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장준하(張俊河, 1918년 8월 27일 출생 일제 강점기 조선국 평안북도 의주 출생 - 1975년 8월 17일 대한민국 경기도 포천에서 별세.)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가, 종교인, 언론인, 사회운동가이다. 종교는 장로회이다.
주요 이력
본관은 안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교육 활동을 하였고, 일본군 '쓰가다 부대'에 자원입대 하여, 1944년 1월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치되었으나 그해 7월 장쑤성 쑤저우에서 탈출,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국민혁명군준위가 되었다.
1945년 중국 쓰촨성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찾아가 1945년 2월부터 한국광복군 소위로 복무하였다. 한국광복군으로 재직 중 미국 CIA의 전신인 전략첩보대(OSS)에서 활동하면서 3개월간 국내 진공작전에 가담하여,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정 귀국 제1진으로 귀국, 이후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공화국에서 공무원에 채용되어 서기관으로 임용되었고, 1950년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1952년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지내고 사상계를 창간하였으며,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사상계는 당시 자유당 정권을 규탄하며 4·19 혁명의 단초가 되었으며, 혁명 이후 제2공화국에서 장면 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국토건설단장 등을 지냈다.
5·16 쿠데타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베트남 전쟁 파병반대운동에 가담했다. 6대 대선에서 윤보선의 지지 유세 중 박정희의 친일파,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았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 신민당과 윤보선과 함께 국민당에서 활동했다. 1967년부터는 7대 국회의원을 지내 국방위에서 활동하였다.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 선고에 대해 2013년 1월 2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모종의 거사를 준비 도중,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았다.
가명으론 김신철(金信鐵)을 썼으며, 일본식 창씨개명 이름은 '하리야스 슌가'(張安俊河)이다.와 연희동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그리고 감천중앙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내의 가정교회) 등에서 담임목사로, 장로교신학대학의 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유년기
1920년 아버지 장석인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으면서 의주군을 떠나 삭주군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교육자이기도 했던 아버지 장석인은 자신의 사재를 들여 대관유치원을 세우기도 했다. 훗날 리영희가 이 대관유치원을 다녔다고 한다.
13살이 되던 해에 그는 삭주 대관보통학교 5학년에 들어갔다. 1933년 삭주(朔州)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 장석인이 교사로 근무하던 평양부 숭실중학교에 재학하였다.
그 후 아버지 장석인이 선천(宣川) 신성중학교의 교목이 되자 장준하는 아버지를 따라 선천 신성중학교로 전학하였다. 1937년 신성중학교 교장 장이욱이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로 검거되자, 이에 장준하는 학생대표를 동원하여 교장 석방을 위한 동맹시위 운동을 전개했다가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아버지 장석인은 기독교인의 양심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신성중학교 교사를 사퇴했으며 전도사로 목회하였다.
교사생활과 도일 유학
장준하는 1938년 3월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부친처럼 개신교 목사가 될 계획이었으나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폐쇄당하자, 1938년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신안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3년 동안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그 뒤 친구인 마라톤 선수 김익준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되고 교사를 그만두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간 장준하는 1941년 4월 도요 대학 철학과 예과를 거쳐 1942년 4월 장로교 계통인 일본신학교에 입학했다. 장준하가 입학할 무렵 전택부, 문익환, 김관석, 박봉랑 등이 같은 학교에 있었다. 결혼식은 1944년 1월 5일에 올렸다.
청년기 >> 일본군 입대와 탈출
1943년, 일본군 입대를 거부하고 노동어용령으로 끌려가는 친구 최기일을 기차역까지 마중나가 전송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그는 김창정(金昌禎) 등 소수의 친구들과 함께 최기일을 전송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징집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고향 친구 최기일은 자원 입대. 라고 진술하였다. 최기일은 장준하의 일군 입대를 열심히 만류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고 학도병에 자원하여 입대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한, 학병으로 지원한 다음 중국에만 파견되면 일군을 탈출하고 중경 임시정부에 편입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이를 환상 되었고, 같은 해 7월 7일 중국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탈영하였다.
