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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 document_id A22062320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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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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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context)
백용성(白龍城, 1864년 5월 8일 ~ 1940년 2월 20일)은 대한민국 일제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백상규(白相奎)이며 용성은 법호이다. 법명은 진종(震鍾)이다. 전라도 장수군 번암면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전라도 남원군 송동면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6세에 출가하여 해인사로 들어가 선종과 교종을 함께 공부하였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또한 불교를 발전시키려면 농사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함양에 화원과 과수원을 만들었으며, 북간도에도 농장을 만들었다. 저서로는 수심론, 어록 등이 있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에서 불교 대표는 2인이었다. 용성과 용운이다. 용성은 깨달은 스님으로 한용운의 사형이었고, 용운 스님은 독립운동에 사형인 용성 스님을 끌어들이려고 그렇게 노력하였으며, 님의 침묵의 님은 부처님이라는 뜻인데, 독립운동에 참여해 달라는 간청에는 침묵한 채, 참선만 하고 앉아 있는 깨달은 사형에 대해 쓴 것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깨달은 스님으로 알려져 있으며, 불교계에서는 조선 후기의 불맥인 지안 조사가 135년 만에 용성 스님으로 환생하였 다고 전해진다. 일설에는 님의 침묵의 님으로도 알려져 있다. 1940년“사자(獅者)뱃속에 충이 생겨 사자가 쓰러지게 되었다”면서 자신이 곧 열반에 들 것을 예고했다. 독립운동 한국역사에 호국불교(護國佛敎)로 대표되는 고승에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더불어 용성대사도 들어가야 할 것이다. 1919년 2월 27일에는 한용운으로부터 3·1운동의 계획을 전해듣고, 이에 찬동하여 자신의 인장을 한용운에게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 날인하게 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 불교계 대표로 참가했다. 그무렵, 천도교와 기독교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자 자기 몫을 고집하지 않는 無我(무아)의 사상으로 3·1운동 민족대표 33人(인)을 결속시키는데 앞장섰다.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들 것을 제안하였다.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3·1 운동 이후 동북아 국제정세를 운용하는 높은 안목을 발휘해 독립운동의 의지를 더욱 높였다. 불상, 불교에 관련된 유물을 가장해 상해임시정부로 꾸준히 독립운동자금을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1921년 한국 불교 사상 처음으로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했다. 1928년 '조선글 화엄경'을 펴냈다. 당시의 언론은 '세종대왕도 못했던 일'이라고 하였다. 1930년 대각사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3귀 5계를 주어 불자로 삼은 후, 항일운동을 위해 샹하이(上海) 임시정부로 보냈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후, 중국에서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이루어졌다.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장제스(蔣介石), 장쉐량(張學良), 마오쩌둥(毛澤東)을 차례로 만나 대한의사군 무장진격작전을 피력, 지원을 요청했다. 귀국하여 대한의사군을 모집하던 중 안모라는 일제 밀정에 의해 스님의 원대한 계획이 들통나 북간도에 마련했던 독립군의 거소가 완전 파괴됨으로써 21만명의 조·중 무장진격전이 무산되고 말았다. 불교정화사업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일제가 사회 문화 전반에 왜색을 도입하면서 불교에서도 대처승을 인정하는 정책을 펴자 자신이 세운 대각사(大覺寺)를 중심으로 왜색불교 추방 운동에 앞장섰다. 1924년 잡지 불일(佛日)을 박한영과 함께 창간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과 육식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건백서를 두 차례 제출했다.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사원 경제의 자립을 위해 1929년 경상남도 함양에 자급형 농장인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하고 선농불교(禪農佛敎) 운동을 펼쳤으며, 여기서 나온 수익금을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보내기도 했다. 화엄경 등 경전의 한글화 작업과 일요 어린이 법회 개설, 거리 포교 및 찬불가 도입 등으로 불교 대중화와 포교 방법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양복을 입고 금광도 개발하는 등, 절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크게 힘썼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백용성이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수행한 역할과 그 과정에서 보여준 사상적 태도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백용성의 3·1운동 관련 역할과 그가 보여준 사상적 태도를 묻는 질문이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3·1운동 관련 역할: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로 참여, 한용운에게 인장을 위탁하여 서명 및 날인, 태극기 흔들기 제안

    • 자신의 인장을 한용운에게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 날인하게 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 불교계 대표로 참가했다.
    •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들 것을 제안하였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사상적 태도에 관한 정보 추출: 천도교와 기독교의 반목 속에서 무아(無我)의 사상을 바탕으로 결속을 이끎

    • 자기 몫을 고집하지 않는 無我(무아)의 사상으로 3·1운동 민족대표 33人(인)을 결속시키는데 앞장섰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역할(불교계 대표로서의 참여 및 태극기 제안)과 사상(무아 사상을 통한 결속)을 결합하여 정리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백용성은 불교계 대표로서 서명 및 날인을 하고 태극기 사용을 제안했으며, 무아 사상을 통해 민족대표들을 결속시켰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해 역할과 사상적 태도를 포함하여 서술형으로 답변을 작성한다.

    • 자신의 인장을 한용운에게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 날인하게 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 불교계 대표로 참가했다.
    •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들 것을 제안하였다.
    • 자기 몫을 고집하지 않는 無我(무아)의 사상으로 3·1운동 민족대표 33人(인)을 결속시키는데 앞장섰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백용성은 3·1운동 당시 한용운에게 자신의 인장을 위탁하여 불교계 대표로서 서명 및 날인을 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하였고, 태극기를 흔들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천도교와 기독교 사이의 반목이 일어났을 때 자기 몫을 고집하지 않는 무아(無我)의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대표 33인을 결속시키는 데 앞장섰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백용성은 천도교와 기독교 사이의 반목이 일어났을 때 무아(無我)의 사상으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을 결속시키는 데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