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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통해 나타난 오이디푸스의 도덕적 변화와 운명 극복, 그리고 이를 통한 정의로운 삶과 신의 인정에 대한 고찰 doc_id PCY_201709190929044551_3

주제 (main_topic)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통해 나타난 오이디푸스의 도덕적 변화와 운명 극복, 그리고 이를 통한 정의로운 삶과 신의 인정에 대한 고찰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자식에게까지 모욕당하고 영면 직전까지 분노와 고통에 시달려야 했던 오이디푸스의 삶은 여러모로 소포클레스 본인의 삶을 연상시킨다. 소포클레스는 말년에 미쳤다는 이유로 아들들에 의해 재산권 행사를 제한 당하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에서 그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배심원들에게 낭독하여 정상임을 입증하고 방면되었다. 또한 국가 1권에서 드러나듯 소포클레스는 쾌락과 욕망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이 얻게 되는 가치에 대해서도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Politeia, 329c-d). 그런 면에서 소포클레스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누리게 되는 가장 행운은 장수(長壽)가 아닌 신의 선택을 받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는 오만을 경계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생활방식을 준수해야 함을 오이디푸스를 통해 투영하고 있다. 오이디푸스의 자해는 저승에서조차 부모를 볼 수 없을 만큼의 수치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를 반영한 것이다. 동시에 이는 한때 자신의 지적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과거 오이디푸스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과오에 대한 원망과 후회, 그리고 수치심에 대한 분노는 오이디푸스를 운명의 노예가 아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의미를 갖게 해준다. 다시 말해 오이디푸스의 분노는 자신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도덕적 주체(moral agent)로 재탄생하는 동인이 되었다. 권좌에서 물러나 추방을 청원했던 것 역시 그의 실존적 선택에 따른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오이디푸스 왕은 운명에 묶여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인간이다.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운명을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에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던 오이디푸스의 변화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통해 명확하게 확인된다. “지금의 오이디푸스는 예전의 오이디푸스가 아니다”로 끝나는 탄원은 이를 요약하고 있다. 더 나아가 콜로노스 오이디푸스에서는 오이디푸스의 오만(hybris)도 발견되지 않는다. 안티고네에서 명백한 크레온의 오만, 아이스퀼로스의 페르사이에서 두드러지는 크세르크세스의 도전은 콜로노스에서 탄원하는 오이디푸스의 모습과는 구별된다. 오히려 그는 크레온과 폴리네이케스가 자행하는 오만의 피해자이다.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필연으로 받아들이며 순응하지만, 크레온과 폴리네이케스의 행동에는 분노한다. 이들에 대한 분노는 더 이상 자신이 도덕적으로 열등하지 않다는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표출이다. 오이디푸스 자신은 당한 것을 갚았을 뿐이지만(Oedipus Colonus, 270-273),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오만한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이들의 폭력은 신의 뜻과는 무관하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필연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자연스럽게 오이디 푸스의 도덕적 판단과 행위는 과거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소극적 차원을 초월하였으며, 그는 이제 관습의 준수 차원을 벗어나 정의를 추구하고 부정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적극적 차원의 도덕률을 구현하기 시작한다. 오이디푸스의 변화는 자비로운 여신들의 태도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자비로운 여신들은 사실 복수의 여신들이며 아이스퀼로스의 에우메니데스에서도 확인되듯 존속 살해자에 대한 어떠한 사면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한 신들이었다. 자비로운 여신들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행여 나쁜 이름으로 불렀다가 화를 당하지 않도록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이유였다. 그러나 여신들은 오이디푸스에게는 별칭에 걸맞은 자비로움을 보여준다. 