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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사할린 내 한인들의 거주 환경 변화, 경제적 지위, 그리고 북한 파견 노동자와 현지 선주민 간의 갈등 및 사회적 역학 관계 doc_id PCY_201805150522373591_7

주제 (main_topic)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사할린 내 한인들의 거주 환경 변화, 경제적 지위, 그리고 북한 파견 노동자와 현지 선주민 간의 갈등 및 사회적 역학 관계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세 부류의 사할린 한인들 사이에 갈등도 나타났다. 무국적을 고집하며 남한으로의 귀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선주 한인들은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 휴전으로 종결되고 뒤이어 1956년 소련과 일본의 수교 이후 일본인만 그 잔류자까지 모두 귀환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아야 했다. 일부는 가능해진 소련 국적 취득을 통해 자녀 교육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소련식 생활방식에 적응하기도 했지만 강화되는 국적 취득의 압박 속에서도 귀환의 꿈을 놓지 않았던 이들 중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알려진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여 북한 국적을 취득한 일부 한인 중에는 북한행을 택한 사람도 나타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국적을 유지하면서 러시아인과 결혼하거나 자녀교육 등의 동기로 소련 국적을 취득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로써 사할린은 한국인에게 ‘강제동원과 미귀환의 한’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각인되었다. 1948년에 실질적으로 1940년대 북한 노동자의 파견은 종결되었지만 기왕 파견된 노동자들의 삶은 지속되었다. 사할린주의 역사에서 1949년은 일본인 귀환사업이 7월 22일로 종료됨에 따라 노동력의 부족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일본인에 이어 귀환할 것을 기대했던 사할린 한인(선주민)들의 염원도 사실상 이 시기에 좌절되었다. 이듬해에 한반도에 전쟁이 시작될 것임을 사전에 알았던 군 지도자들이나 소련의 수뇌부는 현실적으로나 인도적 측면에서도 한인을 귀환시킬 수 없었다. 소련은 1950년 4월 22일에 사할린에 거주하던 일본인의 집단 귀국이 완료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6.25가 발발했다. 1950년 한반도의 전쟁 상황은 사할린 한인 사회를 구성하는 각 그룹에 각각의 영향을 미쳤다. 파견노무자의 경우는 수적으로 최대 인원을 구성했던 1948년도 파견자들의 대다수가 1951년까지 계약이 되어 있었던 까닭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할린에 남게 되었다. 초기 파견자들은 독신 계절노동자로서 작업장에서 집단 거주하며 단체 생활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1947년 이후 가족을 동반하게 되면서 열악하더라도 당시 어촌의 일본인들이 남긴 집들에서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후 점차 독신자들만 기숙사 등 소련식 거주 시설에 남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작업장으로 출퇴근하는 생활 방식의 변화가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1951년 말경에 어업 노동자의 70% 가량인 3천730명이 일본식 개별 주택(통상 땅집으로 불림)이나 소규모 집단 주택의 단독 공간에 거주하고 있었고 집단생활을 하는 독신 노동자는 1천630명으로 오히려 소수가 됐다. 개별 주택의 거주 상황은 일반화하기 어려우나 북한 파견노무자의 후손으로 1951년 사할린에서 태어난 정홍식이 자신의 집에 대해 회고한 바를 통해 그 모습을 그릴 수 있다. 정 씨 가족 8명이 거주했던 네벨스크의 그 집은 ‘일본인들이 넘겨 준 판자집’으로 두 개의 판자를 세워놓고 그 사이에 타고 남은 석탄 찌꺼기와 톱밥을 채워 넣은 것이어서 따뜻함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장작도 없고 석탄을 살 돈도 없어 아이들이 석탄을 주워 간혹 난방을 하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하지만 ‘판자집에는 조그만 야채 밭이 딸려 있어’ 채소를 키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돼지도 길렀다’. 