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10월 8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일본군 한성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등이 경복궁(景福宮)에 난입하여 건청궁 옥호루 곤녕합 일대에서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를 칼로 찔러 암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heading>명칭 >> 개요</heading>
러시아 제국은 한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조선의 지배를 강화하고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려 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김홍집 등의 친일 내각이 득세하였고, 1894년 7월에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대원군이 재등장하며 갑오개혁이 시작됐다. 이에 명성황후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일본 정부는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하여 명성황후 암살을 명령하였고, 조선 측에서도 흥선대원군,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전 군부협판 이주회, 개화파 문신 유길준, 친일파 송병준의 사위 구연수 등 친일 세력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내통, 협조했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 하에 일본인 낭인들은 조선인 군관들의 비호와 길안내로 경복궁까지 3~5시간 내에 진입했다. 기습적으로 경복궁에 진입한 이들은 궁녀 복장으로 위장한 황후를 찾아내 시해한 뒤, 미우라의 지시로 시신에 석유를 뿌려 소각한 뒤 연못에 던졌다.
사후 100년 넘는 동안 일본은 조선의 분쟁에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해왔지만,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에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작성하고 일왕이 결재한 보고서가 2005년 공개되었다.
을미사변의 범행은 당시 일본공사 미우라 일당이 저질렀지만, 그동안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 배후의 진정한 주동자는 미우라 직전에 공사를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를 비롯한 일본 정계의 최고위 원로(元老 : 겐로)들 및 이토 히로부미 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각료들이었다. 당시 을미사변 실행자들이 일본 정부의 실권자인 원로들에게 보호 받았는지는 그들의 사후 출세 가도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 미우라는 재판을 받고 석방되자 일본 메이지 천황이 직접 시종을 보내 치하하기까지 했다. 을미사변은 매우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한국통사 등에 따르면,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부부는 을미사변이 있기 한 달 전 일본을 다녀온 뒤 왕궁을 방문하여 조선 왕실의 안전을 확보한다고 약속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9천원에 상당하는 선물을 바쳤다고 한다. 당시 내각에서 논의하고 있던 조선 정부에 대한 차관을 지급하기로 이미 결정했다고 거짓말까지 한다. 고종은 이노우에가 너무 진지하여 예방을 소홀히 했다고 한다. 이때의 이노우에의 행동은 일본에 대한 고종과 황후의 경계심을 풀게 하려는 계산된 연극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우익 군인 세력의 거두였던 미우라는 조선에 온 뒤 두문불출하고 불경을 외우면서 지냈는데,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염불 공사’였고, ‘수도승 같다’라는 평을 들었는데, 이는 경계심을 풀기 위한 위장술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모의한 내용은, '첫째 시해의 범행은 일본 낭인들이 맡고, 외관 상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 이 일은 청일전쟁 직후 갑오경장 때 일본 군인의 궁궐 점령을 지휘했던 오카모토에게 맡겨졌다. 둘째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들로 구성한다. 이때 낭인 자객들의 동원은 한성에서 발행하는 일본 신문 한성신보의 사장 아다치 겐조가 맡았다. 구마모토와 후쿠오카 등 규슈 출신 낭인 30여 명과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 편집장 고바야가와 히데오, 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 사사키 마사유키, 기쿠치 겐조 등의 민간인들을 동원하였다. 셋째 일본 수비대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 공사관 소관이다. 그래서 황후 시해에 구스노세 유키히코 등이 참여한다. 넷째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으로 한다.' 이라고 불렀으며, 예상보다 일찍 훈련대가 해산되자 거사 일시를 10월 8일 새벽 4시로 앞당기게 된다. 그러나 바뀐 계획도 차질이 생긴다. 새벽 4시에 작전을 끝내려면 늦어도 새벽 3시까지는 흥선대원군과 낭인들이 경복궁에 진입해야 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공덕리 별장을 떠난 때는 새벽 3시였고, 경복궁에 도착한 때는 새벽 5시가 넘었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된 때는 6시 경이었다. 그래서 많은 목격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한국통사에서는 대원군이 입궐하는 일본인들에게 “오늘의 일은 단지 왕실을 호위하는 것뿐이다. 궁중에서 폭거를 행하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종합하면, 흥선대원군이 황후 시해에 동의했는지 매우 의문이다.
유길준은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최고 지휘자로 지목했다.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으며, 명성황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유길준은 민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였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으며,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윤치호는 암살의 협력자이자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쓰카가 사건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 명성황후는 군국기무처의 일부 급진개화파가 독단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들의 정책을 뒤엎을 기회를 찾았다. 이때 박영효는 단독으로 계략을 세워 왕비 암살을 계획하였다.
