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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이씨 가문의 시조 이석으로부터 시작된 가문의 역사와 안동 온혜리로의 입향, 그리고 퇴계 이황의 탄생과 가문의 학문적 전통에 관한 기록 doc_id CNTS-00118874391_1

주제 (main_topic)
진성이씨 가문의 시조 이석으로부터 시작된 가문의 역사와 안동 온혜리로의 입향, 그리고 퇴계 이황의 탄생과 가문의 학문적 전통에 관한 기록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진성이씨(眞城李氏)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은 현재 청송군 진보면 지역이다. 시조 이석(李碩)은 진보현리(眞寶縣吏)였으나, 고려 충렬왕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의 장남 이자수(李子脩)가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여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고,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시조 이석 윗대 조상은 대대로 진보지역의 향리직을 지냈고, 이석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가문을 일으키게 된다. 그 뒤 후손들은 이석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진성(眞成)으로 하였는데, 진보(眞寶)라고도 한다. 시조의 장남인 자수가 기곡(岐谷,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에서 마리촌(안동시 풍산읍 마애리)으로 이주하였다. 그 뒤 와룡면 주하리에 터를 잡는데, 영가지(永嘉誌, 1602) 등을 보면 이 마을에 실질적으로 정착 시기는 자수의 맏아들 운후(云候)와 손자 정(禎)의 시대인 것으로 보인다. 진성이씨(眞城李氏)는 이석(李碩)을 시조(始祖)로 하며, 2세손인 그의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경상북도 안동시 일대로 세거해 온 이래로 오늘날까지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거주해 오고 있다. 오늘날 진성이씨 분파는 여러 파로 확장, 분류되어 왔으며 그 중 이자수의 아들 이운후(李云候)를 파조(派祖)로 하는 주촌파(周村派)의 종택(안동시 와룡면 소재)인 ‘안동(安東) 진성이씨(眞城李氏) 주촌종택(周村宗宅)’이 지난 2017년 6월 29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91호로 지정, 관리되어 오고 있다. ‘안동(安東) 진성이씨(眞城李氏) 온혜파종택(溫惠派宗宅)’은 진성이씨의 또 다른 분파인 온혜파(溫惠派)의 종가(宗家)로 파조인 노송정(老松亭) 이계양(李繼陽,1424~1488)이 오늘날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세거하게 되면서 건립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온혜리는 예로부터 온천(溫泉)이 있어서 겨울철에도 물이 얼지 않아 온계(溫溪)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이계양은 안동지역의 불천위(不遷位) 50위 중 한 명으로 조선초기 단종(端宗)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양하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온혜리로 입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은 안동시 도산면 온혜중마길 46-5(온혜리 604)에 자리하고 있다. 온혜리는 진성이씨 4세 정(禎)의 3남 계양(繼陽, 1424-1488)이 분가하면서 처음 입향한 곳이다. 퇴계 선생이 엮은 『온계전거사적(溫溪奠居事蹟)』에 의하면 이계양은 처음 예안현 동쪽 부라촌(浮羅村, 지금은 예안면 부포)에 살았는데 훈도가 되어 봉화로 가는 길에 온계를 지나게 되었다. 공이 이곳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에 취해 이리저리 거닐다가 신라현(新羅峴) 고개에 이르러 잠깐 쉬었는데 어떤 스님이 온계로부터 오다가 함께 쉬면서 대화가 온계의 풍수(風水)에 이르게 되었다. 공은 서로 본 것이 부합됨을 기뻐하여서 드디어 스님과 손잡고 다시 온계로 돌아오니, 그 스님은 위 아래로 오가며 두루 살피다가 현재의 종택 자리를 선정해주었다고 한다. 4세 이정은 1431년(세종 13) 평안도 영변 판관으로 재직 때 오랑캐의 침공을 막기 위해 영변진(寧邊鎭) 설치와 양산성 증축을 관리・감독하여 완성하였다. 최윤덕을 도와 여진족을 정벌하는데 공를 세워 원종훈(原從勳) 2등에 책록되었다. 이정은 계유정난(癸酉靖亂)에 가담하여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원정공신(3등)이 되었고, 중앙의 관료로 입신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가문의 격이 올라가고, 전답, 노비 등이 급증하여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기도 한다. 그는 우양(遇陽)・흥양(興陽)・계양(繼陽) 3남을 두었는데, 3남 계양(繼陽, 1424-1488))이 온혜리로 이거하게 된다. 5세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은 온혜리 입향조로 선산부사를 지낸 정(禎)의 아들이며 안동 와룡면 주하리에서 태어났다. 생육신의 한 분인 어계 조례와 동방(同房)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었고 봉화현 훈도직에 있다가 단종(端宗)이 왕위를 선위하자 용두산(龍頭山) 아래 국망봉(國望峯) 동쪽으로 터를 잡아 은거하면서 항상 국휘일(國諱日)인 10월 24일에 국망봉(國望峯)에 올라 영월(寧越)을 마라보면서 곡하며 손수 쌓은 단에다 절하였다 한다. 문밖에다 만년송(萬年松) 한그루를 심고서 자신의 호를 노송정(老松亭)이라 했다. 진보(청송군 진보면) 현리(縣吏)였던 시조 이석(李碩)은 예의와 공덕이 커서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2대 자수(子修)는 안동시 풍산면 마애로 이거 하였고,홍건적을 친 충훈으로 공신에 올라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와룡면 주하리[周村]로 다시 이거한 3대 운후(云侯)는 중훈대부(中訓大夫)가 되고, 부인 권씨는 가법으로 “입신양명하여 조상을 빛내어 효도할 것”을 가르쳤다. 4대인 퇴계의 증조부 정(禎)은 영변성을 쌓고 변방을 지켜 공신〔원종훈(原從勳)〕이 되었으며, 노송(老松 : 뚝향나무)을 옮겨 심어 대대로 솔의 절개를 본받도록 가르쳤다. 