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북한 재판기관의 구성은 검찰기관과 동일하게 최고재판소 밑에 도(직할시) 재판소와 지방인민재판소를 두며 이외에 특별재판소로 군사재판소와 철도재판소를 두고 있다. 재판은 판사 1명, 인민참심원 2명으로 구성된 재판소가 하는데 특별한 경우는 판사 3명으로 구성할 수 있다. 최고재판소는 최고인민회의에서 선출된 소장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선출된 판사와 인민참심원으로 구성되며 하부 기관의 재판을 감독하고 사법행정을 지도·감독한다. 확정된 판결·판정에 대한 비상상소 사건의 심리와 도 재판소, 특별재판소의 상소·항의사건의 심리를 수행한다. 최고재판소는 최고인민회의에 책임을 진다. 북한의 재판기관은 전적으로 당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자율적이며 중립적인 사법적 판단을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군·보위부의 판단에 따라 진행되는 특별재판은 단심제로 신속하게 진행된다. 예컨대, 장성택은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숙청이 결정된 지 나흘 만인 2013년 12월 12일 국가안전보위부의 특별군사재판에서 형법 제60조 ‘국가전복음모행위’로 사형판결 및 즉시 집행된 바 있다.
북한 주민은 김일성 일가를 정점으로 하는 전체주의 체제에서 평등주의, 집단주의, 획일주의, 수령중심주의 가치관을 발달시켜야 했다. 이들 가치관은 북한 당국이 지향하는 체제 성격에 부합한다는 의미에서 이상적 가치관(ideal value)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주민이 이런 가치관을 완전히 내면화하고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외형상 당국이 지향하는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반면 내면으로는 특정 상황에서 자신의 이해에 부합하는 현실적 가치관을 발달시켜 왔다. 결국 북한 주민의 행동 양식은 이상적 가치관과 현실적 가치관 간 타협의 산물이며, 북한 주민들에서 나타나는 가치관의 특징은 이중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배급이 중단되고 사경제 활동이 발달하면서 북한 주민들의 의식과 가치관에도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즉 주민들 사이에는 돈과 금전의 이익을 중요시하는 시장경제적 사고가 확산되고 있다. 집단주의보다는 개인주의나 가족주의 성향도 증대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문화와 정보가 유입되면서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이듬해인 1946년 2월 소련군정은 중앙행정기관의 모태가 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한 지역의 최고집행기관이었지만 소련군 사령부에 법령과 결정의 초안을 사전에 제출하여 소련군 사령부의 포고나 법령에 배치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권한을 갖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 공산당의 지도하에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대중 정당이 필요하다는 스탈린의 판단 아래 북조선공산당은 김두봉의 신민당과 합당(1946. 8.)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출범하였다. 이들은 공산당 통치를 위한 내적 기반을 점차 강화하기 위하여 강력한 중앙통치기구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상의 과정을 거쳐 공산당 단독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단계로 돌입한 소련 군정에 의해 1947년 2월에 창립된 입법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는 북조선 인민위원회 설치, 헌법 초안 작성, 조선인민군 창설 등을 포함하여 정권 수립을 위한 제반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당시의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사회주의혁명을 주도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 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해방 직후 북한 지역의 정치 지형은 다양한 정파들이 각축하는 구도로 형성되었다. 국내파로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우익 민족 진영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좌익 공산주의 진영이 세력을 확대하는 가운데 해외파로는 허가이 등의 소련파와 김두봉, 무정 등의 친 중국 연안파 등이 정치의 중심 파벌들을 구성하였다. 여기에 김일성 등의 항일 빨치산 세력이 경쟁에 가담하였다. 그와 같은 38도선 이북지역에서의 정권수립을 위한 권력투쟁 과정에서 김일성은 소련의 비호아래 정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6·25 전쟁 이후 북한의 권력층 내부에서는 북한의 재건을 둘러싸고 향후 국가발전 전략과 관련하여 정파 간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1956년 8월 소위 종파사건으로 이어지게 되며, 김일성은 이 사건을 통해 중공업 우선의 사회주의 국가발전 전략을 관철시키는 한편 자신과 대립하던 정파들을 숙청하였다. 그리고 흐루쇼프(옛 표기는 흐루시쵸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시작된 중·소 간 이념분쟁의 와중에서 김일성은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내세우며 소련파 및 연안파 등을 외세 의존적인 정파로 지목하여 이들을 추가적으로 제거함으로써 권력 독점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북한이 행한 침략·도발의 대표 사례는 1950~1953년에 벌어진 6·25 남침 전쟁이다. 소련 군정 아래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적화통일 달성을 위해 무력통일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북한의 6·25 남침은 화전양면전략(和戰兩面戰略)과 공산주의 혁명 이론으로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었다. 그 결과 남북한 300만여 명의 인명 사상, 10만여 명의 전쟁 고아, 1,000만여 명의 이산가족, 막대한 재산 손실을 초래하였음은 물론 한반도 문제가 국제전쟁으로 비화되어 냉전체제의 서막을 만들고 남북분단을 공고화시키는 시발점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6·25전쟁을 앞두고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군사지원을 확약 받고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남북 지도자들 간 정치협상을 주장하거나 평화통일 선언서를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등 위장평화 공세를 병행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38도선을 넘어 기습 남침 전쟁을 전면으로 개시하였다. 전쟁 개시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까지 단기간에 밀고 내려갈 정도로 북한군은 초기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북한군이 초기 강세를 보인 것은 북한군의 무기가 월등히 많았다는 점 이외에도 북한군의 절반에 가까운 병력이 중국 대륙에서 일본군과 교전 경험이 풍부한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 출신인 반면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국군은 지원 장비도 매우 열악하고 훈련 기간도 극히 짧았기 때문이었다.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북한의 공격을 불법 남침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참전하게 되었다.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38도선을 돌파하여 1950년 10월 말에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투는 38도선 일대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후 소련은 유엔을 통하여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이 이에 응함으로써 1951년 7월 휴전 회담이 개최되어 2년여 기간의 협상과 전쟁을 지속한 양측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을 최종 체결하였다.
1950년 6월 당시 군병력을 보면, 북한군은 20만 여명이었으며, 한국군은 10만 여명에 불과했다. 전차는 북한군이 242대를 보유하고 있던 데 반해 한국군은 전혀 보유하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현대전의 핵심 지원 전력인 화포는 북한군이 2,492문이었으며, 한국군은 1,051문으로 약 2배에 이른다. 다만, 대전차 화기의 경우 북한군이 550문이었으나, 한국군은 2,040문으로 약 4배 많았으나 포탄이 부족했다. 함정은 북한군이 110척, 한국군이 36척으로 약 3배 많았으며, 항공기의 경우 북한군이 226대, 한국군이 22대를 보유해 약 10배 차이가 나 당시 남북한 군사력 수준차는 매우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으로 한반도는 잿더미가 되었고, 14만여 명의 한국군이 전사하고 45만여 명이 부상하였다. 북한의 피해는 180만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또 남한의 경우 생산 시설의 40% 이상이 파괴되어 경제가 거의 마비되었으며, 북한은 대부분의 주요 산업 기반과 자원 생산 시설이 초토화되었다. 1948년 신생국으로 새로 출발한 남북한은 불과 2년 만에 발발한 이 전쟁으로 주요 산업 시설과 인적·물적 자원을 상당수 잃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