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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체제에 대한 서독의 개입과 동독 내부의 다양한 반체제 저항 운동 및 정치적 도전 doc_id PCY_201804260421071901_3

주제 (main_topic)
동독 체제에 대한 서독의 개입과 동독 내부의 다양한 반체제 저항 운동 및 정치적 도전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공모 공작과 관련하여 동독 사무소는 서독 및 서방 비밀 정보기관(미국의 CIA나 영국의 MI6처럼)과 긴밀히 협력했다. 이 내부 정찰의 틀 내에서 동독 사무소는 정치적 극단주의 단체들에 침투했으며 공공기관들로부터 독려를 받았다. 이 사무소는 통일 이후에 ‘더 나은 누렘베르크(Nuremberg)’를 위해 약 3백만 명에 달하는 동독 시민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울브리히트(Ulbricht) 정권의 불법 선동 투쟁에 운반책 및 연락책들이 동원되었다. 동독에 영향을 미치려는 사민당 동독 사무소의 노력은 아주 다양한 채널들을 통해 이뤄졌다. 장벽은 아직 구축되지 않았고 국경은 여전히 개방된 상태였기 때문에 운반책들이 국경을 넘어 선전 자료들을 운반하는 것이 용이했다. 정찰요원들은 정치적 분위기를 관측했고 여론을 분석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민권 운동, 예술가, 작가, 음악가들이 동독에서 반공산주의 활동에 큰 역할을 했다. 가수 겸 작가 볼프 비어만(Wolf Bierman)은 반공주의자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강제로 국외 추방되었는데, 이 사건은 문화계에서 널리 알려져 국경을 넘는 시위사태로 이어졌다. 또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서독의 사상은 문자 그대로 동독의 안방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또한, 점차 많은 성직자들이 동독의 문제점들에 대해 알게 되면서 헌신적으로 동독 반대 운동에 참가하였고, 그로 인해 수천 명의 동독 시민들이 정기적으로 이러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평화와 인권 이니셔티브(IFM)와 같은 반대파의 민권 활동과 반공산주의 학생 단체 및 정당 활동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투쟁적인 환경에서 수백 개의 단체가 생겨나 환경권, 인권, 민권에서부터 평화 운동까지 폭넓은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이러한 단체 대부분은 성직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단체들에 대한 서독의 개입은 특히 정치적 채널을 통해 1980년대에 이뤄졌다. 동독의 저항운동 단체들은 서독의 정당이나 단체를 통해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1977년 이후 호네커의 정책들에 대한 비판이 증가했다. 비판가들 중에는 루돌프 바로(Rudolph Bahro), 로버트 하베만(Robert Havermann), 볼프강 하리히(Wolfgan Harich) 등이 포함되었는데, 이들의 모임은 처음에는 조직적인 단체의 모임이 아니라 느슨하고 비공식적인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호네커가 민족 통일을 거부한 것은 헌법 위반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본 베르크 교수는 이러한 공동 의견을 대중에게 호소하기로 결정했다. 30쪽에 달하는 이 선언문은 ‘전쟁과 평화’, ‘공산주의 개혁과 소련 정통성’, ‘동독의 내부 상황’ 등의 주제를 다루었고 다원주의 정당, 독립적인 의회 및 대법원,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을 요구했다. 과학, 예술, 문학 분야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검열이나 국가의 통제도 거부했다. 이 선언문이 행정부의 정책들뿐 아니라 공산주의 종교 이념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은 국가 정당성의 근본을 뒤흔드는 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진보적 입장으로 잘 알려진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은 1978년 초 소위 ‘독일 민주 공산주의자 연합(Bund Demokratischer Kommunisten Deutschlands)’을 게재하고, 동독 정부와 동독의 정치 및 경제 상황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동독의 정치 제도가 조직적 반대를 법적으로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독 내부에는 어떤 형태의 조직적 반대도 없었다. 이 선언문(manifest)은 다원주의적이며 민주적인 형태의 사회주의를 분명하게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거의 잊혀 가는 듯했던 통일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이 선언문은 1972년 양국 사이의 「기본 조약」 이후 통일에 대한 목표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에리히 호네커를 비난함으로써 그의 정책들을 공격했다. 이 선언문이 동서독 간 관계를 해칠 수 있었기 때문에 사통당은 그저 ‘새해 농담’이나 ‘의심스러운 책략’쯤으로 치부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축소하고 신뢰도를 떨어뜨리려고 시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은 심각한 조치를 취했다. 슈피겔의 동독 사무소를 폐쇄했으며 1985년까지 잡지사의 모든 직원들에게 동독 입국 금지 조치를 내렸다. 사통당 역시 이 선언문의 편집자들을 찾아내려고 했다. 1978년 1월 9일 시작된 편집자들에 대한 수색 결과 헤르만 본 베르크(Hermann von Berg) 교수가 주범으로 발각되었다. 그 당시 동서 관계 전문가였던 본 베르크 교수는 베를린 홈볼트 대학에 재직 중이었고 서독 언론인들을 담당하던 동독 장관위원회(Minister Council)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 본 베르크 교수는 동독의 주정부에서 총리를 역임한 빌리 슈토프(Willi Stoph)의 오랜 지인이자 비밀 정보 운반책으로 일했다. 이런 역할을 통해 본 베르크 교수는 서독 언론인들과 오랜 세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베르크 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전문인들과의 접촉, 특히 1977년부터 울리히 슈바츠(Ulrich Schwarz) 슈피겔 동독 지부장과의 접촉은 우정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본 베르크 교수는 동독의 고위급 극비 정치적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선언문이 동서독 간 데탕트 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서독 정부 내에서 사민당은 저자세를 견지했다. 에리히 호네커가 독일 접근에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기 때문에 호네커가 행동의 자유를 잃을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슈피겔은 1978년 두 번째 판에서 다음과 같이 쓰면서 그 선언문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한편, 기민당의 헬무트 콜은 이 잡지를 계몽적이라고 치하했다. 이 모든 사태로 인해 동독 행정부는 거의 1년 동안이나 분주했고 크렘린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큰 곤욕을 치렀다. 본 베르크 교수 자신도 가택 연금을 당했고 군사 재판에서 25년 형을 선고 받았다. 이 사태가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 되고 언론인들도 동독의 절차들에 반대하는 항의 서한을 출판하자 동독 정부는 본 베르크 교수를 석방하기에 이른다. 단체들이 결합하여 중요한 연합이 생겨났고, 이 연합은 다양한 형태의 결합을 통해 차후 의회 선거에 참여했다. 출발 민주주의(Demokratischer Aufbruch), 민주주의는 지금(Demokratie Jetzt), 인권 이니셔티브(Initiative fuer Menschenrechte), 노이에스 포룸(Neues Forum) 등이 그 연합이다. 이 연합들은 동독의 국가보위부의 침투 때문에 곤경을 겪기도 했다. 국가보위부의 비밀 요원이었던 볼프강 슈누어(Wolfgang Schnur)는 오랫동안 ‘출발 민주주의’ 당 서기장 직을 역임했는데 인민의회 선거 직전에 정체가 탄로났다. 귄터 노케(Guenter Nooke)가 오랫동안 이끌었던 ‘출발 민주주의’는 동독 내 야당 정치 집단으로서 1989년 이후인 1990년 인민의회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독일 연맹’에 참여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본 베르크 교수가 주도한 선언문이 동독 국가 정당성의 근본을 뒤흔드는 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본 베르크 교수의 선언문이 동독 국가 정당성에 위협이 된 구체적인 이유를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선언문의 내용과 그에 따른 국가의 평가를 추출한다.

