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일제강점기 1921년에는 영보마을에 영보학원이 설립되었는데, 당시 영보정이 학사(學舍)로 이용되면서 영암지역 청년들을 위한 근대식 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더불어 1931년 영암의 형제봉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청년들도 영보학원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영암정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유적으로서도 의미를 갖는다. 1979년부터는 기존에 주민들의 친목모임 성격으로 유지되어 오던 예향회를 발전시켜, 매년 5월 5일 영보 풍향제(豐鄕祭)를 개최해 마을 주민과 출향인들이 모여 마을 제사를 지내고 영보정에서 마을잔치를 벌이고 있다. 영보정 인근에는 전주최씨 입향조 최덕지와 문중, 그리고 영보대동계와 관련된 문화유산들이 분포해 있다. 먼저 영보정 북쪽에는 입향조 최덕지가 살았던 전주최씨 영암종택과 그의 영정을 보관하는 연촌 사우(祠宇)가 있다. 종택에는 사랑채 존양루(存養樓)와 안채 존양당(存養堂)이 있는데, 존양루는 최덕지가 영보에 정착한 후 학문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33년(인조 11) 7세손 기정(棄井) 최정 (崔珽, 1568-1639)이 중수했고, 이후 1971년에 화재를 당해 일부 소실된 것을 신축한 것이다.
연촌 사우는 종택과 영보정 사이에 위치한다. 경내에는 보물 제594호 ‘최덕지 초상 및 유지 초본’이 봉안된 영당(影堂)과 재실(齋室)인 합경당(合敬堂), 장판각, 동·서재 등이 있다. 이 초상화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대부 초상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복식과 초상화 기법을 전하는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된다. 그리고 합경당에는 영보정동계문서(永保亭洞契文書)(전7권)이 보관되어 있는데, 1589년(선조22)에 작성한 동계헌 중수서(洞禊憲重修序)를 포함해 이후의 개편된 동계의 운영에 관련된 내용을 수록하고 있으며, 조선 중기 이래 마을의 조직과 운영, 생활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영보정 뒤(동쪽)의 산기슭에는 ‘산정(山亭)’이라 불리는 장소가 있는데, 이곳은 원래 최덕지의 사위 신후경(愼後庚, 1420-1493)과 그의 아들 신영수(愼榮壽, 1442-1497)가 살던 곳이었는데, 산정은 신영수의 호이다. 현재 이 자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64호 ‘영암 최성호 가옥’이 있다. 이 집은 19세기 말에 지어진 전형적인 조선 후기 남도 부농의 주택으로, 一자형 평면에 초가지붕을 얹은 안채, 사랑채, 문간채, 헛간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口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또 영보정 남쪽에는 덕진면에 있는 12개 마을의 대동계 대표가 회합하는 장소인 영보대동계가 있다. 전통 한옥구조로 된 이 건물은 약례당(約禮堂)이라 칭하기도 하며, 2010년에 지어진 것이다. 영보평야 남쪽 건너에 솟은 월출산 북록에는 녹동서원(鹿洞書院)이 북향으로 자리하여 영암군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다. 녹동서원의 출발은 왜란 후 입향조 최덕지 선양사업을 주도했던 7세손 최정이 1630년에 외손들과 당시 영암군수와 영암 유림 등의 도움을 받아 최덕지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존양사(存養祠)이다. 이후 1675년(숙종 1) 영암으로 유배 온 서인(西人) 노론계의 영수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과 그의 아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과 전주최씨 가문이 유대를 맺은 것을 계기로, 김창협과 지역 유생들의 청액(請額) 상소가 이어진 끝에, 1713년 ‘녹동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다. 사액 당시 존양사에는 주향 최덕지와 그의 손자 산당(山堂) 최충성(崔忠成, 1458-1491), 그리고 김수항과 김창협 부자가 배향되어 있었다. 녹동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고, 지금의 서원은 1976년에 복원된 것이다.
영보정은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유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서 가치가 있다. 첫째. 조선시대 호남지방에는 문중 중심으로 鄕約(洞契, 洞約)이 널리 발달했는데 특히 영암지방이 가장 돋보이는 지역이고 유구도 제일 잘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동계가 구림 대동계, 장암정 대동계, 그리고 영보정 동계다. 제일 규모가 컷 던 구림대동계의 상징인 會社亭은 6.25전쟁 시 소실되어 현재는 1980년대 옛 모습이 아닌 축소된 규모로 복원됐다(정면 3칸) 영보정은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한 단면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공간이다. 임란이후 재지사족들의 결속과 향촌사회의 안정, 향촌민 통제의 필요성을 목적으로 洞契가 설립됐는데 그 실행의 장소가 바로 ‘영보정‘이다. 단순히 휴식이 아닌 대동계의 강회 및 집회소로서 정자가 건립됐다. 1630년경에 현 위치에 중건 된 영보정은 오래전에 보물로 지정된 관제성격의 남원의 광한루, 정읍의 피향정과는 건립 배경과 성격이 다른 정자다. 즉 조선 후기 호남지방 향촌사회 조직과 움직임 등을 이 정자를통해 잘 알 수 있다.