그가 아직 테세우스를 통해 정화되지 않았던 여전히 불결한 자였다는 점에서 여신들의 자비는 오이디푸스의 도덕적 변화가 신들의 인정으로 이어지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유랑하던 오이디푸스가 자비로운 여신들의 작은 숲에서 탄원하고 그 탄원이 수용되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작은 숲’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네모스(nemos)는 어원상 나무와는 관계가 없으며 숲 속에 있는 성스러운 경내나 개간지, 신성한 나무 주위의 개간지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 장소를 신성하게 만드는 힘은 불경한 자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영역으로 만드는 힘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에서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가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마지막에 이르기 전까지는 누구도 행복하다 말하지 마라(Oedipus Tyrannos, 1529-1530)”고 경고하며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면, 콜로노스 오이디푸스의 마지막은 오이디푸스가 신들의 인정과 보상을 받고 영웅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모든 진실을 알고 가장 비참하게 내쳐졌지만, 궁극적으로는 변화되었으며 이러한 모습이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가장 극대화되고 있다. 스핑크스를 처단하고 테바이의 왕이 되었던 오이디푸스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지만, 가장 비천한 유랑자였던 오이디푸스는 비로소 영웅이 되었다. ‘까닭 모를 숱한 고통이 그에게 닥쳤으니 이제 정의로운 신이 그를 다시 한 번 드높일 것’이라고 한 코러스와 “일찍이 아버지를 파멸시켰던 신들이 이제는 아버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있다”는 이스메네의 발언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이는 도덕적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인간에 대한 보상이자, 정의로운 생활방식을 견지해온 사람에게 정의 그 자체뿐만 아니라 정의로움이 주는 이익과 혜택의 차원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이라는 플라톤의 도덕교육 입장과도 궤를 같이 한다. 아테네와 테바이의 갈등은 테바이에서 쫓겨난 오이디푸스와 그를 찾으러 테바이에서 돌아온 크레온과의 갈등에서 드러난다. 테바이 도시 전체를 대표하는 크레온은 오이디푸스가 아닌 합창대에 말을 걸고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참상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역겨움과 혐오감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크레온의 의도는 노인을 회유하여 국경 근처에서 사망하도록 한 후 그의 무덤으로 테바이의 방위를 유리하게 하려는 속내일 뿐이다. 자신들이 추방한 왕을 재차 모욕하는 태도는 테바이 사회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크레온은 군대를 동원하여 아테네 지역인 콜로노스에서 무력을 행사한다. 소식을 전해준 이스메네를 체포하고 오이디푸스에게 모든 풍경과 사태를 일일이 설명해 주었던 새로운 눈, 안티고네까지 강제로 데려가며 오이디푸스를 다시 실명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크레온의 도발은 결국 아테네의 지도자인 테세우스에 의해 저지당했으며, 크레온은 오이디푸스를 이용해 테바이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하는 목표 달성에 실패한다. 오염된 노인을 무시하고 박대했던 두 아들은 그의 선택을 받는 자가 테바이의 왕위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부친의 지지를 얻어내려 애쓴다. 그런 면에서 폴리네이케스는 철저하게 오이디푸스를 도구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비로운 여신들의 숲속에서 “제우스께서도 자비의 여신들을 왕좌 옆에 세워두시고 매사에 여신들과 함께하시거늘, 아버지, 여신께서 아버지 옆에도 다가오게 하세요. 허물들은 고칠 수 있고, 더 나빠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라며 탄원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삶을 통해 자제력을 익히며 허물을 고쳤고(Oedipus Colonus, 5-9), 자비로운 여신들은 아테네의 시민으로 인정하며 오이디푸스를 용서했던 것과는 달리 폴리네이케스는 자신의 오만과 탐욕도 자비로운 여신들의 용서를 받고 그들에게 탄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태도는 오이디푸스가 테세우스의 인정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을 오염물로 간주하며 조심하는 것과 상반된다. 테세우스가 아무 질문도 조건도 없이 오이디푸스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것과는 달리 폴리네이케스는 아버지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오이디푸스를 도구화하고 있다. 그리스적인 사유의 맥락에서 볼 때 아들을 향한 그의 분노는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일종의 ‘불문율’ 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며, 특히 솔론은 부모에게 저지를 수 있는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법률 들을 명시하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폴리네이케스의 불효는 곧 신에 대한 불경이기도 하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도라는 차원의 해석보다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일종의 정의 윤리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자식에게 분노와 저주를 드러하는 오이디푸스는 표면적으로는 폴리네이케스를 모욕(hybris)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당초 테세우스와 안티고네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식과 대면한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탄원을 거부하는 것 역시 신에 대한 불경이기 때문이다. 과거 눈뜬 오이디푸스가 지적 오만의 태도를 보이며 테이레시아스의 충고를 거부했던 것과는 달리 눈먼 오이디푸스는 테세우스의 조언을 통해 패륜적인 자식과의 대면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임을 인식한다. 