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1. 푸스발-클룹 뉘른베르크 페어라인 퓌어 라이베쉬분겐 e. V.(1. Fußball-Club Nürnberg Verein für Leibesübungen e. V.)는 바이에른주 뉘른베르크를 근거로 하는 독일의 축구 클럽이다.
이 클럽은 1900년 5월 4일, 잉글랜드에서 들여온 새 종목인 축구를 럭비보다 관심을 가진 18명의 젊은이들이 부렌휘테 (Burenhütte) 라는 인근 펍에 모여 창단하였다. 현재 이 클럽은 권투, 핸드볼, 하키, 롤러브레이드, 스케이트, 수영, 스키, 그리고 테니스 클럽도 운영하고 있다. 2009-10 시즌, 뉘른베르크는 2 분데스리가 3위 FC 아우크스부르크와의 시즌 말 강등 플레이오프를 통해 간신히 잔류를 확정지었다.
1. FCN은 분데스리가에서 총 7번이나 강등당한 경험이 있는데, 이에 따라 뉘른베르크는 독일에서 가장 많은 분데스리가 강등 경험을 가진 클럽이다.
역사 >> 클럽의 창단
1909년, 뉘른베르크는 남독일 챔피언쉽 우승을 거둘 정도로 강성하게 성장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는 이 성공에서 더 나아가 독일 내의 가장 강성한 클럽 중 하나가 되었다. 1918년 7월에서 1922년 2월까지, 뉘른베르크는 104경기 무패행진을 달렸다. 1919년, 뉘른베르크는 실력과 필드에서의 플레이 스타일로 인해 '클럽' (Der Club)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독일 내에서 가장 알려지고 인기있는 팀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뉘른베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의 첫 번째 국내 챔피언쉽 결승전에서 SpVgg 그로이터 퓌르트를 상대하였고, 디펜딩 챔피언을 2-0으로 격파하였다. 이 챔피언쉽 우승은 이어지는 8년간 획득하는 5개의 챔피언쉽 타이틀 중 첫 번째이다. 뉘른베르크는 매번 우승할 때마다 그들의 상대에 늘 완승을 거두었다.
1922년 결승전에서, 뉘른베르크는 함부르크 SV와 대결하였고, 승부가 나지 않았다. 3시간과 10분의 접전 끝에 점수는 2-2 동점이었고, 암전 사태가 발생하였다. 재경기 또한 연장전에 돌입하였고, 당시 교체 요원을 허용하지 않는 시기였으므로, 1-1로 동점인 와중에 뉘른베르크 선수가 7명으로 줄어들자 주심은 실수로 경기를 계속할 수 없다고 판명하였다. 이 결정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독일 축구 협회 (DFB)는 함부르크 SV에게 타이틀을 수여하였고, "좋은 스포츠맨쉽"에 대한 대가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빅토리아 트로피는 공식적으로 수상되지 않았다.
전성기 이후
1. FCN의 전성기는 1927년에 1920년대 마지막 트로피를 차지하며 사그라들기 시작하였다. 뉘른베르크의 마지막 우승 이후, 더 빠른 축구를 지향하게 되었고, 뉘른베르크의 느리면서 효과적인 방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뉘른베르크는 여전히 강호 지위를 유지하였으나, 다른 클럽이 독일 축구계의 정상으로 부상하였다. 1934년, 뉘른베르크는 훗날 제3제국의 최강자가 될 FC 샬케 04와의 결승에서 패하였다. 뉘른베르크는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인 각각 1936년과 1948년에 우승을 차지하였다. 1948년 결승은 전쟁 이후의 최초 결승전이었으며, 뉘른베르크는 이 외에도 체머포칼 (오늘날의 DFB-포칼) 도 1935년과 1939년에 우승하였다.
