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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인재 양성을 위한 대학 제도, 교육 환경의 문제점 및 해외 유학생 파견 현황과 변화 doc_id CNTS-00056605171_2

주제 (main_topic)
북한의 인재 양성을 위한 대학 제도, 교육 환경의 문제점 및 해외 유학생 파견 현황과 변화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북한은 1980년대 중반까지 일부를 제외하고는 노동생활이나 군 복무를 거친 사람들 중에서 추천에 의해 대학생을 선발하는 제도를 고수하였다. 김일성은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나 사회에 나가 몇 해 동안 단련을 받은 후 대학에 가서 공부하게 하는 제도가 매우 좋은 제도라는 것을 경험이 보여준다 고 하면서 이 제도를 고수할 것을 지시하였다. 사회 실천을 통해 혁명화 원칙을 수호할 노동계급의 지식인을 양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고 군 복무 기간이 늘어남에 따라 이 제도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오랜 군 생활로 이전에 배운 것을 잊어버린 제대자들이 대학의 이공계를 기피하고 사회과학 분야를 선호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공장과 기업소에서는 생산에 필요한 핵심 인력들이 주간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기피하고 현장에서 교육하는 공장대학에 보내려 하였다. 김일성은 1973년 10월 27일 교육부문의 책임자들에게 한 연설에서 3대기술혁명이 잘 안되고 있는 것은 전반적으로 과학자 및 기술자의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해방 후에 학생들을 잘 양육할 준비된 인테리들이 적었다. 특히 자연과학 부문에서 인재 부족 현상이 더욱 심각하였다. 따라서, 해방 직후에 대학들을 세우고 학생들을 자연과학 부분에 70- 80%, 사회과학부분에 20- 30%의 비율로 받아서 교육시켰고, 부족한 교수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유학생들을 많이 보냈다. 그러나 유학생들도 언어 습득에 많은 시간을 보내 과학기술지식은 많이 배워오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민족간부를 키워내는 원종의 질이낮았다. 둘째, 대학을 창설하고도 필요한 물질적 조건을 충분히 갖추어 주지 못했다.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대학의 증가로 국가 부담이 증가해 각종 실험설비와 교육 설비, 참고서적 등을제대로 지원하지 못했다. 교육 여건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들이 종합대학 위주인 것과 달리 사회주의 국가들의 대학은 대개가 단과대학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 종합기술교육 이론의 영향으로 생산 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인력들을 실기 위주로 양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과대학 뿐 아니라 학과도 상당히 세분화되어 있다. 중국 역시, 건국 직후인 1952년의 구조조정으로 55개에 달하던 종합대학을 14개만 남기고 대폭해체하여 이공계 위주의 단과대학으로 개편한 바 있다. 북한에서도 일찍부터 학과의 세분화를 강조하였다. 김일성은 1966년11월 3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한 연설에서 "기술인재양성사업에서 질을 높이며 기계공업을 발전시키기위하여서는 대학의 학과와 과목을 세분화하고 기술자양성을 전문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김책공업대학에는 여러 부문 학과들을 종합적으로 다 두고 그 밖의 단과대학들은 보이라면 보이라 어느 한 가지만을 전문화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대학의 학과들을 이렇게 전문화하여야 기계공업을 비롯한 공업을 빨리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 기술과목들을 세분화하는 것이 선진적입니다" 라고 지시하였다. 해방 직후, 고급인력 양성기반이 거의 없던 상태에서 중공업 우선발전 정책을 추진한 북한은,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고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원으로 건설된 공장을 정상 가동하기 위해 대대적인 해외 유학생과 기술자 연수생들을 파견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1946년부터 1972년 사이에 총 7,258명의 유학생이 파견되었다고 한다. 국가별로는 소련 5,000명, 동독 400명, 체코 400명, 폴란드 400명, 헝가리 300명, 중국 300명, 불가리아 300명, 루마니아 50명, 아랍 50명, 탄자니아 26명, 몽고 20명, 쿠바 10명, 미얀마 2명 등이었다. 전체의 70% 정도가 소련에 집중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60년대부터 이어진 중소분쟁과 쿠바사태, 중국의 문화대혁명 등으로 이들 국가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내부적으로도 주체사상이 강조되면서 유학생 파견이 크게 감소하게 되었다. 해외 유학생 파견이 다시 활성화된 것은 1980년대 초반 김일성의 동구 순방으로 외국기술 도입을 강조한 후부터였다. 이에 따라 1980년부터 1984년까지 과학기술 분야에서만 소련 545명, 일본 498명, 중국 287명, 동독 97명, 서독 87명 등 총 1,868명의 유학생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이 해체되고 북한 이탈자가 증가하면서 큰 폭으로 감소하고, 중국으로의 유학생 파견이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중국의 북한 유학생 접수는 1950년 6월 25일 주은래 총리 주재하의 회의에서 북한과 5명씩의 유학생을 교류할 것을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주요 목적은 외교관 양성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는 김일성종합대학과 흥남공업대학 고학년생들의 실습을 북경대학, 청화대학, 북경농업대학 등에서 진행하면서 특별히 큰 폭으로 증가하기도 하였다. 이후 정상 궤도에 진입한 1950년대 말부터는 격년제로 수십명 정도씩의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당시의 중국 내 북한 유학생은 중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수행하던 월남 유학생 다음으로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1966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대학이 휴교 상태에 들어가면서 모든 외국 유학생들을 귀국시키게 되었다. 북한의 유학생들도 모두 귀국하였다. 중국 유학이 재개된 것은 1971년부터였다. 당시의 주중 북한대사는 중국 정부에게 5- 6명의 학생을 중국에 파견해 영어와 프랑스어를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외국과의 유학생 교류 단절로 북한의 청년 외교관과 통역 인력 양성에 큰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이를 허락해 1972년 겨울에 6명이 북경에 도착하였다. 이후 1973년부터 정식 유학생 접수가 재개되었고, 1975년에는 문화대혁명으로 휴학한 학생 46명을 복학시켜 중국 내 북한 유학생이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초반부터는 북한의 해외 유학생 파견 확대로 중국 유학생이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매년 수십 명 선에서 파견되던 학생들도 평균 150명 정도로 크게 증가하였다. 유학생 파견은 80년대 후반의 사회주의권 붕괴와 유학생들의 북한 이탈 증가, 중국의 천안문 사태와 1992년의 한중수교 등으로 한 두 차례의 굴곡을 겪었다. 이런 문제점을 바로 인식한 것은 중국의 교육계였다. 개혁개방 이후 시장 메커니즘의 도입으로 구 교육체제의 단점이 그대로 드러나자, 중국 교육부는 상당수의 단과대학을 통합해 종합대학으로 개편하고 학과도 대대적으로 통합하는 조치를 취했다. 북한과 유사하게 이공계와 의약, 사범계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이공계단과대학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대신 종합대학이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21세기를 대비하여 100개 정도의 대학을 선정해 세계적 수준으로 특별히 육성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대학 당 평균학생 수도 3,000명을 넘어서4,000명을 지향하고 있고, 대학연구 수준도 크게 신장되었다. 최근 북한이 고려성균관대학을 종합대학으로 격상하고 20여 개 대학을 중앙급대학으로 특별 육성하고 있는 것도 이런 추세를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1946년부터 1972년 사이에 파견된 북한 유학생 중 일본으로 파견된 인원은 총 몇 명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질문은 1946년부터 1972년 사이의 특정 기간 동안 북한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유학생의 정확한 인원수를 요구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1946년부터 1972년 사이의 유학생 파견 통계와 국가별 인원 정보를 추출한다.

