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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전후 이승만과 김구의 정치적 관계 변화와 장덕수 암살 사건 및 중화민국의 합작 중재 노력 doc_id CNTS-00118875702_6

주제 (main_topic)
1948년 전후 이승만과 김구의 정치적 관계 변화와 장덕수 암살 사건 및 중화민국의 합작 중재 노력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김구가 1948년 7월 11일 劉馭萬 중화민국 총영사[공사; 아직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았으므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중화민국 대표](Liu Yu-man, Chinese Minister in Seoul; 한국어로 읽으면 유어만)를 11시부터 1시간 넘게 만난 비밀회동 기록을 발굴했다. 이 기록은 유어만이 이승만 국회의장에게 전달한 것으로 이화장 문서에 보존되어 있다. 장개석 총통은 김구의 완강한 단정 반대 태도에 접했다. 이에 장개석 총통은 劉馭萬 총영사에게 김구를 만나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지지할 것을 권고하는 자신의 뜻을 전달하라고 지시해 비밀회동이 성사되었다. 이에 의하면 김구가 요인회담에 갔던 동기의 하나는 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보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구는 그 당시 남한군은 북의 군대만큼 힘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면서 러시아인들이 별다른 비난 없이(책잡힐 일 없이) 쉽게 남쪽을 급습(swoop)하면 단 기간에 남쪽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김구는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어도 소련에 의해 곧 인민공화국이 될 터이니 대한민국을 수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피력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런데 『조선일보』, 1948년 7월 20일자에 의하면 19일 오전 11시에 獨促과 韓民系 의원이 부통령 후보를 인기투표해 본 결과 李始榮이 34표 金九 3표 吳世昌 2표 기권 4표로서 李始榮의 부통령은 거의 확실시되었는데 某側 정보에 의하면 李始榮이 부통령으로 출마하게 되면 대외적인 국제체면상 국무총리에 金九가 의당 임명되어야 하며 또 李 박사측에서도 이를 적극 추진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도 현실화되지 않았다. 한편 김구-김규식이 남한 선거에 반대한 후 劉馭萬 총영사는 이승만과 김구의 합작을 성사시키기 위해 막후에서 노력했다. 蔣介石 주석이 한국 각 당파의 통일을 위해 각 당파 영수에게 단결을 호소하는 전문을 보내는 것을 고려했으나 劉馭萬 총영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劉馭萬은 김구에게 장 주석의 뜻을 전하였으나 김구는 고집이 세 충고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한국언론도 장개석이 김구에게 私的 使節을 보내어 신정부에 참가를 極力 慫慂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1948년 7월 당시 중화민국은 蔣介石(장제스) 주석의 지시로 이승만과 김구의 합작을 위해 노력했다. 유엔한국위원회 중국대표 劉馭萬은 김규식이 북행을 마치고 귀경한 이후인 1948년 5월 6일 김규식을 예방하는 등 한국정치의 실력자들과 다각도로 접촉했다. 김구는 1948년 6월 24일 기자단과 회견하면서 자신이 인천에서 이박사와 합작할 날이 있으리라고 말했던 사실을 확인하면서 그것이 언제이며 어떠한 경우라는 질문에 대해 “머지 않아 국내외정세가 더욱 긴절히 통일의 길로 전부를 모라넣게될것인데 그때는 반쪽정부는 무용하게 될 것이다. 이때야말로 이박사는 물론이오 전민족이 합작하지아니하면 안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이승만과의 합작설에 대한 김구의 입장은 분단정부에서의 합작이 아닌 자신이 도모하는 통일정부에서의 합작을 해야 한다는 식의 다분히 원론적이고 다소 이상적이었던 것이다. 1948년 3월 4일 미군 검찰은 권총·사진 등과 함께 김구가 암살을 교사했다는 피고인 신일준의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 하였다. 미국 군율재판 위원회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 명의로 김구에게 1948년 3월 12일 법정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3월 6일 발부했으며 3월 8일 김구에게 전달했다. 장덕수 암살 사건에 대한 재판은 3월 한달 동안 21회에 걸쳐 계속 되었으며, 김구는 결국 3월 12일 제8회 재판에 출석해 자신은 장덕수 암살을 교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신일준은 진술서가 고문과 강압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으며, 미군 검찰의 고문 행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미군 검찰은 김구에 대한 기소를 유보했으며 김구는 곧바로 북행을 결정했다. 김구는 아들과 같은 라만 대위로부터 증인이 아니라 죄인과 같은 치욕적인 심문을 당했으며 주요 신문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먼저 장덕수 암살사건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47년 12월 1일 김구는 이승만의 단정안에 참여할 것을 시사했으나, 12월 2일 김구 주변 인물들이 주도한 장덕수(한민당 정치부장) 암살 사건이 발생한 후, 김구의 정치노선은 다시 변했다(김구가 이 사건과 관련해 여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48년 3월 12일 그가 미군정 법정에 선 일이었다. 김구가 노선을 전환한 1947년 말 이후 3달여가 흐른 시점이었다. 암살 사건 자체와 김구의 노선전환 시점만 겹칠 뿐이므로 암살 사건 자체 때문에 노선을 전환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암살 이후재판과정에서 벌어진 일과는 연관성이 있다. 