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발해(渤海, t=渤海國, Бохай), 진국(振國), 고려(高麗)는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던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어 926년까지 신라 북부와 연해주 등에 걸쳐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발해는 세워지기 전에 천문령 전투 등에 승리하였고 당나라 북부를 점령하여 많은 당나라인을 죽이고 승리하였다. 원래 국호는 진국(振國)이었으나 713년 발해(渤海)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발해의 뜻은 고구려처럼 큰 나라란 뜻이다. 또 다른 별칭으로는 북국, '말갈'(靺鞨) 발해말갈, 북적(北狄), 해동성국(海東盛國), 모싀 구르(大國), 거란어: mos-i gur) 등이 있다.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스스로를 천손(天孫)임을 자처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였다. 무왕과 문왕 대에 당, 신라, 일본과 외교를 수립하고 교통로를 통해 무역이 성행하였으며 8세기부터 9세기까지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과 안정이 이루어졌다. 그 후의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9세기 중엽 선왕(宣王)대에 이르러 요동을 점령하였고, 동북 쪽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820년쯤 선왕이 소고구려를 병합했다는 설이 있지만 역사적인 기록이 없어 정확하지 않다. 당에선 그때의 발해를 "해동성국"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926년 거란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발해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고 요나라와 금나라에 병합되었다.
남송(南宋)의 홍호(洪皓)가 엮은 〈송막기문 松漠紀聞〉에서 고구려계 국가인 발해의 유력한 귀족 성(姓)으로 고(高)·장(張)·양(楊)·두(竇)·오(烏)·이(李) 6성을 언급하였다. 이들은 원래 한반도 고유 성씨를 가지고 있었으나 송막기문에는 해당 성씨로 기록되었다. 진위푸(金毓黻)가 쓴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에 의하면 발해 유력귀족 6성 외에 일반 성은 총 49족으로 이중 신라 계통인 박씨(朴氏)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발해는 현재까지 밝혀진 기록과 정보가 굉장히 적어서 아직도 베일에 싸인 면이 많은 나라이며 오늘날 역사 귀속 문제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 국가다. 해외에서도 고구려는 한국사로 인정하는 여론이 대부분이지만 발해에 대해서는 신중히 접근하는 편이다.
역사 >> 건국
668년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의 땅을 평양에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나라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고구려 유민 을 영주로 이주시켰는데 고구려 유민으로 영주(榮州)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나라에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674년쯤 고구려 안승이 검모잠을 배신하고 신라에 망명해 신라는 금마저 지역을 주었고, 신라에 보덕국 (고구려 이은나라) (신라의 번속국)을 세웠다. 보덕국은 684년에 멸망을 했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거란족은 한족 조홰를 때려 잡고 한족들을 학살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사리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도중 말갈을 이끌던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을 이끌던 대사리 걸걸중상이 전사하면서 이끌던 무리를 대조영이 이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 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에 위치한 읍루의 동모산(東牟山) 기슭을 차지하고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를 정복하여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의 한족들을 노비로 강등시키면서 곧 진국(震國, 振國)을 건국 하고 말갈촌장,고구려 촌장들이 왕으로 초대했다 이로서 그는 진국왕(振國王)이 되었다. 진국(발해)를 건국했다.
당나라는 대조영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를 발해에 의해 정복당하고 발해에 의해 안동도호부가 멸망하자 발해인들을 달래기 위해 705년 책봉을 시도했지만, 불발되었다.
713년 대조영은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이 되고 대조영은 홀한주(忽汗州)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의 벼슬을 추가했다., 또한 당나라는 발해의 번성에 굴복하였다.
안정과 성장
고왕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대무예는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말갈족들을 복속시키고 만주 북부 일대 전체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영토 확장의 편리성과 지방세력의 약화, 즉 왕권 강화를 위해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 현덕부로 옮긴다. 이러한 발해의 급속한 세력 확대는 주변 나라들을 긴장시켰다. 가령 발해 북쪽의 흑수부(흑수말갈)와 연합하여 대응해 나갔다. 발해는 당나라 지역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고 당나라인들은 발해를 두려워해 중국인 한족(漢族) 여성들을 발해에 상납하였다.
흑수말갈과 당의 연합에 반발한 무왕은 아우 대문예(大門藝)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 문제를 둘러싼 외교 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가을 거란족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여 산둥(山東)의 등주(登州)를 급습하여 순식간에 점령, 자사 위준을 죽였다. 한편, 요서의 마도산(馬都山)에서 대문예가 이끄는 당나라 군과 격돌하였다. 이때 신라는 당나라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발해에 출병하였으나, 겨울에 공격하여 진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737년 무왕이 죽고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즉위하여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문왕 시기에도 영토 확장은 계속되어 동북 방면의 말갈을 복속시켜 그곳에 부(府)를 설치하였다.
영토 확장과 발전
문왕은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756년 수도를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이곳은 만주에 살고 있는 여러 세력의 주된 이동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농사를 짓기에도 한층 수월한 지역이었다. 발해의 수도가 상경으로 옮겨진 이후에는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발해는 당의 문물도 수용하여 3성(三省)과 6부(六部)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상경을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 각지를 연결하는 대외 무역에 더 힘을 쏟았다. 발해는 문왕 때부터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었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종래의 대립 관계를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 돌궐 및 일본 등과도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였고, 762년 당나라는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직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하였다.
한편 문왕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로 천도하였으나, 5대 성왕(成王) 때 다시 상경 용천부로 천도하였다. 상경 용천부는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7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대원의(大元義)·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喜王)·간왕(簡王)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지배층의 내분으로 국력이 점점 약화되었다.
9세기 전반,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渤)의 4대손으로 간왕의 삼종숙(三從叔)인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으로 즉위하였다. 그의 치세 동안 당은 발해의 융성함을 일컬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발해는 선왕 시기에 중국 문헌에 따르면 바다 북쪽으로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고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켰다. 또 요동 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 유역을 기습적으로 점령하고, 그 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兎州)를 설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영역을 형성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부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5개의 부에는 경을 두었는데, 5경은 당시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지방의 주 밑에는 여러 현을 두었다.
8세기 전반에서 9세기 후반기에 발해(혹은 속말)말갈이 남만주 지역에서 아무르 유역으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빠르게 아무르 유역을 정복하며, 이후 아무르 강 상류를 따라 서아무르 평원의 북서쪽인 실카 강까지 진출했다. 비트틱 산 성터, 류잔카 성터, 우스티-쵸르나야 성터 등과 같은 유적이 그러한데, 러시아 학자들은 발해 주민들이 아무르 강을 따라 실카 강까지의 북서지역까지 장악한 결과로 파악한다. 말갈 확장에 대한 지역민인 부르호토이 주민(실위)의 저항은 이주민으로 하여금 실카 강과 초르나야 강의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에 방어용 취락지를 건설하도록 강요하였다.
쇠퇴와 멸망
선왕 사후 약 100여 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발해 멸망을 상세히 다룬 요사의 기록을 고려하면 수도 급습설이 유력하다.
91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부족을 통일하고 거란제국을 건국하였다. 925년 12월 말(음력) 거란왕은 발해를 침공했고, 이들은 발해와 주요 무역 통로인 발해거란도로 침공해 상경용천부로 가는 길목인 부여부를 직격했다. 결국 부여부는 단 3일만에 함락되었고, 1월 6일(음력) 상경용천부가 포위되어 1월 9일(음력) 함몰되었다. 결국 발해는 거란의 침공 보름여 만인 926년(대인선 21년) 윤 1월 15일(음력) 대인선이 항복을 청함으로써 발해는 멸망하였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발해의 옛 땅에 동란국(東丹國)을 세우고 맏아들 야율배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다.
발해 유민들의 저항인 발해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끈질기게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발해의 후예임을 칭하며 건국한 나라는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요나라와 금나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연표 >> 국호 >> 초기 국호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에서 진국(震國 또는 振國) 혹은 진단(震旦)을 세웠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정설이다. 진 또는 진단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때문에 여러 자료를 통해 추정해 볼 뿐이다. 삼국유사를 참고해 보면 진단은 산스크리트어로 치나스타나(cīnasthāna)를 음역한 것으로 '해 뜨는 동쪽 나라'란 뜻이다. 이 어원과 비슷한 국호로 태봉의 바로 전 국호 마진(摩震)이 있다. 다른 가설로 진(振)과 진(震)의 발음이 서로 유사하므로, 대조영이 국호를 정할 때 걸걸중상이 당에게 받았던 진국공(震國公)이라는 호칭을 염두에 두고 국호로 지었다는 가정이 있다.
