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사만왕조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 대해서도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사만왕조는 타지크 민족 황금기의 정점에 속해 매우 위대하게 평가되고 있다. 21세를 앞둔 1999년에 사만 왕조의 1100 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개최한 사실은 현대 타지키스탄의 바로 이러한 역사적 기억을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타지키스탄 대통령도 사만 왕조의 우수성을 전파하였다. 사만 왕조는 타지크 민족 형성의 결정체로 그 중요성을 가졌다. 이 왕조는 사산조 시대에 시작된 타지크 민족 부흥의 연속선에 위치해 있다. 바르톨도에 의하면, 사만 왕조 시대에 타지크 인들은 소그드 언어를 추방시켰다. 소비에트 시기 말엽에 무하마존 수쿠로프는 “대 호라산” 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는데, 바로 북동 이란에서 오늘날의 타지키스탄 영토까지의 단일한 공간을 지칭했다. 이 공간이 사만 왕조 시기에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호라산 정체성은 이란으로부터 타지크가 분리되었다는 의미이다. 타지크 역사가들에 의해 사만 왕조는 이슬람 문화의 최고의 정점으로 해석되었다. 사만 제국은 근대 초기 유럽의 문화적 성취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 왕조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간주되었다.
사만왕조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오래전에 시도되었다. 중앙아시아에 관한 저명한 역사가인 바실리 바르톨도(Vassili Barthold) (1869-1930)는 타지크 문화를 페르시아 문화와 비교했다. 타지키스탄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보보잔 가푸로프(Bobodzhan Gafurov:1909-1977)는 타지크는 페르시아만큼이나 고대 문명에 속하며, 페르시아 문명의 입구라고 해석했다. 그는 각각의 민족은 다른 이웃 민족과 공유할 수 없는 고유한 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 역사는 민족별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지키스탄의 중세 시대의 공식 국가는 사만왕조(Samanids Dynasty:875-999)로 간주되었다. 가포로프는 이러한 개념을 부인하고, 사만왕조를 타지크 민족의 역사적 기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만 왕조가 시작된 9세기 이후를 역사적 기원으로 삼기에는 시기상 너무 늦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푸로프는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B.C. 10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중앙아시아의 첫 번째 국가는 페르시아어 사용 민족이므로 범 페르시아 세계의 가장 바깥 경계에 위치한 오늘날의 타지키스탄 영토에 해당한다는 학설을 제기했다.
우즈베크와 타지크의 민족적 기원에 관한 담론은 이미 소비에트시기에 제기되었다. 타지크 역사학자인 보보존 가푸로프(Bobodzhon Gafurov)은 1972년 출간된 그의 생애 마지막 저술인 “타지크 민족: 고대와 중세의 역사” (The Tajiks: Antique and Medieval History)에서 과거에 그가 출간한 책과 비교하여 현저하게 달라진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이 책의 ‘우즈베크 민족기원 논쟁’이란 장에서 우즈베크 민족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한 당시 중앙아시아 원주민들의 바탕 하에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즈베크 인들은 “중앙아시아에 늦게 정착했을 뿐 아니라 원래 정착민이던 페르시아 민족그룹의 바탕 하에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투르크계의 문화적 기여도 면에 대해서 지적했는데, 투르크 민족이 중앙아시아에 남겨놓은 문화적 유산을 저평가했다. 즉 타시켄트에서 알-비루니(Al-Biruni) 같은 우즈베크 지도자들은 호레즘어를 사용했고, 호레즘어는 고대 동방 페르시아어계통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우즈베크의 문헌어도 단지 14세기- 16세기에 이르러서야 발전되기 시작했으며, 방언의 절반도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남아있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타지키스탄이 사만 왕조를 이상화하는 경향을 보이자 우즈베키스탄이 이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섰다. 우즈베크 학자들은 타지키스탄이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특히 키도야토프(G. Khidoyatov)는 2004년에 모스크바와 타슈켄트에서 자신의 저서인 ‘사만 왕조의 퇴락’ (The Fall of the Samanids) 을 출판, 이 책에서 사만왕조의 정치 문화적 역할을 평가절하 하였다. 사만 왕조가 단순히 바그다드 칼리프의 총독이었다는 것이다. 즉 사만 왕조에 대해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자료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학자들이 있는데, 아스카로프는 타지크 민족이 사만 왕조 시기에 실제적으로 민족 공동체로 존속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는 타지크 인들은 6세기와 7세기에 투르크와 이란의 혼성 시기에 등장한 투르크 민족의 이란화된 일부분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1991년 타지키스탄이 독립한 이후, 정부는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의 지역을 타지키스탄의 영토로 해달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타지키스탄은 범-투르크주의 엘리트들이 타지크 민중들에 내린 권리 제한 등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였다. 특히 타지키스탄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라힘 마소프(Rakhim Masov)는 타지크 민중들이 결국은 문화적 중심지대에서 변경인 산악 지역으로 내몰렸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역사적 관계를 설명하면서, 우즈베크 민족이 타지크 민족 내로 포함되는 것이 역사적 순리라고 대담한 주장을 하였으며, 그는 그것이 바로 역사적 진실이라고 강변했다. 우즈베키스탄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했다. 그들은 19세기의 러시아 역사학자들을 인용하면서, 전통적인 타지크 민족의 거주지를 파미르 산악 지역으로 한정했다. 그리고 우즈베크 학자들은 “아리안 신화”를 타지크와 전혀 관계없는 문명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즈베크의 역사학자, 아흐마달리 아스카로프(A. Аскаров)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거주한 아리안 인들은 BC 2000 년 경, 중앙아시아로 유입된 외국인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아리안 사람들은 노마드 문화에 적응된 투르크 인들이라고 주장했다.
