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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분단 위기 속에서 김구와 김규식이 주도한 남북협상의 제의 과정, 전개 양상 및 관련 정치적 역학 관계 doc_id CNTS-00118875702_10

주제 (main_topic)
1948년 분단 위기 속에서 김구와 김규식이 주도한 남북협상의 제의 과정, 전개 양상 및 관련 정치적 역학 관계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또한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의 부관이 1948년 3월 30일 오후에 조선건민회로 이극로를 찾아가 남북정치요인회담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듣고서 돌아갔다고 한다. 북한의 제의에 대해 양김씨는 1948년 3월 31일 공동성명을 통해 “제1차 회합을 평양에서 하자는 것이나 라디오 방송시에 남한에서 여하한 제의가 있었다는 것을 발표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제1차회담도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기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남북회담 요구를 한 이상 좌우간 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라고 참여 의사를 밝혔다. 한편 1948년 4월 1일 밤 김규식, 홍명희, 이극로, 김붕준이 김구의 사저 경교장을 찾아가 심야까지 남북협상 연락원 파견에 대해 협의했다. 연락원이 협의할 사항은 예비회담에서 백지로 임할 것과 북조선측 지명의 15씨외 적당한 인물을 추천 참석케 함에 대한 의견여하 등이라고 소식통은 전했다. 金奎植은 동 협의 석상에서 남북협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신을 피력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한반도 문제의 유엔 이관 뒤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 결정으로 분단의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김구와 김규식 등은 북쪽에 남북협상을 제안했다. 이와 별도로 북쪽은 ‘남북연석회의’라는 모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북쪽은 김구와 김규식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들의 북행을 권유했다. 그 결과 남북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은 4월19일부터 4월30일까지 12일 동안 평양에서 두 가지 대화를 진행했다. 하나는 4월19일부터 23일까지 열린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앞으로 ‘연석회의’로 줄임)이고, 다른 하나는 4월26일부터 30일까지 열린 ‘남북요인회담 및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앞으로 ‘남북협상’이라고 줄임)이다. 이 두 가지 회의의 성격은 매우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 살펴본 뒤, 평가해보기로 하겠다. 독점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배격한다는 사회주의자들의 논리를 수용하면서도 어떠한 독재도 인정하지 않고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할 것을 주장해 민주적 자본주의 국가를 건립할 것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이 같은 조건은 북측에 전달되었지만, 북측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 내용에 대한 수락은 물론 남북지도자회담조차 수용하지 않았다. 결국 4월 19일 남북연석회의 예비회담이 개최되고 본회의 개막이 선언될 때까지 밀고 당기는 협상이 계속되었다. 결국 북측은 19일 밤 10시 평양방송을 통해 “모든 준비는 다 되었으니 빨리 오시기 바랍니다”라는 암호방송을 남측에 전달했고 최종적인 북행이 결정되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21일 아침 6시 30분경 서울을 출발했다. 북측은 20일 회의를 휴회하고 이들을 기다렸다.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에 도착해서도 남북연석회의에는 소극적이었다. 김규식은 병을 핑계로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고, 김구는 21일 축하연설만 하고 나왔다. 그들은 계속적으로 지도자회담을 요구했고, 그 결과 26일 첫 4김회담이 개최되었다. 27일에는 남북지도자협의회가 개최되었고, 28일에는 김규식과 김일성의 개별회담도 개최되었다. 한편 김구-김규식의 연서에 대한 답신의 형태를 갖춘 3월 25일자 김일성-김두봉의 서한이 3월 27일에 성시백에 의해 전달되면서 김구-김규식은 회의에 참석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했다. 3월 25일의 방송은 다소 과격했던데 비해 27일 전달된 서한은 다소 온건했으며 김구와 김규식의 2월 16일자 서한을 받았음도 명기했다. 이 대목에서 성시백의 회유 공작이 김구를 움직였다는 견해가 북한에 의해 사후에 제기되었음에 주목할 수 있다. 1997년 5월 26일자 북한 『로동신문』 2면 특집보도에는 성시백이 김구를 회유(懷柔)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시백 동지는 4월 남북련석회의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극단한 반동분자로 있던 김구 선생을 돌려 세우는 사업체에도 큰 힘을 넣었다. 그런데 이미 헌법 초안 등이 마련되어 단독정권 수립이 소련의 주도면밀한 준비에 따라 추진되던 1948년 2-3월 경에 스탈린은 “정치협상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남북협상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1948년 3월 경에 슈티코프 장군을 통해 “[김구와 김규식 등이 북으로; 인용자 첨가] 오겠다고 하는데 허용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스탈린을 설득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1948년 4월 12일자 결정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북협상은 김일성이 소련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추진할 수 있는 중요한 과제였으므로 1947년까지 남북협상에 대한 소련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김일성은 이를 추진할 수 없었다. 이 대목에서 보면 김규식과 김구의 발의에 대해 소련의 후원으로 이미 단독정부 수립을 완결지울 수 있었던 김일성이 마지못해 수락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자료에서도 김규식과 김구가 북쪽에 남북협상을 제의하여 회담 개최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누가 남북협상을 제의했는가”에도 여러 논쟁점이 있다. 초기(1948년 1월 26일-3월 24일) 협상제의는 김규식(최초에 김구는 수동적이었으나 월경할 때는 김구가 주도적이 되었다)이 주도했다. 당초 김구는 분단정부 참가여부에 모호한 태도를 보이다가 1948년 1월 單選-單政반대로 입장을 확고히 한 후 김규식과 공동보조를 취하기 시작했다. 김규식의 이론에다가 김구의 민족주의적 추진력이 결합된 것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편 민주독립당 당수 홍명희의 측근이었던 유석현 민주독립당 총무부장 겸 정치부장의 회고는 좀 다르다. 이에 의하면 이미 월북해 있던 백남운이 1948년 2월 비밀리에 월남하여 홍명희를 만나 남북협상을 제의했고 홍명희는 이에 동의했다고 한다. 이에 홍명희는 김규식에게 연락을 취했고 김규식은 김구의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하지 사령관은 남북협상이 이미 끝난 5월 3일 이에 대해 ‘공산당의 모략에 빠졌다’고 혹평했다. 그런데 미군정은 1946년 5월 23일 발효시킨 38선 무허가월경금지령에 의거 북행을 저지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남북협상을 막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사실상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백범은 몰라도 김규식의 방북은 막아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송남헌에 따르면 미군정은 남한에 정부가 서는 경우 김규식을 초대대통령으로 옹립하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으므로 미군정 고문들인 버취 중위와 노블(Harold Joyce Noble) 박사로 하여금 하루에도 한두 번씩 김규식에게 찾아가 북행을 만류하게 했다. 미군정정 정치고문 제이콥스와 랭던은 물론 육군차관 드레이퍼, 하지 중장도 김규식을 방문해 북행을 만류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김규식이 북행을 만류받을 당시 미군정 고문이었던 버취 중위와 노블 박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김규식을 찾아가 설득했는지 설명하시오.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질문은 미군정 고문인 버취 중위와 노블 박사가 김규식의 북행을 만류하기 위해 사용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방식'을 요구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버취 중위와 노블 박사가 김규식에게 찾아가 북행을 만류했다는 사실을 추출한다.

