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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감귤과 노비의 신분 상승, 한국의 김장 및 발효 문화, 그리고 전통의 가치를 알리는 다양한 사례들 doc_id PCY_201707270145198801_5

주제 (main_topic)
제주 감귤과 노비의 신분 상승, 한국의 김장 및 발효 문화, 그리고 전통의 가치를 알리는 다양한 사례들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감귤봉진>은 각 종류의 감귤과 한약재로 사용되는 귤껍질을 밀봉하여 올리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동헌 앞뜰에서 귤을 상자에 담기 위해 땀 흘리는 노동의 장면이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감귤이 담긴 상자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으나, 목사는 동헌인 연희각에 앉아 마당에서 기생들과 흥겹게 풍악을 즐기고 있다. 당시 진상된 감귤 수량이 그림 하단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금귤 678개, 감자 25,842개, 금귤 900개, 유감 2,644개, 동정귤 2,804개, 산귤 828개, 청귤 876개, 유자 1,460개, 당유자 4,010개, 치자 112근, 진피 48근, 청피 30근 등이다. 귤의 진상은 9월부터 시작하여 10일 간격으로 20회나 이루어졌다. 귤 진상을 위해 제주 곳곳에 과수원을 설치했다. 그러나 과수원에서 생산되는 감귤만으로는 수량을 충당하기 역부족이라 관아에서는 일반 민가에서 재배하는 귤나무를 일일이 조사해 감귤의 부족을 대비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귤이 오히려 고통을 주었다는 생각에 귤나무에 더운물을 끼얹어 말려 죽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제주 귤과 관련된 과거시험도 있었다. 진상된 귤이 조정에 도착하면 임금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귤을 나누어 주며 과거를 시행했다. 이른바 황감제(黃柑製)라는 과거시험이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노비의 모습은 사극 드라마 <추노>에서 본 것처럼 고된 노동에 지쳐 결국 도망을 시도하는 기구한 운명의 군상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노비는 소수에 불과했다. 주인집에 사는 솔거노비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 집에 거주하면서 주인집 농토를 경작했다. 이런 노비를 외거노비라고 불렀다. 지주 입장에서는 양인에게 땅을 빌려주기보다는 자신의 노비에게 빌려주는 편이 통제하기가 쉬웠다. 그래서 많은 노비는 소작농의 삶을 살았다. 소작농 외에도 노비의 직업은 다양했다. 상업에 종사하거나 관청에 근무하는 노비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일을 하건 간에 법적으로 주인한테 얽매여 의무를 이행하면 노비라고 지칭한 것. 그중에는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품고 출세를 꿈꾸는 노비도 존재했다. 사극에서도 그러한 사례를 볼 수 있는데, 야심을 품은 노비는 대부분 처지를 개선할 목적으로 도망이라는 방법을 선택한다. 주인집을 뛰쳐나가 노비 신분을 숨기고 새롭게 정착하는 것이 드라마 속 노비들의 현실 타개책이다. 노비 김의동이 그러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많은 노비가 그보다 안전한 방법을 택했다. 신분을 숨기고 사는 것은 어느 시대건 간에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시대가 허용하는 선에서 출세와 성공을 이루어냈다. 노비 박인수와 김의동, 반석평이 그러했다. 김의동 역시 『어우야담』에 등장한다. 조선 전기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한양 사람 신 씨의 솔거노비였던 그는 업산이란 동료와 함께 산에 가서 나무하는 일을 했다. 일이 너무 힘든 나머지 결국 그가 내린 선택은 운명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었다. 주인집에서 도주해 신분을 숨기고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김의동은 주인집에서 상당한 돈을 모았던 모양이다. 숨어 사는 데 그치지 않고 신분세탁을 통해 양인 신분을 얻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공직에까지 진출했다. 처음에는 나루터 직원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현감(縣監)을 거쳐 부사(府使)의 자리까지 올랐다. 부사는 지금으로 치면 1급 지방자치단체 시장이었다. 주인집에서 나와 부사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10년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평생 가도 못할 일을 도망친 지 10년 만에 해냈다. 