1944년 7월에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쉬저우 시내에서 일본군을 탈영, 중국 팔로군에서 김준엽, 노능서 등 역시 일본군을 탈출한 조선인 청년들을 만나 함께 걸어서 안후이성 임천까지 걸어갔다. 일본군에게 발각될 염려가 있었으므로 차량을 이용하지 못하고 걸어서 갔다. 탈영하면서 수배를 피해 민간인 복장을 갖추고 충칭까지 향했다. 이때 하늘의 별을 보고 성경에 나오는 돌베개를 생각하며, 나라를 잃은 부끄러운 선조들의 모습을 보고 반성하며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조들이 되자고 다짐했다. 후일 그의 자서전 돌베개는 이때 떠올린 야곱의 돌베개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 한다.
탈영후 만난 김준엽과 평생 우정을 나눈다. 군입대 전 장준하는 목사 지망생으로 니혼신학교에, 김준엽은 게이오(慶應)대학 동양사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들은 도쿄 유학생이었지만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제의 학병 요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같았다. 두 사람은 마치 합의라도 한 듯이 '숨거나 피하지 않고 학병에 응하되 곧 탈영하여 광복군에 합류한다'는 방침을 미리 굳히고 떠났던 것이다.
1944년 3월 29일 새벽, 김준엽이 탈영을 했고, 1944년 7월 7일 장준하가 탈영했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왁자지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당으로 뛰어나가 보니 일본군복 차림의 청년들이 있었는데, 그 지성적인 얼굴과 느낌으로 대번 나는 나와 같은 한국의 학병일 것으로 단정했다.
한국분들이시죠?"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그들을 차례로 꽉 끌어안았다.
충칭 도착과 광복군 입대
1944년 시안에서 탈출한 장준하, 김준엽 등 50명이 노하구에 도착하자 이 정보를 입수한 김원봉은 장준하와 일행을 광복군 제1지대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김원봉은 사람을 보내 장준하 일행이 떠나는 것을 막으려 했다. 탈영하여 노하구까지 왔던 이들이 충칭으로 떠나려 하자 제1지대의 한 중대장을 통해 이들의 이탈을 막으려 노력했다. 설득의 내용은 '노하구에 계속 머물러서 제1지대를 보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준하 등은 거절했다. 장준하는 이를 두고 '청년동지 50명을 결속시켜 노하구의 기반을 확고히 하겠다는 야심인데, 이것은 실상 임정의 김약산의 속셈이었다. 이 대장이라는 사람을 통해 김약산은 그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 구축해 보려고 공작을 편 것이다. 1944년 8월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군관학교(분교)에서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고, 1944년 12월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되었다. 그 뒤 장준하와 김준엽 등은 무사히 쓰촨성 충칭에 도착하였다.
광복군 활동
그 후 1945년에 쓰촨성 충칭(重慶)으로 가 1945년 1월 31일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하였다. 한편 김원봉은 장준하 등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였는데, 뒷날 장준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계열이 심지어 미인계를 쓰기도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부의 파벌 다툼에 염증을 느끼고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임시정부의 고착화된 파벌다툼에 염증을 느낀 그는 임정 요인들의 분열상을 규탄하며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 임정을 폭격하겠다며 요인들을 비판하였다. 한편 그는 김구의 만류로 김원봉 비판을 그만두기도 했다.
1945년 2월 20일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에 편입하여 광복군 장교로 임관, 광복군 소위가 되어 충칭 토교대(土橋隊)에 거주하였다. 그는 친구인 김준엽 등과 함께 임정 요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회고담을 듣기도 했다. 또한 여기서 등불3·4·5호를 발간하였다.
이후 1945년 11월까지 충칭에 체류하다 귀국하였다. 하였다. 장준하는 '그러나 그 청년당은 사실 1인 1당의 고독한 당이어서 신내무부장이 외로웠던 것은 사실이다. 간다는 이유는 임정 내무부 관할로 '경위대'라는 것이 새로 조직되는데, 그 경위대원이 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후 그는 김구의 비서로 정치, 사회활동을 시작하였다.
