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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상 document_id A220623204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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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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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상(張建相, 1882년 12월 19일 조선 경상도 칠곡 출생 ~ 1974년 5월 14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별세.)은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이다. 본관은 인동(仁同). 아명(兒名)은 장명상(張明相)이고 자(字)는 찬성(贊成)이며 아호(雅號)는 소해(宵海). <heading>생애 </heading> 일본과 미국 유학 후 1916년 신규식의 요청으로 상하이에 건너가 동제사에 참여한 뒤 상하이 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하여 외무부 차장을 지냈다. 그러나 뒤에 임정을 탈퇴, 1920년 말 베이징으로 건너가 국민대표자대회, 고려공산당 등에 참여하고, 임정의 노선에 비판적인 인사들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조직했다. 1922년 1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12월 고려공산당 성립을 위한 꼬르뷰로 임원에 피선되었다. 1923년 베이징으로 돌아와 김성숙 등과 함께 창일당(創一黨)을 조직였다. 이후 잡지 혁명 지의 발간과 편집원으로 활동하다 1926년 10월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1937년 상하이에서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뒤 송환, 일제로부터 김원봉을 유인할 목적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민족혁명당에 가담했고 1940년 임시정부에 재 입각, 임정 국무위원, 학무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1946년 임정을 탈퇴, 근로인민당 부위원장과 민족주의 민주전선 등에서 활동하다가 1947년 여운형이 죽자 근로인민당을 이끌었으며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 기간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의 일방적 협상결정에 반발하여 감금당했다가 홍명희·김두봉 등과의 인연으로 풀려났다. 남북협상의 실패 이후 단독정부에는 불참하였으나, 반대하지는 않았다.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 조각 이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으로부터 내각 입각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나, 한민당 계열로부터 번번히 사상논쟁 시비에 휘말렸다. 한국민주당원을 극도로 미워했던 그는 한때 원내 자유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1954년 호헌동지회에는 참여했으나 민주당 창당에는 불참했다. 1957년 11월 박정호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으나 무죄로 석방,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입건되었다가 풀려났고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사상범으로 투옥되었으나 박정희의 특별 배려로 석방되었다. 사후 1986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처음 이름은 장명상(張明相), 자(字)는 찬성(贊成), 아호는 소해(宵海),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경상북도 칠곡 출신. <heading>학력 >> 생애 >> 생애 초기 >> 출생과 소년기 </heading> 1882년 12월 19일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인동 장씨 참봉 장운원(張雲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장명상(張明相)이고 호는 소해이다. 1883년 집안이 부산으로 이주하면서 그도 부산 좌천동(佐川洞)으로 이사하고 좌천재(佐川齋)라는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얼마후에는 신학문을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던 서당 육영재(育英齋)로 공부하면서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03년 서울에서 황성신문 사장 있던 장지연(張志淵)의 주선으로 관립한성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한편 한성에서 그는 연동교회 담임목사인 게일 (James Gale, 한국명 奇一)을 만났고 그로부터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1888년 한국에 건너와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던 선교사 게일과의 이같은 인연은 후일 그가 미국 유학을 가게 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heading>학창시절 </heading> 러일전쟁 직후 일본에 건너가 1905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에서 수학하다가 그는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 당시 이륭양행 안동지사장 쇼오에게 의뢰하여 거사용 폭탄이 국내로 들어갈 수 있도록 연락, 주선하였다. 1922년 3월 의열단의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 사살 기도 사건에 대해 임시정부가 그 사건이 임시정부와 하등 관계가 없으므로 그들의 행동에 절대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하자 의열단은 임정과의 관계를 철회하고 대신 고려공산당과의 제휴를 통해 자금을 지원받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끊고, 고려공산당과 의열단 사이를 오가며 고려공산당과 의열단이 합작하는데 중재, 협상 역할을 수행하였다. 러시아 볼세비키당 산하의 이르크츠크 공산당 한인지부 간부인 조훈(趙勳)의 권유로 1921년 5월 이르크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동당의 중앙위원 겸 7인 정치부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고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공산당회의에 왕삼덕(王三德), 안병찬(安秉瓚) 등과 함께 한국인 대표단의 한사람로 참석하여 모스크바로 건너갔다. 