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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유산의 보존·복원 및 문화재 환수를 통한 역사적 가치 계승과 문화적 정체성 확립 doc_id PCY_201707270122225661_3

주제 (main_topic)
역사적 유산의 보존·복원 및 문화재 환수를 통한 역사적 가치 계승과 문화적 정체성 확립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앞으로 남한산성은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가 중심이 되어 최근의 남장대터 발굴과 같이 유물·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보전관리 대책을 꾸준히 실현해 가야 할 것이며 조속히 성곽연구소나 산성 박물관 등을 건립하여 국민 교육의 공간으로서 재탄생되어야 할 것이다. 또 옥천정터 등 비지정 문화유적의 조사·발굴 및 복원을 통해 문화재 지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 외에도 소나무 군락이나 야생동물 등 자연 생태계 보호 대책을 수립하고 광주유수 등의 인물 연구와 설화 자료를 스토리텔링화하여 문화콘텐츠 산업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기존의 남한산성 뮤지컬이나 창작 판소리, 소설 창작 등이 그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산성 내·외를 연결하는 도로교통과 장시 루트 분석, 생필품과 군량미 운송, 이천·여주행궁에서의 숙식제공과 접대, 마필 동원에 대한 교통사적 연구와 남한산성 고전적 등 고서들을 종합적으로 조사하고 번역하여 후세들의 교육적 자료로 활용함으로써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 돼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왈츠가 푸른 도나우 강을 따라 흐르는 나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말 그대로 음악의 도시이다. 슈베르트, 모차르트,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브람스 등 쟁쟁한 거장들이 활약한 고장이다. 그 뒤에는 650년간 이어져 온 합스부르크 왕조의 공이 컸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에서 가장 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이지만 원래는 알프스 자락의 작은 영주에 불과했다. 하지만 역사는 반전의 연속이다. 백작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왕으로 선출되면서 하룻밤에 왕가로서 이름을 얻게 됐다. 이후 1452년 신성로마제국 왕에 즉 위한 프리드리히 3세가 교황 니콜라우스 5세의 집행 하에 황제에 올랐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실은 460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하는 황실로 명실공히 자리 잡았고, 그 때문에 긴 세월 유럽의 지배자로 가장 화려한 궁정문화를 남겼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1273년 루돌프 1세를 시작으로 1918년 카를 1세에 이르기까지 6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럽 절반을 통치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찬란한 번영과 쇠락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쇤브룬 궁전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특별한 공간이었다. 그녀의 남편인 황제 프란츠 1세는 아내를 위해서 왕궁의 정원을 아름답게 꾸몄다. 여제는 한발 더 나아가 숙적인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을 능가하는 궁전으로 만들기 위해 규모를 키웠다. ‘합스부르크 옐로’로 알려진 독특한 색채의 외형은 바로크 양식을 따랐고 실내는 우아하고 유려한 곡선을 드러내는 로코코 양식이다. 황금 장식과 우아한 거울, 크리스털 샹들리에로 가득한 궁전 안에는 무려 1,441개의 방이 있다. 그중 거울의 방이 유명하다. 이 방에서 여섯 살의 음악천재 모차르트는 유럽을 호령했던 여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고 한다. 연주를 마친 뒤, 어린 모차르트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된 막내 공주 마리아 안토니아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고 전한다. 쇤브룬 궁전의 정원에는 ‘글로리에테’라는 웅장한 신고전주의풍 아치와 로마유적을 모방한 작품, 화려한 분수, 종려나무 온실과 함께 1750년에 유럽 최초로 조성된 동물원이 있다. 유럽 최고의 왕정문화를 꽃피웠던 합스부르크 왕조는 1918년 카를 1세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오스트리아는 공화국이 되었다. 마지막 황제는 쇤브룬에서 퇴임연설을 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09년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던 조소앙(趙素昻) 선생이 우연히 북관대첩비를 발견하여, 비를 가져온 일본을 꾸짖는 글을 기고하면서 북관대첩비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이후 1978년 한국연구원장 최서면(崔書勉) 선생이 그 기고문을 보고 야스쿠니 신사에서 다시 비를 찾아내면서 북관대첩비의 한국 반환 요구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 해주 정씨 문중에서는 한일친선협회를 통해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측에 처음으로 비 반환을 요청하였고, 1979년 한국 정부의 비 반환 공식 요청에 일본 정부는 원소재지인 북한과의 합의가 있으면 반환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 후 계속된 반환 요청에도 일본 정부는 북한과의 합의가 필요하며 당시 점유자였던 야스쿠니 신사에 강제 반환을 요구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혀 반환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민간차원의 지속적인 반환 노력으로 2005년 3월 남측의 한일불교복지협회(초산스님)와 북측의 조선불교도연맹(박태화) 간의 비 반환에 관한 남북합의서가 체결되었고, 같은 해 6월 한일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가 반환에 합의하였다. 