    • 1946년부터 1972년 사이에 총 7,258명의 유학생이 파견되었다고 한다.
    • 국가별로는 소련 5,000명, 동독 400명, 체코 400명, 폴란드 400명, 헝가리 300명, 중국 300명, 불가리아 300명, 루마니아 50명, 아랍 50명, 탄자니아 26명, 몽고 20명, 쿠바 10명, 미얀마 2명 등이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1946~1972년 기간의 국가별 유학생 명단에는 일본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일본 관련 수치는 다른 기간(1980~1984년)의 데이터에만 등장한다.

    • 1946년부터 1972년 사이에 총 7,258명의 유학생이 파견되었다고 한다.
    • 1980년부터 1984년까지 과학기술 분야에서만 소련 545명, 일본 498명, 중국 287명, 동독 97명, 서독 87명 등 총 1,868명의 유학생이 파견되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1946~1972년 데이터에는 일본 파견 인원이 명시되지 않았고, 일본 인원(498명)은 1980~1984년 데이터에 속해 있으므로 두 정보를 결합해도 질문에 대한 답을 도출할 수 없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질문이 요구하는 특정 기간(1946~1972년) 내의 일본 파견 인원에 대한 정보는 문맥에 존재하지 않는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문맥에 정보가 없으므로 답변 불가능 판정을 내린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에는 1946년부터 1972년 사이의 국가별 유학생 통계가 제시되어 있으나 일본에 대한 정보는 누락되어 있다. 일본 파견 인원은 1980년부터 1984년 사이의 통계로만 명시되어 있어, 질문이 요구하는 기간의 답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외부 정보나 추측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