한국 외의 다른나라 학자들은 각각 진국이라는 국호에 대해 여러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 북한의 학자 장국종은 이미 걸걸중상이 진국이라는 공국을 세웠으나 698년 발해란 국호를 선포하면서 진국이라는 국호를 함께 아우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학자 A.L.이블리예프는 698년에 진국을 선포했다고 서술한다. 중국 사학자들은 신당서의 "말갈이란 명칭을 버리고 발해라 하였다."라는 기술을 근거로 대조영이 거란, 선비, 돌궐 등 여러 북방민족과 같이 민족의 이름을 국호로 썼을 뿐 진국을 선언한 적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발해 국호
김종복은 구당서에 근거하여, 발해의 초기 국호가 진이지만, 그 국호는 대조영이 713년, 발해군왕에 책봉되었을때가 아닌 문왕대부터 버리고 발해라 일컬었다고 추측했다.
이블리예프는 당의 책봉은 발해를 신라와 같이 이웃 국가로 인정하여 국제적으로 안정성을 보장함으로써 새로운 말갈 국가를 당의 세계질서에 편입한 것이라 하면서 이로서 대조영에게 발해라는 명칭은 새로운 말갈국의 명칭이 되었고, 민족명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평춘은 말갈이 발해로 와전되었다는 학설을 반박하면서, 발해 국호가 바다에서 유래한 명칭이며 당나라가 자국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의도로 발해라는 국호를 사용토록 했다고 주장했다.
주요 인물 >> 정치 >> 중앙의 정치 조직
중앙의 정치조직은 3성(三省)과 중경(中京)·동경(東京)·남경(南京)·서경(西京)을 가리킨다. 서경과 남경은 통설만 있을 뿐, 아직 완벽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최근 북한학계가 동경을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로 비정하고 있다.
상경은 당의 장안성(長安城)을 모델로하여 외성(外城)·내성(內城)을 두고 시가지를 바둑판같이 구획하였다. 지방행정의 중심인 15부에는 도독을 두어 지방 행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부 아래에는 62주를 설치하여 자사를 파견하고, 그 아래 다시 현을 두고 현승을 파견하였다. 지방행정의 말단인 촌락은 주로 말갈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촌장을 매개로 지배하였다.
발해의 영역에서 말갈 유적의 분포현황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말갈 유적은 길림성, 흑룡강성, 연해주, 아무르 강 중하류, 제야 강 일대 등에서 그룹을 이루면서 집중 분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멀리 실카 강 일대, 동쪽으로는 아무르 강 하류의 수추섬에서까지 발견되고 있다. 서쪽, 서북쪽, 북쪽, 동북쪽으로 말갈 유적은 북류송화강 중하류 지역, 동류송화강 상류지역, 서아무르 지역의 제야강 일대, 아무르 강 중하류 지역, 연해주 북부의 사마르강 일대까지 집중 분포한다.
기본적으로 본원적인 발해 유적은 모두 발해의 영역에 포함된다. 발해는 말 갈 7부 이외에도 사모, 군리, 굴열, 막예계, 우루, 월희, 철리 등 북방의 모든 말갈들도 복속시켰다. 태평환우기와 당회요에는 흑수말갈도 일정 기간은 발해에 복속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흑수말갈의 서쪽과 북쪽 그리고 북동쪽에 위치한 사모, 군리, 굴열이 발해에 복속되었다는 사실은 그 사이에 위치한 흑수 역시 일정기간 발해에 복속되었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말갈 유적이 집중 분포하는 지역들은 발해가 말갈제부를 모두 복속시켰다는 사료의 내용을 염두에 둔다면 발해의 영역으로 파악해도 무방하다.
고고학적으로 서기 4~7세기까지 동아무르 지역에 존속하였던 흑수말갈은, 서기 8세기부터는 서아무르 지역으로 이동을 하였음이 확인된다. 그 즈음 동아무르 지역에서는 포크로프카 문화가 나이펠드-동인 문화를 대신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흑수말갈은 원래의 거주 지역을 발해에 정복당하고, 서쪽으로 이주하여 계속해서 명맥을 유지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포크로프카 문화에 특징적인 과형토기는 연해주 지역의 크라스키노 성터 등의 발해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포크로프카 문화에 보이는 철제 손칼, 화살촉, 부싯쇠, 꺾쇠모양 유물, 청동제 띠꾸미개 등도 발해 유적 출토품들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포크로브카 문화에서 가장 유행한 등을 아래로 하고 다리는 무릎을 접은 상태의 토광 시신장은 체르냐치노 5 고분군의 토광묘에서 그대로 확인되고 있어 이 역시 발해에 포함된 말갈의 전통임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코르사코프카 고분군에서 발해 청동불상이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이 역시 이 지역에 대한 발해의 영향에 대해 말할 것이다. 따라서 10세기 이전의 뽀끄로브까 문화는 그 문화양상이, 한편으로는, 서아무르지역의 트로이츠코예 문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본원적인 발해 영역 내의 문화양상과 서로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S.P.네스쩨로프는 아무르 강의 북쪽으로 제야 강과 부레야 강 사이 지역에 분포하는 트로이츠코예 문화를 서기 8세기보다 이르지 않은 시기에 발해인들 혹은 속말말갈인들이 송화강 유역에서 이곳으로 이동하여 형성한 문화라고 주장했는데, 이 경우 트로이츠코예 문화 지역을 발해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데 이 지역은 트로이츠코예 문화뿐만 아니라 발해 성립 이후에 해당되는 실위의 유적과 서쪽으로 이동한 흑수말갈의 유적들이 함께 발견되고 있다. 2018년 6월 23일부터 7월 2일까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북방 문화 연구소가 제야 강과 부레야 강 사이에 있는 서아무르 평원에 남은 고고학 유적을 조사한 결과, 발해 수도였던 상경성이나 발해 유적인 크라스키노 성에서 나온 토기와 매우 유사한 토기 조각 9점을 찾았다. 따라서트로이츠코예 지역에 발해인들이 실제로 거주했고, 발해 영역이 서아무르 평원까지 미쳤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고구려 계승의식
속일본기에 기록된 728년, 무왕이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는 "무예는 황송스럽게도 대국(大國)을 맡아 외람되게 여러 번을 함부로 총괄하며,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習俗)을 가지고 있습니다."라 적혀있고, 발해 사신을 고려 사신, 발해악을 고려악, 발해 문왕역시 스스로를 고려국왕 대흠무라 자칭하는 등 고구려 계승국임을 일본에 표출했으며, 본에 사신이 오자 문왕은 "이 땅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었으니 너희 일본은 우리를 옛 고구려를 대하듯 하라"라고 호통을 치기도 하였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발해는 고구려 기피증에 걸린 당나라와 마찰을 방지하기 위해 대당 외교용 국호이고, 실제 내부 국호는 고려라는 주장을 하지만, 속일본기에 나오는 발해, 발해로(渤海路), 발해사(渤海使) 등의 용어는 은폐하고, 발해의 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사(高麗使),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하였다는 기록만으로 발해와 고구려의 관계를 단순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재일교포 출신으로서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과 와세다대학교 조선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목간학회 회장을 역임 중인 리성시(李成市)에 따르면, 중국 동북부에서 흥기했던 여러 민족들은 심지어 금나라에 이르기까지 왕권과 기원의 정통성을 부여, 고구려에서 찾고있었는데, 이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대외적으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여 정치적 우위를 지키고자 하는 의도이며, 고구려 계승이 곧 바로 혈연적 계승관계로 연결시킬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사회 및 주민구성 >> 지배층의 구성
발해는 다종족 왕국으로 고구려유민과 대다수의 말갈 외에 한족, 거란족, 실위, 위구르족 등 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발해 지배층의 족속 구성에 대해서 여러 학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송막기문에 발해의 왕은 옛부터 대씨를 성으로 삼으며, 우성에는 고, 장, 양, 두, 오, 이씨 등이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발해 지배계층 성씨 70% 이상이 고구려 계통이라고 추정하는데,,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림호성이 발견한 기록에 전해지는 발해인 201명 가운데 그 수가 33명으로 16.41%를 차지하는 것이 고(高)씨다. 하지만, 발해 고씨는 대체적으로 고구려 귀족 성씨였지만, 말갈인들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고, 이외에 하씨, 양씨, 오씨, 이씨 등의 성씨는 고구려계와 한계 그리고 말갈계가 공유하는 성씨일 가능성이 높으며, 발해 지배층 성씨에 대씨와 이씨를 가진 속말말갈인을 더 하면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에서 말갈인의 비율이 더 높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이성시는 발해는 고구려 귀족들로 이루어진 지배층와 말갈인 피지배층으로 이루어진 이원화된 사회가 아니라 만주 지역에서 다양한 부족들이 서로 연합한 국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발해를 남북국으로 묶어서 이야기 하기 위해 굳이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를 단순한 지배 피지배의 관계로 서술하는 종래의 민족사학의 서사에는 근원적인 문제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육정산 고분군의 비교적 대형의 고분을 밀집되어 있는 제1구역 중하부에는 고분 양식면이서 고구려 영향을 크게 반영하고 있지만, M5에서 말 뼈와 같은 짐승뼈가 이곳에서만 다수 출토된 점과 다인장을 보여줘 말갈적 요소에 가까운 M3을 볼 때, 역시 말갈적인 전통이 함께 스며 있음을 보여준다. 제1구역 상부와 제2구역이는 말갈계 토광묘가 포함되어 있고, 화장의 현상이나 통형관의 출토도 이곳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점으로 보아 말갈적인 요소가 제1구역 중하부보다 더 강하게 드러난다. 명심해야할 것은, 고분 자료만 가지고 매장자의 혈통을 따질 수 없다. 예컨대 말갈 혈통을 지닌 고구려인이 있다고 가정할 때에 무덤에서는 고구려적인 문화 요소가 강조되어 나타나거나, 때에 따라서는 고구려 문화 요소만 나타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신분적으로 높았던 제1구역 중하부에 위치하는 M1~M10의 고분 가운데, 정혜공주 무덤인 M2는 고임식 천정을 비롯하여 고분 축조 양식에서 고구려 전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고, 내부에 회칠을 하고 벽화를 그린 점도 고구려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 일부 출토 유물이나 바닥에 깐 벽돌에서 당나라 문화가 결합돼 있는 사실도 인정된다. 또 진릉(珍陵)으로 추정되는 M6에서도 벽화편과 돌사자상 파편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서 역시 고구려와 당 문화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이들의 주인공이 왕실 인사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대씨 일족이 말갈 혈통을 지녔는지 아니면 고구려 혈통을 지녔는지 고고 자료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다분히 고구려 문화를 지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주 체재시 또는 발해 건국 이후에 당나라 문화를 체득했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발해 최상층부이서는 기본적으로 고구려 문화를 항유허던 인물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말갈 문화를 지니고 있던 일부 인물들이 포함됐을 것이다.
