감옥에 감금되었다가, 중국내 사회 여론과 중국내 반일주의자들의 석방 탄원, 중국 국민당 정부의 연락 등으로 20일 만에 석방되었다. 바로 미국으로 출국했다가 배편으로 하와이를 거쳐서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1928년 이동녕, 김구, 이시영, 조소앙 등과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데 참여하였다. 1930년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을 재결성하는데 참여하였다가 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에서의 이상촌 계획을 단념하고 난징에서 토지를 매수하였다. 대독립당 운동 추진과 실패 1926년 5월 말 상하이로 간 안창호는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규합하는 유일정당 운동인 대독립당운동(大獨立黨運動)에 앞장섰다. 1924년경부터 국내외에 걸쳐 좌우합작론이 제기되었으나 곧 묻혔고, 산발적으로 논의되는 데 그치던 좌우합작문제를 중국과 만주에서 본격적인 실천운동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도산이었다. 상하이에 도착 후 1개월간 민족파, 좌파, 아나키스트 인사들과 접촉한 그는 그해 7월 8일 140명의 각 파 지도자를 모아 '임시정부 문제와 우리의 혁명운동에 대하여'라는 강연을 시작으로 각 정파의 합작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각 파 간에 이견이 심하여 그의 대독립당운동은 좌절되고 만다. 안창호의 주도로 시작된 좌우합작 운동은 한동안 활발히 추진되다가 실패로 끝나, 1928년 중국의 한국독립운동가들은 민족주의자들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의 한국 독립운동자동맹(韓國獨立運動者同盟)으로 각각 결집하였다.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한 안창호와 그의 측근들은 이동녕 계열(기호파, 임정계)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28명과 함께 한독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안창호는 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정당강령 기초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대공주의(大公主義)론을 한국독립당의 강령에 추가하였다. 그러나 안창호의 권고에도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에는 가입했지만 임정 참여를 거부하는 인사들이 존재하였다. 1932년 그가 국내로 압송된 후 한국독립당 중 흥사단계열과 서북 계열은 상당수 이탈하고 임정은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되었다. 필리핀 이상촌 건설계획 좌절 1928년부터 그는 중국과 만주 밖에 이상촌을 건설할 계획을 세운다. 1929년 2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일제가 목을 죄어 오던 상하이와 만주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독립운동 거점 개척을 시도했다. 안창호는 만주의 한인들을 필리핀으로 대규모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고 필리핀 이민국에 찾아갔다. 중국과 만주의 마적단, 일본의 경찰과 밀정, 조선총독부의 경찰, 독립운동가를 사칭하는 강도단의 출몰에서 만주 동포들을 구제할 방안으로 그는 만주 이주민들의 필리핀 이주를 위해 마닐라 등지의 적당한 지점을 물색하는 등 2년간 노력하였다. 그런데 “일본 여권을 갖고 와야 하고, 1인당 50원의 지참금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 필리핀 외무부 당국이 내건 조건이었다. 당시 50원은 쌀 5가마 값으로, 노동자 1명 월급이 쌀 한두 말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할 때 너무 큰돈이었고, 일본 여권을 얻는 것은 더 어려웠다. 그러자 여운형, 신흥우 등도 독립지사들과 함께 윤치호를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제안하였다고 한다., 일경의 고문을 당하였다. 그의 친구인 윤치호와 안창호를 평소에 흠모하던 김성수는 그에게 영치금을 보내 주었고, 조선총독부에 보석금을 제출하여 석방, 구명 운동을 하였다. 1937년 11월 1일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병세가 심하여 12월 보석을 신청하여 받아들여졌다. 12월 24일 신병으로 병보석 출감하여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하였다. 자신의 전 유산과 전 재산을 대성학교와 이상촌 건설을 위한 토지 매입 등에 헌신하고 평생 가난했던 그는 병원비를 제대로 댈 수 없었다. 윤치호와 김성수, 이광수 그리고 장리욱, 안병욱, 주요한 등이 그의 병원비를 댔다. 그러나 간장염과 고문 후유증으로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병원 입원 중 냉방이었던 때가 있었는데 이때 병세가 악화되었다. 최후 친구인 윤치호와 그를 스승처럼 따르던 이광수가 고급 한약을 보냈지만 여러 병의 합병증으로 고생하여 낫지 않았다. 그의 외조카 김순원과 조카딸 안성결, 그의 제자인 박정호 등 그의 입원 중 시중을 들었으며 나중에는 그의 독립운동 동지인 이갑의 딸 이정희가 거들면서 번갈아가면서 안창호의 시중을 들며 끝까지 지성껏 병간호를 했다. 