최근 현황
2차 세계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는 당시 서독의 5개 1부리그중 하나인 남부 오베르리가에 속하였다. 뉘른베르크는 1963년까지 6번의 리그 우승을 거두었고, 1948년에는 국가 챔피언쉽 우승도 거두었다. 1961년, 1. FCN은 8번째 우승을 거두었고, 이듬해에는 준우승을 거두었다. 1962년에는 또다시 DFB-포칼 우승을 거두었다. 1. FCN의 우수한 성적은 1963년에 단일 독일 1부리그인 분데스리가 창단 원년 16멤버 중 하나가 되도록 하였다. 뉘른베르크는 초창기 중위권에 머물렀고, 1968년에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5라운드에서 시즌 종료때까지 선두를 달려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불명예스럽게도 뉘른베르크는 분데스리가 우승 팀으로는 최초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FCN은 프랑크푸르트와 승점과 골득실에서 동률을 기록하였지만, 3번째 타이브레이커 조건인 총 득점에서 밀려 강등을 당하였다.
1. FCN은 분데스리가로 다시 승격되었고, 시즌 시작부터 종료때까지 분데스리가 잔류에 대하여 걱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5-06 시즌, 뉘른베르크는 시즌을 리그 8위로 마감하며, 손쉽게 잔류를 확정지었다. 오랜 기간의 좌절 끝에, 뉘른베르크는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인상적인 성과를 보였다. 마틴 바데어의 2007년 봄까지 선보인 우수한 역량과 (AFC 아약스의 전 주장이자, 체코 국가대표 토마시 갈라세크를 환대하였다.), 한스 마여 수석 코치의 현대 축구에 대한 이해는, 뉘른베르크가 거의 40년 만에 성공을 거두었다. 2007년 5월, DFB-포칼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제압한 뒤 1982년이후 처음으로 결승에 진출하여 UEFA 컵 진출이 확실시 되었다. 5월 26일, 뉘른베르크는 VfB 슈투트가르트와의 포칼 결승전에서 연장전 끝에 3-2 승리를 거두었고, 45년 만에 포칼 정상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2007-08 시즌에 들어서 더 이상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FC 라피드 부쿠레슈티와의 조별 리그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시즌의 UEFA 컵 우승 팀인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와의 2라운드에서 패해 탈락하였다. 한스 마여 감독은 얀 콜러 등을 영입하며 팀을 리빌딩하려 하였다. 마여는 리빌딩에 실패함에 따라 그 자리를 토마스 폰 헤센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폰 헤센 감독 또한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고, 최종 라운드에서 FC 샬케 04에 0-2로 홈에서 패하여 16위로 강등되었다. 2 분데스리가 강등으로 팬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폰 헤센 감독은 2008년 8월에 사임하였고, 그의 수석 코치였던 미하엘 외닝이 그 자리를 맡았다. 외닝은 슬로우스타트를 끊은 이후, 시즌을 3위로 마감하여 2008-09 시즌 1 분데스리가 16위를 차지한 FC 에네르기 콧부스와의 강등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뉘른베르크는 플레이오프를 합계 5-0으로 승리하여 2009-10 시즌에 1 분데스리가로 복귀하였다.
서포터
뉘른베르크의 서포터들은 충성심이 높고, 팀의 많은 실망으로 자주 정신적 고통을 받았으며, 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과거의 영광으로 팀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40,000명이 넘는 서포터들이 홈 구장에서 나쁜 성적이나 2 분데스리가나 남부 레기오날리가 강등에도 불구하고 항상 현장에서 응원하였다. 더 나아가서, 뉘른베르크 서포터들은 자기 팀에 대해 아이러니하게 생각하고, 냉혹한 유머 센스를 가지고 있어 "클럽은 바보다" (Der Club is a Depp) 라는 문장으로 설명한다. 이 말은 프랑켄 지역의 기자 귄터 코흐가 1994년에 한때 강성한 뉘른베르크가 강등당한 이후 했던 말이다.
