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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전선 곳곳에서 펼쳐진 국군과 유엔군의 치열한 전투와 장병들의 희생 doc_id PCY_201709280121516101_1

주제 (main_topic)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전선 곳곳에서 펼쳐진 국군과 유엔군의 치열한 전투와 장병들의 희생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그 과정에서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순직했고, 후임에 미 육군참모차장이던 리지웨이 중장이 후임 사령관에 임명됐다. 리지웨이 장군은 미군 공수복장에 앞가슴에는 두 개의 수류탄을 매단 챈 한국전선에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그러나 2차대전시 유럽전선에서 독일군을 전율케 했던 공수사단장과 공수군단장을 역임했던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도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중공군의 기세를 멈출 수는 없었다. 전선은 또 다시 남쪽으로 밀렸다. 리지웨이 장군은 수도 서울까지 중공군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안됐다. 그러나 이후 아군의 총력을 다한 노력으로 후퇴를 멈춰 세울 수 있었다. 그곳이 바로 남한지역에서 동서길이가 가장 짧다는 평택-안성-원주-삼척을 연결하는 37선이었다. 그때가 1951년 1월 초순이었다. 이것이 바로 중공군의 4월 공세다. 중공군 4월 공세는 전열을 다시 가다듬은 중공군과 반격 작전을 통해 상승세를 타고 있는 국군, 유엔군과의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였었다. 중공군 개입 이래 최대의 결전이 전개될 판이었다. 중공군은 4월 공세에 총력을 다했다. 중국본토에서 새로 보충된 제19병단과 제3병단 그리고 장진호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함흥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제9병단을 새로 투입했다. 그리고 북한군 제3군단과 제5군단을 중동부전선에 투입했다. 중공군은 30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하면서 취약한 국군사단을 노렸다. 최초 미군사단에 비해 화력이 약한 강원 화천의 사창리에 배치된 국군6사단을 기습해 돌파구 마련에 성공했다. 이어 영국군 29여단이 배치된 파주의 적성지역을 공격했다. 중공군의 노림수는 뻔했다. 중부전선의 국군6사단을 노린 것은 돌파구를 남쪽으로 깊숙이 형성해 전선을 분리한 다음 각개 격파하겠다는 것이었고, 영국군 29여단을 기습한 것은 수도 서울로 통하는 도로를 우회 차단해 그곳의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 섬멸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국군6사단지역은 다행히 미 해병사단과 영연방 28여단을 긴급 투입해 경기 가평에서 중공군을 막아냄으로써 그들의 전선 확대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한편 서부전선의 영국군29여단이 방어하고 있는 경기도 파주군 파평산 일대의 적성지역은 사정이 좋지 못했다. 중공군은 이 지역에 3개 사단을 투입해 첫날부터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서울로 진출하기 위한 통로를 개척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적들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던 영국군 29여단의 글로스터대대는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된 채 고립됐다. 그때가 1951년 4월 23일경이었다. 영국군 참전자는 당시의 중공군 공격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증언했다. “중공군 10명을 쓰러뜨리면 20명이 나타났고, 20명을 쓰러뜨리면 30명이 나타났다.” 대살육전이 전개됐다. 그러다보니 글로스터 대대는 식량도 떨어지고, 탄약도 떨어져갔다. 공중보급도 피아가 혼재해 있다 보니 여의치 않았다. 전선은 점차 대대지휘소가 있는 235고지 일대로 몰렸다. 1694년에 창설된 글로스터 대대는 파평산 자락의 설마리의 235고지에서 워터루전투와 갈리폴리 전투 이래 44번째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창설 이래 중공군과 최대의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적성 전투는 중공군의 제1차 춘계 공세 때 영연방 제29여단과 같은 여단에 배속된 벨기에 대대가 임진강 연안(적성-도감포)에서 중공군 제65군의 공격을 지연시킨 방어 전투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임진강을 도하해 감악산을 점령한 후 다시 동두천 방면으로 진출해 연천과 철원 지역에서 철수 중인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이때 영연방 제29여단은 감악산 서쪽의 설마리 계곡과 235고지에서 중공 제65군의 진출을 저지했으며, 그동안 미 제1군단의 주력은 안전하게 철수해 서울 북방에 견고한 방어선을 형성했다. 당시 영연방 제29여단의 글로스터 대대의 지휘관이었던 카니 중령에게는 다른 부대가 모두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방어하고 마지막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그는 살아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행동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라는 글로스터 대대의 신조 아래 방어선인 임진강 여울과 남으로 가는 도로를 끝까지 지켜냈다. 적성 전투를 치르면서 글로스터 대대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됐으나 미 제1군단의 작전에 크게 기여해 중공군의 제1차 춘계 공세를 서울 북방에서 저지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리지웨이 장군은 37선에서 재편성과 휴식, 그리고 실전 같은 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중공군에게 대반격을 시작했다. 1951년 1월 25일부터 시작된 리지웨이의 대반격작전에 중공군은 맥을 추지 못했다. 