모스크바에서 소련공산당 레닌을 면담하고 독립운동 지원자금 지원을 약속받았다. 21년 9월에 이르크츠크 재로한인공산자대회(在露韓人共産者大會)에 참가하였으며, 그곳에서 보리스 슈미야츠키를 만났고, 이르크츠크회의에서 의장단으로 사회를 맡았다. <heading> 고려공산당 활동과 사회주의 운동 =</heading> 1922년에는 북경에서 의사개업을 했던 한진산(韓震山)과 손잡고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대외업무를 수행하였다. 같은해 1월 22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극동피압박인민대회(極東被壓迫人民大會)의 참가대표 52인 중 1인으로 선발되어 참석하였다. 같은해 12월에는 꼬르뷰로의 임원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지 않음으로써 고려공산당에는 더 이상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1922년 이승만·정한경이 미국정부에 대해 우리나라를 위임통치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 알려지자 이를 동지와 같이 크게 성토하였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상해에서 각지의 독립운동단체 대표 140여 명이 모여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였던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상하이에 도착, 서부 시베리아대표의 자격으로 국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 22년 6월 베이징에서 상하이 임시정부를 불신임하던 일부 무단파 및 김규식, 원세훈(元世勳), 신숙 등 창조파 세력이 모여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라는 독자적인 정부를 조직하는데 참여, 그는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정부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경고와는 별개로 소련의 후원을 기대하면서 같은해 8월 블라디보스톡으로 갔으나 레닌의 사망, 일로협상(日露協商)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처지가 못되었던 소련정부의 추방조치로 저절로 와해되었다. 1923년 겨울부터 선생은 북경에서 김성숙(金星淑), 장지락(張志樂) 등과 함께 창일당(創一黨) 창당에 가담하고 잡지 혁명(革命)을 간행하였다. 잡지 혁명은 격월로 발간되었고 1926년까지 3년간 계속되었다. 1926년부터 민족유일당 운동에 가담, 1926년 10월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heading>언론, 교육 활동과 의열단 입단 </heading> 1926년 중국 독립기념일인 쌍십절(雙十節) 기념행사에 베이징대학의 초청으로 강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강연내용이 문제가 되어 “중국 인민을 선동하여 국권을 혼란시켰다”는 이유로 중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반일 성향이었던 중국 언론의 변호로 일본 경찰에 넘겨지지 않고 중국정부 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1927년 가을에 출옥하였다. 1927년 10월 28일 민족유일당 운동에 따라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가 창립될때 참여하였다. 유일독립당촉성회는 임정 대표와 좌파 대표를 선발했고 그는 좌파 대표로 참석하였는데, 유일당촉성회는 각지에 집행위원들을 파견하였다. 이때 그는 촉성회의 7인 집행위원 중 1인으로 선임되었으며 대표 조성환(曺成煥)의 요청으로 중국 남부지방에 파견되어 유일당결성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유일당운동은 중국의 국공합작이 붕괴되고, 또 좌우파 세력들간의 견해 차이가 노정되면서 좌절되었다. 이후 김성숙(金星淑) 등과 항일 잡지인 ≪혁명≫지 발행에 참여하였다. 민족주의민주전선 활동에 열정적으로 활동하였으며, 민족주의 민주전선의 전국 순회강연단의 일원으로 자청하여 경상남도, 경상북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일원을 순회하면서 강연활동을 하였다. 한편 장건상은 온건 노선을 취하여, 해방 정국의 좌파 정치인 중 테러나 폭력에 시달리지 않는 몇안되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1946년 8월초부터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조선공산당의 3당이 통합하여 남조선로동당(南朝鮮勞動黨)을 결성하자 그는 남로당에 가담했다가 뒤에 여운형 등을 따라 남로당을 탈당, 여운형을 중심으로 사회노동당(社會勞動黨)이 창당되자 입당하고, 사회노동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남로당의 와해공작으로 사회노동당도 해체되었다. 그는 다시 여운형을 따라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에 입당하였다. 5월 24일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당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서울에서 암살된 이후 그는 근로인민당을 이끌었으며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한편 그는 김구와 김규식을 찾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북행길은 자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으나, 김구와 김규식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방북하게 되었다. <heading>남북 협상 참여 </heading> 1948년 2월 북한 측에서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제의하자 좌우합작파와 좌파를 중심으로 합작 참여론이 대두되었다. 그는 남북협상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삼청장을 찾아가 김규식에게는 북행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온건파와 중도파의 리더인 김규식마저 북한에 올라갔다가 협상이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며 올라가지 말라고 만류했던 것이다. 송남헌에 의하면 장건상과 원세훈 등은 우사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가할때, 김규식의 직접 참여가 장차 정치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김규식의 북행을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규식은 그들과 함께 북행하게 되었다. 1948년 4월 도보로 3.8선을 넘어 입북, 평양의 남북지도자연석회의에 참가하였다. 