라이벌
SpVgg 그로이터 퓌르트는 오랜 기간 동안 1. FCN의 최대 라이벌이자 가장 오래된 라이벌로, 독일 축구 초창기에 두 클럽이 국가 챔피언십을 지배하였을 때부터 라이벌 관계를 시작하였다. 두 팀간의 더비 경기는 독일 축구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기로 현재까지 253번에 걸친 공식 더비 경기를 치렀으며, 이는 특정 두 팀 간의 공식 경기수로는 독일 내 최다이다. 가장 모범적인 예로는, 1921년에 찾을 수 있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당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를 암스테르담에서 치루었을때, 당시 독일팀 선수 구성은 뉘른베르크와 퓌르트 선수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두 클럽팀에 속해있던 선수들은 같은 기차편으로 원정을 갔지만, 두 팀 간의 갈등으로 인해 뉘른베르크 선수들은 첫 번째 객차를, 퓌르트 선수들은 마지막 객차를 사용하였다. 중간 객차에는 당시 대표팀 감독 게오르크 B. 블라스케 감독이 혼자 머물게 되었다. 네덜란드와의 친선 경기에서 득점한 선수는 퓌르트 소속으로, 1-0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오직 퓌르트 소속 선수들만이 득점자를 축하하였고, 뉘른베르크 선수들은 등을 돌렸다. 또다른 라이벌 관계의 예시로는 한스 수토어 선수와 관련 되어있다. 수토어는 이전에 SpVgg 퓌르트 선수였으나, 뉘른베르크 팬을 아내로 들이는 바람에 퓌르트에서 방출되었다. 그 후, 수토어는 1. FC 뉘른베르크에서 활약하며 3차례 국내 챔피언십 우승을 거두었다. 두 클럽은 2008-09 시즌에 모두 2 분데스리가에 속해있었다.
리저브 팀
1. FC 뉘른베르크 II (혹은 1. FC 뉘른베르크 아마토이어)는 바이에른 주 오베르리가 (4부리그) 2007-08 시즌에 3위를 차지하여 남부 레기오날리가에 속하게 되었다. 이 팀은 1998년부터 오베르리가에 속해 있었고, 3차례 이 리그에서 준우승을 거두었다. 오베르리가에 속하기 이전, 이 팀은 바이에른-중부 란데스리가 (Landesliga Bayern-Mitte) 에 속해 있었다.
최근 행보
다음은 클럽의 시즌별 성적이다.
역대 성적
뉘른베르크는 60년간 독일 최다 챔피언쉽 우승 팀으로서의 지위(때로는 이 지위를 FC 샬케 04를 가지고 있었다.)를 가지고 있었다. 이 지위는 1987년에 FC 바이에른 뮌헨이 가져갔고,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분데스리가를 여러 회 우승 시 해당 클럽은 진정한 챔피언 클럽 (Verdiente Meistervereine) 을 상징하는 금별 (우승 3회에 1개, 우승 5회에 2개, 우승 10회에 3개, 우승 20회에 4개) 을 클럽 엠블럼 위에 표시할 수 있다. 그러나, 1963년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의 리그를 우승한 경우만이 인정된다. 뉘른베르크는 그에 따라 10회 우승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 독일에서 2번째로 성공적인 클럽은, 금별을 달 수 없다.
국내 >> 유럽대항전 >> 유소년 팀 >> 경기장
뉘른베르크의 홈 구장은 프랑켄슈타디온 (1990년까지는 슈테티셰스 슈타디온 (Städtisches Stadion) 이라 불림)이다. 이 경기장은 1963년을 기점으로 뉘른베르크의 홈 구장이었고, 2009-10 시즌의 겨울 휴식기 리모델링 후로부터, 48,553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이전 홈구장을 차보 (Zabo, 체어차벨쇼프 (Zerzabelshof)의 준말로, 구장 위치를 나타낸다.)였다.
이 경기장은 1928년에 완성되었고, 1933년에서 1945년까지 제3제국 시절 슈타디온 데어 히틀러-유겐트 (Stadion der Hitler-Jugend) 라고 불리었다. 원래 4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고, 1965년에는 65,000명으로 수용인원이 증가하였고, 1967년에 FC 바이에른 뮌헨과 레인저스 FC간의 UEFA 컵 위너스컵 경기를 주최하였다. 컵 위너스컵 결승은 바이에른의 1-0 승리로 종료되었다. 1974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이 경기장은 리모델링되었고, 2006년 FIFA 월드컵의 조별리그 4경기와 16강 1경기를 주최하기 위해, 45,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도록 리모델링되었다.
