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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의 역사적 변천 과정, 건축적·학술적 가치 및 지역 사회에서의 다각적인 상징성과 역할 doc_id CNTS-00118870725_39

주제 (main_topic)
경포대의 역사적 변천 과정, 건축적·학술적 가치 및 지역 사회에서의 다각적인 상징성과 역할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그러나 이 이건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이견의 핵심은 1927년 간행된 강원도 명소구적과 1929년경 간행된 강릉생활상태조사보고에 기록된 내용이 전설과 구전에 의해 편찬된 내용이고, 또한 옛 기록과 상이함을 지적하여 사실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앞서 밝힌 바와 같이 1930년 중반 경에 간행된 사찬읍지인 동호승람에서는 이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입재 강재항(1689∼1756)이 지은 오대산기 에 의하면, “한급은 강릉부사로 있을 때 밤에 대관령에 올라 강릉의 산수를 바라다보며 한탄하기를 이 땅은 인재가 성하는 연유가 있으니 철정으로 산맥을 끊어버려야겠다.”라고 전하고 있어 이건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전설 또는 구전에 의한 기록이라는 이유로만 그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사실 앞서 제시한 이유로 부사 한급이 경포대를 이건하였다고 한 내용은 구전에 의한 것으로 확실한 증거로 삼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한다. 셋째, 광무 1년(1897) 강릉 군수 정헌시가 득월헌과 후선함을 설치한 시기를 꼽을 수 있다. 수당집에 수록된 경포대중수기 에 의하면, “정사의 규모는 대략 몇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에는 모두 다락이 있었으나 다만 동쪽의 다섯 기둥에만 없었다. 이번에는 그 가운데의 세 칸에다 다락을 올렸는데, 전의 다락에 비하여 높다. 그리고 남쪽과 북쪽에 각각 층루 한 칸씩을 만들었는데, 남쪽은 ‘득월헌’이라 하고 북쪽은 ‘후선함’이라”18)고 하였다. 이남규의 의미 부여를 보자면 ‘득월헌(得月軒)’에 대해서는 ‘달[月]-밝음[明]’으로 연결하였고, ‘후선함(候仙檻)’에 대해서는 ‘신선[仙]-욕심 없음[無欲]’으로 연결하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여기서 ‘밝음’이란 순수하고 정의로운 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욕심 없음’도 결국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덕성일것이다. 그리고 달과 신선은 방편으로 삼은 이름일 뿐이니 득월헌과 후선함에 올랐을 때 달과 신선을 찾지 말고 자기 마음속의 밝음과 욕심 없음을 찾으라고 하였다. 당시 강릉군수는 두 층루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청렴과 무욕을 강조하고자 하였으며, 또 공사의 분별을 명확히 함으로써 관과 민 사이의 불신을 해소하고 공정한 사회 기풍을 조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청렴과 무욕의 상징을 조성하여 과중한 조세부담과 비적의 출몰로 혼란한 사회·경제적 위기에 직면한 읍민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 분파적 결속에 따른 분파적 욕구를 갖고 있는 사족들에게는 이곳에서 심신을 수양하면서 담연한 마음을 몸소 익히도록 하고자 했던 것이다. 넷째, 2008년 수리공사 후 판벽과 내부 용상단을 설치하는 원형회복작업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2008년 보수공사 이후 판벽과 용상단의 설치와 관련하여 2010년 11월 한국건축역사학회 학술발표대회에서 문화재 보수정비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용상단과 판벽의 설치에 대해 문제제기로 이어졌고, 이후 한국건축역사학회를 중심으로 많은 토론이 진행되었다. 2011년 2월 25일 강릉에서 개최된 심포지엄(경포대의 국가지정 문화재 승격을 위한 건축사적 가치 제고)에서 경포대의 보물 승격 가치에 대해서는 참가자 모두가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공통된 견해를 보였지만 판벽과 용상단의 설치시기에 대해서는 상반된 의견이 나왔다. 경포대는 관동의 제일 명승지로서 옛날부터 휴양지 또는 중앙관직에서 퇴관한 후 고향에서 여생을 보낸 인물들이 다수 거쳐 간 곳이기도 하다. 강릉출신 인물로는 어촌 심언광, 삼가 박수량, 사휴 박공달, 율곡 이이, 향호 최운우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지역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인물들이다. 담암 백문보, 근재 안축 등은 고려후기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며, 허백당 성현, 기재 신광한, 지봉 이수광, 명재 윤증, 우암 송시열, 삼연 김창흡 등은 조선조의 대표적인 성현들이다. 지역 내외를 막론하고 이들은 모두 경포대를 찾아 자연 풍광을 음미하며 학문을 닦고 마음을 수양했었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경포대와 관련된 많은 시문에는 경포대를 찾는 사람의 심경이 잘 기술되어 있다. 때로는 정치적 타격으로 조정에서 물러나면서 그 안타까운 심정을 추스르는 내용, 또 경포에서 맑은 경포호수를 내려다보며 무욕의 마음을 가다듬고자하는 의미 있는 표현들이 구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객들은 경포대를 심성을 가다듬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공간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경포대는 관아(官衙)성격의 건물이지만, 활용에 있어서는 관인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동호승람에 의하면, 강릉 지역에는 경갑계(庚甲契)가 있는데 이 계는 갑계로 마을 선비 13명이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서 어진 덕을 쌓는다”는 뜻으로 경포대에 모여 계원 상호 결속을 다진 장소이며, 그 후 자손들이 계첩을 이어 받아 계속하여 전해 내려왔다고 하니 경포대가 관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의 다양한 형태의 모임장소로 널리 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경포대는 단순히 경치를 관람하고 풍악을 즐기기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경포대가 창건 이후 수많은 중수와 중건을 거치면서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은 경포대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지역민들도 평안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지방관의 안정적인 지역 통치의 상징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시설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경포대는 단순한 놀이 장소가 아니라 백성들의 근심걱정을 달래주고, 평안한 생활을 유지시켜주는 매우 의미 있는 장소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포대는 1326년 창건 이후 한차례 이건과 수차례 중수 기록이 대부분 자세하게 남아있으며, 특히 창건 이전의 기록도 남아있어 경포대의 시대별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특히, 이건 및 중수의 배경과 의미가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어 당시 지역사회의 시대상을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자료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중수 기록 중 대표적인 사례 한 가지를 소개하면, 조선 중기 경포대에는 온돌방과 마루방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조 때 강릉부사 이명준이 철거하도록 했는데, 그 이유는 많은 외빈들이 찾아와 밤낮으로 경관을 감상함으로 인해 부민들에게 적지 않은 폐해를 발생시켰고, 장기 거주로 인한 화재발생의 위험까지 안고 있다고 판단되어 백성들의 고충이 심각한 상황에서 관리들의 청렴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지배 계층의 퇴폐적 문화 요소의 척결을 통한 대민안정화 정책의 한 방편으로 이와 같은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말할 것도 없이 금강산을 필 두루 한 관동팔경은 고려 말 안축의 「관동별곡」에서도 일부 언급되는데 경포대의 창건한 강원도 안렴사 박숙의 부탁으로 「경포대기」를 기술한 사람이 바로 안축이다. 이후 조선 시대에는 수령관뿐만 아니라 많은 관원을 비롯하여 시인 묵객들이 경포대를 찾아와 관련된 시문과 기록을 남겨 지금까지 전하고 있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장유(張維)가 지은 「경포대중수기」에 의하면 경포대가 있는 자리가 신라 사선 중 하나인 영랑이 노닐던 옛터였다고도 한다. 또 안축보다 앞서 경포대를 노래한 인물이 있었는데 고려 명종(1170∼1198) 때 문신인 김극기(?∼1209)로 『동문선』,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등에 수십여 편의 시문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200여 수가 언급된 인물로 “경포대”라는 한시를 2편 지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조선 인조 때 강릉부사 이명준이 경포대의 온돌방과 마루방을 철거하도록 결정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이명준이 경포대의 온돌방과 마루방을 철거한 이유를 문맥에서 찾아 기술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인조 때 강릉부사 이명준의 조치와 관련된 내용을 추출한다.

