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해방 이후 우리 나라 여성의 정치참여 현황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실제 우리 나라에서 여성의 정치참여는 1946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선거 때부터의 일로 현재까지 반세기가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여성의 정치참여와 관련하여 국회 및 지방의회, 정당 내 여성당직자 참여도가 낮고, 최근에 와서야 정당들이 여성관련공약을 제시하게 되면서 비교적 적극적이게 되었다. 아울러 우리 나라에서 남녀유권자의 투표성향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여성단체들이 여성의 정치참여 활성화를 위한 후보자 및 유권자 교육과 연대하여 할당제 모임을 가진 것 역시 1990년대부터의 일이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와 함께 그동안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진 여성의 정치참여에 관련된 연구는 1990년대 이후 국회, 지방의회, 정당, 유권자, 여성단체의 지원활동, 여성의 국제활동 참가 등으로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왔지만, 해방 이후 여성의 정치참여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룬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1987년의 6 29선언은 1961년 이래 한국 민주정치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있던 비민주적인 요인들을 제거한다는 관점에서 통치자의 국민들에 대한 약속이었으며 시한적인 계약이었다. 6 29선언은 해방이후 민주정치과정에서 모순을 안고 왔던 지배구조 뿐만 아니라 참여구조의 개혁, 즉 정당정치의 민주적인 부활을 시민 앞에 약속했다는 또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회복시키는 르네상스 이기도 했다. 즉 권위주의적인 통치구조로부터의 탈피를 위한 과도기였다.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 대중정당으로서 민주자유당, 신한국당이 여당으로 기능 하였다.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신한국당의 패배 이후 야당이 될 수밖에 없는 한나라당과 평민당, 신민당, 민주당, 국민회의 등의 이합집산의 과정속에서 야당으로, 그리고 정권교체를 통해 집권당이된 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이 여성의 이익을 어느 정도 반영하려고 하였으며 정당에서 여성의 참여는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에 제3당으로서 자유민주연합내의 여성과 정책도 함께 알아본다. 이는 1987년 11월 13대 대통령 선거이후 약 13년 이상의 기간에 대한 고찰이다.
우리 나라의 주요 정당 내 여성의 참여는 1948년 대한여자국민당이 남녀평등권리를 주장하면서 단체활동을 시작한 이후 자유당과 민주당, 민주공화당, 민정당, 평민당, 민주당, 국민회의,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 등 집권정당 및 야당의 일원으로 오랜 동안 정치활동에 참여하면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인으로서 때로는 정권의 정당성의 결여에 저항하는 정치인으로서 역할을 하여왔다. 그리고 1987년의 민주화운동을 전후하여 여성의 권익신장을 주장하는 여성계의 요구를 수렴하는 공식적 통로로서의 역할을 하여온 것도 사실이다. 여성이 정당활동에 참여한 것은 우리 나라 여성이 국회에 참여한 비율이 저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 내 주요당직의 참여는 의원직을 얻은 여성 또는 향후에 의원으로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일부여성들에 한정되었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1945년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을 맞았고, 여성들은 민족해방의 기쁨과 함께 여성해방의 욕구가 분출되었고, 새로운 국가사회 건설에 참여할 희망과 기회를 맞았다. 해방이 되고 가장 먼저 결성된 단체는 ‘건국부녀동맹’(1945)이다. 일제하부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왔던 여성지도자들은 해방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 건국부녀동맹을 결성하기로 하고 황신덕, 박순천, 유각경, 허하백, 박승호 등 5명을 위원으로 선출한 뒤 그 이튿날인 17일 발기총회를 개최함으로써 해방후 최초의 여성단체인 건국부녀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건국부녀동맹에는 근우회 (1927-1931) 등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던 여성,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하던 여성, 그리고 일제말기에 친일활동을 하던 여성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어 전 여성의 통일 전선 형성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부 우익 성향을 가진 여성들이 곧바로 탈퇴하여 1945년 9월, ‘한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함으로써 당시의 여성단체는 좌 우의 이념에 의해 양분되는 형상이 되었다.
동맹결성후 1개월여만에 우익여성지도자들이 탈퇴하는 사태에 직면한 건국부녀 동맹의 지도자들은 조직 재편의 필요성을 느껴 1945년 12월에 남북한 통틀어 148 개 지방의 부녀자 대표 458명이 모여 3일에 걸친 결성대회를 갖고 ‘조선부녀총동맹’(이하 부총)을 새롭게 결성한다. 진정한 여성해방은 진보적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던 부총은 민족통일전선(이하 민전)에 적극참여, ‘임시정부배격, 삼상결정지지’ 등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벽보, 강연회, 가두연설 등의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전개 한다. 뿐만 아니라 부녀대중의 문맹퇴치와 나아가서 정치 및 경제 사회의식을 주입하기 위하여 전국적인 선전계몽활동 또한 활발하게 펴나간다. 1946년 부총의 회원은 80만에 달했으며, 1947년 8월에는 회원 200만 증원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부총 회원의 구성은 노동자, 농민, 소시민부녀,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 등으로 다양하였다.