    • 미군정 고문들인 버취 중위와 노블(Harold Joyce Noble) 박사로 하여금 하루에도 한두 번씩 김규식에게 찾아가 북행을 만류하게 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제공된 근거는 그들이 '하루에도 한두 번씩 찾아갔다'는 빈도와 '북행을 만류했다'는 목적만을 명시하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 내용이나 설득 논리, 혹은 물리적/심리적 방식을 사용했는지는 포함하지 않는다.

    • 미군정 고문들인 버취 중위와 노블(Harold Joyce Noble) 박사로 하여금 하루에도 한두 번씩 김규식에게 찾아가 북행을 만류하게 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문맥을 종합하면 미군정 고문들이 김규식을 자주 방문하여 만류를 시도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으나, 그들이 사용한 구체적인 설득의 방법론(예: 회유, 협박, 논리적 설득 등)에 대한 정보는 결합할 수 없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질문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정보는 문맥 내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순히 방문 횟수와 목적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외부 지식을 동원하지 않고 문맥에 명시된 정보만으로는 답변이 불가능하므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에는 버취 중위와 노블 박사가 김규식에게 하루에도 한두 번씩 찾아가 북행을 만류했다는 사실만 언급되어 있다. 질문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설득 방식이나 대화의 내용은 문맥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외부 지식 없이는 답을 결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