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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미국의 주요 예술 기관 및 기념 공간들이 예술가와 위인을 기리고 대중과 소통하며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는 방식 doc_id PCY_201703200445208951_2

주제 (main_topic)
유럽과 미국의 주요 예술 기관 및 기념 공간들이 예술가와 위인을 기리고 대중과 소통하며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는 방식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독일 예술원은 예술원 회원들의 작품과 대중들 사이의 소통을 활성화하기 위해, 전시회, 강연회, 낭독회, 공연 등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예술원 회원뿐 아니라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행사도 자주 운영하고 있으며, 시사적인 문제와 관련된 예술가들의 입장을 전달하는 토론회 등도 자주 개최하고 있다. 입장료를 받고 진행되는 이러한 행사들은 예술을 대중에게 보다 가깝게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독일 예술원은 예술원 회원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문서고를 운영하고 있는데, 문서고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는 1696년 베를린 아카데미 설립 이후 예술원의 역사와 관련된 자료, 1900년 이후 베를린의 예술가들과 문화전반을 알려주는 자료, 동독의 문화 및 예술정책 관련자료, 독일 예술가 협회의 자료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공연예술, 미술, 건축, 음악, 영화 및 미디어 등 전 장르를 망라하고 있다. 팡테옹은 오스트리아 계승전쟁(1740~1748) 중인 1758년에 루이 15세의 서원에 따라 자크 제르맹 수플로가 생트 즈느비에브산 위에 착공하여 세워진 교회로서 현재도 성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문화예술인에 대한 존경과 예우를 다하기 위한 영묘로서의 역할 역시 담당하고 있다. 특히 팡테옹은 사회와 문화에 기여한 위인에게 영예를 부여하고 그들을 기림으로써 대중에게 국가와 국가의 사회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또한 팡테옹에서 정치가나 군인뿐만 아니라 문인, 철학가, 과학자, 예술가, 건축가 등 다양한 문화예술 영역을 넘나드는 인물들을 사회의 기틀을 세운 위인으로 공식적으로 추대하는 것은 프랑스 사회에서 문화예술의 지위를 그 어느 영역 못지않게 중요히 여긴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1791년 4월 4일 칙령을 기초로 팡테옹은 제헌의회의 결정에 따라 프랑스를 성장시키는데 기여한 위대한 인물들을 안치하는 지하 분묘다. 프랑스 제 1공화국 시기, 팡테옹은 1806년 2월 20일 칙령에 따라 ‘생 제네비에브 성당’으로 명명되고 위인의 매장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예배와 같은 종교적 의식을 하는 장소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1851년 12월 6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칙령에 따라 팡테옹은 카톨릭 종교 예배당이 되었고 돔 위에 십자가를 다시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다 제 3공화국 시기가 되어 생 제네비에브 성당의 종교 의식 기능을 규정했던 여러 조항을 폐지하고 1881년 7월 9일 법령의 영향으로 생 제네비에브 성당은 “팡테옹” 으로서의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이후 1885년 빅토르 위고의 죽음과 팡테옹에서의 장례를 계기로 팡테옹은 종교에서 완전히 분리되었고 그 이후 세속기관으로서 영예로운 묘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위인들의 새로운 안치 및 이장 하나하나에 관련된 법령과 세레모니 시행에 대한 법령이 발표되고 있다. 팡테옹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위인들의 영예로운 지하 분묘로서 장례의식과 고인의 안장이라는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현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기념의식은 대체로 역사적 인물의 위인으로서의 업적을 재인정하고 공표하는 의미에서 그 유해나 흔적을 팡테옹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팡테옹이 영묘역할을 하던 초기, 위인 사후의 역사적 재평가로 인해 안치되었다가 불명예스럽게 퇴출당한 일(혁명가 미라보와 장 폴 마라)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1795년 2월 8일 법령에 따라 입관은 인물의 사후 10년 간 프랑스 시민들의 자격 심사 토론 이후 대통령의 최종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를 통해 현재의 프랑스 사회를 만든 인물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지난 역사를 돌아보는 공식적인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프랑스 국민들에게 자국에 대한 자긍심과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장례의식은 또한 방문객에게 특별한 볼거리가 되기도 한다. 시인의 공간은 계획 하에 조성된 것은 아니며, 영국의 유명한 작가 제프리 초서(1343-1400)의 무덤이 시초가 되어 조성되었다. 제프리 초서가 켄터베리의 이야기를 쓴 문인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으며, 당시 그는 웨스트민스터의 건물보수 담당자로 일한 공을 인정받아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150년 후 영국문학이 가장 번성하던 시기인 16세기에 초서의 무덤이 재조명 받게 되고 니콜라스 브링함에 의해 현재위치인 남쪽 회랑으로 옮겨져 더 화려한 대리석 무덤으로 다시 조성되었다. 이후 1599년 페어리 여왕의 작가이자 초서의 추종자인 에드몬드 스펜서의 무덤 이 초서의 무덤 근처에 위치하게 되며 시인의 공간의 전통이 생기게 되었다. 두 무덤이 조성 된 이후 남쪽 회랑을 중심으로 수많은 시인과 극작가의 무덤과 기념비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시인의 공간이라는 명칭은 1733년 ‘웨스트민스터의 시인의 공간 아래서’라는 시가 널리 알려지면서부터 얻게 되었다. 또한 문인 뿐 만아니라 예술적 업적을 받아 시인의 공간에 안장되거나 기념비를 설립하며 추모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내의 시인의 공간은 예술인에 대한 영국인들의 존경심을 잘 반영한 사례로, 묘비와 기념비를 세워 길이 추모하고자 하는 염원을 잘 보여준다. 예배를 위한 사원으로서의 목적을 지금까지도 잘 유지하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인들을 기념하는 시인의 공간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고 방문하는 관광지로, 국내외적으로 영국 문화의 우수성을 드높이고 있다. 하지만 장례식 및 안장, 기념비 설립 등의 모든 절차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주임사제에게 결정권이 있음으로, 공식적인 심사와 절차가 구체화되어 있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안치 시 마다 각 사람, 상황 마다 다른 절차를 거치게 된다. 이러한 특징은 종교 단체에서 추모할 예술인을 선정하게 되기 때문에 종교적 한계가 있으며, 윤리적으로 논란이 있는 예술인은 선정되기 어렵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점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도 인지하고 있으며 시인의 공간으로의 안장 여부만으로는 작가의 훌륭함을 평가할 수 없다는 내용을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미국 예술 문학 아카데미가 다른 유사 기관과 가장 큰 차이점과 특징은 시상제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상의 종류는 총 27개(비정기적인 것까지 포함하면 30개 이상)이며, 이들은 기부나 후원에 의한 재원조달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27개의 시상제도 중 일반 개인, 아카데미 회원, 기타 재단의 기부나 후원에 의해 운영되는 시상제도는 13개에 해당한다. 이러한 시상제도에 후보 선출 및 수상자 선정에 아카데미 회원들이 관여하며, 이러한 시상제도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는 것이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큰 영예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아카데미의 특징으로는 전시사업이 매우 활성화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카데미 운영 시상제도의 수상자 및 신규 회원 작품의 주기적으로 전시하며 미술 작품에 국한되지 않고 작가의 원본 초고, 작곡가의 자필 악보 등 다양한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풍부한 자료와 작품을 토대로 전시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작품의 다양성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팡테옹이 종교적 기능을 수행하던 시기에서 세속기관으로서의 지위를 되찾게 된 역사적 과정을 기술하시오.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팡테옹의 종교적 기능 수행 시점부터 세속기관으로 전환된 역사적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팡테옹의 명칭 변화와 종교적 성격이 부여된 시점 및 법령을 추출한다.

