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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차사 document_id A220623208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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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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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context)
함흥차사(咸興差使)는 조선 태종 이방원이 태조의 환궁을 권유하려고 함흥으로 보낸 차사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차사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세간에 퍼지면서,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이는 태종 이방원이 저지른 일(왕자의 난)과 그것을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던 태조 이성계를 바라보던 백성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민정중이 쓴 노봉집(老峯集)에 나오는 박순의 시장(諡狀), 선조 때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오산설림(五山說林) 등의 책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함흥차사의 경위 >> 사건 경위 함흥차사를 보내고 태조가 답한 일을 한국사 학자 이덕일과 이회근의 연구를 바탕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차사와 이성계의 반응 성석린, 무학대사가 환궁에 큰 역할을 했고, 태종 2년 11월 3일 환관 김완(金完)을 보내 문안케 하였다. 같은 달 7일에 예문관 대제학 이직(李稷)을 보내 문안케 하고, 청원군 심종(沈淙)과 예문관 제학 유창(劉敞)을 보내 시위하게 하였다(이들 가운데 태조 이성계에게 죽은 사람은 없다). 또한 태종 2년 12월에 평양에서 머무를 때 시자에게 “내가 동북면에 있을 때에 국왕(태종)이 사람을 보내지 않았고, 맹주(孟州 평안남도 맹산군)에 있을 때도 사람을 보내지 않았으니 감정이 없지 않으리라.”라고 말하자, 시자가 “주상께서 안평 부원군 이서와 승려 익륜과 설오를 보냈으나 중간에 길이 막혀서 돌아갔습니다”라고 변명한다. 차사를 죽이기는커녕 보내지 않아 섭섭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후 중앙에서 증원된 출정군이 관군과 합류하여 군을 재정비하고 조사의의 난을 진압하고 함흥에 칩거하고 있던 태조를 시위하고 왔다. 태종실록2년(1402) 12월 8일 3번째기사를 보면 12월 8일에 태조가 한양에 환도를 하고 바로 다음날 태상왕을 시위하여 왔다고 정벌군으로 출정했던 이천우와 이빈에게 안마를, 이성도 절제사(泥城道節制使)였던 최운해에게 말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야사속 함흥차사 >> 성석린과 함흥차사 태종이 태조에게 보낸 성석린의 이야기가 명신록에 실려 있다. 태종 이방원이 함흥차사로 자원한 성석린을 보내 아버지인 태조를 모셔오게 한다. 성석린이 밥을 짓는 시늉을 하였더니 태조가 오랜 지기인 그를 초대하였다. 성석린이 밤중에 부자 사이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말하자 태조는 “너도 너의 임금을 위해서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냐?”라고 의심하자 성석린은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臣)의 자손은 반드시 눈이 멀어 장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믿고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왔다. 박순과 함흥차사 야담 수필집 노봉집시장(老峰集諡狀)에 함흥차사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그때 함흥차사가 박순이다. 가는 사람마다 죽고 돌아오지 못하니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다음에는 누가 가겠는가?”라고 물으니 아무도 응하는 신하가 없었으나,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인 박순이 자원하였다. 박순은 새끼 딸린 어미 말을 함흥까지 끌고 가서 “어미를 따르는 말도 저러한데 하물며 인간의 부모에 대한 정이야 얼마나 깊겠습니까?”라며 태조의 귀경을 설득했다. 며칠을 묵으며, 하루는 태조와 박순이 장기를 두는데 천장에서 쥐가 새끼를 안고 떨어져 죽을 지경이 되었으나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박순이 장기판을 제쳐놓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자고 청하니 태조가 돌아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이 박순을 죽여야 한다고 태조에게 고하자, 태조는 이미 박순이 용흥강을 건넜으리라 여기어 “용흥강을 건넜다면 쫓지 말라”라고 명령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병이 나서 쉬다가 용흥강을 건널 때, 쫓아 온 병사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태종이 직접 교외로 나가서 태조를 맞이하려 하자, 하륜 등이 말리면서, 태조의 진노가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여 큰 장막을 받치는 굵고 높은 기둥을 많이 세우게 하라고 조언하였다. 태종은 그렇게 하라 일렀다. 그 결과 태조가 태종을 보고 별안간 활을 쏘자, 태종은 급히 순간적으로 기둥 뒤에 몸을 피해 화살은 기둥에 꽂혔다. 이에 태조가 “모두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탄식하며, 태종에게 옥새를 건네었다. 또 태종이 태조에게 잔을 올리는데, 역시 하륜이 일러준 대로 직접 잔을 따라 올리지 않고, 중간의 내시에게 잔을 바치게 하자 태조가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 놓으면서 “모두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말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함흥차사가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의미로 통용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함흥차사의 의미가 변화하게 된 원인과 배경을 묻는 질문이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함흥차사의 본래 의미와 변화된 의미를 추출한다.

    • 함흥차사(咸興差使)는 조선 태종 이방원이 태조의 환궁을 권유하려고 함흥으로 보낸 차사를 일컫는 말이다.
    • 그러나 차사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세간에 퍼지면서,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의미 변화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역사적 배경을 선별한다.

    • 이는 태종 이방원이 저지른 일(왕자의 난)과 그것을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던 태조 이성계를 바라보던 백성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태종의 행위와 태조의 태도,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백성들의 인식이 결합되어 의미가 변했음을 파악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태종의 왕자의 난과 이를 용서하지 않은 태조를 보던 백성들의 이야기가 결합되어 의미가 변했음을 결론짓는다.

    • 태종 이방원이 저지른 일(왕자의 난)과 그것을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던 태조 이성계를 바라보던 백성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해 문맥에 근거하여 서술형으로 답변을 작성한다.

    • 태종 이방원이 저지른 일(왕자의 난)과 그것을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던 태조 이성계를 바라보던 백성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최종 답변 (final_answer)
태종 이방원이 저지른 일(왕자의 난)과 그 일을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던 태조 이성계를 바라보던 백성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때문이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함흥차사라는 용어의 의미 변화는 태종 이방원과 태조 이성계 사이의 일에 대해 백성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