영보정은 창건, 중건을 특정할 자료가 거의 없어 건립시기를 판단하는데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다. 전주최씨 가장 자료를 토대로 1635년을 중수 시기로 본 점은 양란 이후 영보촌에서 일어난 선양사업과 맞물려 타당성이 높은 견해로 인정된다. 대체로 현영보정 건물을 보면 1635년 중수한 기본골격을 토대로 이후 몇 차례 중수 내지는 수리한 흔적이 보이나 그 시기를 파악할 단서는 없다. 하지만 구불대는 자연곡재를 사용하여 짠 가구구조와 자연곡재를 기둥재로 사용하기 위해 휜 부재를 직선으로 만든 기법 등은 흥미를 끈다. 또한 전후를 달리한 익공의 위계와 초각 기법, 다양한 무늬를 새긴화반과 대공의 장식성은 영보정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1635년 중수 이후의 변화상 가운데 추후 논의할 점은 크게 익공의 기법과 간살 구성에 있다. 건물 전후가 다른 익공은 위계를 반영한 차이로도 볼 수도 있지만 중수하면서 구부재를 재사용 결과로도 판단되는 사안이어서 향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좌우 툇간을 가운데 세칸보다 넓게 설정한 간살도 계원이 대폭 늘어난 18세말의 동계 상황을 반영한 결과가 아닐까 싶지만 단언하기엔 이른 점이 있다.
영보정의 창건 내력을 자세히 기록한 당대의 사료는 확인된 것이 없다. 지금 영보정에는 각각 1977년, 1991년에 작성된 중수기문이 걸려 있는데, 이에 의하면 영보정은 문종 연간(1450-1452)에 최덕지(1384-1455)와 사위 신후경(1420-1493)이 건립했고, 왜란으로 인해 건물이 퇴락(頹落)하자 최정(1568-1639)과 소은(素隱) 신천익(愼天翊, 1592-1661)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한편 영보마을의 전주최씨 문중자료와 촌락 공동체 조직문서들을 분석한 김경옥의 연구에 의하면, 영보정은 전주최씨와 거창신씨가 영보마을 집거를 시작하면서 입향조 최덕지의 유덕을 기리고자 사위 신후경과 외손(신후경의 아들) 신영수(1442-1497)가 주도하고 전주최씨와 거창신씨 후손들이 힘을 모아 건립했고, 이후 왜란 때 소실된 것을 최정과 신천익이 1635년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창건과 중건 내력에 대한 위의 두 자료의 내용이 제법 다른데, 두 자료 모두 신뢰할만한 특정의 사료에 근거하거나 증거 자료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먼저 영보정의 창건에 대해, 김경옥은 최덕지가 아니라 그의 사위와 외손자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한 것은, 사위 신후경의 영보마을 입향(1455년 이후)이 최덕지의 사망 연도보다 늦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보정의 건립이 반드시 신후경이 영보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관직에 나가 있는 중에라도 건물 건립을 위해 재정이나 자재 조달, 행정 편의 등의 도움을 주거나, 이에 더해 실제로 공사기간동안 다녀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문종 재위 기간에 최덕지와 신후경이 함께 창건했다는 중수기문의 내용을 인정하지 않을 근거는 없다고 하겠다.
지시문 (instr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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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question)
영보정의 창건과 중건에 관한 두 가지 자료의 내용 중, 김경옥의 연구에 따르면 영보정은 누가 주도하여 건립되었으며 이후 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누가 1635년에 중건하였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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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김경옥의 연구를 바탕으로 영보정의 건립 주도자와 1635년 중건자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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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문맥 내에서 김경옥의 연구 내용을 언급한 부분을 추출한다.
- 김경옥의 연구에 의하면, 영보정은 전주최씨와 거창신씨가 영보마을 집거를 시작하면서 입향조 최덕지의 유덕을 기리고자 사위 신후경과 외손(신후경의 아들) 신영수(1442-1497)가 주도하고 전주최씨와 거창신씨 후손들이 힘을 모아 건립했고, 이후 왜란 때 소실된 것을 최정과 신천익이 1635년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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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건립 주도자와 중건자가 명시된 문장을 선택한다.
- 사위 신후경과 외손(신후경의 아들) 신영수(1442-1497)가 주도하고
- 최정과 신천익이 1635년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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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건립 주도자는 신후경과 신영수이며, 1635년 중건자는 최정과 신천익임을 결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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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질문에서 요구하는 두 가지 정보를 정리하여 답변을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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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영보정은 사위 신후경과 외손 신영수가 주도하여 건립하였으며, 왜란으로 소실된 후 1635년에 최정과 신천익이 중건하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김경옥의 연구에 따르면 영보정은 사위 신후경과 외손 신영수가 주도하여 건립하였으며, 왜란으로 소실된 후 1635년에 최정과 신천익이 중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