    • 인조 때 강릉부사 이명준이 철거하도록 했는데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철거의 원인이 된 구체적인 사유들을 선별한다.

    • 많은 외빈들이 찾아와 밤낮으로 경관을 감상함으로 인해 부민들에게 적지 않은 폐해를 발생시켰고
    • 장기 거주로 인한 화재발생의 위험까지 안고 있다고 판단되어
    • 백성들의 고충이 심각한 상황에서 관리들의 청렴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지배 계층의 퇴폐적 문화 요소의 척결을 통한 대민안정화 정책의 한 방편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추출된 사유들을 종합하여 부민의 피해, 화재 위험, 관리의 청렴성 강조 및 대민안정화 정책이라는 측면으로 연결한다.

    • 많은 외빈들이 찾아와 밤낮으로 경관을 감상함으로 인해 부민들에게 적지 않은 폐해를 발생시켰고
    • 장기 거주로 인한 화재발생의 위험까지 안고 있다고 판단되어
    • 관리들의 청렴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지배 계층의 퇴폐적 문화 요소의 척결을 통한 대민안정화 정책의 한 방편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외빈 방문으로 인한 부민의 피해와 화재 위험을 방지하고, 관리의 청렴성을 강조하며 퇴폐적 문화를 척결하여 대민안정을 도모하기 위함임을 정리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정리된 내용을 바탕으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많은 외빈이 밤낮으로 경관을 감상하면서 발생하는 부민들의 피해를 막고, 장기 거주에 따른 화재 발생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또한, 관리들의 청렴성을 강조하고 지배 계층의 퇴폐적 문화 요소를 척결함으로써 대민안정화 정책을 시행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조선 인조 때 강릉부사 이명준이 경포대의 온돌방과 마루방을 철거한 이유는 많은 외빈이 밤낮으로 경관을 감상하면서 부민들에게 적지 않은 폐해를 발생시키고 화재 발생 위험을 안고 있었으며 관리들의 청렴성을 강조하고 지배 계층의 퇴폐적 문화 요소를 척결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