    • 1806년 2월 20일 칙령에 따라 ‘생 제네비에브 성당’으로 명명되고
    • 1851년 12월 6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칙령에 따라 팡테옹은 카톨릭 종교 예배당이 되었고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종교적 기능이 폐지되고 다시 팡테옹의 지위를 찾게 된 결정적 계기를 선택한다.

    • 제 3공화국 시기가 되어 생 제네비에브 성당의 종교 의식 기능을 규정했던 여러 조항을 폐지하고
    • 1881년 7월 9일 법령의 영향으로 생 제네비에브 성당은 “팡테옹” 으로서의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 1885년 빅토르 위고의 죽음과 팡테옹에서의 장례를 계기로 팡테옹은 종교에서 완전히 분리되었고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1806년 성당 명명, 1851년 카톨릭 예배당 지정, 제3공화국 시기 종교 조항 폐지 및 1881년 지위 회복, 1885년 완전한 종교 분리라는 시간 순서로 사건을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팡테옹은 1806년 성당으로 명명되고 1851년 카톨릭 예배당이 되었으나, 제3공화국 시기 종교 조항 폐지와 1881년 법령을 통해 팡테옹의 지위를 되찾았으며, 1885년 빅토르 위고의 장례를 계기로 종교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세속기관이 되었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추출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답변을 구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팡테옹은 1806년 2월 20일 칙령에 따라 '생 제네비에브 성당'으로 명명되어 종교적 의식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1851년 12월 6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칙령으로 카톨릭 종교 예배당이 되었다. 이후 제3공화국 시기에 종교 의식 기능을 규정하던 조항들이 폐지되었고, 1881년 7월 9일 법령의 영향으로 '팡테옹'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았다. 최종적으로 1885년 빅토르 위고의 죽음과 장례를 계기로 종교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세속기관으로서 영예로운 묘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팡테옹이 1806년 성당 명명과 1851년 카톨릭 예배당 지정 과정을 거쳐 종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가, 제3공화국 시기의 조항 폐지와 1881년 법령, 그리고 1885년 빅토르 위고의 장례를 기점으로 세속기관으로 완전히 전환된 과정을 시간 순서에 따라 재구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