제2구역에 비해 제1구역 중하부 그룹과 친연관계를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분적으로 또는 다른 요인으로 구분이 되는 그룹인 제1구역 상부에서는 M11에서 짐승뼈가 출토됐고, M101에서 통형관이 확인됐으며, 다인정과 2차장 현상아 보인다는 점에서 말갈적인 요소를 더 띠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짐승뼈가 출토된 점이나 화장 현상이 보이지 않는 점에서는 제2구역과 구별되는 독립성을 보인다.
제2구역에는 우선 제1구역에서 보이지 않는 토광묘가 자리잡고 있다. 4기의 토광묘 모두에서 화장 현상이 나타나는 점까지 고려하면, 순수 말갈적인 양상을 다분히 띠고 있다. 그럼에도 2기의 고분에서 석묘로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3기에서 기와가 출토된 점에서 볼 때에 고구려 문화도 습합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4기 고분을 제외한 나머지 고분들은 석묘로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고구려 요소를 띠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화장과 다인장 및 2차장 현상이 현저히 나타나고, 통형관 매장 사례도 다수 보이는 것은 말갈적 문화 요소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육정산 고분군에서는 고구려와 말갈 문화가 상호 결합된 양상이 주목된다. 그러면서도 신분이 위로 올라갈수록 고구려 문화 요소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확인된다. 송기호는 이러한 고고문화 연구와 문헌연구를 토대로 말갈계 고구려인이나 원고구려인이 발해 상층부를 주도하고 있었고, 그 아래로 내려오면서 말갈인이 좀 더 많은 수를 차지하였던 면모가 도출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속말말갈의 중진통형관(重唇筒形罐)은 고구려계의 토기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속말말갈 유적에서는 가장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기물로서 발해 후기에 오면 상경회령부를 비롯한 상층부에는 소멸되지만, 상경성 부근의 일반고분에서는 계속 존재하는 양상을 보이며 상경과 거리가 멀수록 수량도 상경부근보다 많다. 이는 발해 상층의 낙후된 토기공예 기술이 선진적인 토기제작 기술에 의해 대체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발해건국 당시 말갈들의 이런 토기제작 전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문화와의 접촉에서 새것을 받아들이면서 자연적으로 쇠퇴되어 가고 있음을 반영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서강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인 이종욱은 자신의 저서인 고구려의 역사에서 발해에는 고구려인들이 많이 살았고,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으며, 더욱이 속말말갈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장군으로 있었기에 새로운 왕국을 세울 정보와 힘을 갖출 수 있었던 것 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발해에 살게된 고구려인들은 한국·한국인을 형성한 원류에서 떨어져 나간 역사 속의 한국인들로 현대 한국인에게 피를 전해 줄 기회를 잃게 된 집단이라고 일축했다.
프레데릭 W. 모트(Frederick W. Mote)는 발해인들은 본래 수렵과 어업활동을 했는데 발해인들은 정착 생활을 했고, 발해인들의 농경 인구는 정복한 한국인들이나 중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국인들은 발해라고 부르며 '발해'라는 용어는 많은 역사서에서 나타난다고 하고 한국 문화적 요소는 발해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경제
발해의 귀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무역을 통하여 당나라의 비단, 서적 등을 수입하여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발해는 9세기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업,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였다. 농업에서는 기후 조건의 한계로 콩, 조, 보리, 기장 등을 재배하는 밭농사가 중심이었다.특히, 목축이나 수렵도 발달하여 돼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는데 솔빈부의 말은 주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모피, 녹용, 사향 등도 많이 생산되어 수출하였다. 어업도 발달하여 고기잡이 도구가 개량되었고 송어, 문어, 대게, 고래 등 다양한 어종을 잡았다. 수공업은 철·구리·금은 등 금속가공업과 삼베·명주·비단 등의 직물업, 도자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하였다.세금으로는 조세, 공물, 부역 등이 있었다. 발해는 당나라,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하였다. 이때 사신과 더불어 상인들이 동행하여 무역을 했다. 무역의 증거로서 고비사막에 서식하는 쌍봉낙타 청동상이 러시아의 발해유적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발견되었고, 러시아의 노브고르데예프 발해 성터에서는 중도의 부하라에서 온 소그드 은화가, 콕샤롭카 성터에서는 위구르 토기가 발견되고 신라, 당나라, 일본, 거란과 위구르로 연결되는 다섯 개의 통로를 열고 신라와의 교역로에 신라도를 연결하며 그 사이에 39개의 역참을 두었다는 기록과 일본에 담비가죽을 수출한 일화가 남아있다. 또한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원숭이 조각상과 신라 장보고의 청해진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편병이 발견되어 장보고 상단과의 교류가 짐작되기도 한다.
상업
발해의 상업은 농업, 수공업, 목축과 수렵 등이 발전하면서 상호간의 교환 관계로 촉진이 되어 발달하게 되었고, 영토상으로도 각기 다른 자연 지리적 조건을 가진 광대한 지역을 포괄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제반 사정들로 생산 부문 간, 주민 상호 간에 생산물을 교환하는 국내 상업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건국 이후 국가 통치 체제가 정비되면서 교통망이 발달하게 되어 국내외의 교류로 상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해 상업의 발달은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와 서고성의 도시 구조를 통해 발해의 수도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의 田 자형의 리방제, 계급 신분별 거주지의 구분을 그대로 계승하여 건설되었다. 용천부의 외성은 ‘전(田)’자 모양의 리방제 모양으로 도시의 주민들이 살던 집과 절터, 시장터, 기타 시설물들의 자리들이 나타나 있으며, 외성 거리는 일반 주민 지역, 중성은 주로 중앙 관청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이렇게 용천부는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칙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발해의 수도에도 평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어용 시전 상업과 장거래 상업이 조직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육
문왕 때 학문 연구 기관인 주자감을 세웠으며, 관리들이 학습시킬 수 있게 서적원이라는 기관을 만들었다. 주자감에서는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휴학생 중에는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였고, 이거정 등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유교 지식인으로 활동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정혜공주 묘지와 정효공주 묘지가 세련된 4·6 변려체로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발해에서는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몇 편의 한시가 현재 전하는데, 양태사나 왕효렴의 작품이 유명하다.