평양에 도착했을 때 김규식이 나타난 것을 보고 그는 놀랐다고 한다. 남북 협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서 일방적으로 회의 의사를 진행하자 그는 반발하였고, 민주적인 의사 결정에 따르자는 박헌영에게 그 민주적인 의사가 뭐냐며 항의하였다. 남북협상 중 '우리 겨레는 공산주의를 갖고는 살 수 없다. 우리가 근로인민당 운동을 하는 것은 공산사회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이념으로 평화롭게 살려는 데 있다'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한동안 북한으로부터 연금되기도 하였다. 2대 민의원 선거에서 임시의장으로 사회를 주관하였다가, 빨갱이 라는 비판과 친일파 라는 비판을 양쪽으로부터 들어야 했다. 일부 의원들은 빨갱이에게 사회를 맡길 수 없다며 강하게 비판하였고, 장건상은 국회의 평화를 위해 스스로 의장직을 사퇴하였다. 서범석은 그를 '왜놈의 스파이'라며 질타하였다. 중국에서 잡혀 있다가 부산에 와 있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일본 경찰과 교섭하였는데, 그 중 한 경찰관으로부터 김원봉을 홍콩으로 유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경찰관은 서범석의 일족이었다. <heading>진보정당 건설 </heading> 원내 진출 이후에도 한민당 출신 의원들로부터 노골적으로 빨갱이, 빨갱이 동조자 라는 비판과 모욕을 당하던 그는 한민당계열을 심히 미워하였다. 그러나 예외로 장택상과 윤치영 등 이승만의 측근들과는 만나기도 하고, 연락을 주고받기도 한다. 1954년 원내 자유당을 탈당하였고 호헌동지회에 가담하였다. 호헌동지회에 가담하였으나 조봉암이 구 한민당 계열로부터 배척당하면서 민주당 조직에 가담하지 않고 독자적인 진보정당 건설 운동에 참여하였다. 1956년 조봉암 등과 진보당결성추진위원회 조직책으로 활동하였다. 1961년 1월 8일 혁신당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5월 16일 5.16 군사쿠테타 당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혁신계 지도자였다는 이유로 임시정부때부터 같은 동지였던 김성숙과 같이 구속되었으나 박정희의 배려로 병보석, 석방되었다. 그는 박정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그의 탄원이 받아들여졌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정동의 오두막집에서 가난의 찌든 생활을 하였다. 평소 한민당원을 미워하였던 그는 1963년의 대통령 선거 당시 주변인들에게 박정희를 지지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heading>사후 </heading> 가난했던 그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정릉동의 오두막집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974년 5월 14일 92세로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지고 장지는 서울 근교에 있는 신세계공원묘지에 장사되었다. 그 뒤 1980년대부터 복권, 재평가 여론이 등장하여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11월, 국가보훈처로부터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heading>평가 </heading> 정치 한복판에 선 건국초기의 독립운동가이며 사상가라는 평가가 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남북협상 과정에서 장건상이 김구 및 김규식과 보인 태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남북협상 당시 장건상과 김구, 김규식의 행동 및 태도를 비교하여 차이점을 파악한다.

    • 남북협상 참여
    • 김구와 김규식을 찾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북행길은 자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으나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장건상의 태도와 김구·김규식의 행동을 각각 추출한다.

    • 김구와 김규식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방북하게 되었다.
    • 김규식의 북행을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규식은 그들과 함께 북행하게 되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두 집단의 상반된 행동을 보여주는 구절을 선별한다.

    • 북행길은 자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으나
    • 김구와 김규식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방북하게 되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장건상은 북행을 만류하며 자제를 권고한 반면, 김구와 김규식은 결국 북한으로 향했다는 차이점을 도출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장건상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북행을 만류했으나, 김구와 김규식은 결국 북행하였다는 결론을 내린다.

    • 김구와 김규식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방북하게 되었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해 명확한 비교 문장으로 답변을 작성한다.

    • 김구와 김규식을 찾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북행길은 자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으나, 김구와 김규식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방북하게 되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장건상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김구와 김규식에게 북행길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며 만류하였으나, 김구와 김규식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결국 북행하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남북협상에서 장건상은 김구와 김규식의 북행을 만류하였으나 두 인물은 결국 북행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