중공군은 원주에서도 그랬고, 지평리에서도 맥없이 무너졌다. 그들의 장기였던 인해전술도 통하지 않았고, ‘마성(魔性)의 소리’로 국군과 유엔군을 괴롭혔던 야음(夜陰)의 피리소리, 나팔소리, 꽹과리소리도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아군은 수도 서울까지 진격해 올라갔다. 그리고 전선은 38선에서 형성됐다. 중공군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들의 2월공세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얼마나 급했던지 평소 타지 않던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펑더화이는 곧장 마오쩌둥(毛澤東)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최후를 예상한 카니 중령은 중대장을 소집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각 중대별로 탈출할 것을 지시했다. 대신 대대장과 군목 그리고 군의관은 부상당한 60여명과 함께 남기로 했다. 적진을 뚫고 탈출하려는 시도는 쉽지 않았다. 하비 대위가 이끈 D중대만이 겨우 대오를 유지한 채 탈출에 성공했다. 그것도 38명뿐이었다. 글로스터 대대의 전체 탈출자는 84명에 불과했다. 대대 889명 중 805명이 전사, 포로, 부상자가 됐다. 그렇지만 글로스터 대대는 중공군 4월 공세를 맞아 최전선에서 고립된 채 ‘미8군의 칼끝’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글로스터 대대의 용전(勇戰)과 희생으로 서울을 향한 중공군 4월 공세는 끝내 좌절됐다.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사수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순호 대위은 제7사단 제3연대 제3대대 제9중대장으로 강원도 양구의 1090고지(크리스마스 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크리스마스 고지는 육군 제7사단이 담당한 전선 중 최북단에 위치한 곳으로 적의 주요 저항선인 어은산에 이르는 요지다. 1952년 10월 6일 어은산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중공군 제204사단이 기습 공격하면서 크리스마스고지 전투가 발발했다. 적은 300여 발의 공격준비사격을 한 후 파상공세를 감행해왔고, 중대는 포병 지원 아래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적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고지 남쪽으로 철수했다. 거듭되는 포위와 압박으로 중대의 후미마저 차단당하자 위기를 직감한 이순호 대위는 일부 병력과 함께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이순호 대위는 대원들과 함께 한 치 물러섬 없이 수류탄을 던지고 총검을 휘두르며 물러서지 않았다. 이순호 대위는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어 가면서도 부하들의 후송제안을 완강히 거부하고 3박스의 수류탄을 투척하는 등 혈전을 벌이다 흉부에 재차 총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부상당한 상태에서도 사력을 다해 싸우고 죽음까지 불사한 이순호 대위의 희생정신을 앞세워 역습을 감행한 제11중대는 적을 포위·섬멸하고 고지를 사수할 수 있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중공군 4월 공세 당시 영국군 29여단이 배치된 파주 적성지역을 공격한 중공군의 구체적인 의도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중공군 4월 공세 중 영국군 29여단이 위치한 파주 적성지역을 공격한 목적과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중공군이 영국군 29여단을 기습한 행위와 관련된 문장을 추출한다.

    • 영국군 29여단을 기습한 것은 수도 서울로 통하는 도로를 우회 차단해 그곳의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 섬멸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영국군 29여단 공격의 의도가 명시된 핵심 문구를 선택한다.

    • 영국군 29여단을 기습한 것은 수도 서울로 통하는 도로를 우회 차단해 그곳의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 섬멸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중공군이 파주 적성지역의 영국군 29여단을 공격함으로써 얻고자 했던 전략적 이득(서울행 도로 차단 및 퇴로 차단/섬멸)을 연결한다.

    • 영국군 29여단을 기습한 것은 수도 서울로 통하는 도로를 우회 차단해 그곳의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 섬멸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중공군의 의도는 수도 서울로 통하는 도로를 우회하여 차단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이들을 섬멸하는 것이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추출된 정보를 바탕으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완성한다.

    • 영국군 29여단을 기습한 것은 수도 서울로 통하는 도로를 우회 차단해 그곳의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 섬멸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수도 서울로 통하는 도로를 우회하여 차단함으로써, 그곳에 있는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섬멸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중공군이 영국군 29여단이 배치된 파주 적성지역을 공격한 것은 수도 서울로 통하는 도로를 우회 차단해 그곳의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섬멸하려는 의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