문화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 당나라, 말갈의 문화가 섞인 것이었으며, 당나라와 요나라의 역사서에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점을 들어 발해가 고급 문화를 향유했음을 시사한다.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공주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또한 정효공주묘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이런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발해의 지상 건물은 전해오지 않지만, 그 터를 통해 당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본떠 설계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
발해에서 발견되는 절터나 불상 등은 고구려의 양식을 따른 것이 많다. 다른 조각상도 고구려의 것을 닮아서 소박하며 힘찬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자기 공예가 발달하여 가볍고 광택이 있었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였으며, 당나라 사람이 자주 구해갔다고 한다.
흑룡강성 닝안시의 상경용천부유지(上京龍泉府遺址), 혼춘시 팔달성(八達城)의 동경용원부유지(東京龍原府遺址) 및 화룡시 서쪽 고성(古城)인 중경현덕부유지(中京顯德府遺址)에서 모두 계속하여 발해의 문자를 적은 있는 기와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기와 상의 문자는 대분이 한자이고 일부 한자와 비슷하면도 한자와 같지 않은 부호(符號)가 있었으니, 이러한 부호가 문자(文字)인지 또는 어떤 문자인지 여부는 사가들이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인데, 어떤 학자가 인정한 것은 "발해에서 창제한 문자는 일본의 만엽가나(萬葉假名)와 유사한 것이다"라고 한다던가, 어떤 학자가 인정한 것은 "신라의 이두(吏讀)를 채용하여 창제한 독립문자이다"라 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대량의 고적자료와 문헌자료를 분석한 바에 의하면, 발해인들이 사용했던 문자는 대부분이 정규의 한자이며, 또 적지 않은 옛스럽게 쓰여진 문자와 간화한자(簡化漢字)도 있으며, 또 일부 문자를 독창하였으나 이러한 독창적 문자는 한자(漢字)를 보충한 문자들이었다. 발해인들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두 사신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은 이라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이라고 하였는데 이 두 글자는 곧 발해인들이 독창한 글자이다.
연상시키는 기호들이 사실은 신라의 이두 문자에서 힌트를 얻어 발명된 제3의 발해 문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거란과 여진이 대자라고 불린 문자를 창조했는데, 틀림없이 발해의 영향을 받아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연변대학 조선어문학연구소의 최의수도 이것을 거란 문자나 여진 문자와 같은 한자의 영향을 받은 독자적 문자로 보고 있다.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2012년 논문에서 여진 문자가 발해 문자에서 발전한 것이라 학설을 제기하였는데, 여전히 의문점이 있다.
반면에, 금 희종의 조칙 중, "모든 관원들을 임명하는 고명(誥命)은 여진인에게는 여진자(女眞字)를 사용하고, 거란(契丹)·한인(漢人)들은 각기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를 사용토록 하되, 발해인에게는 한인(漢人)과 똑같이 하라라고 한 것을 근거로 만약 발해가 멸망하기 이전에 이미 자기 종족의 문자를 창제하였다고 한다면, 금나라 초기에 여진·거란·한인 등 여러 종족에게는 각기 자기 종족의 문자를 사용토록 할 때에는 발해족에게도 똑같이 사용을 허가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발해는 그 말기까지 문자를 창제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종교 >> 불교
불교의 삼보인 불, 법, 승이 전래되어 수용, 발전되면서 발해의 문화는 한층 더 발전하게 된다. 삼보의 불이란 부처의 혼과 정긴을 의미하는데 불교가 수용 됨으로써 부처의 이러한 정신을 따르기 위한 예배를 위해 당대 모든 역량을 다해 최고급 불상과 불탑, 사찰등을 만들었다. 삼보 중에 법이란 불교의 경전 즉 부처의 말씀을 의미한다고 보는데 불교가 수용, 발전 되면서 고대문화가 무속에서 문자가 있는 고급문화로 발전하게 된다. 불교를 통해 교육과 학문도 발전하게 된다. 승이란 석가모니의 뜻을 앞정소 따르는 승려들을 말하는데 불교가 존래, 발전되면거 많은 승려들이 구복과 경전연구를 위해 국제적 왕래를 하면서 경제,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불교는 종교를 넘어 사상과 학문, 교육 등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발해에서 불교가 성행하였다는 사실은 예배의 중심지인 사찰이 많이 건축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확인 된 발해의 절터는 모두 40여 곳이다. 돈화의 구국지역에서 한 곳, 상경일대에서 10여곳, 중경 일대에거 13곳, 동경 일대에서 9곳이 확인되었고 흑룡강성 동녕현의 대승자성 안에서도 절터로 보이는 곳이 조사되었다. 또한 럿;아 연해주 아브리코스 절터 등 5곳 함경도 일대에서도 5개의 절터가 확인되었다. 불탑도 많이 발견되는데 화룡시 용두산 고분군의 정효공주 무덤탑, 훈춘 마적달탑 압록강 상류의 장백 조선족 자치현의 영광탑 등이 유명하다. 또한 상경성터에 6미터나 되는 석등과 거대 석불이 남아 있는 것도 발해의 불교 수준을 알게한다. 이 곳에서는 불상만 1000여점 가까이 출토되었다. 불상에는 돌로 만든 석불, 철로 만든 철불, 구리에 금칠을 한 금동불 그리고 구리의 동불, 구리의 소조불, 마른옻칠을 한 건칠불 등이 출토되었으며 벽화에도 불상이 그려져 있었다.불상 중 전불이라는 틀에서 뽑아낸 불상도 많았다.
발해의 불교는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60년 이상 수도였던 상경성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관음신앙이란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반복 염불하여 현세의 권한에서 벗어나서 영험을 얻고 복을 얻고자하는 신앙을 말한다. 관음신앙은 화염경, 법화경 등 여려 경전 속에서 신앙을 체득하여 여러 형태의 불상을 만들어 숭배하였다. 동경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법화신앙이란 법화경을 중심으로 깨달음의 단계인 성문승, 영각승, 보살승의 3승이 1불승 하나로 통섭되는 회삼귀일을 이루려는 신앙형태를 맣안다. 이를 신앙하는 많은 사람들은 석가불과 다보불이 다보탑 안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을 만들어 숭배하였다.
도교
도교는 신선사상을 기반으로 자연 발생하여 노장사상 & 유교 & 불교 그리고 통속적인 여러 신앙 요소들을 받아 들여 형성된 종교이다. 도교가 성행한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금액환단백문결, 해객론 등에서 발해인 이광현을 통해 기록된 도교의 흔적및 당에 보낸 마노궤는 신선(神仙)한 글을 담는데 사용하였고 불로장생의 명약으로 수은 등을 선물 하였던 점 노장 경전인 장자를 인용하고 공주의 출생을 무악, 무산신녀, 신선 등으로 표현하며 묘지명을 도교와 관련 있는 고사로 인용하는점에서 도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경교
경교는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이다. 네스토리우스교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368~450)이 주장한 양성설(dyophysitism)을 따르는 종파들을 말한다. 서양에서는 완전히 무시되었던 네스토리우스교는 그 특유의 끝이 넓게 펼쳐진 톡특한 모습의 십자가 석관으로 만든 네스토리우스교의 선교사와 신도들의 무덤이 중앙아시아, 중국에서도 발견되었으며 발해의 영역이렀던 러시아 연해주 아브리코스절터의 십자가 점토판 등이 발견되었다. 경교가 퍼질 수 있었던 까닭은 적극적으로 현지의 문화와 결합하였기 때문에 발해에서도 받아 들여졌으며 경교의 유적은 모두 불교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군사
발해의 군사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지배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
발해의 군사제도 완비 과정은 크게 3시기로 분별하여 살필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건국 초기 확장된 영토 범위에 행정 제도를 마련한 시기, 두 번째 시기는 신당서 발해전에 기록되어 있는 10위 설치 시기, 세 번째 시기는 내양왕(內養王) 왕종우(王宗禹)가 발해에 사신으로 다녀온 이후 발해의 군사 상황에 대해 보고한 시기이다.
발해는 만주와 연해주, 흑룡강과 동해 연안 방면의 말갈족을 정복해오며 영토를 넓혀왔고 그 과정에서 여러개의 성을 쌓았다.
팔련성, 마리야노프카 성, 청해토성, 콕샤로프카 성터, 크라스키노 성터, 파르티잔스크의 니콜라예프카 성터, 스쵸클라누하 성터, 비트틱 산 성터, 류잔카 성터, 우스티-쵸르나야 성터, 남우수리스크 성터, 코르사코프카 성터, 노브고르데예프 성터 등이 있다.
