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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동아시아의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의 부상과 조선의 대응 실패, 그리고 자주적 안보 태세의 중요성 doc_id PCY_201504090906351331_5

주제 (main_topic)
근대 동아시아의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의 부상과 조선의 대응 실패, 그리고 자주적 안보 태세의 중요성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서양제국의 동양권에 대한 침략이 노골화되고 일본이 서양에서 배운 제도나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동양의 새로운 종주국의 꿈을 실현해나가는 이시기에 러시아가 해안, 두만강지역에 자주 출몰하다가 드디어 경흥지역을 약탈(1867)하고, 해안으로는 불란서와 미국과의 충돌로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가 일어났다. 일본은 페리 제독의 개항(1854)으로 명치유신을 겪었던 방식 그대로를 조선에 적용하여 강화도 조약(1876), 제물포조약(1882), 한성조약(1884.11.24)을 체결하면서 조선에 대한 금융·경제 진출을 시도함과 동시에 군사적 진출을 준비하였다. 청은 조선 내에서 대원군 집권(1863~1873)-고종 친정(1873~1882)-대원군 재집권(1882.7.3~1882. 7.13)-고종이 다시 집권하는 등 대혼란 속에서 청의 세력권 가운데 마지막 남아있는 조선에 대한 단속은,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의 강화로 나타난다. 청의 간섭은 신구식 군대간의 갈등인 임오군란(1882.7.23)의 결과로 인하여 일본의 간섭을 촉발시키게 된다. 이 시기에 세계는 큰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된다. 동서양의 충돌이 그것이다. 영국은 우월한 경제, 군사력을 기반으로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소위 PLANT를 건설하여-이는 무역거래품을 식민지에서 만들어 세계무역시장을 구성하여 독점적 무역의 차익을 영국이 가져가는 형식으로 요약된다. 아편을 신민지인 인도에서 생산하고 이를 아편의 최대수요처인 청(1636년 개국)으로 수출하려는 시도로 당시 식민지 개척의 영국 방식(중상주의)대로 하면 군사적 충돌은 예정된 것이었다. 결과로 아편전쟁 패배한 청은 남경조약(1842), 이어 천진조약(1858), 북경조약(1860)을 맺어 중국의 시장을 서양열국에 개방하였고 청은 극도의 피폐 속에 빠져들었다. 청은 명을 이어 중화론의 사상-적어도 외교와 군사를 중국에 기탁하는, 즉 중국 속의 안보관념이 우세한- 속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많은 식자들의 조언을 무시한 채 종래의 제도와 관습에 안주한 것이 세계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조선 역시 중화권내에서 중화권내의 변화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만 아니라 외교의 방식에 있어서도 유교적 철학이 지배적으로 작용하여 힘을 근본으로 하는 서양의 외교와는 비교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은 명치유신(1868)을 통하여 적극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명치유신이 성공한 이유는 임진전쟁의 이전부터 무역이라는 개념을 일본인들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 무역을 통해 국가의 재정이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튼튼했다는 점, 중화권에서 상대적으로 멀리 위치한 일본은 서양의 문물 교류에 있어서 국내적인 갈등이 덜했다는 점, 정치적 안정이 최초로 이루어 졌으며 명치유신에 가담하였던 정치인들이 모두 낙향하고 왕에게 전권을 주자 훈구, 개혁세력간의 소모적인 갈등없이 서양의 입헌군주제를 그대로 수용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역사를 함축적으로 뛰어 넘는 비약적 발전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서양제국들이 청을 공략하기에는 긴 항해거리와 보급의 문제가 있음으로 지리적으로 아시아권에 속해 있는 일본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서양제국들의 모습을 답습하여 아시아내의 일본제국을 꿈꾸기 시작한 것도 이때이다. 여기서 일제의 안보의식을 살펴보면 천왕에 대한 충성(서양은 마찬가지 왕에 대한 충성이지만 이것은 계약관계이다)은 그 동안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하대 받았던 문화적 차별을 서양의 사상으로 대치하고, 서양사상을 역으로 아시아권에 전파한다는 개화인으로서의 우월한 자부심이 안보의식의 중앙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조선은 잡색군을 정병화하여 5군영제를 편성하고, 청의 정군제를 받아들여 이를 친군 5군영제로 개편하였다. 사회의 질서가 무너진 상태에서의 군비 강화란 근본적인 양적 질적 한계를 넘지 못하는 명목상의 개편에 불과하여 오히려 실질적인 전력의 증가 없이 군내부의 혼란과 사회적 혼란만을 가중 시켰다. 훈련도 보다 나은 훈련 방식을 추구한다는 필요에 따라 청 방식-일본 방식-미국방식 등으로 바꾸어 나갔다. 그러나 훈련이란 편제 장비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예산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한정적인 일부 소규모 집단 훈련에 그쳤다. 외국의 끊임없는 간섭으로 위기의식이 고조되자 국내에서도 지체없이 개화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급진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갑신정변: 1884.10.17-19). 갑신정변은 결과적으로 청국을 조급하게 만들었고, 동학농민난(1894. 1)을 청이 제압하자, 일본이 조선에 대한 군사적 간섭을 노골화하여 청·일은 조선을 사이에 두고 전쟁(청일전쟁: 1894.7.23~1895.4)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점령을 위한 단계를 여러 부문에서 밟아 가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갑오개혁(1.2차:1894.7~1895.5, 3차;을미개혁, 1895.5~1896.2)이다. 