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또한 4월 26일(김두봉 집에서)과 5월 3일(김일성 집무실인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 두 차례 4김(四金)회담이 있었으나 별다른 정치적 결정은 못 내렸다. 단지 4월 30일 김구-김규식은 1)남한에 대한 송전계속, 2)연백수리조합개방, 3)조만식 월남허용 등을 김일성에게 피력했으며 김일성은 1), 2)항을 수락했으나 3)항에 대해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북한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양김씨가 남한으로 귀환하자마자 전기도 농업용수도 모조리 끊어버렸다. 결과적으로 남북협상은 단선을 반대하는 회합으로 귀착되었다. 건민회 대표 이극로는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서 “우리 민족은 하나이며 우리 조국도 하나입니다. 우리 민족은 통일독립을 요구합니다”라는 연설을 했다. 22일 오후 2시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3일차 회의에서 행한 인사말이었다.
북한은 남북협상 2개월 후에 김구-김규식에게 제2차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2차남북협상; 1948년 6월 29일-7월 5일) 개최를 제의했다. 미국은 김구·김규식이 마침내 속았음을 깨닫고(finally realized that they had been duped) 참여하지 않았다고 사후에 분석했다. 그러나 보다 자세히 보면 실제 김구가 “속았다”고만 단정하여 예단한 것은 아니었다. 김구는 제2차 남북협상을 처음부터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김구는 북측의 초청장(6월 26일까지 참가 여부를 회송 요청함)에 대해 “회담장소 시일 토의내용 등 구체적 방법을 협의하기 위해 홍명희를 연락위원으로 서울에 보내달라”는 回翰을 보냈다. 김구는 홍명희를 통해 진의를 확인하고자 했다. 그러나 북은 홍명희를 내려 보내지 않았다. 결국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7월 19일 남북협상을 포기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신용하 교수는 이 12월 1일자 담화에 대해 소련의 방해로 북에서 동시 선거가 실시되지 못하면 북쪽 지도자들과 협상하여 그 의석을 남겨두고 기다리면 된다는 김구 남북협상론의 근거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유엔총회도 아닌 ‘소총회’에서 한국인들에게 남북 총선거 추진의 기회도 주지 않고 1948년 2월 26일 서둘러 가능지역 총선거를 결의하자 김구는 북쪽 한국인들과의 협상도 없이, 통일에 대한 한국인끼리의 약속도 없이 유엔소총회가 남한 단독선거로 단독정부 수립을 의결했다고 평가해 반대했다고 신용하 교수는 주장한다. 이렇듯 백범은 남북협상을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구는 1947년 12월 19일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표명한 김규식에 뒤이어 12월 22일 같은 반대 노선을 표명해 노선을 전환했다. 따라서 김구가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에 참여한다는 데에 1948년 초까지는 이승만과 이견이 없었다는 기존 견해는 수정되어야 한다.
버취 문서군에 있는 미군정의 지방 조사 자료들은 주로 1947년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 자료들에는 이미 지방의 대부분이 이승만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1946년 지방순회를 거치면서 이승만의 독촉국민회가 지방에서 힘을 키우기 시작한다는 것은 이미 기존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은데, 그러한 이승만의 힘이 1947년을 통해서 지방에 녹아드는 모습이 미군정의 지방 조사를 통해서 잘 드러났고, 김규식은 그와 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점에 있어서는 김구 역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규식은 남북의 지도자 회담을 적극 추진하였다. 김구보다도 더 적극적이었으며, 김규식의 남북 지도자 회담의 추진은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했던 그의 신념에서 연장선상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자기를 정복하라”는 김규식의 말은 자기중심주의를 넘어서라는 말이다. 김규식이 평생 민족통일전선과 좌우합작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런 자기 극복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규식은 자기 혁명을 통해 사회 혁명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1945년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내용이 국내에 왜곡 전달되어 모든 우파가 반탁에 나섰을 때, 김규식은 먼저 임시정부의 구성을 통해 탁치 문제를 해결하자는 대안을 내놓았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될 때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른 임시정부 수립 방침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운형 안재홍 등 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1946년 7월)했고, 1947년 12월에는 홍명희 안재홍 등과 손잡고 민족자주연맹 결성을 주도했다. 그가 주도한 민족자주연맹의 창립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고딕으로 강조되어 있다.
“금일의 조선에는 독점자본주의 사회도 무산계급 독재 사회도 건립될 수 없고 오직 조선의 현실이 지시하는 조선적인 민주주의사회의 건립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어떠한 국가의 세력이나 어떠한 사상의 역량으로도 변경할 수 없는 역사적 귀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을 민주주의화할 뿐만 아니라, 또한 민주주의를 조선화하여야 할 것이다.” 민족자주연맹은 독점자본주의 사회와 무산계급 독재 사회를 동시에 배격하면서, 조선 방식의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식민지 조선이 민주주의적으로 개조되어야 함은 물론이며, 민주주의 또한 조선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정희가 만들어낸 ‘한국적 민주주의’란 술어 때문에 식상한 표현이 되어 아쉽지만, “조선의 민주주의화와 민주주의의 조선화”는 선각자 김규식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피해갈 수 없는 화두이자 과제이다.
남북협상 직후인 1948년 5월 4일 평양을 출발하여 5월 5일 서울에 도착한 김구와 김규식은 5월 6일 “금반 우리의 북행은 우리 민족의 단결을 의심하는 세계인사에게는 물론이요, 조국의 통일을 갈망하는 다수동포들에게까지 금반 행동으로 많은 기대를 이루어 준 것”이라고 자평했다. 또한 “연석회의는 우리 민족도 어느 우수한 민족과 같이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서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또 한번 행동으로 증명”했다고 말했다. “이 회의는 자주적 민주적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서 양조선의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미-소 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북조선당국자들도 단정은 절대로 수립하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斷電불실시와 저수지개방도 약속받았다고 부기했다. 그러나 5-10선거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북한도 준비된 단정을 계속 추진하여 이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북한은 5월 11일 송전문제에 대하여 “조선인끼리 협정을 체결하기 위하여 남조선인 대표를 5월 14일까지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김구가 제2차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북측에 요청했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
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김구가 제2차 남북협상 참여와 관련하여 북측에 전달한 구체적인 협의 방법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
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제2차 남북협상과 관련된 김구의 대응 및 북측 초청장에 대한 회신 내용을 추출한다.
- 김구는 북측의 초청장(6월 26일까지 참가 여부를 회송 요청함)에 대해 “회담장소 시일 토의내용 등 구체적 방법을 협의하기 위해 홍명희를 연락위원으로 서울에 보내달라”는 回翰을 보냈다.
-
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김구가 구체적인 방법을 협의하기 위해 요청한 대상과 목적이 명시된 문구를 선택한다.
- “회담장소 시일 토의내용 등 구체적 방법을 협의하기 위해 홍명희를 연락위원으로 서울에 보내달라”
-
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김구는 초청장에 대해 무조건적인 거절이나 수락이 아닌, 구체적 협의를 위한 연락위원 파견을 요청함으로써 진의를 확인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
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김구가 요청한 방법은 홍명희를 연락위원으로 서울에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
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회담장소, 시일, 토의내용 등 구체적인 방법을 협의하기 위해 홍명희를 연락위원으로 서울에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김구는 제2차 남북협상 초청에 대해 회담 장소, 시일, 토의내용 등 구체적 방법을 협의하기 위해 홍명희를 연락위원으로 서울에 보내달라고 북측에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