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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대율리 대청의 건축적 특징, 역사적 변천 과정 및 서당으로서의 학술적 가치 doc_id CNTS-00118870725_46

주제 (main_topic)
군위 대율리 대청의 건축적 특징, 역사적 변천 과정 및 서당으로서의 학술적 가치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군위 대율리 대청은 조선 중기의 목수기술 뿐만 아니라 건축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중수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변형된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전반적으로 1632년 중건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단은 대형 장대석을 잘 다듬어 사용하였고 초석은 치석한 것과 적당히 치석한 자연석을 혼용하였다. 기둥은 적당한 후림으로 치목하여 나무의 생명력을 잘 살려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둥 상부에서는 초익공에 주두를 올리고 보를 걸었는데 보간 거리가 약 17.5 자(5,340㎜)에 달하는 일반적인 건물에 비해 매우 길다. 대들보 위에는 삼분편작으로 양쪽에 동자주 대신 포를 짜 올리고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걸었다. 익공과 익공 사이에는 화반을 올렸는데 화반의 모양이 여러 가지다. 중건당시부터 이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건축양식으로 보아 중건 당시에는 모든 화반을 같은 모양으로 초각된 화반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목구조는 당시 목수의 건축예술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대형 건축물을 맞배지붕으로 한 것은 탕개톱이 개발되어 많이 보급됨으로써 판재를 쉽게 생산할 수 있다는 점과 부재를 절약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대율리 대청 건물에서 어디서 어디까지를 창건인지, 중수 이후의 모습인지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다만 1705년 <을유년 상량문>에 적힌 실상은 중수 범위를 추측할 단서를 제공한다. 건물의 상태를 적은 내용을 보면, 기우는 기와와 무너지는 서까래가 드리워진 모습에 썩을 대들보와 기둥이 추락할 지경이란 표현이 있어 사용하기 곤란한 지경에 처했음을 알 수 있다. 나열된 건축부재는 서까래, 대들보, 기둥으로 주요 골격을 이루는 구조재에서 서까래까지 포함하고 있어 1632년에 건립한 건물의 부재 가운데 주요 부재는 1705년에 상당 부분 신재로 교체되었을 여지는 있다. 1632년에 지은 건물을 1705년에 중수한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나 만일 1705년에 대부분의 부재가 신재로 교체되었다면, 여기에 더해 규모나 구조가 변화하였다면 이 건물의 시기를 언제로 판단해야 할 것인지 고심이 남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향후 연륜연대 조사가 필요하다. 근래인 1991년 기둥 이상을 해체하여 부식재를 교체하고 마루와 기단도 보수하였다. 당초 공사범위는 서까래 이상이었으나 막상 해체하고 보니 부재 손상이 심해 상당수 부재를 신재로 교체하였다. 군위 대율리 대청은 누정건축을 대상으로 한 승격 지정으로 조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 건물의 원래 용도는 학사건물로 건축되었고 1900년대 초반까지도 그 용도에 맞게 사용되었다. 그 뒤 근년에 와서 마을주민들의 모임장소로 사용되어 왔다. 본 건물은 1705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에 대한 기록이나 그간의 과정들이 남아 있는 자료들이 많아 이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 또한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의 모습에서 익공살미의 형태나 보머리의 치목수법 및 대공의 구성수법 등에서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어 건축년대가 부합되는 부분이다. 그 외에도 이 건물은 전반적으로 건실하면서도 건축규모, 가구수법, 장식 등을 볼 때 매우 공을 들인 우수한 건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건축 당시의 평면은 마루와 방이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후에 벽체를 없애고 방이 있던 자리에도 마루를 깔아 벽체없이 기둥만 남은 통칸으로 바뀌어서 정자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변형이 많이 되었다. 그 뒤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1991년에 대대적인 해체보수가 시행되었는데 많은 부재들이 신재로 교체되었다. 특히 기둥 15본 중 10본 교체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벽체 등을 복원할 수 있도록 인방 흔적 등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 복원의 기회를 잃어 버렸음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군위 대율리 대청은 임진왜란 이후 궁핍한 경제상황에서 마을 공동체가 건립한 서당건축이다. 서당건축은 향교, 서원 등과 같은 교육시설임에도 그동안 건축사적으로 깊이 연구된바가 없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형태가 유사한 건축물은 있을지 몰라도 서당기능을 지닌 이러한 건축물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 건축물은 단순히 건축사적인 측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지역사회 공동체와 조선시대 초등교육사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마을 공동체에서 건립한 교육시설로는 그 사례가 희귀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따라서 조선중기 마을 공동체에 관한 연구에서도 학술적 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이 건물의 보존은 매우 양호한 상태다. 특히 마을 주민들이 협심하여 보존 관리를 하고 있으며 주변 환경 또한 양호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1632년 중건된 이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쳤지만 대체적으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화반과 같은 극히 일부 부재에서 원형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조와 양식에서 큰 변형 없이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부재에 남은 흔적과 문헌 기록 등을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대율리 대청은 건축당시부터 현재와 같이 사면(四面)이 개방된 누각 형식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방과 마루로 구성된 일반적인 서당식 건물이 시간이 흐르면서 온돌방이 없어지고 마루로 개체되면서 현재와 같이 변모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겠다. 온돌방이 마루로 개체되면서 하부 구조인 구들과 고막이 벽 등이 함께 없어지면 전체가 고상식 구조의 누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기둥 머리는 전형적인 앙서형의 살미가 짧은 초익공으로 구성하였는데 이른 시기의 수법으로 보인다. 주두위에 첨차를 넣어 창방과 주심장혀사이에 화반을 둘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였다. 화반을 두지 않는 일반적인 형태의 초익공 수법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량대공은 포대공으로 구성하였는데 주두위에 2중 첨자로 구성하고 보아지는 초각으로 장식하였다. 종도리를 받치는 종대공은 사다리꼴의 제형판대공 형식과 파련대공형의 두가지를 사용하였다. 보머리는 단부를 마름모모양으로 치목하였는데 이는 대공의 모습과 함께 1700년대에 많이 나타나는 치목수법으로 건축년대와 부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건물은 원래 학사건물로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계서당기에 ‘마루에 오르고 방에 들어오는 후생들이’라는 대목은 서당이 방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과 이현로의 상량문에 중수한 건물이 학사였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 뒤 광무(光武)10년 병오년(丙午 : 1906)에 완성군(完城君)이 썼다고 기록된 ‘부계동중서당 (缶溪洞中書堂)’현판이 존하는 것으로 보아 20세기 초반까지는 서당 기능이 지속되어 온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1900년대 이후 서당이 차츰 기능을 상실하고 해방후에는 다른 용도로 건물이 사용되다가 근년에야 마을 주민들이 모이는 장소로 변하면서 온돌방과 벽체 등이 사라지고 대청구조만 남아 현재에 이른 것으로 보여진다. 1991년에 대대적으로 해체보수한 바가 있는데 기둥, 도리, 창방, 퇴보, 마루 등 대들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재들이 교체된 바 있다. 이때 기둥의 홈 자국들에 대한 조사없이 신재로 교체하다 보니 내부 구조를 복원할 수 있는 여지를 잃어버린 것이 매우 아쉽다. 대율리 대청은 부림홍씨 세거지인 대율리에 건립한 마을 서당으로 1632년에 중건한 뒤 이후 중수를 거쳐 1705년에 크게 중수한 뒤 현재에 이르고 있는 건물이다. 서당은 향촌의 소규모 초학 교육기관으로 행정 단위별로 마련되었는데 특히 부계서당은 문중에서 만든 동중서당으로 활발한 문중활동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서당 기능이 상실된 뒤에도 부림홍씨 후손이 잘 보존하여 지금은 마을 안의 공공시설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1705년 중수를 기록한 묵서 상량문 외에 이후의 변화상을 파악할만한 기록이 부족한 한계가 있으나 현 건물이 지닌 구조, 양식 특징으로 미뤄 중건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후대의 기법이 더해진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조선후기 건축의 특징을 잘 갖춘 건물로 평가되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는데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추후 1705년 중수 이후의 변화상을 파악해둘 필요가 있으므로 연륜연대 조사와 문화재 지정명칭에 부계서당으로서의 역사성을 반영할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군위 대율리 대청이 현재와 같은 사면이 개방된 누각 형식으로 변모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대율리 대청의 건축 형태가 원래의 서당식 건물에서 현재의 누각 형식으로 변화하게 된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건물의 원래 구조와 변화 과정에 대한 정보를 추출한다.