1945년 9월 초순 광복군 장교인 장준하는 중국 서안에서 박정희를 만났다는 주장이 있다. 장준하의 측근인 이철우의 증언에 따르면 장준하는 박정희를 질타했다고 한다.
장준하와 박정희가 해방 전에 구면이었다는 이들에 따르면, 장준하는 이때 일본군 장교라는 과거를 별로 참회하지 않고 행동하는 박정희에게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자진해서 일군을 탈출하지 않은 점,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다면 일군 장교로서 여전히 한국 독립투사를 학살했을 것이라는 점, 유난스럽게 기회주의적인 자세 등을 들어 크게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장호권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장준하와 박정희는 전혀 모르는 사이라고 강하게 말했다.
광복 직후
광복 직후 김원봉 일파는 장준하 등과 새로 일본군 출신 탈영, 전역자 등을 다시 영입하려 했으나, 장준하는 김원봉의 영입 노력을 거절하였다. 뒷날 장준하는 '그가 미인계를 써서 현혹시키려 했다.'고 비판하였다.
이때 김원봉은 자원 징집 또는 강제 징집으로 일본군으로 입대,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을 적극 영입하려 하였는데, 장준하는 그의 책 돌베개에서 그가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이소민 등을 파견하여 인척인 일본군 소위 출신 황용주 등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보았다. 장준하는 김원봉 등이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자료를 이청천에게 보고하였다.
광복군 일부의 횡포가 계속되자 김원봉은 이를 이용하려 했다.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
관료, 언론 활동 >> 정부 수립 직후
이후 1946년부터 1947년 2년간 이승만의 공보비서가 된 친구 최기일과 만나 이승만과 김구 사이의 의견 일치와 합작을 위해 상의, 노력하였으나 장덕수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김구의 합작은 실패하고 만다. 합작 실패 이후 그는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에는 참여하지 않고 정부수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후 장준하는 당분간 별다른 정치적 활동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1949년 1월 도서출판 한길사를 설립했다. 출판활동을 하던 그는 1949년 2월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학, 같은해 6월에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학사)하였다. 1952년 휴전으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한국 전쟁에서 휴전이 된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휴전이 되자 그는 서울로 상경하였다.
언론 활동
1953년 9월 사상계 1953년 9월호를 끝으로 부산시대를 마감, 서울 종로 한청빌딩에 사무실을 입주하고 사상계를 계속 발행하였다.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제1회를 발표하였다. 동인문학상은 소설가 김동인을 추모하여 만든 김동인 문학상이었다. 그를 옹호하는 글을 사상계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국토건설단의 기획부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사실상의 국토건설단의 운영을 책임, 총괄, 지휘하였다. 또한 대졸 미취직 청년들의 국가관과 사회관 교육을 위해 함석헌, 주요한, 박순천 등을 강사로 초빙하여 학생들의 심성수련과 교육을 담당하였고, 장준하 자신도 국토건설단 강사로서 정신교육을 맡았다.
절정에 달한 국정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 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군사혁명이다.
다만 사상계 권두언은 1955년부터 50년대 말까지 장준하의 이름으로 쓰여졌고, 그 이후 장준하 외의 사람이 대필했을 경우에는 필자를 무기명으로 하여 밝히지 않았다. 문제의 1961년 6월호 권두언과 편집후기는 무기명으로 되어 있어, 이것이 장준하의 글인지 쿠데타 세력의 압박에 의해 다른 사람이 대필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발행인 장준하의 책임을 면죄할 수는 없으며, 사상계 1961년 6월호는 권두언 뿐 아니라 박정희와 장도영의 사진 화보를 싣기까지 했다. 장준하 평전을 쓴 김삼웅은 사상계 1961년 6월호는 사상계 정신을 가장 크게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이후 7월호에서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군사혁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실었지만 사상계는 그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쿠데타의 불가피성을 인정했다. 사실 장준하는 적극적인 친미주의자였다. 후에 그가 모든 통일은 다 좋다고 말한 것과는 달리 장준하는 이 당시만 해도 반공을 최우선에 두고 있었으며, '친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장준하는 군정 초기에 군정 세력과 미국 세력간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티에 박정희 계열 인사들은 참석하지 않았고, 이는 나중에 장도영과의 관련설이 나오는 원인이 되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쿠데타 주역들은 대부분 군대 내 소외된 비주류세력이었고 따라서 미국 특히 현지 관계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미국이 쿠데타를 현실로 인정했지만 쿠데타 직후에도 양자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다음날 장준하는 편집 책임자인 취재부장 고성훈과 함께 지정한 시각인 아침 7시에 회사로 나갔다. 검정 지프차 하나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고 다른 군인 2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프차는 장준하와 고성훈을 싣고 가 남산 밑 회현동 어딘가에 있는 허름한 2층 집의 한 방에다 내려놓았다. 김종필은 사상계 7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5·16 군사정변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칼럼을 문제 삼았다.
