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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략적 개입과 군사적 구조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의 비대칭적 국제 질서와 그 역사적 배경 doc_id PCY_201508120408101551_11

주제 (main_topic)
미국의 전략적 개입과 군사적 구조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의 비대칭적 국제 질서와 그 역사적 배경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1930년대 중반 세계가 공황에 빠지고 보호주의적 관세가 만연하며, 일본이 중공업 산업화를 개시하던 시기에 “일본”은 큰 골칫거리였다.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과 같은 자유주의 국제주의자들은 “미국에 대한 근원적 친밀함이라는 전통”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자유무역 체제를 벗어나 만주에서 방종을 일삼으면서 “문호 개방”을 파괴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1935년에(당시에는) 반어적인 제목이었지만 결국 미래를 예지한 책이 된 “일본산(Made in Japan)”을 썼던 궨더 스테인(Guenther Stein)은 일본이 관세 장벽이 없다면 “단시간 내에 세계 최대의 수출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산업 효율성의 본보기라고 보았다. 스테인은 1930년대 중반의 중공업 산업화 추진 과정에서 “세계 산업화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모습”을 제대로 포착했다. 일본의 문제는 일본이 세계체제의 균형을 흔들었다는 점이었고 “다른 나라들이 일본에 대해 불평한 진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945년 8월 15일(요식적 겉치레만 빼고는 사실상) 일본 점령 과정에서 동맹국을 배제하고, 한국을 38도선에서 분할하고, 베트남을 16도선에서 분할하고, 중국 내의 일본군이 국민당 군에게 항복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장개석의 지도하에 중국이 통일되도록 추구한 일반 명령 1호를 발표 했을 때, 미국의 결정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국제 관계의 기본 틀을 형성했다. 뜻대로 되지 않았던 유일한 군사적 분단은 중국이었는데 공산당이 1948-49년에 걸쳐 본토에서 국민당을 소탕하면서 새로운 분단, 즉 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분단이 일어나고 그 사이에 7함대가 대만해협으로 진입하게 된 것이었다. 맥아더가 자비로운 황제로서 일본을 통치하는 동안, 한국전쟁이 동북아시아에서의 분단 구도를 대단히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요새화된 비무장지대가 38도선을 대신했고 오늘날까지도 이제는 끝난 세계적 냉전을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한 세대 동안 중국은 내부의 급진주의와 미국의 봉쇄 및 전쟁 위협 때문에 전후 국제 체제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미국의 군사기지로 이어진 열도(archipelago)가 북태평양에서 미국의 지위를 공고히 해준 강압적 구조를 이루면서 동맹국들에 대해 산발적이지만 가시적인 영향력을 제공했다. 동아시아에서 미군 기지의 역사는, 미군이 진주만 이전 반세기 동안 지속된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경쟁관계를 무력화시킨 194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유례가 없는 장수는 또한 격세유전과 시대착오의 반영이기도 하다.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의 부산물이었던 이 기지들은 마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는 듯이 이 세기에도 끈질기게 남아있다. 일본에는 50,000명, 한국에는 28,000명, 유럽에는 수천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 컬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은 1989년 이후 냉전 권력 구조가 붕괴하면서 세계 각지에 갈등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고 한탄하면서, 정작 실제로 붕괴한 단 하나의 구조, 즉 소련 제국은 간과하고 있다. 반면 미 국방부는 1989년을 대담하게 받아들이면 서 2001년 9월 11일 이후로는 세계 전역에,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구 소련의 기지에 제국의 열도(archipelago of empire)를 확대하면서 러시아의 남쪽, 중국의 서쪽 국경에 처음으로 미국의 힘을 투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동맹국에 대한 냉전기의 영향력은 대부분 유지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러한 일방주의가 낳은 장기적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역내 비공산국가들이 미국을 통하여 서로와 교류하는 축과 바퀴살(hub-and-spoke) 형태의 비대칭적 체제로서(일본, 한국, 대만, 필리핀과의) 양자 방위 조약으로 공고화되고 4개국의 외무부의 위에 국무부가 서있는 수직적 레짐이었다.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은 서로에 대해서는 미국과의 관계에서와 달리 “은자의 왕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중국은 대만이나 한국과 대화하지 않았고 남북한 간에는 개인적인 서신조차 교류되지 않았으며 남북한은 모두 일본을 증오했고 일본의 외교는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에 관심을 보였지만 자신의 “근린(near abroad)”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각국은(한국군의 작전권, 대만해협에서 7함대의 순찰, 4개국에서의 국방 의존도, 각국 영토 내의 미군 기지와 같은) 미국의 군사 구조가 깊이 침투한 상태의 준-주권 국가가 되었고, 독자적 외교정책이나 국방 기획 따위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 체제의 유일한 균열은 중국의 부상이었고, 이는 대만이 미국의 다른 걱정거리에 비하면 사소해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족보를 들춰보기 좋아하는 이들은 김정은의 할아버지 김일성이 1930년대 만 주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있던 시절에 아베의 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의 반란을 주동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손자인 김정은과 아베가 충돌일로에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은 또 다른 풍파를 일으켰는 데 그의 아버지 박정희가 일본 황군의 장교로서 또한 만주국에 있었으며, 기시와 함께 아직도 논쟁거리인 1965년 한일관계 정상화를 공모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사태의 배경에는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일시적으로 기시를 A급 전법으로 지명했으나 전후 기간 중에 금세 지난 일은 묻어버리고 그를 훌륭한 반공 주의자이자 근대화의 기수로 칭송했다. (그는 실제로도 반공주의자이기는 했지만 이런 복권은 대체적으로 CIA의 작품이었다.) 