첫 번째 시기
첫 번째 시기는 전반적으로 제도가 마련되는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과거 고구려의 유제(遺制)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시기로 군사와 행정을 겸직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유취국사 권193에는 "발해는 사방이 2천 리에 달하며 주현 관역이 없고,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들은 말갈인들이 많고 토인이 적다. 모두 토인을 촌장으로 삼는데, 대촌에는 도독(都督)이라고 부르고 다음은 자사(刺史)라고 부르며 그 아래의 백성은 모두 수령이라고 부른다." 라고 기록하였는데, 도독이나 자사는 아마도 발해국의 지방 행정 장관으로, 예를 들면 약흘주도독, 목저주자사, 현토주자사와 같은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아직 제도가 마련된 초기이므로 전 왕조 고구려의 유제가 곳곳에 남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에 대한 구획도 아직 미비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긴장 관계가 조성된 지역을 중심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모습이 보인다.
고왕·무왕 시기의 지속적인 영토 팽창을 통하여 강역권이 확정되고, 그 확정된 강역과 인구 및 세수의 확보를 통해서 관제의 개편과 완비가 이루어졌다. 건국 초기 승병이 몇 만명에 불과하였던 상황에 비추어 보면 발해는 확대된 강역과 인구에 대한 전반적인 조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특히 발해는 주변의 강국인 당(唐)·돌궐·거란·흑수말갈·신라 등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고, 초기의 강력한 정복 전쟁으로 인하여 주변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다. 또한 당의 압제에서 벗어나 천신만고 끝에 나라를 세웠고 전 시대의 패주였던 고구려의 멸망을 목도했던 발해에게는 더욱 군사적 측면에서의 강화와 정비가 요구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발해가 확장된 강역 범위에 고구려의 유제를 바탕으로 새로운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기반을 닦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기
두 번째 시기는 신당서 발해전에 기록된 중앙 부서와 10위가 설치되는 시기이다. 중앙에 설치된 3성 가운데 하나인 정당성(政堂省)에서는 군대를 관리하고 선발하며, 지도와 전차·수레·무기를 관리하는 관할 부서인 지부(智部)가 설치되어 있고, 그 하위에도 융부(戎部), 수부(水部) 등 실무 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758년 일본에 사신으로 간 양승경(楊承慶)의 경우는 중앙 관직인 보국대장군겸장군((輔國大將軍兼將軍)과 지방 장관의 관직인 목저주자사(木底州刺史) 및 중앙의 국방을 담당하는 실무 부서로 보인다. 그러나 중앙의 관직 체계에서 그 명칭이 보이지 않아 그 연원을 살피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이와 같이 발해는 제도를 완비해 가는 과정에서 군사를 담당하는 중심 부서로서 지부와 그 하위 부서인 융부 또는 병서를 설치하여 조직화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발해에는 "좌·우맹분위(左右猛賁衛), 좌·우웅위(左右熊衛), 좌·우비위(左右羆衛), 남좌·우위(南左右衛), 북좌·우위(北左右衛)가 있었으며 각각 대장군과 장군이 1인씩 있었다."고 하여, 발해에 10위 제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당나라의 16위 혹은 12위와 같은 맥락에서 출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각 위(衛)에는 대장군 1명, 장군 1명을 두었는데, 이것은 당나라 모든 위의 상장군(上將軍)과 장군(將軍)에 해당한다. 10위는 왕실 내외의 경비를 담당하며 지방의 부병(府兵)을 관할한다. 1960년 발해 상경 용천부 황성 유지(遺址) 서남쪽에서 발해 '천문군지인(天門軍之印 : 발해 군사 조직의 하나인 '천문군'의 관인으로 전서체로 새겼다. 이 관인은 1960년 상경 용천부 황성 서남쪽에서 발견되었으며, 크기는 5.3×5.3cm이다. 이 관인의 발견은 발해에 새로운 군사 조직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1점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발해의 위에 소속된 군대가 황성(皇城)의 각 성문을 나누어 지켰음을 보여준다.
한편 속일본기에는 728년에 온 사신단 가운데 유장군(游將軍) 과의도위(果毅都尉) 덕주(徳周)가 포함되어 있다. 과의도위는 당나라 군사 제도의 명칭을 따른 것이다. 당나라 부병제에는 위로는 위(衛)와 아래로는 절충부(折衝府)가 있다. 절충부에는 다시 상(上)·중(中)·하(下)의 구별이 있는데, 각 부에는 절충도위(折衝都尉) 1명과 좌·우의 과의도위 2명이 있다. 상부(上府)의 과의도위는 종5품하, 중부(中府)의 과의도위는 정6품상, 하부(下府)의 과의도위는 종6품하에 해당된다. 발해의 경우 과의도위의 존재는 아마도 당의 부병제(府兵制)를 본받아 주·현에 부병을 설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건국 초기 일본으로 간 사신들의 관직을 살펴보면 ○○장군·보국대장군 등 무관직을 지닌 인물들이 중심이다. 자사는 조서를 받들어 주를 감찰하는 지방 행정장관이고, 대장군 및 장군의 경우는 무관의 최고 지위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무관직이 보이고 있는 것은 이들이 사행(使行)을 갈 시기에는 이미 제도적인 측면에서 정비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시기
세 번째 시기는 내양왕 왕종우가 발해 사행을 다녀온 이후 발해의 군사 상황을 보고한 시기이다. 832년 왕종우가 발해에서 돌아와 당 문종에게 올린 보고에서 "발해에는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이 있고, 좌우삼군(左右三軍)과 120사(司)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판단하면, 초기의 장군직을 지닌 제도에서 좌우 10위로 정비되었다가 왕종우가 사행을 마치고 복명(復命)할 당시에는 이미 좌우신책군과 좌우삼군 그리고 120사의 군사 조직으로 확대 개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좌우삼군에 대해서 당나라의 제도를 예로 들면, 좌삼군은 좌룡무(左龍武), 좌신무(左神武), 좌우림(左羽林) 삼군이고, 우삼군은 우룡무(右龍武), 우신무(右神武), 우우림(右羽林) 삼군이다. 이 6군은 모두 위군(衛軍)이다.
왕종우의 보고 내용을 보면, 발해의 군제 조직도 당나라를 모방하여 위군(衛軍)과 부병(府兵)을 설치하였다고 생각된다. 당나라 제도는 위군과 부병을 나누어 설치하였고, 호를 계산하여 병졸을 충당하였다. 경사(京師)의 금군(禁軍)이 가장 많았을 때에는 16위에 이르렀고, 매 위 마다 만 명 이상이었다. 지방에는 부병을 설치하여 전국에 모두 634개의 부를 설치하였다. 부에는 낭장(郞將)을 두고 각각 제위(諸衞)의 통치를 받도록 예속시켰다. 이러한 엄격하고 방대한 군사 기구는 발해에 대해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이를 모방하여 10위와 신책군 등을 설치하였다.
발해가 당나라를 모방하여 부병을 설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사서에 기록이 없다. 그러나 발해가 장기적으로 대외 팽창을 통해서 강역을 확장한 것과 무관 가운데 자사, 낭장, 과의도위, 별장 등이 존재했던 것에 근거하면, 발해에는 부병제를 실시하였을 것이다. 동시에 [신당서] 발해전에서 "발해 부여부는 거란의 변경에 있는데, 항상 강병을 설치하여 거란을 방비하였다." 라고 하여 발해에 10위 이외에도 각 부에 분명히 지방병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부병과 유사하여 변경의 대외 작전을 공고하게 하는 중요한 군사력이 되었다. 낭장·별장 등의 무관직은 모두 대무예 통치 시기에 출현한 것으로 이 시기 발해가 이미 당나라의 군제를 모방하여 금군과 지방군을 설치하여 군제를 실시하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발해인은 본래 장정 3명이면 호랑이도 잡을 정도로 용맹함을 숭상하였으므로 군인이 된 자는 자연이 매우 용맹하였을 것이다. 그 군대의 수도 초기의 승병 수만에서 점차 후기의 수십만으로 확대되었다. 대무예 통치 시기에 발해의 병력은 고구려 30만 대군의 1/3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연히 생산과 정복이 상호 결합된 군사 통치 시기에는 노약자나 어린이나 모두 군사가 되었고, 심지어는 한 집안의 부자와 형제가 모두 군대에 포함되어 대외 전쟁의 수요를 충족시켰을 것이다.