장준하의 말에 김종필은 앞으로 밀어놓았던 책을 급히 집어다 빨간 줄 투성이가 된 문제의 글과 권두언을 펴 여기저기 한줄씩 읽어주며 장준하에게 들이댔다.
김종필이 장준하와 장도영의 사이를 의심할 만한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이 무렵에 사상계사에서 사상문고 100권 출간 기념 리셉션을 창경궁(昌慶宮)의 수정궁(水晶宮)에서 열었던 것이었다. 당시 사상계의 국제적인 명성 때문에 그날이 7월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인데도 미국 대사가 직접 참석하고 내외 귀빈이 수도 없이 모였는데 쿠데타 군부에서도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이하 그 일파가 모두 왕림했다. 그때 박정희와 김종필 쪽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처리위원회를 방문하자 육군 소령은 그에게 반말을 하며 모욕적으로 추궁하였다.
김영선은 장준하를 어떻게든 자기들 정부의 일에 참여시키고자 설득하던 중 장준하의 빚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것을 재무부 장관인 자기가 책임을 지고 융통해주겠다고 하였다.
민간인 조사관에게 넘겨진 장준하는 쓰라는 대로 경위의 진술서를 쓰고 나왔다. 그러나 그날 실제로 군부에서 사상계사에 나와 장부를 입수해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장준하는 그 일로 인해 네 차례나 더 불려갔다. 시청의 부정축재처리위원회에 한번 더 불려가고 혁명검찰부와 혁명재판소, 그리고 서울지방국세청에 각각 한 차례씩 불려다녔다. 그 돈 1천만 환을 1961년 연말까지 갚기로 하고 겨우 불려가는 일이 끝났다. 정치와 상관없는 그가 정치정화법에 걸린 것은 '부패 언론인'에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김영선에게서 받은 돈 1천만 환 때문에 집이 넘어가고 했는데도 그도 정치행위 금지자 4,734명 속에 들게 된 것이었다.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정을 일본 제국주의 군인 출신이 침략자이며 전범자 집단인 일본 자민당과 매국협상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1964년 4월호를 긴급 임시증간호로 내놓았다. 2월 28일에 "정치인의 정치적 발언이라고 해도 실정법에 저촉되면 규제받아 마땅하다"면서 "피고인의 연설 내용은 그 진실을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범의를 인정할 수 있다"며 징역 6월을 선고했지만 보석을 유지했다.
야당 단결 및 후보단일화 운동 =
1967년 선거 때는 박정희가 동남아와 미국을 다녀오더니 청년들을 베트남에 팔아먹을 것을 구상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구속되었다.