    • 30쪽에 달하는 이 선언문은 ‘전쟁과 평화’, ‘공산주의 개혁과 소련 정통성’, ‘동독의 내부 상황’ 등의 주제를 다루었고 다원주의 정당, 독립적인 의회 및 대법원,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을 요구했다.
    • 과학, 예술, 문학 분야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검열이나 국가의 통제도 거부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정당성을 뒤흔든 핵심 근거인 선언문의 요구 사항과 비판 대상을 선택한다.

    • 다원주의 정당, 독립적인 의회 및 대법원,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을 요구했다.
    • 이 선언문이 행정부의 정책들뿐 아니라 공산주의 종교 이념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에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선언문이 요구한 민주적 가치들과 공산주의 이념 자체에 대한 의문 제기가 국가 체제의 근간을 부정하는 행위임을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선언문이 다원주의적 요구를 담고 있으며, 행정부 정책을 넘어 공산주의 이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을 결론으로 도출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해당 선언문이 다원주의 정당, 독립적인 의회 및 대법원, 집회·표현·언론·종교의 자유 등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행정부의 정책은 물론 공산주의 종교 이념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본 베르크 교수가 주도한 선언문은 행정부의 정책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종교 이념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원주의적 요구를 담고 있어 동독 국가 정당성의 근본을 뒤흔드는 도전으로 간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