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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릉과 유물, 그리고 조선 시대 왕실 이금화의 역사적 배경과 예술적 가치 doc_id PCY_201801120307118091_1

주제 (main_topic)
고려 왕릉과 유물, 그리고 조선 시대 왕실 이금화의 역사적 배경과 예술적 가치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개성 출신 호족의 아들이었던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있다가 4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고 나라의 이름을 고려로 바꾸었다. 그가 935년(태조 18) 신라의 항복을 받고, 이듬 해 후백제를 무너뜨리면서 고려는 반란 왕조에서 정통 왕조가 되었다. 통일 왕조를 건설한 왕건은 67세에 세상을 떠나고 도읍 개경의 서쪽 만수산 남쪽 기슭에 묻혔다. 『고려사』에는 943년(태조 26) 6월에 장사를 지내었고 능 이름을 현릉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극락세계가 서쪽에 있다는 불교의 영향일까? 왕건의 능은 생전에 머물렀던 궁궐의 정 서쪽에 자리했다. 현재 현릉은 1994년 능 안팎을 새롭게 단장한 이후의 모습이다. 1992년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발굴에서 현릉은 석실분(돌칸흙무덤)인 것으로 밝혀졌다. 석실은 단실이며 구릉 경사면의 반지하에 조성되었다. 규모는 남북 3.43m, 동서 3.1m, 높이 2.16m다. 석실의 동·서·북벽은 장방형의 화강암 판돌을 3~4개씩 세워 만들었고, 남벽은 동·서벽 양쪽에 잇대어 판돌을 1매씩 놓았다. 입구인 가운데에 나무문을 설치한 뒤 그 바깥을 화강암 판돌로 막았다. 천정은 고임돌을 놓고 그 위를 판돌로 덮은 1단 평행고임천정이다. 1992년 10월 왕릉을 고치는 과정에 현릉 봉분 북쪽 5m 지점의 구덩이 속 화강암 판석 아래에서 청동상과 옥띠장식 등이 발견되었다. 약 140cm 높이의 이 좌상은 태조 왕건을 형상화한 것으로 왕건상이라 불린다. 왕건상은 황제의 관인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으며 나신(裸身) 위에 비단옷을 입고 금동과 옥 장식의 허리띠를 패용했다. 이는 고려가 황제국을 표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황제의 보관을 쓴 태조의 상(像)이 현릉 옆 구덩이에 묻혀 있던 이유는 고려의 흥망과 관계가 있다. 왕건상은 광종 연간(949~975 재위)에 제작되어 태조의 진전사원인 개경 봉은사에 오랫동안 숭배의 대상으로 모셔져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고려가 망한 이후 더 이상 개경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지방으로 옮겨 졌다가 세종 때 이곳에 묻혔던 것이다. 옛 왕조의 자취를 폐기해야 하지만 태조의 상징물을 그냥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문신 성임(成任)의 시에는 이미 망해버린 왕조의 태조 현릉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여몽전쟁 당시 강화로 옮겨진 태조의 재궁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지만 지금까지 강화에는 고려의 왕릉이 남아있다. 이 곳으로 천도했던 고종의 홍릉을 비롯해 희종의 석릉, 원덕태후 곤릉, 순경태후 가릉 등 4기의 왕릉과 묻힌 이를 알 수 없지만 왕릉급이 분명한 석실분이 몇 기 있다. 우왕과 창왕, 공양왕 등 묻힌 곳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개경에 있는 고려 왕릉을 남한에서 볼 수 있는 곳은 강화뿐이다. 이는 강화도가 40여 년간 공식적으로 수도 개경을 대체한 또 하나의 고려 도읍지였기 때문이다. 고려 사람들은 강화를 강도(江都)라 했고 황도(皇都)로 인식했다. 홍릉을 제외하고 모두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강도 왕릉의 구조와 규모가 개경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미 대부분 도굴을 당했지만 질 좋은 자기와 구슬, 금동제 봉황문 장식 등 수준 높은 유물이 출토되어 강도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금속으로 표현된 금동탑의 화려한 장식과 꾸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로써 금동탑은 옥외에 설치해 예배를 드리는 대상으로서의 탑이 아닌 건물 안에 모셔둔, 하나의 공예품이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와 같이 청동으로 소형의 불탑을 제작해 절에 봉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높이가 20~30㎝ 정도인 것에 반해 국보 제213호 금동탑은 155㎝로 대형 금속공예품이다. 현재 남아 있는 탑신은 5층이지만 본래 7층 정도였으며 머리장식의 일부가 사라진 것으로 보아 본래 높이는 지금보다 더 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보 제213호 금동탑은 기단부 위에 탑신 부를 구성하고 상부에 상륜부를 장식해 일반적인 석탑의 형식을 갖췄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연꽃잎이 둘러져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석탑양식의 특징이다. 반면 옥개부의 사방 모서리가 처마와 같이 살짝 올라간 것, 1층 탑신에 출입문과 기둥을 두고 그 위에 지붕을 얹은 것은 목조 건축의 형식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그 자체로서의 화려한 표현력도 감탄할 정도지만 금동탑 안에 담긴 다양한 건축양식은 이 탑의 연구 가치를 더욱 높인다. 왕실발원 순금화의 제작은 17세기에 접어들어 선조(재위 1567~1608)가 사림을 등용하여 유교적 정치 질서를 구현하면서 쇠퇴했다. 