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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과학기술 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사상성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오랜 인테리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이후 '새로운 인테리' 집단의 성장과 함께 과학기술 중심의 인력 관리와 연구 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doc_id CNTS-00047966710_8

주제 (main_topic)
북한은 과학기술 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사상성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오랜 인테리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이후 '새로운 인테리' 집단의 성장과 함께 과학기술 중심의 인력 관리와 연구 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과학기술 인력의 절대적 부족이라는 시대적 한계로 인해, 해방 직후 부터 북한 지역에서는 과학기술자들의 ‘정치적 이념’보다 ‘과학적 능력’을 더 우선시하는 전통이 생겨났다. 이런 전통은 약간의 굴곡이 있기는 했지만 큰 틀에서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과학기술 자들의 정치적 이념이나 과거 전력에 대해 관대하게 처리해주는 전통은 ‘오랜 인테리 정책’으로 정리되었다. ‘오랜 인테리 정책’이란, 식민 지시기에 길러진 과학기술자를 뜻하는 ‘오랜 인테리’들도 식민지 지식 인으로서 제국주의의 폐해를 충분히 체감하였으므로 잘 교화하고 포용 하면 국가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정책이다.54) 이는 인테리 들을 불신하여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번번이 단행하는 등 지식인을 불신했던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과 다른 북한사회의 특징이다. 소련은 과학에서도 부르주아 과학과 프롤레타리아 과학으로 구분된다고 하면서 부르주아 과학을 지지하는 사람을 박해하였다. 대표적으로 유전자 개념과 물리, 화학적 연구방법론을 지지한 과학자들이 획득형질 유전을 지지하는 ‘신유전학자’들에 의해 박해당한 사건이 있다. 중국에서는 지식인 자체에 대한 불신이 강해서 문화혁명 시기 많은 지식인들이 숙청당하였다. 이런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진 결정적 계기는 물론 집단적 기술혁신 운동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유형의 과학기술자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시기 대안 세력으로 떠올랐던 새로운 유형의 과학 기술자들은 대부분 해방 이후에 교육 받은 사람들로 과거에 대한 문제가 전혀 없었다. 기존 과학기술자들이 갖고 있던 태생적 한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사회주의 제도 아래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사상성에 있어서도 뒤질바가 없었다. 기존의 과학기술자들을 부르는 ‘오랜 인테리’라는 말 대신에 이들은 ‘새로운 인테리’, 혹은 ‘붉은 인테리(Red Expert)’라고 불리었다. 또한 그들 중에는 전쟁에 직접 참가한 경험을 가진 사람도 많아서 북한 지도부의 정책적 방향과 의도, 심지어는 감성적인 부분까지 잘 받아들일 수 있었다. 1958년 11월에 새롭게 구성된 과학원 지도부에 이들이 대거 진출한 것으로 볼 때, 이들은 이 당시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당시 과학원 지도부는 현지연구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형태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생산현장에 직접 영향을 미쳐 생산현장에서도 새로운 인테리 집단이 형성될 수 있게 하였다. 오랜 인테리 정책이 꾸준히 적용되고 있던 모습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해방 직후 과학기술자를 대거 모집하는 과정에서 과학기술적 재능을 지닌 자라면 그들의 과거 행적에 상관없이 우대받았던 일도 있었고, ‘사상검열’에서 탈락되었던 과학기술자들이 후에 그들의 과학기술적 능력을 인정받아 다시 임용되기도 하였으며, ‘8월종파사건(1956)’ 이후 진행된 사상검열에서 종파주의자 혐의를 받았던 과학기술자들이 그들의 과학기술적 재능 때문에 빨리 복권되기도 하였다. 또한 1950 년대 말에 이르면 상당수의 인문과학계 월북인사들은 사상적인 부분에서 신임을 얻지 못하고 실권하지만, 리승기(비날론), 려경구(염화비닐), 마형옥(갈섬유), 김봉한(경락발견), 리재업(합성고무) 등을 비롯한 과학 기술계 월북인사들은 그들의 우수한 연구성과에 힘입어 자신들의 입지를 오히려 더욱 넓히고 공고히 하는 경우가 많았다. 2000년대 들어 일련의 과학기술사학자들에 의해 북한 과학기술 활동에 대한 연구가 시도되어 의미 있는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북한 지도부는 일찍부터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정권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식민지 전력으로 사상적인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는 과학기술자들에 대해 그들의 식민지적 특수성을 고려해서 관대하게 처리해 주었다. 과학기술적 재능을 사상성보다 우선 고려하는 ‘오랜 인테리 정책’으로 인력관리를 한 것은 다른 사회주의국가인 소련과 중국의 경우와는 차이 나는 매우 특이한 경우였다. 이 정책에 의해 자신들의 과학기술적 재능을 적극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받았던 리승기, 려경구, 김봉한 등 ‘오랜 과학기술자’들은 1961년에 북한이 비날론 공장과 염화 비닐 공장을 자체 기술로 건설할 수 있게 하였고, 동양의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경락체계를 현대적 방법으로 새롭게 정립하기도 하였다. 비날론공장 건설 공사가 부각되면서 리승기도 최고의 과학자로 대우 받기 시작하였다. 그는 1959년 9월 9일에 처음으로 수여한 ‘조선민주주 의인민공화국 인민상’을 받은 첫 번째 과학자로 선정되었다. ‘인민상’이란 1958년 9월 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제정된 것으로, “과학, 기술 및 문학, 예술 분야에서 특출한 로작, 발명 및 작품들을 창작한 일군들을 국가적으로 표창하기 위한 상”이었다. ‘조선민주주 의인민공화국 인민상에 관한 규정과 그의 시행 세칙’은 내각명령 제 154호로 1958년 12월 16일에 결정되었다. 인민상에는 표창장, 금메달과 함께 상금이 수여되었는데 과학부문에서는 30만 원, 기술부문에는 20만 원, 문화 및 예술부문에는 15만 원이 책정되었다. 1959년 제1회 인민상은 과학부문에서 리승기가 받았고 기술부문에서 함철콕스를 개발한 주종명이 받았다.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자립적 민족공업 발전 위한 과학기술적 문제를 종합적으로 풀”고 “가장 중요한 기술자재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 해결”하고, “선진과학기술을 광범하게 섭취 도입”할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 북조선 중앙연구소와 관련된 사항들을 정리한 것이다.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산업현장의 요구조건들을 최대한 수용할 수 있도록 7개나 되는 연구부서(지질, 광업, 금속, 섬유, 기계, 전기, 화학)를 갖고 있었고, 산업현장과 연구부서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연구활동을 계획적,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조정기구로서 ‘연구위원회’를 두고 있었다. 중앙광업연구소처럼 연구분야가 특정된 연구소와 달리, 북조선중앙연구소는 다양한 연구분야를 모두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위원회와 같은 조정기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이제 막 임시인민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전환되는 상황이어서 국가 전체적으로도 재원 확보가 쉽지 않았으므로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설비나 재원 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직되었다. 따라서 연구소의 활동이 정상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다른 행정부처나 생산현장의 지원이 필수적이었고, 이런 업무를 담당한 연구위원회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은 북한 지역에서 최고의 과학기술인력들이 모여 있는 조직이었다. 따라서 이곳으로 연구소 기능을 이관시켰다는 것은 북조선중앙연구소의 기능을 유지,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과학기술 인력의 부족을 해결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부터 극심했던 과학기술인력 부족현상은 1947년 당시까지 여전히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북조선중앙연구소는 연구활동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고 이는 결국 연구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물질적 지원의 부족이 북조선중앙연구소 운영을 어렵게 한 핵심적인 원인이었다면, 연구소를 폐쇄하는 대신 규모를 줄이거나 새로운 지원방법을 마련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을 것이지만 이런 조치를 취하는 대신 연구소를 김일성종합대학으로 이관해버리고 말았던 사실에서 북조선중앙연구소 운영에 가장 핵심적인 걸림돌은 과학기술인력의 부족이었음이 드러난다. 따라서 북한지역에서 정상적인 종합연구기관 이 설립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인력을 충분히 길러내고 확보하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였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북한의 '오랜 인테리 정책'이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차별화되는 특징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북한의 '오랜 인테리 정책'의 정의를 파악하고, 이를 소련 및 중국의 사례와 비교하여 차별점을 도출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북한의 정책 내용과 소련, 중국의 지식인 대우 방식을 문맥에서 추출한다.