미국은 또한 만주국 장교였던 박정희를 1946년 한국군 사관학교에 2학년으로 입교시키는 데에 압력을 행사했고, 1961년 쿠데타 이후에는 그를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지원했다. 또 미국은 1965년 관계정상화를 이루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그리고 고위 정치라는 명목으로 거의 40년간에 걸친 일본의 식민 지배(1910-1945) 에서 비롯된 한국인들의 증오와 원한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한국의 전쟁기념관은 한국의 전쟁의 역사를 전시하면서, 1950년 한국전쟁을 핵심주제로 삼고, 근대 한국의 운명을 좌우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전시하지 않고 있다. 현대 한국의 운명을 좌우한 2차세계대전도 전시되지 않고 있지만,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두 개의 전쟁이 전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 이런 약점을 전쟁기념관측도 느끼고 있었는지, 2014년 6월부터 11월까지 <청일-러일전쟁과 위기에선 대한제국>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는 개관 20주년 특별기획전으로 청일전쟁 120주년, 러일전쟁 110주년의 기념전의 의미를 가진 것이다. 이 특별기획전의 서장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개관 20주년을 맞아 ‘청일-러일전쟁과 위기에선 대한제국’이라는 특별기획전을 개최합니다. 청일-러일전쟁은 우리가 그 주체는 아니었지만,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으며 종국에는 나라의 운명까지 결정짓는 사건이었습니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러일전쟁으로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의사와 전혀 무관한 결과였습니다. 힘없는 나라의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1907년 12월, 일본과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는 경고가 일어나는 와중에 루 스벨트는 대서양 함대에 해안을 따라 내려와 혼 곶을 돌아 태평양으로 진출하도록 지시했다. 1905년 러시아가 일본에게 당한 불의의 패배는 루스벨트가 일본의 남자다움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과는 별개로 미국의 서해안에 대한 위협의 망령을 일깨웠다. 그리고 일본의 성공을 미국이 모호한 태도로 환영 한 것은 그때가 끝이 아니었다. 1905년 허스트(William Randolph Hirst)의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San Franciso Examiner)는 “일본의 소리가 우리 해안에서 들린다.”고 대서특필했다. 또 다른 신문 헤드라인은 “황인들은 지도를 갖고 있으며 손쉽게 상륙할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정말 백인들을 불안하게 했던 것은 캘리포니아에서 일본 기업들의 성공이었다. 이는 다양한 반일 시위, 폭력 사건으로 이어졌고 루스벨트는 일본계 미국인들의 귀화를 허가하는 법안을 의회에 요청하는 식으로 애써서 개입해야만 했다. 그가 정말로 심각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는 캘리포니아의 백인들에게 분노했던 것은 진심이었으며 전국의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연방군의 투입을 승인하기 까지 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1965년 한일관계 정상화 과정에서 미국이 동원한 구체적인 수단과 방법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질문은 1965년 한일관계 정상화 당시 미국이 사용한 구체적인 수단과 방법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1965년 한일관계 정상화와 미국의 역할에 관한 문장을 추출한다.

    • 또 미국은 1965년 관계정상화를 이루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미국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는 사실은 명시되어 있으나, 그 수단과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 또 미국은 1965년 관계정상화를 이루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문맥 내에서 미국이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지만, 그 구체적인 행위나 방식에 대한 세부 정보는 결여되어 있다. 다른 문장들을 결합해도 구체적인 방법론을 도출할 수 없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질문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수단과 방법'에 대한 정보는 문맥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답을 작성할 수 없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답변 불가능 원칙에 따라 최종 답변을 생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은 미국이 1965년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고 언급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명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문맥에 없는 외부 지식이나 추측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