타시켄트 동방학 연구소의 아흐메도프(A.Akhmedov) 교수는 아스카로프의 관점을 지지하였다. 그는 “타지크 지식인들이 1972년도에 출판된 가푸로프의 저서 이후로 열광적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정신 속에서 살아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타지크 민족의 정체성을 확대 해석한 타지키스탄의 역사학계를 공박했다. 그리고 타지크 학자들이 심지어 나치의 아리안 전통을 거론한다며 비판했다. 이에 더 나아가 아흐메도프는 타지크 민족이 아리안의 직접적인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마소프는 니체주의 원칙의 옹호자라며 강력히 비난했다. 아흐메도프는 아리안은 타지크계가 아니라 투르크계와 연관되어 있음을 다시 강조했다. 철기 시기부터 투르크계가 아리안 문화와 연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소프는 아리안계가 투르크계로 혼성되어 흡수되었다는 우즈베크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매우 강렬히 반발하였다. 마소프는 2006년, 아스카로프를 공격하는 일련의 글들을 게재하였다. 아스카로프의 주장은 단순히 중앙아시아 최초 정착민의 유산을 우즈베크 민족으로 귀속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학문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지못하고 단지 정치적인 주장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아리안 문화는 기본적으로 유럽 전통을 가지고 있다. 즉 서유럽 정체성이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여전히 서유럽 정체성을 드러내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학자들의 국수주의에서 비롯된 측면이 많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역사 논쟁에서 타지크 역사학자들은 매우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타지크 민족에게 아리안 신화는 학문적인 연구의 주제로써 뿐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정부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좋은 도구가 되었다. 중앙아시아 각 국은 1991년 독립 이후 빠른 시간 내에 국가건설에 매진해야만 했고, 국경의 안전성을 도모하고 민족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타지크 학자들도 이러한 국가적 비전에 맞추는 역할을 하고 과거의 역사적 유산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타지크 민족은 아리안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관점이었다. 아리안 신화는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다른 민족적 정체성을 타지키스탄에 부여할 뿐 아니라 타직인과 유럽인의 기원적 유사성을 상기시킴으로써 보다 유럽인에 가까운 정체성을 타직인에게 부여하였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보보잔 가푸로프가 사만 왕조를 타지크 민족의 역사적 기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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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보보잔 가푸로프가 사만 왕조를 타지크 민족의 기원으로 인정하지 않은 구체적인 이유를 파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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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문맥에서 가푸로프의 사만 왕조에 대한 견해와 관련된 내용을 추출한다.
- 가포로프는 이러한 개념을 부인하고, 사만왕조를 타지크 민족의 역사적 기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 사만 왕조가 시작된 9세기 이후를 역사적 기원으로 삼기에는 시기상 너무 늦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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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가푸로프의 주장이 담긴 핵심 문구를 선택한다.
- 사만 왕조가 시작된 9세기 이후를 역사적 기원으로 삼기에는 시기상 너무 늦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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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가푸로프는 사만 왕조가 시작된 시점(9세기)이 민족의 기원을 설명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고 판단했음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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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사만 왕조가 시작된 9세기 이후를 기원으로 삼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다는 점을 결론으로 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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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한 답변을 완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사만 왕조가 시작된 9세기 이후를 역사적 기원으로 삼기에는 시기상 너무 늦기 때문이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보보잔 가푸로프가 사만 왕조를 타지크 민족의 기원으로 보지 않은 근거가 사만 왕조의 시작 시점이 역사적 기원으로 삼기에 너무 늦다는 점에 있음을 파악하여 답변을 도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