1967년 3월 그는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4자회담(백낙준-윤보선-유진오-이범석)을 주선하였으나, 각 정당 대선후보 간의 이견으로, 의견 조율에 실패했다. 그러나 야당 통합을 추진하여 신민당에 입당하였고 신민당 중앙당 당무위원, 신민당 서울특별시 제4지구당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67년 신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씨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광복군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박정희씨는 과거 남로당 군사조직책으로 남한에서 지하조직 활동을 한 사람으로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조직원을 팔아 희생시켰다” 라고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1971년 장준하는 자신의 학병 탈출과 광복군 참여시절을 회고하면서 자서전 ‘돌베개’를 편집하였다. ‘돌베개’를 내면서 저술의 이유로 ‘현대사의 증언’임을 밝히면서 “광복군 출신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일부 인사들이 광복군 모자 하나를 얻어 쓰고 기실 과연 어떤 일을 했는가 하는 것도 역사 앞에 밝히고자 함”이라고 밝혔다. 1971년 출판사 사상사를 설립, 자서전 돌베개를 출판하였다. 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고 한다.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윤보선을 지지하여, 지지 유세를 다니던 중 친일파 발언이 문제가 되어 1967년 4월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 중 선거법위반으로 구속되어 3개월간 투옥당하였다. 1967년 7월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뒤에도 그는 월남전에 한국군 파병을 반대하였다.
광복군 출신인 장준하는 1967년 대선에 맞추어 나온 소설 광복군(저자 박영만)에 격분한다.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을 비밀광복군으로 둔갑시켰기 때문이었다. 1967년 당시에 야당 대통령 후보 윤보선을 지지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줄기차게 비판한다. 고상만의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책에도 언급돼 있다. ‘지금 현재 일각에서 박정희 후보가 광복군이라고 하면서 써놓은 책이 있는데 이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다. 내가 광복군이기 때문에 정확히 안다. 그는 당시에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있었다’ 이같은 언급에 대해서 당시 중앙정보부가 중요상황 보고로 장준하의 발언을 다 일일이 기록했다.
만군ㆍ일본군 출신들이 중국(만주)에서 해방과 함께 광복군에 편입된 사연을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이 된 장준하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67년 11월 국회에 등원하여 의정활동을 시작하였고, 국회 의정활동기간 중 장준하는 국회 경제과학분과 위원회 위원과 국회 국방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의정활동을 하게 되면서 1968년 1월 1일 사상계(思想界) 발행인직을 일시적으로 부완혁에게 위임하였다.
1969년 4월 19일에는 4.19 10주년 기념 강연을 마친 뒤 침묵 시위에 들어가기도 했다.
제4공화국 >> = 국민당 창당에 참여 =
1970년 2월경부터 그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규합을 위해 신당 결성 운동을 추진한다. 1970년 윤보선 등 민주당 구파 인사들이 신민당을 탈당할때 장준하 역시 신민당을 탈당, 한동안 무소속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71년 1월 6일 윤보선, 박기출 등과 함께 국민당(國民黨) 창당에 참여한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에 김대중이 선출되자 반발한 윤보선은 신민당을 탈당하여 박기출·장준하와 함께 국민당을 창당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윤보선과 함께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국민의 당을 만들고 청년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 게 되었다. 71년의 대선에서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후보직을 사퇴하는 대신 다른 정치인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당시 범야권에서는 야당 후보 단일화라는 이름으로 야당 인사들은 그에게 후보 단일화를 위한 후보자 용퇴를 계속 요청하였다. 장준하는 열심히 윤보선을 지지하였고 지원 유세를 다녔다.
한편 국민당의 총재였던 윤보선은 장준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한때 진보당에 참여했던 박기출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 3월 제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민주통일당 공천을 받고, 통일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출소와 병원 입원
1973년 12월 24일 YMCA회관에서 전격적으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시켜 ‘헌법개정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서 한 그는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조광현내과 203호실에 입원하였다.