박영효는 왕후의 권모와 계략을 두려워 하여 암살을 감행하지 않으면 화근을 근절할 수 없다 생각하고, 1895년 7월 마침내 날짜를 잡아 계책을 정하고 일본에 병력을 요청하였다. 그는 유길준이 자기와 친근하다고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
미우라는 거사 계획서인 〈입궐방략서〉(入闕方略書)를 영사관보인 호리쿠치 구마이치에게 주고, 용산으로 가서 거사 준비를 지시한다. 이에 한성신보 직원들과 낭인들은 칼 또는 총을 들고 용산으로 모였다. 또 미우라는 오기하라 히데지로(荻原 秀次郎)에게 영사관 순사들을 인솔하여 사복에 칼을 차고 용산으로 가도록 지시한다. 아사야마로 하여금 군부 협판 이주회에게 사실을 알리도록 하였고, 이주회가 조선인 몇 명을 규합하여 공덕리로 가도록 했다. 그렇게 그날 밤에 공덕리 대원군 별장에 모인 사람은 공사관 직원, 고문관, 순사, 기자 등 약 60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술에 취한 상태였고 복장도 제멋대로였다.
<heading>궁궐까지의 진입 과정 </heading>
오카모토가 이끄는 일본인 낭인들이 공덕리에 도착한 때는 자정 쯤이었으나, 흥선대원군이 교여를 타고 떠난 때는 새벽 3시 경이었다. 대원군은 그들이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담을 넘어 가서 별장 경리(警吏)를 모두 포박하여 가두고 옷을 빼앗아 일본인 순사들이 덧입었는데, 조선군으로 위장하려 함이었다. 오랜 실랑이 끝에 대원군이 집을 나섰는데, 아마도 일본인들이 대원군을 반강제로 끌어냈으리라 여겨지며, 76세 노령의 대원군이 이 쿠데타에 가담했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엉뚱한 곳으로 갔던 140여 명의 일본 수비대 제1중대가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또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때 경복궁에서는 일본 수비대 제3중대가 광화문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수비대 제2중대장은 훈련대 제2대대를 인솔하고 춘생문(경복궁 동북문) 부근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새벽 2시경부터 미리 와서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다가 광화문 쪽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사방에서 궁궐 담을 넘고 외전의 근정전(勤政殿) 일원을 지나 명성황후가 거처하는 건청궁(乾淸宮) 쪽으로 돌진했다.
윌리엄 다이 장군과 아파나시 사바틴은 이학균 부령으로부터 보고받자마자 일어나 별군관실로 갔으나 2명의 부령과 최소한 6~7명의 당직 장교가 야근하고 있어야 함에도 그곳에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고 사바틴은 증언했다. 또한 고종은 이미 새벽 4시 반 전후로 궁궐이 소란함을 알고 있었으며, 명성황후는 위험한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를 떠나 은신하였으리라 여겨지나 궁궐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리라 본다.
고종은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했다는 급보를 받고 이범진에게 시간을 다투어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에 뛰어가 도움을 요청하라고 명령했다. 이범진은 일본인 순찰을 피해 높이가 4~5미터인 담에서 뛰어내려 궁궐을 탈출하였다. 미국 공사관에 도착했을 때 대궐 쪽에서 첫 총성이 들려왔다고 이범진은 증언했다. 이범진은 미국 공사관을 거쳐서 러시아 공사관을 찾아가 궁궐이 일본군에 포위되었음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틴이 고종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궁전 뜰에서 일본인의 행패를 목격했다. 윌리엄 다이도 시위대를 지휘하면서 궁 안에서 이 참상을 목격했다. 사바틴과 다이는 둘 다 일본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했는데, 뒷날 일본인들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는 증언을 하였다.
법부 협판 권재형의 보고서(흔히 〈권재형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흉도들의 주의를 따돌려 명성황후의 피신을 돕기 위해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흉도들이 잘 보이는 방 문앞에 나와 서 있었는데, 흉도들은 칼날을 휘두르며 그 방에 들어가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고종 옆에서 권총을 쏘고 궁녀들을 난타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또한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건청궁까지 다가온 흉도들은 대오를 지어 합문(閤門)을 포위하고 파수를 보았다. 자객들은 전당으로 들어가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흥선대원군은 근정전 뒤 강녕전 옆에서 기다렸다. 훈련대 군인들은 건청군 앞마당에서 쉬며 황후 시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고 한다. 한편 일본인 낭인과 조선인 앞잡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조선의 국모라고 호통쳤다는 공식 기록과는 달리 암살 직전 목숨을 구걸했다는 기록이 있다. 황현은 낭인들이 왕비의 정체를 확인하자 '살려달라고 애걸했으나 일본인들이 칼로 내리쳤다. 이러한 주장은 물론 <에조 보고서>자체가 실제 목격자의 진술이 담겨있는 가장 신빙성있는 자료로 평가받는 <베베르 보고서>를 비롯한 다양한 증언들과 완전하게 위배된다. 여기서 쓰인 '나체'국부'라는 단어도 논란이 있는데 <에조 보고서>를 신뢰한다고 가정해도 히로시마에서 시해범들이 증언한 '민비의 얼굴을 알수없어 중년여성의 신원을 식별하기 위해 가슴을 확인한 행위'를 지칭했을 개연성이 크다.
