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북핵 문제는 지난 25년 동안 다양한 철학과 접근법 그리고 전략의 동원에도 풀리지 않았던 난제 중 난제이다. 그 결과 북핵 문제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모든 이슈를 삼키고 가두어 버리는 블랙홀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북핵 문제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결정적 계기는 향후 개최될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될 것이다. 특히 북핵 위기 25년 만에 처음으로 북미 정상이 직접 담판을 하게 됨으로써, 북핵 문제의 획기적 진전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두 차례 정상회담이 합의된 가장 큰 배경은 북한의 태도 변화, 미국의 대화 호응, 우리 정부의 강력한 남북관계 진전 의지와 외교력이다. 이 중 김정은 스스로가 비핵화 의지를 밝힌 것이 정세 변환의 핵심이자 촉발 동인이다. 이러한 북핵 정세 변화가 추동하고 있는 구조적 변화 양상, 이를 가능하게 만든 북한의 전략전환 이유, 북미 정상회담 전후의 정세 방향, 그리고 한국의 정책적 고려사항을 제시한다.
한반도는 평창 올림픽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 변화의 정점이자 이후 변화의 선도자가 남북·북미 정상회담 개최이다. 이를 비롯해 한반도 주변 일련의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선도, 촉진하면서 한국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선순환을 추구하고 궁극적으로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와 평화정착을 기대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남북·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두 개를 제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관계개선 의지를 고려할 때 남북정상회담은 무리 없이 성사될 가능성이 큰 반면, 북미정상회담은 성사 가능성에 무게를 두지만 낙관하기 어려운 측면도 존재한다. 두 회담에 대한 전망을 한 후에는 남북·북미관계의 선순환 방안을 제안해볼 것이다. 그에 앞서 남북·북미 정상회담 개최가 갖는 전략적 의미를 먼저 논의해보고자 한다.
분단 이후 남북관계는 한반도 주변 국제관계와 불가분의 함수관계를 가지며 진화를 거듭해왔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독립변수로서 한반도 주변 국제관계를 이끌어가기 보다는 국제관계의 변화와 남북관계에 영향을 주는 범위와 정도가 우월한 양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냉전 시기 남북대화를 통해 남북관계 전반을 규정하는 최초의 합의를 이뤄낸 7.4 남북공동성명의 배경에는 닉슨 대통령의 미중화해(rapprochement) 정책과 베트남전 철수 등 국제관계의 변화 요인이 자리잡고 있었다. 소련에서 고르바초프 정권의 출범과 개혁개방 정책 추진이라는 국제환경적 요인 속에서 노태우 정권은 북방정책을 추진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추진 배경에는 북한을 우회적으로 압박하여 국제사회로 유도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북한이 유엔 동시가입 수용이라는 방식으로 다자 국제기구에 편입 결정을 내린 것도 냉전의 해체와 한중, 한소 수교라는 변화된 국제정치 여건에 대한 대응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정부는 이러한 국제적 요인을 배경으로 7.7 선언을 통해 남북간의 인적 교류와 문호개방, 경제협력 및 상호교역 허용 등의 방식으로 남북관계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7.7 선언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적 차원에서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관계를 민족공동체 내의 특수한 관계로 정의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남북관계의 정체성에 대한 재인식의 기반 위에서 남북한은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탄생시켰다. 뿐만 아니라 남북한이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서명(1991년 12월) 하면서 북한은 비확산에 관한 국제규범을 수용하여 핵안전협정에 서명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임시사찰을 수용하게 되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남북한 사이의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에 대한 3개항 25개조의 합의와 3건의 부속합의서를 통해 남북관계의 신기원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합의서의 운명 또한 국제관계의 영향 속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단기적으로는 팀스피리트 훈련의 중단과 재개 여부가 남북관계의 진전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고 장기적으로는 1993년 1차 핵위기의 발발이 남북관계의 단절로 이어졌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에 대한 민족주의적 접근과 국제주의적 접근 사이에서 정책적 진폭을 크게 드러내며 최초의 문민정부로서 누릴 수 있었던 대북정책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에 한계를 드러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는 등 남북관계의 불확실성이 예고되는 상황에서도 김영삼 정부는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판문점을 통해 송환하면서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1993년 3월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한 이후 1차 핵위기가 고조되면서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은 급변했다. 1993년 출범한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와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간 북미 고위급 회담을 열어 핵문제 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포괄적 협상을 시도했지만 김영삼 정부는 남북관계의 진전 없이 북미관계만 앞서 나가는 상황을 용인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인도주의적 대북 식량 지원을 김영삼 정부 시절 한미가 공동 제안했던 4자회담 수용 조건으로 제시함으로써 남북관계를 국제관계 차원에 결부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의 남북정상회담 성사와 이를 통한 남북간 전면적 교류협력 시대의 개막은 남북관계의 70여년 역사에서 주변 국제환경에 대한 수동적 대응이 아닌 한국 정부의 능동적 대북전략이 이뤄낸 최초의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 역시 한미일 3국의 대북공조체제가 마련되고 북미 대화가 진전됨에 따라 남북관계를 본격적으로 추진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개성공단 건설 등 남북경협의 안정화를 통해 남북관계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데에 대북정책의 주안점을 두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조지 부시 대통령이 ‘ABC (Anything but Clinton)’ 정책으로 표현되는 대북정책 차별화를 통해 한국정부와 이견을 마다하지 않던 상황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특히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불거진 2차 북핵위기로 인해 김대중 대통령은 북미간 대화를 중재하기 위해 워싱턴과 평양으로 특사를 보내는 등 중재 역할에 충실하는 한편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관리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2차 북핵위기는 노무현 정부 시기 남북관계 활성화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로 작용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구상했던 북핵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북미 양측의 요구조건을 합리적 수준에서 교환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정책의 이면에 깔려 있던 의도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
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가진 숨겨진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
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문맥에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관련된 내용을 추출한다.
- 노태우 정권은 북방정책을 추진했다.
-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추진 배경에는 북한을 우회적으로 압박하여 국제사회로 유도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
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북방정책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명시한 문장을 선택한다.
- 북한을 우회적으로 압박하여 국제사회로 유도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
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추출된 근거를 바탕으로 북방정책의 목적이 북한에 대한 압박과 국제사회 유도에 있음을 연결한다.
-
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북한을 우회적으로 압박하여 국제사회로 유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
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한 답을 간결하게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북한을 우회적으로 압박하여 국제사회로 유도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추진 배경에는 북한을 우회적으로 압박하여 국제사회로 유도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