발해는 건국 이후에 확장된 강역에 행정적인 편제를 실시하였으며, 군사조직의 설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발해는 긴장 관계가 첨예한 부여부에는 항상 강병을 주둔시킬 정도로 군사적인 역량을 집중시켰고, 초기에 일본으로 파견된 사신단은 주로 무관이 그 중역을 담당했다. 이후 흑수말갈과의 전쟁, 당나라와의 전쟁을 통해서 군사적인 역량을 확장하였으며, 비로소 제도적인 정비가 완비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 발해는 중앙 부서에 군사적 역량의 전반을 담당하는 지부와 그 산하에 융부, 수부를 설치하여 일원적인 제도를 마련하였다. 발해는 당의 부병제를 모방하여 10위를 설치하고, 더 나아가서는 좌우신책군과 좌우삼군, 그리고 120사로 군 체계의 개편을 도모하였다.
양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토기의 전체 높이는 24.2㎝이다. 발굴 보고자들은 이 토기를 거란 토기로 보고함과 동시에 동체 하단부의 문양과 바닥의 둥근 원은 거란토기에 특징적이라고 지적하면서 거란이 발해를 정복할 때에 거란 군대가 이곳까지 온 증거가 될 수도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 형태의 화병모양 토기는 실제로 거란 유적에서 적지 않게 출토되었는데 동체 하단부에 상기한 것과 동일한 문양이 시문된 경우가 많다. 요녕성 조양시 야율연녕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를 그 대표적인 예를 제시할 수 있다. 또한 거란에는 이 형태의 자기 혹은 시유 토기도 사용되었다. 그 중의 한 예로서 내몽골 과우전기 백신둔 요묘에서 출토된 ‘백유병’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 토기는 거란 토기임이 틀림없지만 요 건국 이전과 이후로의 구분이 아직 분명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축약되는 목 부분의 그림을 통해 볼 때에 화병모양 토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수제이고, 니질의 회도이며, 표면을 삼탄(滲炭) 후에 마광하였다. 표면이 검푸른 흑색이며 음각 ‘화문’으로 장식하였다. 전체 높이는 확인되지 않으며 저경은 20㎝이다.
동체 하부에는 사슴의 다리가 분명하게 구분된다. 더욱이 동체 기저부에 수평의 띠들이조성된 것도 회주성 출토 토기와 서로 동일하다. 그 외에도 화병모양이라는 기형, 대형이라는 크기, 선을 긋거나 새긴 시문기법, 기면 처리방식 등이 서로 매우 비슷하다.
따라서 상경성 출토 사슴무늬 토기는 거란 토기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출토 위치가 제2호 궁전의 기지, 즉 기단이기 때문에 발해시기에 사용된 것도 분명하다. 따라서 이 사슴무늬 화병모양 토기는 발해와 요 건국 이전의 거란과의 교류에 대해 증명할 것이다.
[[흑수말갈]]과의 관계
흑수말갈은 오늘날 아무르 강 중류 일대의 나이펠드-동인문화로 비정되고 있다. 이 문화의 발해이전 시기 유적들을 중심으로 그 범위를 추정해 보면 흑수의 동서 1천리는 대체로 소흥안령에서 하바롭스크 사이, 남북 2천리는 대체로 의란 부근의 왜긍하에서 블라고베쉔스크 시와 비슷한 위도선까지가 된다.
제 하에 들어갔기 때문일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불열, 월희, 철리 말갈은 모두 문왕 치세의 전반기에 발해에 복속되었고, 흑수말갈 역시 문왕대에 일정 기간 복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송화강 유역에서 이곳으로 이동하여 남긴 것으로 판단되면서, 비록 이 지역에 발해 성립 이후에 해당되는 실위의 유적과 서쪽으로 이동한 흑수말갈의 유적들이 함께 발견되고 있지만 이 지역이 발해의 영역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교통 >> 발해의 5도 >> 역대 국왕과 연호 >> 발해와 역사 인식 >> 발해와 역사서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에 의하면, 18세기의 규장각에서도 발해의 정식 역사서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진위 논란이 있는 자료 중에는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지 않으나 발해 때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서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발해가 아닌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들은 그 내용이 시대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아 한국 사학계에서는 위서로 판단한다.
발해사 인식 >> 발해 스스로의 인식
무왕과 문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 고 하였으며 759년 일본에 조문사를 보내 스스로를 고려국왕이라 칭하였다.
금의 인식
여진족 사람들이 자신의 선조의 사적을 기술한 금사세기 태조본기가 있는데, 금나라 사람들의 기록 중에서 실록에서 나온 것은 비교적 믿을 만하다.
금사본기에는 금의 조상은 말갈(靺鞨)씨로 말갈의 본래 호칭은 물길(勿吉)이고, 물길은 옛 숙신(肅愼) 땅이었으며, 북조 시대에 물길에는 7부가 있었는데, 속말부(粟末部)와 백돌부(伯咄部), 안거골부(安車骨部), 불열부(拂涅部), 호실부(號室部), 흑수부(黑水部), 백산부(白山部)였다고 기록하면서 수나라에서 이들을 말갈이라고 불렀는데, 7부가 모두 같았고, 당나라 초기에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있었는데, 속말말갈은 처음에는 고구려에 예속했으며, 성씨는 대씨(大氏)라고 인식했다.
또한 금사고려열전에는 당나라 초엽에 말갈에 속말(粟末)·흑수(黑水) 두 부(部)가 있었는데 모두 고구려에 신속(臣屬)하였고,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속말은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고 점점 강대해져서 발해(渤海)라고 불렀는데, 성은 대씨(大氏)라 하였고, 금이 요를 정벌하자 발해가 귀부해왔는데, 대개 그 후예라고 인식했다.
民與金之勃興)〉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발행한 조선통사에서 “발해는 우리 선조의 국가이며 발해 유민의 항요부국투쟁을 망친 여진국은 발해 유민의 교활한 동맹자”을 비판하고, "여진과 발해는 본디 동일한 집안(女眞渤海本同一家)"란 구절을 근거로 발해 유민의 반요부흥(反遼復興) 운동에 고려가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는 몇 조항을 들어 고려와는 관계가 없고 발해와 여진이 같은 동족에 가깝기 때문에 발해 부흥운동에 여진족이 시종일관 참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이용범은 완안 아골타가 요나라 치하의 발해와의 동족의식을 불러일으키며 협조를 요청한 언급으로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청의 인식
청 제국 초기 문자옥(文字獄)으로 흑룡강지역에 유배온 오조건(吳兆騫)·방공건(方拱建)·장진언(張縉彦)·양월(楊越)·장분(張賁) 등을 포함한 많은 유학자의 시야에 상경성이 들어왔고, 이로부터 발해사에 대한 기록이 조금씩 남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남긴 기록은 발해에 대한 관심에서라기보다는 당시 동북 변방[寒地]에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유물들이 남아 있게 되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청대 만주족의 정체성에 대한 시도의 정점으로 만주족에게 처음으로 논리정연한 국사를 제공한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ᠮᠠᠨᠵᡠᠰᠠᡳᡩᠠᠰᡝᡴᡳᠶᡝᠨ ᡳᡴᡳᠮᠴᡳᠨᠪᡳᡨᡥᡝ|Hesei Toktobuha Manjusai Da Sekiyen-i Kimcin Bithe}}) 권6 부족 발해에서는 발해는 흑수말갈의 남쪽에 처했기에 말갈(靺鞨)의 속말부(粟末部)였고, 남으로는 백제를 병탄하고, 북으로는 흑수(黑水)를 겸병하여 면적이 5천 리요, 동방에서 가장 큰 나라가 되었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청대에 발해사는흠정만주원류고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중국사가 아닌 만주사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인식
1919년, 발해사 연구가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 시기별·주제별 연구 현황, 발해사 연구의 동인 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중국 학계의 발해사 연구는 1,240편이 이루어졌는데, 그중에서는 단연 고고학 분야가 가장 많고 발해사의 귀속 및 성격에 관한 연구가 뒤를 이었다.