<heading>사후 처리 </heading>
을미사변이 일어난 10월 8일 아침에 고종은 아침 건청궁 장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종이 8시경 미우라 공사에게 사자를 급히 보내 어젯밤 일의 내막을 묻자 미우라는 서기관 스기무라와 통역관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왔다. 미국과 러시아의 공사도 소식을 듣고 궁으로 왔다. 미우라와 스기무라, 그리고 자객의 우두머리가 옆에 섰으며, 흥선대원군도 들어와 고종 옆에 앉았다. 미우라는 고종을 협박하여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켰다.
<heading>소 은폐</heading>
일본 당국에 시해사건이 처음 전달된 것은 8일 오전 6시 32분발 공사관 수비대 소속 해군 소좌 니이로 도키스케(新納時亮)가 (본국) 이토 미요지(伊東巳代治) 중장에게 보낸 전보였다. 그리고 다시 그날 오전 9시 20분, 니이로(新納) 소좌는 본국 대본영 육군참모부에 전문(電文) 한 장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고 보고하고 있다.
흉도들은 왕후의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 숲 속으로 가져간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날이 밝은 뒤 타다 남은 유골을 궁궐을 순시하던 우범선이 우연히 발견하여 연못 향원정에 넣으려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혹시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다. 뒷날 친일 내각은 윤석우를 비롯한 군부 협판 이주회, 일본어 통역관 박선(朴銑) 등을 무고하게 반역죄 또는 불경죄로 사형에 처했다.
<heading>여론 호도 작업 </heading>
사건 직후 미우라는 왕후 시해 사건을 조선인의 반란으로 호도하는 공작을 폈다. 미우라는 이튿날인 10월 9일과 그 다음날인 10월 10일 외부에 공문을 보내었다. 그 와중에 군부 대신 조희연이 일본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미우라는 조선 외부(外部)와 군부(軍部)의 입을 통해 일본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거짓 증명을 받아냈다. 김홍집 내각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지 55일 만인 12월 1일(음력 10월 15일)에 그 사망을 공식 발표하고 국상을 치르려 했다. 이는 고종의 친위 쿠데타 세력인 정동파가 몰락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국상을 치르려 함이었다.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일어났으며, 그날 고종은 조칙을 내려 김홍집 일파, 곧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을미사적(乙未四賊)이라고 밝히어 역도로 규정하고, 그들이 진행시키던 국모 재간택과 이미 내린 폐비에 관한 조칙을 무효로 돌렸다. 1896년 3월 10일 김홍집 내각이 진행하던 국상 절차를 중단시키고, 무기한 연기하였다. 그 뒤 국상 일정을 몇 차례 더 연기하였다.
명성황후에 대한 장례는 사후 2년이 지나 1897년에 비로소 진행되었고, 대한제국이 성립된 직후인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의 유해는 청량리 홍릉에 안장되었다. 명성황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유해를 수습할 때 뼈에 재와 모래가 뒤섞여 신체 부위가 판명되지 않아 고양군에 사는 환관을 불러 그의 말을 들으면서 석회를 바르고 비단옷을 수십 벌 입혀 구부리고 포개고 묶어서 관에 넣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궁내관 정만조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heading>고종과 흥선대원군의 관계 악화 </heading>
고종은 사건의 배후의 한 사람으로 흥선대원군이라 봤다. 1898년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아들 고종이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부자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죽자 한성부에서는 7일장을 했으나, 고종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종은 그의 장례식 참석을 거부했고, 흥친왕 이재면은 혹시나 자신도 죽임당할까봐 대원군의 부음을 알리는 것을 머뭇거리면서 주저했다. 그러나 상여가 노제를 한 뒤 서문(西門)으로 나갈 때 고종은 마루에 서서 담넘어로 바라보며 오랫동안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 통곡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한다.
한편 봉건군주국가에서 조선의 군대는 마땅히 왕실 수호와 국토 방위에 헌신해야 함에도 조선 군대인 훈련대 일부는 일본인 폭도들의 역모에 가담해 그들의 졸개로 전락, 궁궐 침입에 가세했다. 한편 연약한 조선 궁녀들은 일본 폭도들의 폭력과 협박 앞에 굴복하지 않았으나 1,500명의 궁궐 경비병들은 겁을 먹고 무기와 군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달아나 버렸다.