윤치호와 이광수, 김성수 등은 병원비를 지불했고 수시로 그를 찾아 문안했다. 1938년 그는 혼수 상태에 빠졌는데, 이때까지도 그는 나라를 걱정하며 민족의 실력을 기르고 독립을 준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1938년 초 그는 병상에서 일본 천황 무쓰히토(睦仁, 메이지 천황)를 규탄하는 소리를 일갈하여 병원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병상에서 도산은 선우씨의 손을 잡고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입 안이 마르고 혀가 잘 돌지 않아서 말을 못하였다. 몸이 극도로 수척하여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수염은 희고, 머리의 반은 누렇고 반은 희어 황백색이었다. 물을 숟가락에 떠서 입술에 축여드리니 비로소 말을 하였다. 실력양성론 안창호는 1920년대 내내 독립운동의 진행을 가로막던 고질적인 사상분열을 극복하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사상과 노선 갈등의 극한 대립을 융화 시키고자 그 어떤 주의와 노선으로도 분파할 수 없는 자기 희생의 '대공주의'(大公主義)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는 스스로 힘을 키울수 있을 때만이 민족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실력양성론을 주장했다. 그의 실력 양성론에 이광수, 최남선, 김성수, 조병옥 등이 감화받았다. 안창호는 개인의 당리나 사익보다 사회 전반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민주적 토론절차를 통해 형성된 공론을 중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 나라 수립을 지향하는 중도적 노선을 선호했었다.”라며 거짓과 거짓말이 나라를 망친 길이라고 보았다. 거짓이 만연한 것이 나라를 망친 것이라 진단한 그는 거짓이야 말로 나라를 죽인 원수로 규정하였다. 그는 "나라 일은 신성한 일이요. 신성한 일을 신성치 못한 재물이나 수단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오. 장택상에 의하면 "도산은 어떠한 문제든지,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자기의 의견을 (쉽게) 납득시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한 번은 나이가 한참 어린 나를 데리고 얘기를 하다가 의견이 달라지게 되자, 그 날 밤중에 다시 찾아와서 의중의 말을 들려주며 어떻게 해서든지 꼭 상대방으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어린 생각에도 이 분이야말로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면 반드시 대통령이 될 분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에, 도산 안창호가 주장한 '강산개조론'이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부정적 평가 안창호의 소위 실력 양성론은 적극적 독립 투쟁을 회피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또 LA엔 안창호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도산 안창호 우체국과 도산로가 있을 정도로 미국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특히 청년 계몽운동을 많이 하였다. 원래 문서에서는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쓰여있었으나 청포도출판서의 안창호 평전을 보면, 장남 필립에게 한자와 한글을 가르치고 익히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보적 지식인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 교수는 그를 근대 친미적 부르주아·지식인의 수장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민족개량주의자, 친미주의자'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저서 >> 연보 >> 취미 그는 매일 밤 10시에 취침하고 아침 여섯 시면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태극권이나 검술 운동을 하였다., 그는 조병옥, 장택상, 허정, 윤치영 등을 비롯한 재미 유학생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재미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놓고, 서재필, 박용만, 이승만 등과 경쟁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는 청년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대화와 담론하기를 즐겼다. 가난한 한인 고학생들이 찾아오면 찾아가서 밥부터 사 먹이고, 차비와 숙박비도 지불해주었고, 학생들의 학비까지 직접 건네주기도 했다. 장택상은 그를 대통령감이라 봤고, 조병옥과 이광수, 주요한 등은 그의 감화를 받아 국민회와 흥사단, 수양동우회를 이끌만큼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의 영입 요청을 거절한 것은 허정 등 소수였다. 