선조는 종실과 관료들이 자유로운 문예활동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함과 동시에 감상을 위한 이금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특히 왕실의 고급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던 종실화가들은 이금산수화나 이금화조영모화 등 자신들이 능한 분야를 제작하였다. 이들이 그린 이금화는 거의 현존하지 않아 정확한 예술세계를 파악할 수 없지만, 다행히 종실화가인 이정이 그린 묵죽과 매난 그림이 남아 있다. 이정이 1594년에 그린 <삼청첩(三淸貼)>은 최립의 서문과 한호의 서예가 더해져 왕실과 문인사대부들에게 감상되면서 풍류와 아취를 담은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왕실과 사대부들이 이정의 그림에 열광한 이유는 그의 이금죽이 지닌 예술적인 역량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잦은 전란으로 무너진 속(俗)과 아(雅)라는 계급간의 차이를 구분하고자 한 의도도 작용했다. <삼청첩>은 이금으로 그렸지만 불화가 지닌 종교적인 상징과는 무관한 순수한 감상용 회화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이금산수화가 인조(재위 1623~1649) 때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는데 보위에 오른 직후부터 재위 기간 내내 수 많은 내우외환에 시달려야 했다. 즉위한 다음 해에는 이괄의 난(1624)이 일어났고, 곧이어 정묘호란 (1627)과 병자호란(1636을 겪었다. 정묘호란 때는 백성들을 적에게 내주고 강화도로 피신을 가서 공분을 샀고, 병자호란 때 역시 강화도로 도망을 가려다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했다. 결국 인조는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삼전도에 내려와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왕권은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다. 이징이 그린 <이금산수화>는 이때 등장한다. 이징은 이경윤의 서자로 왕실과 사대부들을 위한 이금산수화를 제작했다. 이징은 주문층의 취향에 따라 화풍을 달리하여 보수적이고 전통성이 강한 이금산수화를 그렸다. 즉 왕실에 진상할 그림으로는 조선의 원체화풍과 명대 궁정화법을 결합한 대형 이금산수화를, 사대부들을 위해서는 절파화풍으로 비교적 간단한 화첩이나 선면에 이금산수화를 그렸다. 인조는 이징을 매우 총애하여 정묘호란을 겪었던 1627년에도 그를 입궐시켜 곁에서 그림을 그리게 함으로써 신하들의 원성을 샀다. 그러나 신하들의 원성은 반영되지 않았고, 병자호란이 발생한 지 2년 후인 1638년에도 역시 이징을 불렀다. 그러자 간원(諫院)이 상차(上箚)를 올려 ‘삼가 전하께서는 남한산성의 일을 잊지 말아 하늘의 경계를 삼가고 연못에 다다른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 날마다 조심하라’는 말로 직언을 했지만 인조는 결코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은 듯하다. 「인조실록」에는 인조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까지 비슷한 상소가 몇 차례 더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인조가 그토록 이징의 이금산수화에 집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갖은 수모를 다 겪은 왕으로써 그림을 통해서 나마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자 한 욕망의 반영이었을지 모른다. 반대로 말하면 절대적이지 않은 권위를 들키고 싶지 않은 불안과 초조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조의 뜻에 부합하기라도 하듯 이징의 이금산수화는 거칠고 성근 김명국의 작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화려하다. 이금산수화는 불화에 쓰던 이금이란 안료를 감상용 회화에 사용함으로써 그 안료가 지닌 권위와 상징성을 시각화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고려 시대에 제작된 국보 제213호 금동탑의 원래 높이는 구체적으로 몇 cm였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질문은 국보 제213호 금동탑의 원래 높이를 수치로 묻고 있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국보 제213호 금동탑의 현재 높이와 원래 높이에 대한 추정 정보를 추출한다.

    • 대부분의 높이가 20~30㎝ 정도인 것에 반해 국보 제213호 금동탑은 155㎝로 대형 금속공예품이다.
    • 현재 남아 있는 탑신은 5층이지만 본래 7층 정도였으며 머리장식의 일부가 사라진 것으로 보아 본래 높이는 지금보다 더 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현재 높이는 155cm라고 명시되어 있으나, 원래 높이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더 컸을 것으로 추정한다'라고만 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수치는 제공되지 않는다.

    • 본래 높이는 지금보다 더 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현재 높이(155cm)와 원래 층수(7층)에 대한 정보는 있으나, 이를 통해 원래의 정확한 높이를 계산할 수 있는 근거(층당 높이 등)는 문맥에 없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문맥은 원래 높이가 현재보다 더 컸을 것이라는 사실만 전달할 뿐, 정확한 수치를 명시하지 않았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수치는 문맥을 통해 확정할 수 없으므로 답변 불가능으로 판정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에는 국보 제213호 금동탑의 현재 높이가 155cm라는 정보와 원래 높이가 현재보다 더 컸을 것이라는 추정 정보만 존재한다. 질문이 요구하는 원래 높이의 구체적인 수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문맥에 없는 추가적인 정보나 계산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