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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지역의 고분군, 정양산성, 건봉사지 등 주요 역사 유적의 고고학적 가치와 역사적 변천 과정에 관한 고찰 doc_id CNTS-00118874664_3

주제 (main_topic)
영월 지역의 고분군, 정양산성, 건봉사지 등 주요 역사 유적의 고고학적 가치와 역사적 변천 과정에 관한 고찰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셋째, 은선리 주변의 저평한 구릉에는 분구를 가진 지사리, 운학리고분군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들 지역 이외에도 장문리를 비롯하여 고부리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수의 분구묘가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은 마한 54개국 가운데 ‘고비리국’이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특히, 지사리고분군은 최대 직경 37m 내외의 분구를 가진 5기의 무덤이 선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운학리분구묘에서 출토된 금동투조과판은 중국의 진식대구(晉式帶鉤)와 연결되고, 일본 오사카의 시치칸(七觀) 출토품과도 비교가 가능하여 당시 이들 지역의 국제 교류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영원면 은선리 일대가 고대로부터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성장했으며, 이 일대 정치집단의 핵심지역이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들이다. 정양산성과 관련된 이름은 정양산과 정양역이 있었던 것인데, 이후 정양산과 정양산성, 그리고 정양역의 이름을 이은 정양리가 있다. 즉,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 영월부의 방리(坊里)에는 하동면(下東面)에 정양리가 관문에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거리에 당시 편호(編戶) 43호(男198口, 女153口)가 살고 있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정양의 이름은 고려 때의 역이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마을 이름으로 존속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양리는 1937년 대통령령 6542호에 의해 남면 흥월리, 팔괴리와 함께 영월면으로 편입되었다. 이외에도 정양산성에는 왕검성(王儉城)이란 속칭(俗稱)이 있다. 고려 때 왕검이란 장군이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이 성을 쌓았다고 한 이래 속칭으로 불려온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왕검이란 인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가 거란족의 침입이 예상되고, 또 실제로 고려 초기 여러 차례 거란이 침입한 사례가 있으므로, 북쪽에서 쳐내려오는 적군을 방어하기 좋은 요충지에 축성했거나 기존의 성을 수리했을 추론도 가능하다. 산성의 축조시기나 그 주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문헌자료가 소략하므로 영월군의 역사와 고고학적 자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기존 조사 자료에 대한 검토와 함께 발굴조사 결과를 참고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정양산성의 초축은 출토유물로 보아 6세기 전후까지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5~6세기 유물은 매우 적은 양이고, 성내 주요 시설물이나 건물지, 주거지 출토유물과 그 비중으로 보아로 보아 정양산성의 중심연대는 7~8세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남문지 1차 문지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판단되므로 현존하는 석축 성벽은 결과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판단된다. 둘째, 정양산성의 운영시기는 내성에서 조사한 층위를 참고하여 종합적으로 본다면 삼국시대에 축조되어(혹은 통일신라기에 개축) 대체로 고려시대 몽고 침입시기까지는 산성으로 유지되었다고 여겨진다. 몽고 침입 후 각처에서 기존의 산성을 폐지하고 깊은 산중과 해도(海島)로 피난하며 새로운 험지 위주 산성이 등장하게 되면서 통일신라기에 확고하게 주군현의 거점 성으로 운영되던 산성들이 다수 폐기되었다. 영월의 경우, 이 시기에 완택산성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런 점으로 보아 몽고침입기 이후로 정양산성은 폐기되었다가 고려 말 왜구 침입으로 다시 수리되어 조선 초기까지 산성의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성종(成宗)대 이후에는 산성으로 경영되지 않는 폐지된 산성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전반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영월군의 산천에서 정양산과 완택산이 기록되고, 고적에는 정양산성과 완택산 고성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정양산성은 아직 폐퇴(廢頹), 퇴비(頹圮), 금반퇴비(今半頹圮), 금폐(今廢) 등의 수식을 붙이지 않고 고적의 항목에서 설명하고 있다. 완택산성은 언전(諺傳)을 소개하여 완전히 옛 일을 기록하면서 옛 성, 오래된 성으로 인식하고 있어 정양산성보다 먼저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건봉사지의 역사성을 확인하기 위하여는, 건봉사지의 조선시대 유구뿐만 아니라, 창건 당시의 유구를 확인함으로서, 역사의 켜켜를 확인함으로서, 역사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건봉사지는 현재 건봉사가 운영되면서 발굴조사하고, 그 위에 사찰의 건축물이 축조되어 있다. 문화재의 진정성 측면에 있어서, 유구에 대한 해석을 물론, 그 위에 축조되는 건축물 또한 철저한 고증에 의해 확인되고 축조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재 대웅전을 비롯한 다수의 건축물들이 고증되지 않은 채, 무분별하게 건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이러한 사항들이 회복되는 과정은 문화재의 가치를 논함에 있어 필수적인 방안이라 사료된다. 네 번째는, 이러한 사항들이 수정된 후, 학술대회를 통해 재 검증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이렇게 몇 가지의 사항이 검토되고 수정된 후, 건봉사지로서의 문화재적인 가치가 재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정양산성의 중심 연대와 현존하는 석축 성벽의 시기를 각각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정양산성의 중심 연대와 현존하는 석축 성벽의 형성 시기를 문맥에서 찾아 기술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정양산성의 중심 연대와 관련된 유물 및 시설물 비중 정보를 추출한다.

    • 정양산성의 중심연대는 7~8세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성내 주요 시설물이나 건물지, 주거지 출토유물과 그 비중으로 보아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석축 성벽의 시기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인 남문지 조사 결과를 선택한다.

    • 남문지 1차 문지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판단되므로 현존하는 석축 성벽은 결과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판단된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추출된 중심 연대(7~8세기)와 석축 성벽의 시기(통일신라시대)를 결합한다.

    • 정양산성의 중심연대는 7~8세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현존하는 석축 성벽은 결과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판단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정양산성의 중심 연대는 7~8세기이며, 현존하는 석축 성벽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판단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해 명확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정양산성의 중심 연대는 성내 주요 시설물, 건물지, 주거지 출토유물의 비중으로 보아 7~8세기로 볼 수 있으며, 현존하는 석축 성벽은 남문지 1차 문지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판단됨에 따라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정양산성의 중심 연대는 유물과 시설물의 비중을 근거로 7~8세기로 판단하며, 현존하는 석축 성벽은 남문지 문지의 시기를 근거로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