2006년을 기점으로 프랑켄슈타디온은 지역 은행 이름인 이지크레딧의 상업명을 따 이지크레딧 스타디움 (EasyCredit Stadium) 으로도 불린다. 다수의 팬들은 이 경기장을 클럽 레전드인 막스 몰로크의 이름을 딸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지크레딧과의 상업 계약이 종료되는 6년 뒤까지 최소한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개명이 현재 성사되지 않았다.
임대 선수 명단 >> 코칭스태프 >> 유명 선수와 감독 >> 뉘른베르크 올스타
2010년 여름, 뉘른베르크의 창단 110주년 기념으로, 클럽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팬들에 의해 투표되었다. 최다 득표를 기록한 선수들은 포지션별로 분류되어, 클럽의 베스트 11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었다.
선수 >> 감독
이전의 누락된 감독으로는 이치도르 "도리" 퀴어쉬너 (Izidor "Dori" Kürschner, 1921, 1922), 프레드 스픽슬리 (Fred Spiksley, 1913, 1920년대), 전 선수 알프레드 샤퍼 (Alfred Schaffer, 1930년대), 카를 미할케 박사 (Dr. Karl Michalke, 1930년대), 알빈 "알프" 림케 (Alwin "Alv" Rimke, 1940년대-1950년대), 그리고 전 선수 한스 "붐베스" 슈미트 (Hans "Bumbes" Schmidt, 1940년대, 1950년대) 가 있다. 한스 슈미트는, DFB-포칼을 뉘른베르크 소속 감독으로 1회 우승하였는데, 포칼 결승에서 3차례 숙적 FC 샬케 04를 상대로 치루었다. 그는 뉘른베르크 선수로 4차례 챔피언십을 우승하였고, 이 중 1차례를 SpVgg 그로이터 퓌르트를 상대로 얻어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FC 뉘른베르크와 SpVgg 그로이터 퓌르트의 라이벌 관계에서 나타난 두 팀 선수들 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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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FC 뉘른베르크와 SpVgg 그로이터 퓌르트의 라이벌 관계 중 선수들 사이의 행동 차이를 묻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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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1921년 네덜란드와의 친선 경기 당시 두 팀 선수들의 상황을 추출한다.
- 당시 독일팀 선수 구성은 뉘른베르크와 퓌르트 선수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 두 팀 간의 갈등으로 인해 뉘른베르크 선수들은 첫 번째 객차를, 퓌르트 선수들은 마지막 객차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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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경기 결과에 따른 두 팀 선수들의 반응 차이를 확인한다.
- 네덜란드와의 친선 경기에서 득점한 선수는 퓌르트 소속으로, 1-0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오직 퓌르트 소속 선수들만이 득점자를 축하하였고, 뉘른베르크 선수들은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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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퓌르트 선수들은 승리 후 득점자를 축하한 반면, 뉘른베르크 선수들은 등을 돌리는 상반된 태도를 보였음을 통합한다.
- 오직 퓌르트 소속 선수들만이 득점자를 축하하였고, 뉘른베르크 선수들은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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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두 팀 선수들의 태도 차이를 결론으로 도출한다.
- 퓌르트 소속 선수들만이 득점자를 축하하였고, 뉘른베르크 선수들은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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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구체적인 행동 차이를 기술하여 답변을 작성한다.
- 오직 퓌르트 소속 선수들만이 득점자를 축하하였고, 뉘른베르크 선수들은 등을 돌렸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1921년 네덜란드와의 친선 경기에서 퓌르트 소속 선수가 득점하여 1-0으로 승리했을 때, 퓌르트 소속 선수들은 득점자를 축하하였으나 뉘른베르크 소속 선수들은 등을 돌리는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FC 뉘른베르크와 SpVgg 그로이터 퓌르트의 라이벌 관계에서 두 팀 선수들은 1921년 국가대표 경기 당시 득점 축하 상황에서 서로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