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데이터 · 도서자료 기계독해

DMZ 세계평화공원 조성사업의 의의와 추진 현황 및 지난 수십 년간의 남북 교류협력 역사와 경과 doc_id PCY_201503020948338131_4

주제 (main_topic)
DMZ 세계평화공원 조성사업의 의의와 추진 현황 및 지난 수십 년간의 남북 교류협력 역사와 경과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본 연구의 목적은 DMZ 세계평화공원 조성의 의미와 추진 현황, 각종의 기대효과, 그리고 향후 과제 등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는데 있다. DMZ 세계평화공원 조성사업은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제시된 첫 대북사업으로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고, 한국 주도(initiative)의 남북관계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박근혜식 해법’이다. 물론 현 한반도 정세를 감안할 때, 동 사업에 대한 낙관적 전망보다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냉각되어 대화가 중단되고, 북한의 위협과 도발이 비상식적이라고 해서 우리마저 신뢰 회복의 노력을 중단해 버린다면, 정상적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통일 기반구축은 요원해진다. 따라서 동 사업이 갖는 각종의 기대효과를 감안해, 강력한 의지를 바탕으로 꾸준히 추진해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의미를 갖는 DMZ 세계평화공원 조성사업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물론 박근혜 정부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첫 시작은 1970년대였다. 1971년 유엔사가 북측에 DMZ의 평화적 이용에 대해 처음으로 제안한 이래, 지난 40년간 각 행정부별로 자신들의 특성과 시대적 상황에 맞는 명칭으로 변경시켜 가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지난 세월 북한의 일관된 무반응 및 난색, 그리고 남북 당국간 인식 및 접근 방식의 차이로 인해 제대로 된 논의를 한번도 진행해 보지 못하고 ‘제안→무시→제안→거부’라는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분단과 대결의 상징인 DMZ를 평화적으로 이용한다는 구상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에 본 절에서는 지난 40여 년 간 추진되어 왔던 DMZ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현황을 리뷰하고자 한다.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제12조에서 남북한은 군사적 신뢰구축의 일환으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을 규정하고, 이산가족 만남의 장소 건설 및 남북공동출자 합작공장 설치 등을 제의했으나, 북한의 무반응으로 정전 이후 DMZ를 처음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15) 그리고 1994년 8월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DMZ 자연공원화’를 제의했으나, 김일성의 사망으로 남북관계가 냉각되면서 또 다시 별다른 진전 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남북경협이 활성화되면서 남북관계의 초점이 개성공단 및 금강산관광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DMZ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DMZ 내의 남북한 소초(GP: Guard Post)와 중화기를 철수한 후 평화적으로 이용하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제안하면서 부각이 되었다. 특히, 장관급회담에서 △비무장지대 생태계․환경조사, △역사유적 공동조사 및 연구,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등 보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논의 진행을 제안했다. 이는 그야말로 중무장지역으로 변한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를 위한 제안들이었다. 그러나 당시 북측은 시기상조라며 협의 자체를 회피했다. 첫 대북 투자는 1993년 주식회사 대우가 남포공단에서 셔츠, 가방, 재킷 등을 생산하는 대북협력사업을 승인받은 것이 시초이다. 2003년에는 경제특구로서 개성공단이 착공되었고, 동 공단은 2013년 누적생산액 20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개성공단 외에는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을 포함해 2013년까지 총 100개의 협력사업이 승인되었다. 북측 사정으로 승인이 취소된 7개 사업을 제외하면 93개 사업이 승인되어 있는 상태이며, 1989년 이래 2013년 말까지를 기준으로 남북 간 교역액은 200억 달러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한편 2002년에는 경의선, 동해선 등 단절된 철도의 연결을 위한 착공식이 거행되었고, 2007년에는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남북을 연결하는 철도를 이용하여 기차가 달리는 감격적인 순간도 있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 선언) 이후 26년간 남북교류협력을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계속되었다. 1990년 제정된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 남북협력기금법 은 그 법적인 발판이 되어 왔다. 