이 과 정에서 불법과 부정도 없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신분을 뛰어넘기 위해 공부는 물론 대인관계에도 크게 신경 써, 직무상의 실적도 많이 거뒀을 것이다. 반석평은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과 더불어 『어우야담』에도 거론된다. 그는 가난한 노비의 아들이었다. 원래 성은 반씨가 아니었다. 반씨는 양아버지의 성이었다. 그의 주인이 학업 능력이 뛰어난 그를 출세시킬 목적으로, 아들 없는 부자인 반서린의 양자로 들여 보냈기 때문에 반씨 성을 갖게 된 것이다. 돈 많은 양부모의 지원을 받게 된 반석평은 더욱더 공부에 매진했다. 재능과 재력이 결합했으니 어깨에 날개를 단 듯했을 것이다. 그는 연산군 시절인 1504년 과거시험 소과에 급제해 생원이 된 데 이어, 중종 때인 1507년 대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진출했다. 그 뒤 함경도 병마절도사(지역 사령관), 평안도 관찰사,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노비로 태어난 사람이 장관급까지 올랐으니 대단한 성공신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젊은 디자이너는 휴대전화를 생산하는 대기업에 들어갔다. 애플의 디자인 책임자 조너선 아이브를 롤모델 삼아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기만을 꿈꾸던 그는 2006년 손수 디자인한 휴대전화로 ‘차세대 디자인 리더’에 선정되는 등 실력을 입증했다. 그렇게 키워간 내공으로 2009년 드링클립(Dringklip)이라는 작품을 출시하면서 다시금 자신만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바로 빈 컴퍼니 김빈 대표 얘기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의 전통 디자인을 접목한 생활용품 회사를 차렸다. 한지로 된 바구니, 단청문양을 응용한 컵받침 등이다. 자체 개발한 브랜드 ‘미츠(Meets)’라는 이름을 달고 맨해튼 ‘MoMA 디자인 스토어’와 파리의 ‘메르시(Merci)’, 뉴욕의 트리니티 백화점과 도쿄의 생활용품 디자인 백화점 ‘로프트’ 등에 진출했다. 국내에서는 청와대 기념품 매장과 유수의 박물관 아트 숍에 자리하고 있으며 기업의 요청을 받아 제품을 주문·생산하기도 한다. 디자이너로서, 청년 사업가로서 그의 전환은 꽤나 성공적으로 보인다. 김장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기록은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의 <가포육영>에 나오는 “무를 장을 곁들이면 여름철 3개월간 먹기 좋고(得醬尤宜三夏食) 소금에 절여 9달 겨울을 대비한다(漬鹽堪備九冬支)”에서 찾는다. 아주 오래전에는 순무, 가지, 부추 등을 소금으로만 절인 형태로 먹었고, 그 후 여러 종류의 채소를 응용하면서 김치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 외국으로부터 고추가 유입되면서 현재와 같은 김치 형태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김치의 특성 중 하나는 단순히 소금에 절이는 것이 아니라 향채소를 곁들여 양념하는 것이다. 이 김치 담금법은 고려시대에 이미 정착되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는 파, 마늘, 생강, 여뀌, 백두옹이 주축을 이루면서 갓, 미나리, 산초, 부추 등의 양념이 추가됐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전후에는 고추가 양념으로 추가되면서 파, 마늘, 생강, 부추, 고추가 주축을 이루고 갓, 미나리, 산초를 곁들였다. 김치의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지금까지 알려진 김치의 종류는 문헌에 기록된 것만 200여 종 이상이었다. 어육김치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단일 음식으로 200여 종 이상을 개발해내는 독창성을 가진 민족은 드물 것이다. 소금에 절인 채소인 ‘저’ 한 가지를 놓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새로운 재료를 넣어 시도해 만들다 보니 200여 가지가 된 것이다. 과학적인 지혜가 담겨 있는 김치의 종류는 그 뒤에도 계속 늘어났으며 지방마다 새로운 김치가 나왔다. 가령, 남쪽지역인 전라도에서는 고들빼기김치가 유명하고, 중부지역인 개성에서는 보쌈김치가 유명한 것이 그런 예에 속한다. 제주도의 동지김치, 충청남도 홍성의 호박김치, 경기도 이천의 게걸무김치, 강화도의 순무김치 등이 한정된 산물로 인해 지역을 대표하는 김치로 알려진 것이다. 이제 김장은 생존의 문제를 넘어 우리 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함께 나누는 현대인의 공동체 문화가 되었다. 가족과 이웃 간의 관계가 소홀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과 모여 정을 나누는 김장은 치유의 행위가 되기도 한다. 