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동학농민혁명이나 청일전쟁에 관한 사회적 기억은 지난 1994년을 계기로 극적으로 변화되었고, 그것은 이 사건의 명칭의 변화에 잘 배어있다. 동학농 민혁명은 한국근대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이것이 정부군과 일본군 에 의해 철저히 진압된 후 농민들의 경험은 재현되지 못하고 망각을 강요당했다. 청일전쟁은 그 주요 전장이 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한국사회의 외부에 위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사건의 명칭은 국내적으로는 ‘동학란’으로, 국제적으로는 ‘청일전쟁,’ 또는 ‘일청전쟁’으로 명명되었다. 전자에 대한 명명권은 보수적 지배층에 있었고, 후자에 대한 명명권은 승전국인 일본에 있었다. 이 사건이 종료된 15년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함에 따라 농민군들의 경험은 또 다시 은폐되고, 이들에 대한 기억도 재생산되지 못하였다. 한 세대가 지난 1920년대에 이르러 ‘문화정치’에 힘입어 약간의 기억이 소생하고 객관적인 언급이 가능해졌으나 침묵과 망각의 시대는 해방이 될 때까지 50년간 지속되었다.
‘농민혁명 이후’라는 제목의 전시에서는 일본군 5사단이 평양을 점령하여 선화당을 사령부로 사용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사진과 청군 포로를 감시하고 있는 조선인 병사의 사진이 함께 있다. 마지막으로 농민혁명의 현재적 의미를 전시하고 있다. 이 의미는 첫째, ‘민중의 역사적 주체화,’ 둘째, 사회개혁 지향성, 셋째, 반침략 반외세를 통한 근대민족운동, 넷째, 아래로부터의 개혁, 다섯째, 근대민족민주통일운동의 시발점으로서의 자리매김 등이다. 이 기념관의 전시를 보면, 청일전쟁은 한 장의 판넬로 다루고 있으며, 평양의 사진을 두 점 보여주는 것 이외에 일본군의 압록강 도하 후 요동과 산동에서 전개된 청일전쟁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잇는 고리를 설명하거나 일본군에 의한 조선정부군의 지휘에 대한 설명도 취약하다. 이것은 청일전쟁이 한반도를 전장으로 하여 발생했고, 그 전쟁의 결과 한국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는 대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한국사’의 외부로 간주하는 인식의 결과이다.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는 19세기 동아시아에 서구 열강이 어떻게 들어왔는가를 설명하는 ‘제국주의와 세계사의 혁명들’이 있었는데, 2014년 초에 이를 어린이 전시관으로 바뀌었다.
연구방법상 기념비들을 망라하는 점적 접근 외에 중요한 기억과 기념비들이 특정 장소에 집중되는 현상에 주목하여 면적 접근을 한다면, 그것은 ‘핵심적 상징공간’ 분석이 된다. 동학농민혁명의 ‘핵심적 상징공간’인 정읍 황토현에는 여러 층의 기억들이 ‘집적’되어 있다. 황토재는 일제강점기와 1950년 대까지, 구전으로만 동학군 전투지로 기억되어 왔다. 1961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장군은 자신의 행위를 ‘혁명’으로 개념화하였고, 군정을 끝내고 민정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1894년의 농민혁명의 기억을 활용하였다. 1963년 8월, ‘갑오동학혁명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존경받던 학자 이병기를 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추진위원회는 10월 3일, 농민군의 봉기와 승전을 기념하여 황토현전투 전적지에 기념탑을 제막하였는데, 기념탑의 명칭은 甲午東學革命紀念塔이었다. 이 탑을 세우는데 소요된 경비는 전라북도, 도 농협, 정읍군, 그리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분담했다. 이 기념탑에는 이 탑을 세운 과정이 각인되어 있다. 또한 후에 세워진 갑오동학혁 명기념탑의 안내판에는 “이 탑을 세울 당시는 동학란이라 불리던 시절로 ‘농민’의 존재와 역할보다는 ‘동학’의 상징성이 강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기념탑은 ‘관주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탑의 제막식에 박정희가 참여했으므로, 그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념탑 건립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당시 전북일보 기자였던 이치백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동학기념탑 건립을 희망하고 있던 김상기교수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는 1963년 7월 어느날 김인 전북도지사를 만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제안했던 상황부터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기금을 모금했던 과정, 10월 3일 황토현 현지에서 열린 제막식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가람이 병기 위원장을 비롯해 수만명의 군중이 운집하였던 당시 현장을 술회했다. 이처럼 기념탑의 건립에는 지역유지들의 노력이라는 요소가 작용했으며, 이 때문에 이를 기념하는 조직과 의례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민간단체로 처음으로 정읍을 중심으로 갑오동학혁명 기념사업회가 1967년에 결성되었고 1968년부터 갑오동학혁명 기념문화제가 정읍을 중심으로 하여 거행되었다. 동학혁명으로 평가가 바뀌어지는 과정에서 농민군의 저항성과 민중성을 새로이 부각 시키려는 움직임도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동학혁명기념탑이 건립되자 주위에 산재한 동학농민봉기 관련 유적을 포함하여 황토현전투전적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동학농민혁명의 기억이나 기념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인 연구는 박명규에 의 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이루어진 현지 조사와 학문적 관심에 기초하여 당시까지의 이 사건에 대한 기념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때까지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학문적 작업의 중심은 1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사실 규명이었고, 기념사업은 기념물 건립에 그치고 있지, 종합적인 서사를 포함하는 기념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동학 농민전쟁의 기념물과 의미체계를 6단계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유교적 충절론의 상징화(1910년 이전), 둘째, 민족적 역사인식의 성장과 기념의 부재(1910-1945), 셋째, 분단체제의 형성과 이데올로기적 규정력(1945-1960), 넷째, 혁명의 상징성의 정치적 이용과 근대화론(1961-1979). 