2005년 10월 20일 일본으로 반출된 지 100년 만에 비가 돌아와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니 오랜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실인 셈이다. 필자를 포함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2005년 7월 비의 현황과 해체, 이송방법 등을 강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서니 어딘가 있을 북관대첩비를 처음 마주할 설렘에 긴장됐다. 그러나 습하고 구석진 그늘의 허름한 보호각 아래 천덕꾸러기처럼 놓여있던 북관대첩비를 보고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가 우거져 통풍도 제대로 안 되는 한 쪽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북관대첩비는 벌 받는 것처럼 무겁고 조악하기 짝이 없는 머릿돌을 지고 있었다. 한국으로 옮겨진 비는 먼저 암석 조사, 오염물 분석 등 과학적 조사를 통해 오염물 세척, 균열 부분 수술 등 보존처리가 이루어졌고, 실측작업을 통해 복원도 실시되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부터 이고 있던 핍박의 역사인 1,000㎏가량의 머릿돌을 벗어던지고, 북관대첩비 조성 당시와 유사한 시기에 조성된 해남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보물 제503호, 1688년)와 강진 백련사사적비(白蓮寺事蹟碑, 보물 제1396호, 1681년) 등의 머릿돌을 참고하여 복원안이 제시되었다. 여러 학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거쳐 화강암으로 정성껏 조각하여 북관대첩비에 새로운 머릿돌을 올렸다. 2005년 10월 20일, 국립중앙박물관 앞마당에서 환국고유제를 지내고 10월 28일부터 11월 6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1층 로비에 머릿돌이 복원되고 보존 처리가 된 북관대첩비가 조립되어 전시되었다. 그렇게 전시되어 있던 북관대첩비는 2006년 3월 1일, 북한 개성으로 이관되어 인도인수식을 가졌다. 2006년 3월 23일 북한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복원된 북관대첩비는 현재 북한 제193호 국보유적으로 등록되어 역사적 가치를 되찾았다고 한다. 남북교류의 문화재 사절단으로써 첫 테이프를 끊은 의미 깊은 북관대첩비. 비록 한국에 머물렀던 시간은 짧았지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우리 손으로 애써 보존 처리한 만큼 한국에 남아주기를 바랐던 마음도 있지만 다시 제자리를 찾아 소중함을 인정받고 있다고 하니 그걸로 뿌듯한 마음이다.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통해 외교, 사법, 행정권을 장악하고 군대를 해산시킨 일본 제국주의 는 그들의 침략에 맞서 부단히 싸워왔던 의병과 계몽운동가 등 항일세력을 강력히 통제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감옥 ‘경성감옥’을 1908년 10월 서울 서대문 현저동에 개소하였다. 근대혁명 이후 제국주의로 치닫는 속에서 각국은 강력한 정권 유지가 필요했으며, 이에 효율적으로 대중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파놉티콘(Panopticon: 인신의 구속을 전제로 한 감옥 건축양식) 구조의 근대감옥을 설치했다. 일제 역시 식민지 침략을 위해 항일세력을 감옥에 가두어 일반인과 철저히 분리, 통제함으로써 항일운동의 확산과 일반인의 사상적 동요를 막으려 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북관대첩비의 새로운 머릿돌을 제작할 때 참고한 구체적인 사례들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북관대첩비의 복원 과정 중 머릿돌 제작 시 참고한 대상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북관대첩비의 보존 처리 및 복원 과정에 관한 내용을 추출한다.

    • 한국으로 옮겨진 비는 먼저 암석 조사, 오염물 분석 등 과학적 조사를 통해 오염물 세척, 균열 부분 수술 등 보존처리가 이루어졌고, 실측작업을 통해 복원도 실시되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머릿돌 복원안 제시와 관련된 구체적인 비교 대상을 선택한다.

    • 북관대첩비 조성 당시와 유사한 시기에 조성된 해남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보물 제503호, 1688년)와 강진 백련사사적비(白蓮寺事蹟碑, 보물 제1396호, 1681년) 등의 머릿돌을 참고하여 복원안이 제시되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추출된 근거를 바탕으로 북관대첩비의 머릿돌 복원에 참고된 유물들을 연결한다.

    • 해남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보물 제503호, 1688년)
    • 강진 백련사사적비(白蓮寺事蹟碑, 보물 제1396호, 1681년)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참고된 두 가지 유물을 명확하게 정리하여 답변을 구성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해남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 1688년)와 강진 백련사사적비(보물 제1396호, 1681년)의 머릿돌을 참고하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북관대첩비 복원 과정에서 머릿돌 제작을 위해 유사한 시기에 조성된 해남 명량대첩비와 강진 백련사사적비를 참고했다는 정보를 추출하여 답변을 도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