이제 곧 겨울이다. 올겨울에는 배추 몇 포기라도 김장을 해서 나눠 먹어보자. 김장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뮤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우리 민족의 독특한 김장문화가 한국을 넘어 세계인들이 보존해야하는 인류의 문화자산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김장문화는 이제 전 세계인들이 함께 지켜나가야 할 유산인 것이다. 한국 밥상의 특징은 채식위주의 식단과 발효음식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음식재료의 대부분을 자연에서 얻는다. 그리고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정(情)’을 먹는다고 할 정도로 정성을 기울여 음식을 만든다. 이러한 정성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발효음식이고 한식의 근간을 이룬다. 한국의 발효음식으로는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장류, 젓갈류 그리고 김치가 있다. 발효음식문화는 세계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한국 발효음식의 특징은 요구르트나 치즈같은 서양발효음식에 비해 채소발효가 발달한 데에 있다. 데이비드 메이슨 교수의 한국에 대한 연구는 백두대간 프로젝트를 통해 더욱 구체화 됐다. 2005년 2명의 동료와 함께 백두대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자 했지만 지원 자금을 구할 수 없어 난관에 봉착했다. 하지만 자비를 들여가며 백두대간 안내 책자를 영문으로 발간했고, 품절이란 기록을 세우며 높은 판매율을 기록했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유용한 하이킹 정보를 서적으로 전하는 일에 멈추지 않고 웹사이트를 만들어 백두대간을 영어로 설명하는 공간도 운영 중이다. 또한, 연간 수백 명이 찾는 한국의 산을 더 다양한 방식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백두대간 프로젝트를 앱으로도 개발할 계획이다. “전통적이란 것은 굉장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지루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관광자원과 관련된 수업을 할 때 꼭 한국의 국립공원을 직접 방문하도록 과제를 냅니다. 처음에는 볼멘소리도 나오지만, 갔다 오고 나서는 모두 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한국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다고요.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만이 전통을 배우는 가장 효율적이고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노비 김의동이 주인집에서 도망친 후 신분을 세탁하여 최종적으로 도달한 관직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김의동이라는 인물이 도망 이후 어떤 관직에 올랐는지 확인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김의동의 행적과 관직 변화에 관한 내용을 추출한다.

    • 노비 김의동이 그러했다.
    • 주인집에서 도주해 신분을 숨기고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 그는 공직에까지 진출했다.
    • 처음에는 나루터 직원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현감(縣監)을 거쳐 부사(府使)의 자리까지 올랐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김의동이 거쳐 간 관직 중 최종 단계에 해당하는 정보를 선택한다.

    • 나중에는 현감(縣監)을 거쳐 부사(府使)의 자리까지 올랐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나루터 직원, 현감을 거쳐 마지막으로 도달한 직위가 부사임을 파악한다.

    • 처음에는 나루터 직원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현감(縣監)을 거쳐 부사(府使)의 자리까지 올랐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김의동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관직은 부사이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한 답으로 부사를 제시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부사(府使)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노비 김의동은 주인집에서 도망친 후 신분을 세탁하여 부사(府使)의 관직까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