발해사는 청대의 만주원류고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중국사가 아닌 ‘만주사’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해사가 중국사로 편입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만주 침략 때부터였다. 역사지리학자이자 역사 전략가로도 평가받는 김육불은 일제에 항거하여동북통사를 집필하면서 ‘만주’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지역은 오직 중국의 ‘동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자주성이 전혀 부정된 것은 아니었고, 이후의 주민과 지역이 중화인민공화국인이 되었기에 중화인민공화국사의 일부라고 하는 비교적 학문적 입장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학계에서 발해사 연구가 활성화된 계기는 건국 이후 논의되기 시작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해사 입장에서 보면, 이 두 시기에 종족 및 국가 성격에 관한 성과가 두드러지는데, 그 이유는 중원과 다양한 형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소수민족들이 건립한 정치체를 ‘지방정권’ 또는 ‘할거정권’이라고 인식하면서, 역사상의 각 민족관계를 ‘중앙과 지방’이라는 구도 속에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발해사를 포함한 소수민족 역사에 대한 근본이론으로, 1949년 논의가 시작된 이후 198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확립되었다.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직후, 중국의 각 민족들이 스스로를 다민족국가 중국의 일원임을 인정하도록 하고, 과거 대한족주의자(大漢族主義者)들이 주장했던 한족(漢族)만이 중국인이라는 의견을 부정하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최근 보도되는 중국 언론을 통해서 보면, 중국 학계는 또한 하상주단대공정(夏尙周斷代工程), 중국고대문명탐원공정(中國古代文明探源工程), 요하문명론(遼河文明論)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통해서 만주지역에서 출현하는 신석기·청동기시대의 문화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 및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2007년 4월부터는 제3차 전국문물조사사업을 추진하여 현재는 현지조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뿌리를 두고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는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이어졌다. 이것의 인식틀은 단순히 각 왕조대의 영토만이 아니라 그 역사마저도 중국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논리로, 한국 고대사의 정체성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경향은 한국사의 기원인 고조선사, 특히 그 문화의 기틀인 신석기· 청동기시대에 대한 역사해석이 주를 이룰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현재의 중국 영토 내에 있는 모든 소수민족은 바로 ‘중화대가정’의 일원이며 그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견해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던 유적이 드러나고 있어 몽골에서도 발해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최했는데, 여기서 몽골의 국제유목문명연구소의 오치르(A. Ochir) 교수는 몽골에서 다수의 발해 유적이 발굴됐다고 하였다. 그리고 10세기 이후 발해 문화가 몽골로 전파돼 큰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발해 유적을 통해 그 문화가 몽골에서도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러시아의 이블리예프(A. Ivliev) 박사도 몽골 내 발해 유민과 관련된 유적에 대해 답사자료를 공개하기도 하였다.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에서도 발해 유민 관련 유적을 조사하였다.
생각하였다.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연해주가 러시아 영토로 넘어간 뒤 현대 러시아의 발해사 전공자들은 모두 말갈족이 발해를 건국하였고, 곧 러시아 극동 역사의 일부로 파악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발해와 여진 시대 전문가인 E. V. 샤프꾸노프는 지금의 나나이족, 울치족, 우데게족, 오로치족, 만주족 그리고 일부 니브흐족의 역사가 발해와 이에 선행한 말갈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고, 러시아의 발해학계는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 아닌 말갈이 사회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이룩한 독립 주권국가였다고 주장한다.
신라의 인식
신라시대의 학자 최치원이 신라 국왕의 청원서의 형식을 빌어 당나라 황제에게 바친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 발해의 원류를 말갈이라 칭하였다. 서술자가 발해가 존재했던 동시대의 신라인이라는 점에서 당시 발해의 근원에 대한 신라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의 인식
태조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멸시하고 배척하였으며 발해의 유이민을 대거 수용하였다. 또한 거란의 사신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개경 만부교에 묶어 굶겨 죽였다.
현존하는 역사서 중 발해를 최초로 언급한 우리 나라의 역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는 발해를 말갈의 발해, 발해말갈 그리고 북국(北國) 혹은 북쪽 이민족이라는 뜻의 북적(北狄)으로 표현하여, 본기에 고조선과 발해를 누락시켜 우리역사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후 충렬왕 때의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는 대조영을 고구려의 구장 및 속말말갈의 추장이라 칭하면서 말갈과 발해조에 소속시켜 우리 역사로 인식하였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발해를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건국하였다고 서술하였다.
조선의 인식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두 가지 흐름이 하나로 정리되면서 발해사가 배제되어 주변국의 역사로 전락하였지만, 그 후에 점차 인식이 바뀌면서 발해사를 재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겪었다.라는 사론을 달아 비판하였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15~16세기를 지나 17세기까지 근간을 이루고 있었으며 박상의 동국사략(16세기초)을 비록하여 오운(吳澐)의 동사찬요(1606), 조정(趙挺)의 동사보유(東史補遺)(1646), 홍여하(洪汝河)의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1672), 홍만종(洪萬宗)의 동국역대총독(東國歷代總目)(1705) 등에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정구(鄭逑)의 역대기년(歷代紀年)(17세기 초), 이돈덕(李敦仲)의 동국사회(東史會綱)(1711), 동문광고(同文廣考) 등도 이러한 계열 인식에 속한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새로이 나타나는 발해사 인식은 이러한 기존의 인식을 수정해 나가는 과정이었다.또한 발해고 서문에서 고려가 발해를 신라와 동등하게 다루어 남북국사를 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여 당시로서는 상당히 새로운 의식을 담았다. 이러한 의식은 김정호의대동지지(大東地志)(1864년경)로 이어졌다. 김정호는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다룬〈방여총지(方輿總志)〉에서 발해사를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었으며,〈발해국〉에서는 삼한-삼국(신라, 가야, 백제)-삼국-남북국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고대사 체계를 제시하였다.
일제강점기, 70년대 이후
일제강점 독립운동기가 되어서는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발해사를 한국사로 정립하기 시작한다. 민족주의 사학자인 신채호(1880 ~ 1936)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신라와 발해를 독사신론에서 양국된 시대로 보았는가 하면, 장도빈(1888~1963)이 국사에서 양국을 남북국이라 하였고, 권덕규(1890~1950)와 황의돈(1890~1964) 도 조선유기에서 양국을 남북조라 하여 한국사에서 발해를 신라와 대등하게 다루었으며, 단군을 강조하는 대종교 계통에서도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 한국사의 일반적인 서술은 실증사학적 삼한정통론에 입각해 통일신라론이 중심이 되었다. 한국사에서 해방후의 발해사는 북한이 주도했다. 북한은 1960년대에 이미 만주지역을 중국과 공동으로 발굴해나가면서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상당한 성과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신라와 발해를 조선사의 양국시대로 적극이해했다. 그러나 연구사적으로 보았을때 ,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70년대에 침체기를 겪게된다. 대한민국에서 발해사는 1980년대부터 수용하기 시작한다. 1980년부터 발해사 연구가 심도있게 진행되면서 한국사에서 18세기 말, 유득공에 의해 탄생한 남북국시대론도 자리잡게 된다. 내부적으로는 고조된 정치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분단 시대론도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외부적으로는 고구려와 발해가 당나라 지방정권이었다는 즉 고구려가 발해사 중국사의 일부라는 이른바 동북공정이 확산되면서 다시한번 주목을 받게 되었다. 주민구성에 있어서 남북한은 80년대 말까지 공통적으로 일본의 영향을 받아 발해의 주민구성에 대해 지배계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계층은 말갈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고고학과 별개로 말갈이란 고구려의 변방유민을 멸시하여 부른 것이었기에 발해는 근본적으로 지배계층이나 피지배계층 모두를 고구려유민으로 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발해사의 한국사적 의미를 더욱 굳혔고, 북한도 1990년대부터는 발해 피지배층이 말갈이란것에 대해 번복하였고 옛 고구려땅에 있던 사람들은 지배계층이나 피지배계층 모두를 고구려유민이라고 주장했다. 남한은 문헌 중심의 정치,종족, 문화적 연구를 하였고 북한 고고학 측면에서 고구려의 계승성에 대해 집중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 사학계에서는 북한과 남한 사학계가 발해가 한국사인 것에만 집중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일본의 인식
일본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대체로 1945년을 경계로 전·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에 앞서 19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19세기 후반 근대 역사학이 태동하면서 황국사관에 입각하여 국사의 체계화를 시도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야시 다이쓰케(林泰輔)는 1892년 다섯 권으로 구성된 조선사(朝鮮史)에서 ‘신라의 통일’이라는 근대적 표제어를 사용하고 이를 더욱 보완한 1912년의 조선통사(朝鮮通史)에서 ‘발해’는 별도의 장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무열왕 김춘추의 외교와 김유신의 활약을 강조하면서 후세에 조선반도, 즉 한반도의 남북부가 하나로 합쳐진 단서는 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여 한반도 남부의 통일을 부각시킨 대신 발해를 한국사의 체계에서 배제하였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편수강령에 따르면, 한국사를 일본사에 편입시키면서 한국 고대사의 서술 부분은 ‘제1편 신라통일 이전’과 ‘제2편 신라통일시대’로 나누었는데, 이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중심으로 서술할 의도였다. 이 점은 당시의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되었으나, 발해사를 중국사로 간주하면서 이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이 배제하였다.