좌익 여성운동의 과제는 부총의 강령에 나타난 바와 같이 “조선 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완전해방”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는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로 달성될 수 있으므로 그 국가건설을 위해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총은 여성운동의 당파성을 주장한다. “여성해방전에 있어서 소위 불편부당이란 있을 수 없다. 정치적 해결이 없이 여성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따라서 정치적 불편부당이란 우리의 운동 앞에 있을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여성들의 정치의식 각성 제고를 위한 활동을 중요한 일상활동으로 전개하였다. 부총이 일제잔재와 봉건잔재의 소탕 없이 여성해방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 한 것은 미군정기 사회운동의 기본임무가 반제반봉건이라는 것에 동의하였음을 의미한다. 당시 반제는 일제잔재에 대한 투쟁으로 규정되었고 반봉건은 인습․관습 에 시달리고 있던 여성들을 이 질곡에서 해방시킴을 의미하였다. 부총은 봉건적 질곡에서의 여성해방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과제를 행동강령으로 제시하였다.
이상과 같이 좌․우익 여성운동은 1945년 말∼1946년 초가 되면 각각 조직을 정 비하면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는데, 좌․우익이 아닌 중간파를 견지하는 여성운 동의 움직임도 1948년에 처음 나타났다. “중간 각 정당의 통일전선 결성추진에 병행해야 중간파 각 여성단체로 총선거에 대비하고자 행동통일과 연락을 긴밀히 하기로” 하고 자주여성동맹, 애국부녀동맹, 불교 부인회, 천도교 부인회, 건인회 부인회, 한독당 부녀부, 근민당 부녀부 등 7개 여성단체가 1948년 3월 18일 처음 회합을 가졌다. 이 회합 이후 어떠한 공동행동을 취한 것도 나타나지는 않으나, 근로인 민당․근민당․한독당은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북연석회의(1948년 4월 19일)에 참가하여 단선 무효성명(1948년 8월 16일)을 발표하였다. 중간파 여성 운동은 중간파적 이념이나 지향점이 무엇인가 분명하지 않으며, 게다가 이미 정세가 우익세력 중심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기울어져 있었을 때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중간파적 활동의 의미가 별로 없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해방 직후 결성된 '건국부녀동맹'이 이후 '조선부녀총동맹'으로 재편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조직적 변화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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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건국부녀동맹이 조선부녀총동맹으로 변화하게 된 원인과 구체적인 조직 재편 과정을 파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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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건국부녀동맹의 결성 사실과 이후 발생한 이탈 및 분열 상황을 추출한다.
- 해방후 최초의 여성단체인 건국부녀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 일부 우익 성향을 가진 여성들이 곧바로 탈퇴하여 1945년 9월, ‘한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함으로써 당시의 여성단체는 좌 우의 이념에 의해 양분되는 형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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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조직 재편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지도부의 판단과 재편된 조직의 규모 및 성격을 보여주는 문구를 선택한다.
- 동맹결성후 1개월여만에 우익여성지도자들이 탈퇴하는 사태에 직면한 건국부녀 동맹의 지도자들은 조직 재편의 필요성을 느껴
- 1945년 12월에 남북한 통틀어 148 개 지방의 부녀자 대표 458명이 모여 3일에 걸친 결성대회를 갖고 ‘조선부녀총동맹’(이하 부총)을 새롭게 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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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우익 여성들의 탈퇴로 인한 이념적 양분화가 조직 재편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더 넓은 범위의 대표자들이 모여 새로운 조직을 구성했음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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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건국부녀동맹은 우익 성향 여성들의 탈퇴로 좌우 이념 양분화를 겪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45년 12월 대규모 지방 대표들이 모여 조선부녀총동맹을 새롭게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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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인과관계와 변화 과정을 포함하여 서술형으로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건국부녀동맹은 결성 직후 일부 우익 성향 여성들이 탈퇴하여 '한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함으로써 좌우 이념에 의해 양분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에 건국부녀동맹 지도자들은 조직 재편의 필요성을 느껴 1945년 12월, 남북한의 148개 지방 부녀자 대표 458명이 모여 '조선부녀총동맹'을 새롭게 결성하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건국부녀동맹 내 우익 세력의 탈퇴로 인한 이념적 분열이 조직 재편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지방 대표들이 모여 조선부녀총동맹을 결성하는 과정을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