외침에 의한 강요와 급격한 사회변화, 경재난 등을 이유로 제주·고성·개성·인천을 비롯한 전국적인 민란(1889~1893)이 일어나고, 동학농민란이 일어나 극한의 혼돈으로 빠져 들었다. 왕권조차 외세에 의해 보장되지 못할 지경에 이른 조선은 서양제국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으로 보였다. 조선은 이미 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라고 판단되자, 미국에 손을 빌리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하자 일본은 명성왕후를 시해(1895)하는 극단적인 사건을 일으켜 민중의 분노를 자아냈었다. 결국은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1896)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듯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의 모험은 이미 선을 넘고 있었는데 청과의 전쟁처럼 러시아와의 일전은 예상된 것이었다. 류구 왕국을 상대로 이미 병합 예행연습(류구왕국 병합: 1879)을 마친 일본은 잘 짜인 각본을 조선에 적용하는 일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서양제국들의 조선내 이권선점 경쟁이 이뤄지자 일본의 조선 침략의 발길이 빨라졌다. 조선은 대한제국(1897)을 선포하고, 황제중심의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기 위하여 육군 10개 대대를 중점으로 해군과 경비대를 포함하는 상비군을 준비하려는 노력과 함께, 병역제도는 17세에서 40세까지의 장정들을 징병하는 징병군 제도(1903)를 채택하고, 일부에게 급료를 주려는 계획으로 추진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1904.2.9~1905.9.5)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일본이 대한제국을 일본군 전략요충지로 사용한다는 한일의정서(1904.2.23)를 강행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했다. 이어 을사보호조약(1905.11), 정미7조약(1907)을 체결하고 한일합방 3년 전인 1907년 7월 31일 군대를 해산함으로서 모든 것이 무산되었다. 일본의 폭거에 안중근 의사의 거사(1909)를 비롯한 각지의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각지의 무장투쟁도 치열했지만 너무나 혹독했다. 가장 근원적인 힘인 ‘백성 스스로의 가정과 재산을 지키는 의병’이 기초적인 방위력으로 작용하는 국면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의병 무장투쟁이 지역적으로 국내, 특히 가정과 밀접한 곳에서의 전투가 이뤄지기 때문에 피해 역시 참혹한 것이 되는 것이다. 자기 집 안방이 적이 준비한 전쟁터가 되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조직적 집단의 준비된 전투력과 의병의 전투력이 충돌하면 결과는 참담한 것이다. 따라서 나라의 안전보장은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에 기초하여 최소 집합적인 크기의 군대는 보유해야 한다. 외교의 관계도 상대방이 적어도 상대가 될 만한 정도가 될 때 작동하는 것이다. 자주적인 안보태세 없이 외국의 힘에 의존하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새삼 깨우치게 하는 교훈이다. 그리고 자주적인 안보태세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황제 중심의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 추진했던 징병군 제도의 구체적인 급료 지급 방식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질문은 대한제국 선포 이후 추진된 징병군 제도의 구체적인 급료 지급 방식에 대한 정보를 요구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대한제국의 군대 육성 노력, 징병군 제도 채택, 그리고 급료와 관련된 언급을 추출한다.

    • 대한제국(1897)을 선포하고, 황제중심의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기 위하여
    • 병역제도는 17세에서 40세까지의 장정들을 징병하는 징병군 제도(1903)를 채택하고
    • 일부에게 급료를 주려는 계획으로 추진을 시도하였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징병군 제도와 급료에 관한 문장을 근거로 선택한다. 해당 문장에는 급료를 주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만 명시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방식'은 누락되어 있다.

    • 일부에게 급료를 주려는 계획으로 추진을 시도하였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문맥을 종합하면 대한제국이 징병군 제도를 채택했고 일부에게 급료를 주려는 계획을 시도했다는 점은 알 수 있으나, 그 급료가 어떤 형태로, 어떤 주기로, 어떤 기준에 따라 지급되려 했는지에 대한 세부 정보는 결합하여 도출할 수 없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질문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급료 지급 방식'에 대한 정보는 문맥에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는 최종 답변을 생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에는 대한제국이 징병군 제도를 채택하고 일부에게 급료를 주려는 계획을 추진했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질문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급료 지급 방식에 대한 정보는 누락되어 있으므로 외부 지식 없이는 답을 결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