다섯째, 상징적 자원의 민주적 해석과 그 억압(1980-1987), 여섯째, 민중의식, 지방의식의 확대와 역사의 대중화(1987-1996)가 그것이다. 매우 치밀한 분석을 동반하고 있으며, 기념비의 역사가 한국 정치사에 너무 많이 종속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문병학(2014)은 1894년 이후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크게 4시기로 구분하 고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895~1910년 기간으로 조선정부와 유학자들에 의해 철저히 동학농민혁명이 반란으로 치부된 채, 반농민군 측 입장에서 이루어진 기념사업이다. 두 번째 시기는 일제식민지시기부터 1960년까지의 기간으로 동학농민혁명이 민족적 거사가 아니라 일개 종교단체의 반란 또는 고부지방 수령의 학정에 따른 민란으로 의미가 축소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정치적 격동으로 기념사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고, 1954년 전봉준 장군 단비가 세워진 것이 유일한 기념사업이었다. 세 번째 시기는 1961년부터 1992년까지로,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이 동학농민혁명의 상징성을 이용하여 정권의 취약한 정통성을 가리기 위한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1963년 10월 3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국가재건회의 의장 박정희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정읍 황토재에 세웠다. 그의 선조가 동학 접주였기 때문에 그는 동학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3년 ‘황토현전적 지정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기념관을 설치하였다.
네 번째 시기는 1993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으로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전 후하여 전국 각지에서 창립된 민간 시민사회단체들에 의해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그것이 지닌 민중적 변혁지향성이 부각된 시기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간 기념사업단체와 협의를 하면서, 기존의 동학혁명기념탑 주변에 1999년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을 착공하였다. 이 기념관은 2004년 개관하였고, 같은 해 제17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 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공포되었다.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2005년에 조사한 혁명유적지 기념시설은 모두 130개소로, 이 가운데 전북이 62개소였다. 2009년 동학농민혁 명기념재단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역사’라는 제목의 특별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문병학(2014)이 구분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네 번째 시기는 언제부터이며, 이 시기의 주요 특징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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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문병학(2014)의 분류 체계에 따라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네 번째 시기 범위와 해당 시기의 성격을 파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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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문맥에서 문병학의 4시기 구분 중 네 번째 시기에 관한 정보를 추출한다.
- 네 번째 시기는 1993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으로
- 민간 시민사회단체들에 의해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그것이 지닌 민중적 변혁지향성이 부각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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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시기적 범위(1993년~현재)와 특징(민간 주도의 연구 및 민중적 변혁지향성 부각)을 나타내는 문구를 선택한다.
- 네 번째 시기는 1993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으로
- 민간 시민사회단체들에 의해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그것이 지닌 민중적 변혁지향성이 부각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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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추출된 시기 정보와 특징 정보를 결합하여 하나의 완성된 답변으로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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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네 번째 시기는 1993년부터 현재까지이며, 민간 시민사회단체들이 연구를 진행하며 민중적 변혁지향성을 부각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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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네 번째 시기는 1993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창립된 민간 시민사회단체들에 의해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민중적 변혁지향성이 부각되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문병학의 기념사업 구분 중 네 번째 시기의 시간적 범위와 민간 주도의 연구 및 민중적 변혁지향성 부각이라는 핵심 특징을 문맥에서 찾아 결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