법정에 선 이후 인기가 추락하자 북행했으므로 법정 출석과 북행 사이에 연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범인은 모두 한국독립당원으로서 현직 종로경찰서 경사이던 박광옥(朴光玉, 23세)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배희범(20세) 등이었다.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과 배희범을 체포했다. 미군정은 장덕수 암살 배후인물로 김구를 지목했다. 그러자 김구 측에서는 이승만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이승만 박사와 하지 장군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비서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고 판단해 이 박사에게 전달하지 않았고, 이 박사가 고의로 도움 요청을 회피한 것으로 생각한 김구는 몹시 서운해 하며 두 사람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김 주석(김구)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는 등 딴전을 피웠다. 자신을 재판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는 김구의 도움 요청을 이승만은 회피하고 수수방관했다. 분노한 김구는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했다. 평소 김구는 공석에서도 이승만에게 '형님'이라 했을 만큼 그와 친밀했다. 그러나 장덕수 사건을 계기로 양자의 관계는 악화되고 파국에 이르렀다. 이승만 박사는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를 만류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북한 정권의 정통성 강화에 도움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김구의 북행에 반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반대의 정도는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유력한 경쟁자(라이벌)가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유일한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목숨 걸고 맞서지는 않았던 것이다. 한편 한민당은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 남로당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그들이 "크레믈린 궁의 사자"라느니 하며 비난했다. 한민당은 “총선거에 임하여 만천하 동포에게 고함”에서 김규식은 한때 공산당원이었으니 그 태도가 공산당과 동일할 것은 필연의 귀결로 볼 수 있고, 김구도 토지국유정책 등을 볼 때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다고 공격했다. 한편 1948년 7월 11일 이승만과의 합작을 권하는 장제스의 특사 劉馭萬(유어만) 총영사를 만난 김구는 이승만이 ‘한민당의 포로’가 되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신세라고 평가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김구가 장덕수 암살 사건 이후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이승만이 도움을 회피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질문은 김구가 장덕수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승만이 이를 회피한 구체적인 동기나 이유를 묻고 있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는 김구가 장덕수 암살 사건 이후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과, 이승만이 이를 회피하고 수수방관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 김구 측에서는 이승만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 자신을 재판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는 김구의 도움 요청을 이승만은 회피하고 수수방관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이승만이 도움을 회피했다는 결과적 사실은 언급되어 있으나, 이승만이 왜 도움을 주지 않았는지에 대한 내면적 동기나 구체적인 사유는 제시되지 않았다.

    • 이승만은 "김 주석(김구)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는 등 딴전을 피웠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문맥을 종합하면 이승만이 김구 관련설을 암시하며 '딴전'을 피웠다는 정황은 있으나, 이것이 도움을 회피한 근본적인 이유인지 혹은 다른 정치적 계산이 있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과관계는 알 수 없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이승만이 도움을 회피했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보인 태도는 확인할 수 있지만, 질문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이유'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는 문맥에 존재하지 않는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제공된 정보만으로는 이승만의 회피 동기를 확정할 수 없으므로 답변 불가능으로 판정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에는 김구가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승만이 이를 회피했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는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이승만이 왜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나 동기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외부 지식 없이 답을 도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