    • 건축 당시의 평면은 마루와 방이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 후에 벽체를 없애고 방이 있던 자리에도 마루를 깔아 벽체없이 기둥만 남은 통칸으로 바뀌어서 정자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 온돌방이 마루로 개체되면서 하부 구조인 구들과 고막이 벽 등이 함께 없어지면 전체가 고상식 구조의 누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형태 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벽체 제거', '방의 마루 개체', '온돌방 소멸' 관련 문구를 선택한다.

    • 벽체를 없애고 방이 있던 자리에도 마루를 깔아
    • 온돌방이 마루로 개체되면서 하부 구조인 구들과 고막이 벽 등이 함께 없어지면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원래 방과 마루가 있던 서당식 구조에서 벽체를 없애고 방 자리에 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이 마루로 바뀌면서 하부 구조(구들, 고막, 벽 등)가 사라졌기 때문에 누각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인과관계를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벽체 제거와 온돌방의 마루 개체로 인해 하부 구조가 사라지면서 현재의 누각 형태가 되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추론된 내용을 바탕으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원래 방과 마루가 있는 서당식 건물이었으나, 이후 벽체를 없애고 방이 있던 자리에도 마루를 깔아 벽체 없이 기둥만 남은 통칸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또한 온돌방이 마루로 개체되는 과정에서 구들과 고막, 벽 등의 하부 구조가 함께 없어지면서 전체가 고상식 구조의 누처럼 보이게 되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군위 대율리 대청은 원래 방과 마루가 있는 서당식 건물이었으나, 이후 벽체를 없애고 온돌방이 마루로 개체되면서 하부 구조가 소멸하여 전체가 고상식 구조의 누처럼 보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