<heading>일본인 암살범 후손들의 사죄</heading>
2009년 8월 일본 아사히 TV의 "보도 스테이션"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영하였는데, 범인들의 후손중 카와노 타츠미와 이에이리 케이코가 명성황후의 후손을 만나 사죄하는 모습을 담았다. 일본의 일부 극우 성향의 네티즌들은 "역사 위조, 허위보도"라고 하기도 했으며, "황후를 살해한 것은 조선인들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아사히 TV 보도 이후 전 독립기념관 관장 김삼웅은 을미사변에 참여했던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의 외손자 카와노 타츠미를 만나 개인적인 반성과 용서에 그치지 않고, 일본 정부가 반성하고 사죄할 수 있도록 적극 제안해 달라고 요청했다.
<heading>마모토와 후쿠오카의 조직적 관련</heading>
을미사변의 범행 구조를 보면, 일본은 이노우에 가오루나 이토 히로부미, 미우라 고로 등 야마구치 출신들이 배후에서 범행을 교사하여 총괄 기획, 지휘하고, 도오가츠 아키, 츠키 나리히카루 등 후쿠오카 출신들이 구체적으로 계획을 수립하여 아다치 겐조, 구니토모 시게아키 등 구마모토 출신들이 필요한 인력을 동원하여 시해를 실행하였다는, 사건 관련자들의 지역적 연결고리가 있다. 이는 야마구치가 단지 후쿠오카나 구마모토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것 뿐 아니라, 후쿠오카에 본부를 둔 현양사가 천우협, 흑룡회와 제국주의적 정한론에 입각, 연계하여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배후 역할을 한 것이다. 나가사키, 가고시마까지 포함하면 범행 가담자들의 절대 다수가 큐슈 지역 출신이라는 동질성이 있다.
1896년 1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48명의 일본 민간인 신분 범인들에 대한 예심과 이에 앞서 8명의 일본군 현역 군인들에 대한 군사재판 결과는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면소, 무죄 석방'이었다.
<heading>사법 처리 </heading>
을미사변을 조선인들의 소행으로 돌리려던 미우라의 흉계가 실패로 끝나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를 비롯, 사건을 주동한 일본군 육군 소좌,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 일본인 영사관보, 낭인들의 길 안내인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 九萬一), 영사관 경찰총수 오기하라 히데지로 등과 외무성 낭인, 일본 영사관 경찰 등 암살을 주동한 일본인 낭인들 등 관련자 48명을 소환하여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했다. 그러나 예심 판사 요시오카(吉岡美秀)는 증거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다음해(1896년) 1월 20일 이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heading>본 측 관련자들의 영전</heading>
을미사변에 관련된 일본 측 관련자들은 대부분 영전, 크게 영달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가와카미 소로쿠, 그 외에 시바 시로, 구스노세 유키히코, 아다치 겐조 등이 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을미사변의 실행 주체인 일본인 낭인들과 일본 수비대 및 순사들의 역할 차이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
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을미사변 계획 중 일본인 낭인과 일본 수비대/순사가 각각 맡은 역할의 차이점을 비교 분석한다.
-
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모의 내용 중 낭인과 수비대/순사의 역할을 구분하여 추출한다.
- 첫째 시해의 범행은 일본 낭인들이 맡고
- 둘째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들로 구성한다.
- 셋째 일본 수비대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 공사관 소관이다.
-
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낭인은 직접적인 시해 범행을, 수비대와 순사는 조직적인 움직임을 담당했음을 확인한다.
- 첫째 시해의 범행은 일본 낭인들이 맡고
- 셋째 일본 수비대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 공사관 소관이다.
-
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낭인은 실질적인 암살 행위를 수행하는 실행 인력이며, 수비대와 순사는 공사관의 지휘 아래 군사적/치안적 움직임을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
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두 집단의 역할 차이를 명확히 정리한다.
- 시해의 범행은 일본 낭인들이 맡고
- 일본 수비대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 공사관 소관이다.
-
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낭인의 시해 역할과 수비대/순사의 조직적 움직임 역할을 대조하여 답변한다.
- 시해의 범행은 일본 낭인들이 맡고
- 일본 수비대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 공사관 소관이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을미사변 모의 내용에 따르면, 일본인 낭인들은 직접적인 시해 범행을 맡았으며, 일본 수비대와 순사는 일본 공사관의 소관으로서 조선인 훈련대 등과 함께 움직이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을미사변 모의 내용에 따르면, 일본인 낭인들은 직접적인 시해 범행을 맡았으며, 일본 수비대와 순사는 일본 공사관의 소관으로서 조선인 훈련대 등과 함께 움직이는 역할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