장준하는 1975년 들어 평소 잘 만나지 않던 김대중과 만나고, 함석헌·홍남순과 접촉하며 8월 15일, 광복절 30주년을 맞아 모종의 거사를 계획했다. 마침 김영삼이 동남아 여행중이라 그가 귀국한 뒤인 8월 20일로 계획은 연기되었다.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은 이 당시 ‘무엇인가 어마어마한 일’이 계획되고 있었으며, 장준하가 “박정희를 깨는 것은 민중의 힘으로 역부족이니 게릴라전으로라도 박을 제거해야 한다. 군부 쪽에도 상당한 연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고 증언한다. 또한 1976년 4월에 자신이 테러를 당했을 때 주한 미 대사 하비브가 찾아와 “당신 아버지가 이루고자 했던 일이 이뤄질 터이니 몸조심하고 기다려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장준하는 재야와 야당 전체를 아우르고 군부 일부가 동조하는 어떤 거사를 계획중이었으며, 여러가지 증언으로 미루어 8월 20일경으로 예정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또한 장준하는 국회의원 재직 시절 사적인 인연이 있던 김재규와 만났는데, 당시 2군단장이던 김재규는 장준하의 국방위 의정활동과 청렴상에 감동하여 장준하의 죽음 이후 박선호를 시켜 가족들을 돌봐주었다. 1976년 말, 김재규는 장호권을 남산으로 불러 “부친의 사망사건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해주고, 10·26 3개월 전에는 미국에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미국행을 권유했다. 2005년 1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장호권은 장준하의 계획에 포함되었던 군내 동조 세력이 김재규 등이며, 10·26도 장준하의 영향을 입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
최후
박정희정권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던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거사와 관련해 당시 비밀리에 김대중 등 다른 야당 인사들과의 연락을 돕고 있던 자신의 측근 임춘원을 집으로 초대해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장준하는 호림산악회 회원 약 40여명과 함께 경기도 포천 이동면의 약사계곡 입구에 도착하여 약사봉에 올랐다. 그리고 이날 오후 약사봉에서 약사계곡 방향으로 뻗은 절벽 아래에서 김용환 및 호림산악회 회원들에 의해 사체로 발견되었다. 이날 형식적인 사고 조사와 시신 수습이 이뤄진 이후, 시신은 유족들에게 인계되었다.
임춘원은 1960년대 서울 종로에서 상아탑학원을 설립해 운영하며 큰 재산을 모은 재력가로 장준하의 사상계 출판을 남몰래 재정적으로 도와주다가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아 고초를 겪고 장준하의 측근이 된 인물이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장준하는 천주교에 입교하였다는 말과 임시정부 태극기 등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말을 하였고, 며칠전 망우리에 있는 부모의 산소에 다녀왔다며 벌초로 갈라진 자신의 손바닥을 펴보이며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벌초로 생긴 이 손바닥의 상처는 나중에 경찰에 의해 장준하가 산에서 추락하는 도중 소나무 가지를 붙잡아 생긴 것이라며 그의 추락사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왜곡되어 발표되었다.
사후
유족에 의해 운구된 시신은 8월 18일 오전에 상봉동 자택 안방에 마련된 빈소에 안치되었다. 부고를 접한 함석헌, 양호민, 김준엽, 계훈제 등이 8월 17일부터 자리를 지켰고, 8월 18일에는 김대중, 양일동, 고흥문, 정일형 등 정치인들과, 김옥길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김동길 교수 등 1백여 명이 빈소를 다녀갔다.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외유 중이어서 조화를 보냈다.
8월 21일 오전 8시에 자택에서 가족 발인예배가 엄수되었다. 이어 유해는 영구차로 장로교회로 옮겨져 오전 10시에는 목사님들 이 집전하는 영결예배가 거행되었다. 신구 합동으로 열린 이 장례식에는 백낙준, 유진오, 김영삼, 김대중, 박순천, 함석헌, 양일동, 김홍일, 김준엽, 김동길, 천관우 등 각계 지인들과 시민 1,500여 명이 참례했다. 영결식 후 유해는 시청앞, 국회의사당, 중앙청을 거쳐 서대문형무소 앞을 지나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의 나사렛 묘지에 옮겨져 안장되었다.
장준하 사후 1주일 뒤에 호림산악회 회원 및 지인들이 사고 현장에서 추모등반 행사를 가졌다. 사후 1개월 뒤인 9월 17일에는 후학 및 민주화운동 동지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고 현장에서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통일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1985년 8월 '장준하선생 10주기 추모행사'가 열렸다.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인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 4월 15일 제1회 한신상이 추서되었다.
