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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의 가르침인 사도(斯道)의 역사적 중요성과 그 성쇠가 국가의 치란 및 사회 교화에 미치는 영향과 조선의 현황 doc_id CNTS-00060005487_6

주제 (main_topic)
성현의 가르침인 사도(斯道)의 역사적 중요성과 그 성쇠가 국가의 치란 및 사회 교화에 미치는 영향과 조선의 현황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사도가 전대에 비롯된 것에 이르러서도 고증할 수 있습니다.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요(堯)⋅순(舜)이 하늘의 뜻을 이어 표준을 세우고 도를 닦고 가르침을 확립하여 백성을 교화한 것이 모두 사도가 아님이 없습니다. 사도(司徒)의 직무와 전악(典樂)의 벼슬이 오교(五敎)를 널리 펴고 장자를 가르쳤는데 그 도가 점차 완비되었습니다. 주 나라에 이르러 선왕의 시서예악(詩書禮樂)을 따라 선비를 기르되 물 뿌리고 청소하며 응대하는 절차와 활쏘기⋅말타기⋅서⋅수[射御書數]의 글을 가르쳤으며, 또한 도덕을 갖춘 자를 가려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지방에서 세 가지 일로써 만민을 가르쳐서 빈객으로 삼아 들어 썼기 때문에 융성한 사도와 훌륭한 치화(治化)를 후세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주 나라가 쇠하게 되자 학교의 정사가 닦이지 않아 사도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자께서 하늘이 낸 성인으로 군사(君師)의 지위를 얻어 그 정교(政敎)를 행하지 못하게 되자 물러나 제자들을 거느리고 사도(斯道)를 강론하여 전고(前古)의 옛 성인의 가르침을 잇고 만세의 후학에게 열어주었으니, 후세에 끼친 공은 크지만 어찌 사도를 한 시대의 천하에 크게 행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선유가 말하기를, “사도의 성쇠는 우리 도의 회명(晦明∶어둡고 밝음)에 관계되고, 우리 도의 회명은 국가의 치란(治亂)에 관계된다.” 하였습니다. 지금 집사 선생께서 가을의 과장(科場)에서 책문을 내시면서 특별히 사도를 거론하고 오늘날 사도가 쇠퇴해진 것에 분개하여 이를 구제하는 방책을 듣고자 하시니, 어리석은 저는 여러 차례 사도의 위대함을 탄식하였습니다. 대체로 하늘이 백성을 낼 적에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을 부여하지 않음이 없고, 군신⋅부자⋅부부의 윤리를 두었으니, 고유의 본성을 다하여 당연의 법칙에 따르는 이가 선각자입니다. 일반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기품이 구속하고 물욕이 가리므로, 본성에 가지고 있고 직분에 당연함을 알지 못하고 사사로이 함부로 하여 금수의 지경에 흘러가지 않는 자가 거의 드뭅니다. 이러므로 선각자에게 배운 뒤에 그 총명을 개발하여 천리(天理)를 회복할 수 있으니, 이것이 사도가 일어나게 된 까닭입니다. 대체로 이끌어 가르쳐주고 열어주어 성취시킴으로써 불효자에게 효도하게 하고 불충자에게 충성하게 하니, 사도의 공이 어찌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사도의 성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 우리 동방은 고려 이전으로 천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깊이 탐지하고 멀리 찾아보면 인물의 적적하고 전혀 없음이 이처럼 심하고 치화(治化)도 흡족하지 못하였으니, 혼란이 서로 이어진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동방에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중화에서 예의와 문명이 있는 나라라고 성대하게 칭송하지만 실상은 이와 같으니, 참으로 의지와 기개를 지닌 자들이 어찌 이에 대해 감정이 격발하지 않겠습니까. 밝으신 집사의 물음이 이에 미치니, 실로 우리 동방에 사도가 일어날 싹인데 평소의 소견을 집사를 위해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선이 개국한 이래 열성이 서로 계승하여 정치를 힘쓰고 치세를 도모하여 모두 문(文)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균관과 사학(四學)을 도성 안에 설치하여 도성 안의 선비를 가르치고, 또 향교(鄕校)를 두어 사방의 선비를 가르쳤으며, 또 동몽훈도(童蒙訓導)50)를 두어 어린 아이를 가르쳤으니, 그 사도에 한 가지 일도 잘못된 것이 없고 한 가지 사물도 극진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는 총명예지(聰明睿智)의 자질과 정일집중(精一執中)의 학문으로 학문을 부흥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누차 성균관에 납시어 도의(道義)를 강론하시니, 유학자를 높이고 도의를 중히 여기시는 성의가 사람들의 이목에 넘쳤습니다. 전답을 더 마련하여 선비를 기른 것에 이르러서는 학교의 일에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비록 한 명제(漢明帝)가 벽옹(辟雍)에 거둥하여 삼로(三老)⋅오경(五更)에게 말을 듣기 원한 것도 이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사도가 확립되어 교화가 밝아지고 풍속이 아름다워 국가가 다스려져야하는데, 어찌하여 사도가 쇠퇴하여 확립되지 않고 선비들의 풍습이 비루해져서 날로 훼손된단 말입니까. 신진의 젊은 선비는 학식과 덕망이 깊고 나이 많은 선비의 말을 듣지 않고 저마다 자기가 배운 바를 옳게 여기며 사화(詞華)를 잘하여 영리추구를 일삼거나 문장을 잘하여 세속을 놀라게 하는 것을 뜻으로 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 시서의 바른 이치를 탐구하고 성현의 사업을 따르는 사람이 없어 자기의 글과 재력으로 협박하여 상대의 패배를 보려는 사심은 있어도 선을 따르고 의리에 복종하는 양심은 없으니, 사도가 확립되지 않음이 심합니다. 