1931년 일본의 만주사변 이후에 이르러 조선사의 길잡이(朝鮮史のしるべ)에서 반영되었는데, 신라의 삼국통일을 중심으로 하고 발해를 부수적 존재로 보면서 당나라가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발해국이 당나라의 북변에 있었기 때문이라 서술하였다. 즉, 발해사를 일본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조선총독부의 새로운 의도가 내포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일제시기 발해사 연구는 그들의 만주 침략과 깊은 관련이 있었으며, 또한 역사 지리 고증과 고고학적 조사가 연구의 중심이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처음으로 영고탑을 발해의 수도로 단정하고 그 유적조사의 필요성을 제안하였다. 특히 그는 발해가 고구려 유민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주장하여 처음으로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 내에 넣었다.
조선사편수회의 개설류가 일본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아니지만, 발해국을 고구려 계승으로의 인식은 지속되어 갔다.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 역사학계에서 제시되었던 남북국시대론에 대한 역사 인식의 흐름을 일본 학계에서 소개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발해사의 귀속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졌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는 발해와 관련된 역사 기록이나 자료가 상당히 풍부하게 남아 있어 속일본기 등을 통한 발해사 연구가 점차 정치하게 다루어지고 국가 귀속 문제에 대해서도 추구되었다. 현재 일본에서는 발해 건국의 주체 민족을 속말말갈 또는 백산말갈의 차이는 있지만, 대세는 퉁구스족 말갈인 국가라고 생각한다.
발해 유민들의 활동
발해 유민은 거란 통치자의 폭위에 핍박당하다 수종들을 거느리고 고려, 후당 및 이후의 북주(北周), 북송, 여진족 등의 통치권 내로 도망하였으나 많은 평민들은 계속해서 그 땅에 남았는데, 어떤 이들은 거란 통치자에 의해 거란족이 거주하는 다른 지방으로 옮겨져서 분산・관리되었으며 마침내 그 지역의 거란, 여진족들과 융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종족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거란은 발해인들을 각 지역으로 이주시켰는데, 이에 대해서는 요사 지리지 중에 단편적인 기록이 보인다. 대규모의 이주는 크게 두 차례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929년 발해의 도성 홀한성의 발해인들을 요하 유역의 임황부(臨潢府: 지금의 遼陽市)로 이주시켜 거대한 공포감을 조성하였던 것과, 1029년 8월에 발해왕족의 후예 대연림이 무리를 이끌고 요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망한 이후, 거란의 통치자가 반란에 참여한 발해인들을 각 지역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발해 유민의 고려 유입은 대체적으로 10~20만여 명 정도가 망명했다고 추정되며, 20만여 명을 초과한다고 보기에는 의문점이 많다. 1011년에 거란은 고려에 정착했던 발해 유민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가 귀주(寧州)와 영주(歸州)에 편호시켰는데, 이때 변경에 배치되어 완충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광현이 처음 정착했던 백주(白州)를 중심으로 한 고려 서북지역 발해 유민 사회가 크게 붕괴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바오룽은 여진으로 투항한 인구수는 고려에 투항한 수보다 많지 않더라도 역시 수만으로 기록되거나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 밖에 발해국사(渤海國史)의 편찬자는 여진에 의탁한 발해인은 남하하여 고려의 경내로 달아난 수와 대체로 비슷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나영남도 발해인이 여진 지역으로 도망가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며, 거란의 영향력이 동북지역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이 일부 여진 지역에는 발해인과 여진인이 잡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지방관 내지 도독 중에는 발해인 출신이 많았던 터라 발해 유민의 주요 망명지로 적합했다. 예컨대 말갈인이 다수 거주했던 올야부라든지 남해부에 파견됐던 도독이 발해 귀족 출신의 열씨와 오씨였음이 이를 방증해준다. 따라서 홀한성 중심의 발해인 가운데 상당수가 동단국의 통치를 거부하고 여진 지역으로 도피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당시 여진인은 문자가 없어서 고려인과 같이 기록을 남기지 못해 구체적인 망명인 수를 알 수는 없지만 오히려 고려로 망명한 수보다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여진에 동화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며, 거란 제국의 황룡부(黃龍府)에서 고려로 귀화한 발해인 역시 주변의 거란, 습, 여진 등의 영향을 받아 10세기 고려인은 발해인을 유목민으로 여겼다.
금나라 지배 하의 발해인
11세기에 거란 제국이 점차 쇠퇴하였고, 변방의 완안부가 흥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침내 거란의 통제를 벗어나 금을 건국하였다. 스스로 왕조를 개창하지 못한 발해인은 여진이 건국할 때뿐만 아니라 요동을 병합하는 과정에서도 협력적인 태도를 취했으므로 금대에서 특수한 정치사회적 지위를 향유할 수 있었다. 여진은 발해인과의 친연성을 중시했으므로 금나라가 망할 때까지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금 초기에도 몽골제국과 유사한 종족등급을 구분한 적이 있는데, 그러한 정황을 조자지(趙子砥)의 연운록(燕雲綠)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발해인이 세력을 형성하여 통제의 어려움이 있을까봐 해마다 연경의 발해인을 수백 가(家) 단위로 산동으로 이주시킨 금 희종은 1141년에 이르러 발해인을 산동으로 모두 이주시켜 그들의 원망을 샀고, 1145년에는 중앙집권의 목적으로 한인과 발해인의 맹안모극(猛安謀克)을 폐지하였다.
금 초에 요양의 발해인 망족(望族)의 자녀 중에 용모가 뛰어난 자를 뽑아 종실 제왕의 측실로 삼았는데, 이것은 금나라가 요양의 발해인을 회유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지만 또한 그들이 가진 교양에 깊은 관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인들을 통해 금 종실에 선진적인 교양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했다. 한인팔종(漢人八種)이라는 명칭은 원말의 도종의(陶宗儀)가 쓴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 1권 씨족에서 말하는 한인(漢人)은 결코 원래 금나라 경내의 한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종의(陶宗儀)가 말한 "한인팔종(漢人八種)"으로, 여기에는 거란·고려·여직(女直)·죽인대(竹因歹)·출리활대(朮里闊歹)·죽온(竹溫)·죽역대(竹亦歹)·발해가 포함된다. 그리고 금나라에서 말하는 한인(漢人)은 바로 원래 요나라 경내의 한족만을 전적으로 가리켰다. 이밖에 또 설명해야 할 한 가지 점은 한인(漢人)이란 칭호는 금·카안 울루스 사람들의 습관적인 표현이었으며, 요나라 사람과 송나라 사람들은 한아(漢兒)로 통칭되었는 바, 이 양자는 완전히 똑같은 것으로 포폄의 색채가 없었기 때문에, 발해인이 한족으로 통칭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발해의 수도인 상경 용천부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의 도시 구조 측면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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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와 고구려의 수도 평양 사이의 도시 구조적 공통점을 찾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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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상경 용천부의 도시 구조와 평양의 도시 구조에 대한 정보를 추출한다.
- 특히,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의 田 자형의 리방제, 계급 신분별 거주지의 구분을 그대로 계승하여 건설되었다.
- 용천부의 외성은 ‘전(田)’자 모양의 리방제 모양으로 도시의 주민들이 살던 집과 절터, 시장터, 기타 시설물들의 자리들이 나타나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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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두 도시의 공통적인 특징인 '田 자형의 리방제'를 핵심 근거로 선정한다.
-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의 田 자형의 리방제, 계급 신분별 거주지의 구분을 그대로 계승하여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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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상경 용천부가 평양의 도시 구조를 계승했다는 문맥을 통해 두 도시의 공통점을 도출한다.
-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의 田 자형의 리방제, 계급 신분별 거주지의 구분을 그대로 계승하여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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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상경 용천부는 평양의 田 자형 리방제와 계급 신분별 거주지 구분을 계승했음을 결론짓는다.
-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의 田 자형의 리방제, 계급 신분별 거주지의 구분을 그대로 계승하여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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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계승된 도시 구조의 특징을 명확히 기술한다.
-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의 田 자형의 리방제, 계급 신분별 거주지의 구분을 그대로 계승하여 건설되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발해의 수도인 상경 용천부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의 '田' 자형 리방제와 계급 신분별 거주지 구분을 그대로 계승하여 건설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의 '전(田)' 자형 리방제와 계급 신분별 거주지 구분을 그대로 계승하여 건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