1995년 8월 16일 20주기 추모행사 및 추모문집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1999년 11월 1일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평가 >> 긍정적 평가
안병욱은 ‘칼의 힘과 펜의 힘’(사상계 1969년 12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는 평가와 50∼60년대 척박한 지적 풍토 속에서 <사상계>를 창간하며 당시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높게 평가됐다. 그가 '김구한테 붙었다가 장면한테 붙었다가, 또 윤보선을 따라다니며 색깔논쟁에 열 올렸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장준하는 이범석이 족청을 통해 발호하자 독립군 시절 사령관이었던 그와 인연을 끊을 정도로 청렴했지만, 한편으로는 김원봉이 일본군을 탈출한 한국인 청년들을 미인계로 매수하려 한다고 비이성적인 비난을 한 바 있다. 여기에는 김구의 비서로서 그 영향을 받은 반공주의적 시각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야마하 피아노가 일제라고 광고를 싣지 않을 정도의 결벽적 배일주의자면서 대표적인 친일 문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제정하고, 사상계 1957년 12월호에는 역시 친일파인 최남선을 추모하는 〈육당 기념호〉를 발행하며 최남선을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라고 찬양하는 권두언을 쓰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 장준하의 이런 모순된 모습들은 그의 시각이 어느정도 왜곡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며, 냉전 시기 반공주의 지식인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기타
윤보선, 장면, 이철승, 유진산, 김영삼, 김대중 외에 3공, 4공 시절 박정희의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으며 일부에서는 그를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에 대비하여 재야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병적 기록부 발견
장준하 등이 일본군을 탈영했다는 주장의 진실을 찾기 위해 2004년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 전병헌은 직접 일본군 측 자료를 조사하던 중 장준하의 일본군 탈영 증거와 병적기록부(유수명부)를 발굴해냈다. 이는 2004년 10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언론에 공개했다.'라며 혹평을 가하기도 했다.
1944년 일본군 탈출 직후의 장준하, 김준엽 등을 영입하려는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계속 사람을 보내 이들을 설득하려 했는데,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 탈영병, 학도병들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했다고 한다. '김약산의 부하로 파견된 분견대장의 설득공작이 실패한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곧 우리에게 이간공작을 시작했다.'이라 하였다. 또한 장준하는 김원봉이 광복군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계략을 꾸몄다고 비난했다. '김원봉이 열심히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
상훈 >> 기타 >> 가족의 생활고 논란
가족들은 사후에도 박정희 정권에 의한 압박에 시달렸다. 장남 장호권은 1976년에 테러를 당해 투병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취업이 곤란해져 가족이 흩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반면 박정희 정권 말기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김재규는 유족에게 미국행을 권유하는 등 일부 편의를 제공했다. 2012년에 장남 장호권은 노모와 일원동의 월세집에서 연금 월 100여만원에 의지하여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6조에 의거하여 미망인에게 월 143만 1천원의 보상금이 지급되고 있으며, 일원동 아파트도 동 법률에 따라 특별공급받은 주택이라고 밝혔다.
가족 관계
두 고모는 아버지 장석인보다 연상이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장준하가 일본군 탈영 후 중국에서 광복군에 합류하기까지 거친 군사 교육 과정과 임관된 계급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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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장준하의 일본군 탈영 이후 광복군 합류 전까지의 군사 교육 기관과 최종 임관 계급을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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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탈영 후 교육을 받은 기관과 임관 관련 정보를 본문에서 추출한다.
- 1944년 8월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군관학교(분교)에서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고, 1944년 12월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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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교육 기관인 '중앙군관학교 임천군관학교(분교)'와 임관 계급인 '중국 중앙군 준위'를 핵심 근거로 선택한다.
-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군관학교(분교)에서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고, 1944년 12월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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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교육 기관과 임관 계급을 연결하여 시간적 흐름에 따른 과정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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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장준하는 임천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준위로 임관했음을 결론 도출한다.
-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군관학교(분교)에서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고, 1944년 12월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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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명시된 교육 과정과 계급을 포함하여 답변을 작성한다.
-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군관학교(분교)에서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고, 1944년 12월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되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장준하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군관학교(분교)에서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1944년 12월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하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장준하는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