옛날 사람이 세 분을 한결같이 섬긴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옛날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은 사도의 위대함을 알아서 임금의 자격으로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스승의 자격으로 가르쳐서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자로 하여금 다스림이 있게 하고 본성을 따르지 않는 자로 하여금 가르침이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 뒤에 임금과 스승의 책임이 완비되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터전이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가르치는 방법도 백성들의 일상생활과 인륜의 떳떳함에서 벗어나지 않고, 임금이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한 나머지에 매여 있었으니, 임금된 이가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의 학문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옛날 정치가 위에서 융성하고 풍속이 아래에서 아름답게 된 까닭이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현달하여 윗자리에 있으면 군사(君師)의 도를 다하여 그 효험이 평천하하는 데에 이르고, 곤궁하여 아래에 있으면 이 도를 강명하여 옛 성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후세의 학자들에게 전해줄 따름이었습니다. 밝으신 물음에 따라 아뢰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단군(檀君)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위로는 임금이 되어 누가 능히 군사의 도를 다하였으며, 아래로는 신하가 되어 누가 능히 사도를 진작시켰습니까. 삼국시대 말기에 정법(政法)이 밝지 못하고 기강이 문란하여 전쟁이 늘 잇따르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멸망하게 되었으니, 이는 반드시 군사의 도를 다하지 못한 데에서 연유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고려 최충(崔冲)이 배우는 자들을 거느리고 도와 문예(文藝)로써 가르치니, 당대에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일컬었습니다. 지금 살펴보면 쇠퇴한 세상에 분연히 홀로 사도로써 자임한 이에 해당될 만합니다만 공자의 학문과 성의정심(誠意正心)의 실지는 전혀 듣지 못하였습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경우는, 쇠미한 시절에 학문을 부르짖자 일시의 학자들이 성대히 배출되었지만 이는 다만 문사(文詞)를 잘하여 이록(利祿)을 취하고 부처에게 아첨한 요망한 영웅일 뿐이지, 옛사람의 도를 진작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염계선생(濂溪先生)은 태어날 때 별이 모이는 상서에 응하여 타고난 기품이 순수하였습니다. 일찍부터 분발하여 두루 배우고 힘써 행하여, 묘기(妙機)에 초월해서 홀로 나아가고 전하지 않던 유경(遺經)을 이었으니, 실로 맹자 이후에 한 사람 뿐입니다. 소강절 선생(邵康節先生)은 씩씩하고 호걸스러움이 천부적으로 특출하고 영매함이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마음을 정밀히 하여 매우 노력하고, 신묘한 깨달음이 아주 계합(契合)하였습니다. 건곤의 시비를 초월한 곳에서 탐색하고 고명을 마음속에서 음미하였으니, 또한 만세에 그러한 분이 적습니다. 마침내 잠시 주현의 수령을 지냈으나 결국 거두어 감추어 두었으며, 혹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나아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으니, 이것이 모두 세상을 잊어버리는 데에 과감한 분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성현이 하늘에서 책임을 받고 당시 사람에게 이목이 되었으면, 천하에 우리 도를 미루어 주어 당시 사람이 모두 듣고 보는 바가 있게 하는 것이 진실로 성현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저 주렴계와 소강절 두 선생은 또한 어찌 홀로 이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다만 그 시대가 함께 유위(有爲)할 수 없는 데에 불과합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본문에서 언급된 고려 시대 인물 중, 배우는 자들을 거느리고 도와 문예로써 가르쳐 당대에 '해동공자'라 일컬어졌던 인물은 누구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본문에서 고려 시대 인물 중 '해동공자'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을 찾아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고려 시대 인물과 관련된 서술을 추출한다.

    • 고려 최충(崔冲)이 배우는 자들을 거느리고 도와 문예(文藝)로써 가르치니, 당대에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일컬었습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해동공자'라는 명칭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인물 이름을 선택한다.

    • 고려 최충(崔冲)이 배우는 자들을 거느리고 도와 문예(文藝)로써 가르치니, 당대에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일컬었습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최충이 배우는 자들을 가르쳤으며, 그 결과로 해동공자라 불렸음을 확인한다.

    • 고려 최충(崔冲)이 배우는 자들을 거느리고 도와 문예(文藝)로써 가르치니, 당대에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일컬었습니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질문에 대한 답으로 최충을 도출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최충(崔冲)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고려 최충(崔冲)은 배우는 자들을 거느리고 도와 문예(文藝)로써 가르쳐 당대에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일컬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