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연구팀은 본 연구를 통해, 확장된 안내 정보의 제공, 증강현실 기반의 멀티미디어 환경 구현, 정부 3.0의 취지에 부합하는 유관 정보 융합 서비스 등의 개발 과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향후 추진해야 할 디지털 문화재 안내 체계의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이상과 같은 과업 수행의 결과로 산출된 분석 데이터, 사례 조사 결과, 지침의 시안, 시스템 개발 로드맵은 향후 문화재청에서 추진할 문화재 안내 체계 개선 사업에 다각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아울러 2013년의 전수조사와 2014년의 전수조사 결과 분석이 일회적인 사업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문화재 안내 정보 관리 체계를 혁신적으로 개선하는, 문화재 해설문 통합 관리 시스템의 구현으로 발전되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문화재 해설문은 오프라인 안내판뿐 아니라 디지털 안내 시스템 상에서도 모든 안내 기능의 출발점이 되는 정보이며, 디지털 안내 시스템의 활용 효과를 좌우하는 토대이다. 따라서 디지털 문화재 안내 체계의 도입과 함께 향후 전국의 문화재 안내판 해설 문안은 문화재청에서 집중적으로 통합 관리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문화재 용어에 대한 주제 분류는 향후 각 주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해당 문화재 용어의 가용성, 즉 그 용어가 해당 문화재를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용어인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인지를 검토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다. 향후 문화재 해설문 개선 사업을 수행할 때 분야별 전문가들이 소관 분야 문화재 용어의 필요성 및 보다 평이한 용어로 바꿔 쓸 수 있는지, 용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를 설명하는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는지 등을 검토할 것을 제안한다. 향후 오프라인 안내판과 온라인 디지털 안내 시스템이 연동하는 문화재 안내 체계상에서는 오프라인 안내판 상에서 가장 평이한 문장과 쉬운 단어로 서술된 문화재 해설을 접하고,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독자들은 개인용 모바일 장비를 통해 온라인 안내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이렇게 주제 분류가 이루어진 각각의 용어들은 심도 있는 문화재 해설을 위한 ‘온라인 용어사전’의 표제어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현재의 문화재 해설문 상에서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어를 쓰면서 그 용어의 의미를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사례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앞으로는 이와 같은 형식의 적정성에 대해서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 석굴암은 1)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던 김대성이 처음 건립하였는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재위 742 ~ 765)때에는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황룡사대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만들어져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룬다. 석굴의 평면 구조는 앞쪽이 네모났고 뒤쪽은 둥글다. 석굴에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2) 둘레에 천부상·보살상·나한상·거사상·사천왕상·인왕상·팔부신증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3) 인도나 중국의 석굴 사원과는 달리 화강암을 인공으로 다듬어 조립한 이 석굴은 불교 세계의 이상과 과학기술 그리고 세련된 조각 솜씨가 어우러진 걸작이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진실과 원형의 주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둥근형태의 주실 천장을 교묘하게 축조한 것이다. 4) 이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드문 뛰어난 기술이다.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하여 건립했다고 전하는 석굴암은 신라 예술의 극치이자 동양 불교미술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록되었다.
석굴암은 통일신라시대 토함산에 세운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이다. 신라인들의 신앙과 염원, 아름다운 건축미, 뛰어난 조각기법 등을 보여 주는 동양 불교미술의 대표작품으로 평가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록되었다. 석굴암에서는 지금도 매일 스님이 예불을 드리는 절이다. 석굴암은 자연 상태의 화강암을 다듬어 조립한 석굴사찰이라는 점에서 인도나 중국의 자연석굴사찰과 다르다. 앞쪽의 네모난 방은 부처님께 예배와 공양을 드리는 곳으로 인왕상과 사천왕상을 조각하여 넣었다. 그 안쪽의 둥근 방은 부드러운 자태와 인자한 표정의 본존 부처님이 가운데 앉아 계시는 곳이다. 그 주변에는 세련된 조각 기술을 보여주는 제자들과 보살상들이 새겨져 있다. 석굴암의 천장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드문 뛰어난 기술로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돔형의 둥근 천장을 지어 놓았다. 석굴암은 신라인들의 신앙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생의 부모를 위해 751년 석굴암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1)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하고 나서 바로 짓기 시작하여 1395년에 경복궁보다 먼저 완공했다. “궁궐의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고대 중국가 도성 계획 원칙을 따라 경복궁의 왼쪽인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왕조가 이어져 봉안해야 할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 건물의 규모가 커져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후에 그 신주를 종묘에 옮겨 모신다. 정전에는 공적이 뛰어난 임금들을 모셨고,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나 죽은 뒤에 왕으로 추존되었거나 정전에서 신주를 옮겨온 임금들을 모셨다.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신위 34위를 모셔 두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다. 종묘제례는 국가의 가장 큰 제사로서 정전에서 1년에 5번, 영녕전에서는 1년에 2번 열렸으며, 왕이 친히 주관했다. 종묘제례에는 왕세자와 문무백관이 참여하였으며, 음악[樂], 노래[歌], 춤[舞]이 일체화한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진행했다.
사람의 성을 따서 하조대(河趙臺)』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1) 조선 정종 때 정자를 건립하였으나 퇴락하여 철폐되었으며, 수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여 1940년에 8각정을 건립하였으나, 2) 한국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55년과 1968년에 각각 재건되었다. 하조대는 동해바다의 절경을 볼 수 있는 돌출 된 만(灣)의 정상부에 위치하여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 해체 복원한 건물로 3) 초익공굴도리 양식의 육모정으로 지붕에 절병통을 얹어 소나무와 함께 주위의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고 있으며, 정자각 앞에는 조선 숙종 때 참판 벼슬을 지낸 이세근(李世瑾)이 쓴 “하조대” 3자가 암각(岩刻)된 바위가 있다. 이곳은 인접한 하조대 해수욕장과 함께 양양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양양의 관광명소중의 하나이다.
대원각사비는 1471년(성종 2)에 세조(世祖)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이다.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分身)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 11) (2)흥복사(興福寺) 터에다 원각사를 지었다. 이어 1467년(세조 13)에 13층 석탑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전후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하게 하였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을 만들고 그 등 위에 연잎을 새겨 비석 몸돌을 세울 자리를 만들었다. (3) 몸돌은 머릿돌인 이수(螭首)와 한 돌로 만들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494㎝이며 거북은 화강암으로, 몸돌과 머릿돌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당대 문장과 글씨로 이름난 사람들이 비문을 맡았다. 김수온(金守溫)이 앞면의 글을 짓고, 성임(成任)이 그 글을 썼으며, 서거정(徐居正)이 뒷면의 글을 짓고, 정난종( 원각사는 빈 절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 공원으로 변모한 이곳에는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이 비석만 남아 원각사의 옛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에는 각각 몇 위까지의 신위를 모실 수 있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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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에 모셔진 신위의 구체적인 숫자를 파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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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종묘에 관한 설명 중 정전과 영녕전의 신실 칸수 및 신위 숫자가 언급된 부분을 추출한다.
-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신위 34위를 모셔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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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정전의 신위 수와 영녕전의 신위 수가 명시된 문장을 선택한다.
-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신위 34위를 모셔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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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추출된 정보를 바탕으로 정전은 49위, 영녕전은 34위임을 확인한다.
-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신위 34위를 모셔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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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정전에는 49위, 영녕전에는 34위의 신위를 모신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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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정전에는 49위, 영녕전에는 34위의 신위를 모신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종묘의 정전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영녕전에는 신위 34위를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