퇴계의 조부 계양(繼陽, 1424-1488)은 도산면 온혜에 입향하여 주하리 큰집의 노송을 분식(分埴)해 솔의 고절(固節)을 술상하면서 용두산 용수사(龍頭山 龍壽寺)를 가숙(家塾)으로 삼고 가학(家學)을 일으켰다. 퇴계의 조부 계양(繼陽)이 진사에 급제하였고 아들 형제의 입신출세를 위하여 갖은 정성을 기울여 가정교육을 하였다. 그 결과 퇴계의 아버지도 진사가 되었고, 숙부 우〔堣, 호 · 송재(松齋)〕는 최초로 문과에 급제하고 감사와 참판 벼슬을 하였다. 『온계전거사적(溫溪奠居事蹟)』・신용개(申用漑, 1463-1519)의 이계양의 묘갈명 등 집안에 전하는 여러 자료를 보면, 종택을 건립한 시기는 계양(繼陽, 1424-1488)이 이곳에 이거하여 1454(단종 2)년경에 건립하였고, 여러 차례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집은 퇴계 이황이 태어난 태실(胎室)이 있다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퇴계선생 탄생에 관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퇴계선생의 어머니인 춘천박씨(1470~1537)는 공자가 집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꿈을 꾸고 퇴계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성림문중수기(聖臨門重修記)에 “연산 7년, 신유년(1501) 11월 기해일, 진시에 퇴계 선생이 온계리 집에서 출생하셨다. 그 하루 전날 선생의 모친이신 정경부인 춘천박씨께서 공자가 문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니, 참으로 좋은 꿈이었다.”는 내용의 기문이 있다. 아버지 식은 진사에 합격한 해에 퇴계를 두었으나,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난 지 7개월 만인 이듬해 6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퇴계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와 친생자를 차별 않고 부도(婦道)를 지키면서 자애로이 길렀다. 이식의 5남인 이징(李澄, 1498-1582)은 대과(大科)에 응시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김안로(金安老)가 전형(銓衡)을 주관함을 알고 과거를 포기고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뒷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으로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43년(중종 38) 제원도 찰방 제수되어 부임했으나, 감사(監司)와 뜻이 맞지 않아 낙향하였다. 입향조 계양의 손자로 이식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다, 그는 노송정 종택에서 태어났고, 6개월만에 부친을 잃었기 때문에 모친과 숙부 우(堣)에게 양육되었다. 1528년(중종 3)에 진사에 합격하고,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였다. 대사성(大司成)・예조판서(禮曹判書)・양관(兩館)・대제학(大提學) 등을 지내고 은퇴하여 낙향하였다. 주자학을 집대성한 대유학자로 영남학파의 영수였다. 만년에 도산서원을 세워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심하여 심오한 학문적 업적을 이룸으로써 후인의 추앙을 받은 대학자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호는 퇴계(退溪)이고,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진성이씨 온혜파의 종가인 '안동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의 파조는 누구이며, 그가 온혜리로 입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의 파조와 그가 온혜리에 정착하게 된 이유를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온혜파의 파조와 입향 배경에 관한 정보를 문맥에서 추출한다.

    • ‘안동(安東) 진성이씨(眞城李氏) 온혜파종택(溫惠派宗宅)’은 진성이씨의 또 다른 분파인 온혜파(溫惠派)의 종가(宗家)로 파조인 노송정(老松亭) 이계양(李繼陽,1424~1488)이 오늘날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세거하게 되면서 건립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 이계양은 안동지역의 불천위(不遷位) 50위 중 한 명으로 조선초기 단종(端宗)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양하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온혜리로 입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파조의 이름과 입향 원인이 명시된 문장을 선택한다.

    • 파조인 노송정(老松亭) 이계양(李繼陽,1424~1488)
    • 단종(端宗)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양하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온혜리로 입향한 인물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파조는 이계양이며, 그가 온혜리로 들어온 이유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양한 사건 이후 스스로 벼슬을 버렸기 때문임을 결합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한다. 파조는 노송정 이계양이며,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양하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온혜리로 들어왔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온혜파의 파조는 노송정 이계양이다. 그는 조선 초기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양하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온혜리로 입향하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진성이씨 온혜파의 파조는 노송정 이계양이며, 그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양하자 벼슬을 버리고 온혜리로 입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