그러나 허정은 뒤에 이승만 계열에서 활동하면서도 이승만계와 안창호계의 반목과 분열을 조절하기 위해 대화를 주장했고, 서재필을 찾아가 양자간의 중재를 요청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서재필, 박용만 이승만 등과 서신을 주고 받았고, 이광수, 김성수 등과도 수시로 연락하였다. 국내에 있던 윤치호와도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성 관계 경성부의 구세학당에 다닐 당시 안창호는 경성부의 신여성 중에 이상형이 있었다. 그러나 고향에 있던 그의 할아버지 안태열은 그의 동의 없이 자신의 친구 이석관의 딸 이혜련과 중매결혼을 추진하였다. 1896년 동의 없이 일방적인 약혼이 되었음을 알고 할아버지에게 파혼을 주장했으나, 관철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파혼하지 못하고 6년 뒤 이혜련과 결혼하였다. 이후 독립운동과 교민활동을 하느라 아내와 떨어져 지냈으나, 한번도 바람피우거나 사창가에 출입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창가에 데려가겠다는 교포들과 친구들의 제의와 농담을 모두 거절하였다. 사회운동을 하느라 바쁜 남편에게 불평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평생을 함께 한 이혜련 여사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것이다.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구익균의 증언에 의하면 '도산은 늘 양복과 넥타이, 중절모를 깨끗하게 차려 입는 멋쟁이였습니다. 청년, 장년 시절의 안창호는 수려한 외모에 옷을 잘 입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안창호를 연모하여, 그가 아내와 멀리 떨어져 있음과 홀아비로 생활한다는 것을 알고 그를 유혹하였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어느 날엔 최모라는 신여성이 침실로 몰래 들어와서 도산이 자고 있던 침대에 누웠어요. 그러자 도산은 조용히 '불을 켜라'고 말한 뒤에 '이렇게 나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그것을 독립운동으로 돌려라'고 하고는 돌려보냈습니다' 한다. 음주와 흡연 안창호는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술은 1~2잔 마시고 나면 얼굴이 빨갛게 돼서 많이 하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술을 입에도 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담배는 잘 피웠다. 그는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 항상 입에 담배를 물고 있을 정도로 담배를 많이 피웠는데, 내가 '선생님은 왜 다른 건 다 실천하시면서 담배 끊는 것만은 못 하십니까'라고 항상 말해도 끝내 못끊다가 나중에 감옥에 가서야 끊었다.' 석방된 뒤에는 여러 사람들이 잔칫상을 열어 줘서 과식을 한 탓에 위장병에 걸려 트림을 많이 했다 한다. 유길준 숭모 사업 그는 유길준을 애국자이자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로 규정했다. 이후 유길준은 선각자, 계몽의 선구자로 기려져 왔다. [[안중근]]의[[친척]] 꽤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사의 친척이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안창호가 재창립한 흥사단은 어떤 단체들의 취지를 계승하여 구성되었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흥사단의 구성 원천이 되는 단체들의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흥사단의 재창립 배경과 계승 대상에 관한 정보를 추출한다.

    • 1913년 자신이 창설한 청년학우회와 유길준이 창시한 흥사단을 통합하여 흥사단을 재창립하였으며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흥사단이 통합한 두 단체의 명칭을 확인한다.

    • 자신이 창설한 청년학우회와 유길준이 창시한 흥사단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안창호의 청년학우회와 유길준의 흥사단이 통합되어 현재의 흥사단이 되었음을 연결한다.

    • 흥사단은 국내에서 그가 세웠던 청년학우회와 유길준의 흥사단의 취지를 계승한 것으로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두 단체의 취지를 계승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 청년학우회와 유길준의 흥사단의 취지를 계승한 것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맞춰 두 단체의 명칭을 포함하여 답변을 작성한다.

    • 청년학우회와 유길준의 흥사단
최종 답변 (final_answer)
안창호가 재창립한 흥사단은 안창호 자신이 창설했던 청년학우회와 유길준이 창시했던 흥사단의 취지를 계승하여 구성되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흥사단은 안창호가 세운 청년학우회와 유길준이 창시한 흥사단의 취지를 계승하여 민족운동의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재창립된 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