    • ‘오랜 인테리 정책’이란, 식민 지시기에 길러진 과학기술자를 뜻하는 ‘오랜 인테리’들도 식민지 지식 인으로서 제국주의의 폐해를 충분히 체감하였으므로 잘 교화하고 포용 하면 국가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정책이다.
    • 이는 인테리 들을 불신하여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번번이 단행하는 등 지식인을 불신했던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과 다른 북한사회의 특징이다.
    • 소련은 과학에서도 부르주아 과학과 프롤레타리아 과학으로 구분된다고 하면서 부르주아 과학을 지지하는 사람을 박해하였다.
    • 중국에서는 지식인 자체에 대한 불신이 강해서 문화혁명 시기 많은 지식인들이 숙청당하였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북한은 과학기술자의 정치적 이념보다 능력을 우선시하여 포용하는 반면, 소련과 중국은 지식인이나 특정 과학적 견해를 가진 이들을 불신하고 숙청했다는 점을 핵심 근거로 선택한다.

    • 과학기술 자들의 정치적 이념이나 과거 전력에 대해 관대하게 처리해주는 전통은 ‘오랜 인테리 정책’으로 정리되었다.
    • 이는 인테리 들을 불신하여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번번이 단행하는 등 지식인을 불신했던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과 다른 북한사회의 특징이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소련은 부르주아 과학을 지지하는 자를 박해했고, 중국은 문화혁명 시기 지식인을 숙청했다는 사실과 북한이 식민지 출신 과학기술자를 포용하여 경제 발전에 활용하려 했다는 사실을 대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북한은 지식인을 불신하여 숙청했던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달리, 과학기술자의 정치적 이념이나 과거 전력보다 과학적 능력을 우선시하여 이들을 포용하고 교화함으로써 국가 경제 발전에 활용하려 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도출된 결론을 바탕으로 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다른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국은 지식인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부르주아 과학을 지지하는 사람을 박해하거나 문화혁명 시기에 많은 지식인을 숙청하였다. 반면, 북한은 과학기술자의 정치적 이념이나 과거 전력에 대해 관대하게 처리하는 '오랜 인테리 정책'을 통해, 식민지 출신 과학기술자들을 포용하고 교화함으로써 국가 경제 발전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소련과 중국이 지식인을 불신하여 박해하거나 숙청했던 것과 달리, 북한은 과학기술자의 정치적 이념이나 과거 전력보다 능력을 우선시하여 식민지 출신 과학기술자를 포용하는 '오랜 인테리 정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