먼저 인도적 지원 분야를 살펴보면, 남한은 1995년에 북한에 15만 톤의 식량을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쌀, 비료 등 다양한 물자를 무상 지원 또는 차관의 형태로 전달하였다. 정부는 지금까지 차관 형태로 지원된 8,728억 원을 포함해 2조 3,615억 원을 북한에 인도적으로 지원하였으며, 대한적십자사를 포함한 민간의 지원까지 합하면 현재까지 3조 2,000억 원 이상이 북한에 지원되었다. 둘째로 교역 및 경제협력 분야를 살펴보면, 교역 시작 당시에는 단순 상품교역만이 이루어졌으나, 이후 남측이 원․부자재와 설비를 제공하고, 북측에서 가공하여 완제품을 들여오는 위탁가공 교역이 모색되었다. 이는 남북한의 필요와 장점을 살린 초보적인 형태의 경제협력사업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다시 본격적인 경제협력사업이라 할 수 있는 대북 직접투자로 이어졌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이 평양에서 합의한 ‘6.15남북공동선언’의 정신에 따라 남북한 경제교류와 협력에서 발생하는 상사분쟁의 해결을 촉진하기 위하여 그 해 12월 16일 남북 장관급회담이 개최되었다. 위 회담에서 남북한 당국은 ‘남북 사이의 상사분쟁 해결절차에 관한 합의서’(이하 ‘분쟁해결합의서’라 한다), ‘남북 사이의 투자보장에 관한 합의서’(이하 ‘투자보장합의서’라 한다), ‘남북 사이의 소득에 대한 이중과세 방지 합의서’, ‘남북 사이의 청산결제에 관한 합의서’ 등 남북경협 4대 합의서에 서명하였다. 이들 4개 합의서는 판문점 연락관 접촉을 통해 발효통지문을 교환함으로써 2003년 8월 20일자로 발효하였다. 즉 이들 4대 경협 합의서는 6.15남북공동선언 제4항의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는 규정과 위 선언 제5항의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는 규정에 따른 구체적인 후속조치에 해당한다. 개성공단 사업의 시작은 1998년 소떼 1001마리를 몰고 방북했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이듬해인 1999년 10월 1일 또 다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정일 위원장은 정 회장이 제안한 서해안공단 조성사업에 관심을 보였고, 정 회장은 공장입지에 대해 내심 해주를 원했다. 그러나 북한은 해주가 군사적으로 민감한 곳이라 신의주를 제시했고, 정 회장은 원부자재 수출이나 해외수출에 물류비용이 많이 든다면서 맞섰다. 이때 북한은 파격적으로 개성을 공단 후보지로 내놓았고, 이후 현지답사, 지질조사, 측량 등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지만 2001년 정 회장의 사망과 이후 남북관계의 침체기를 거치면서 답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2년 4월 대통령 특사의 방북을 통하여 다시 개성공단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유동성 위기에 빠진 현대그룹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국토지공사(현재의 LH)가 개성공단 개발에 공동사업자로 합류했다. 원래는 그 해 12월 30일이 착공식 날짜로 잡혔지만 군사분계선 통과에 대한 군사보장합의서가 체결되지 못해 다소 지체되었다가 2003년 6월 30일 착공식과 함께 개성공단 사업은 깃발을 올렸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개성공단 사업이 본격적으로 착공되어 시작된 시점과 그 과정에서 한국토지공사가 합류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개성공단 사업의 착공 시점과 한국토지공사의 합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개성공단 착공 시점과 한국토지공사 관련 정보를 문맥에서 추출한다.

    • 2003년에는 경제특구로서 개성공단이 착공되었고
    • 유동성 위기에 빠진 현대그룹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국토지공사(현재의 LH)가 개성공단 개발에 공동사업자로 합류했다.
    • 2003년 6월 30일 착공식과 함께 개성공단 사업은 깃발을 올렸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착공 시점을 나타내는 날짜와 한국토지공사 합류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문구를 선택한다.

    • 2003년 6월 30일 착공식과 함께 개성공단 사업은 깃발을 올렸다.
    • 유동성 위기에 빠진 현대그룹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국토지공사(현재의 LH)가 개성공단 개발에 공동사업자로 합류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개성공단은 2003년 6월 30일에 착공되었으며, 한국토지공사는 유동성 위기를 겪던 현대그룹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동사업자로 합류했음을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하여 착공일과 합류 배경을 명시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개성공단 사업은 2003년 6월 30일 착공식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국토지공사는 유동성 위기에 빠진 현대그룹을 지원하기 위해 개성공단 개발의 공동사업자로 합류하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개성공단 사업은 2003년 6월 30일 착공식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한국토지공사는 유동성 위기에 빠진 현대그룹을 지원하기 위해 개발에 공동사업자로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