오이디푸스의 새로운 눈인 안티고네 역시 테세우스에게 동의하며 자식에 대한 교육의 의무를 상기시킨다. 이러한 면에서 오이디푸스와 폴리네이케스의 갈등은 단순한 효도의 차원보다는 가족 내에서 부모 자식 간의 도덕률 역시 정의 원칙에 따라 수립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탄원자는 자신이 겪어야 하는 삶의 상황이 부당하며 자신의 무고함과 정의로움을 호소하는 존재이다. 이방인인 오이디푸스는 도시의 관습(nomos)을 어긴 자로서 관습적 정의 원칙에 따라 내쳐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오이디푸스의 탄원에 공감하고 그를 포용한다. 그 역시 오랫동안 유랑했고 자신의 과오로 애인과 부친을 잃었던 만큼 오이디푸스의 과오를 이해하고 그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관습과 법률을 수호하는 지도자인 테세우스는 정의(dikē)와 관습(nomos) 중 정의를 선택하고 성역을 더럽힌 오이디푸스를 징계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가 콜로노스의 숲에서 보인 탄원과 안식의 전 과정은 그의 행위가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과오(hamartia)를 씻기 위한 고행의 과정이 아테네의 노모스라는 울타리에 수용되었으며, 더 이상 오이디푸스는 네메시스의 대상이 아님을 시사한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불안한 아테네 정세에서 운명 직전의 현인이 던지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오랜 전쟁의 참상 속에서 경제적 피폐와 도덕적 타락으로 점차 쇠망해가던 아테네 사회에서 소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의 윤리적 변화와 사회적 단합을 추구하고 있다. 아테네의 오랜 숙적 관계였던 테바이 사회를 대비시키고 시민들에게 가장 익숙하며 풍부한 정화 기능을 수행했던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를 연결 지어 두 작품의 의의를 환기시키고 아테네 시민 전체에 위기의 상황에서 고난을 감내하고 신들의 선택과 인정을 받는 존재로 오이디푸스를 재조명한다. 당대 아테네 시민들에게 가장 요구되었던 도덕교육과 시민교육의 차원에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재해석할 수 있다. 도덕교육의 차원에서 오이디푸스의 과오(hamartia)는 과거 오이디푸스에게 가장 큰 형벌을 안겼던 사건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지혜로 모든 문제로 해결하려 했으나 결국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며 정 의가 실현되고 오이디푸스의 과오는 가장 지독한 형벌로 심판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분노로 내팽개쳐진 오이디푸스에게 그의 과오는 더 이상 오이디푸스를 속박하는 굴레가 아닌 오이디푸스에게 자신을 변화 시키고 새롭게 살아가기 위한 정화(katharsis)가 되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가 크레온과 폴리네이케스의 행동에 분노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오이디푸스가 크레온과 폴리네이케스에게 분노를 느끼는 구체적인 이유와 그 성격을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오이디푸스의 분노와 관련된 대상인 크레온과 폴리네이케스의 행동 및 오이디푸스의 태도를 추출한다.

    • 오히려 그는 크레온과 폴리네이케스가 자행하는 오만의 피해자이다.
    •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필연으로 받아들이며 순응하지만, 크레온과 폴리네이케스의 행동에는 분노한다.
    •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오만한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했기 때문이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분노의 원인이 되는 '오만한 행위'와 그 목적이 '자신들의 이익'임을 명시한 문구를 선택한다.

    • 이들에 대한 분노는 더 이상 자신이 도덕적으로 열등하지 않다는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표출이다.
    •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오만한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했기 때문이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며 수용하지만, 타인(크레온, 폴리네이케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저지르는 오만한 행위는 신의 뜻과 무관한 부정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분노한다는 논리를 구성한다.

    • 오이디푸스는 이들의 폭력은 신의 뜻과는 무관하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필연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분노의 이유는 그들의 행위가 개인적 이익을 위한 오만함이며, 이는 오이디푸스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적 필연이 아닌 부정한 행위이기 때문임을 정리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은 필연으로 받아들이며 순응하지만, 크레온과 폴리네이케스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행하는 오만한 행위와 폭력에는 분노한다. 그는 이들의 행동이 신의 뜻과는 무관하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필연이 아니라고 판단하며, 이러한 분노를 통해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표출한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가 크레온과 폴리네이케스의 행동에 분노하는 이유는 그들의 오만한 행위가 신의 뜻과 무관한 개인적 이익을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표출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