이처럼 거주 및 생활의 객관적 조건은 좋다고 하기 어려웠고, 식료품 및 생필품 지급 역시 넉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외국인이나 소련의 다른 지방에서 이주한 이주민들의 생활 조건과 작업환경이 파견노무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 당시 러시아인 이주민 노동자들이나 파견노무자의 생활 조건은 어업 분야 노동자에 대한 일반 기준에 따라 전체적으로 어려운 수준이었으며 노동이나 작업도 공동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생활 조건의 열악함 때문에 북한 노동자들 사이에 불만이 가중될 여지는 크지 않았다. 거주 유형의 변화는 파견노무자들이 개인적 활동을 늘려갈 수 있는 기회가 됐다. 할당된 생산 기준을 채우고 성실하게 근무하면 노동자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더불어 파견노무자들의 수입 수준이 점차 올라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다. 북한 노동자들의 노동 계약 기간은 1~3년 사이였는데, 1년의 계절노동을 체결한 이는 통상 200~250루블의 월급과 1달치 정도의 무상 보조금 이외의 추가 수입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에 비해 2~3년 노동계약을 체결한 북한 노동자에게는 1948년 1월 27일자 소련각료협의회의 890-p.호 지시에 따라 추가적인 부상보조금 500루블과 1천 루블까지의 선불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51년 말에 북한 노동자 중 3년 근무자에 주어지는 특혜 대상자는 당시 잔류 중인 북한 노동자의 수(5천410명)를 기준으로 약 70%에 해당하는 3천756명에 달하였다. 구소련 당국의 이러한 조치는 파견노무자에게는 오래 근무할수록 유리한 노동 조건이 조성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에 충분하였으며 선주민들이 오히려 상대적인 차별과 박탈감을 느낄 정도였다. “북한에서 노무자 온 거는 계약 조건에 그것도 있었습니다. 3년 계약 왔으면, 그러면 그거 10프로, 1년에 10프로씩 더 추가 준다고. 여러 가지 제한도 있죠. 그 외국 사람이니까 아마 이동 제한도 있었겠죠. (중략) 이것은 다 똑같은데, 계약 조건 해가지고 돈 버는 거는 우리보다 더 많았죠. 같은 일을 했는데 그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돈 많이 벌고 받았어요.” 외국인 노동자 활용 문제에서 국경 지역의 안보와 부족한 노동력의 안정적 확보라는 상충되는 과제를 해결해야 했던 소련의 입장은 1940년대 후반이나 1950년대 초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으나, 1950년대 들면서 노동력의 이용을 더 중시하게 됐다. 이에 따라 현지 선주민인 무국적자와 외국인인 북한 노무자를 구별하지 않는 정책이 채택됐다. 이와 함께 노동수첩을 발행하면서 노무자 개인에 대한 당국의 통제가 가능해 졌으며 결과적으로 북한 공민인 파견노무자와 현지 선주민간의 구별이 없어졌다. 초기에 어업 분야로 사실상 한정되었던 북한 노동자들의 직종이 1950년대 초에 들어 임산업이나 건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로 확산됐고 집단생활에서 벗어나 가족과 함께 개별적으로 거주하면서 장기체류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다. 이들은 숙달된 노동자가 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현지 선주민보다 오히려 유리한 정치·경제적 혜택을 누리는 등 특권적 지위마저 누릴 수 있게 됐다. 소련 극동 지역 북한 외교 대표의 언급은 당시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며 가족 단위의 삶이 일반화되어 있던 북한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없었던 북한 측의 입장을 토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50년대 후반 들어 북한은 사할린에서 자국 공민뿐 아니라 무국적 한인들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선전선동을 강화하고 있었다. 사할린의 거의 모든 도시와 지역을 돌며 ‘당신의 조국은 조선이니 조선의 애국자가 되시오’라는 구호를 내걸고 북한 국적의 취득을 권고하고 귀국을 촉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1959년에는 북한의 제안에 따라 조직된 학습반이 선전선동 과제를 함께 수행했던 일이 주목을 끈다. 당초 학습반의 조직은 문맹퇴치와 교양학습으로 불린 공산주의 정치문화 수준의 제고를 표명하며 시작되었다. 이 학습반은 북한 노동자들에게 노동당의 활동과 소련의 정책, 공산주의 이론과 역사에 대한 학습을 시키면서 북한 사회주의의 성과와 당시 북한이 표방하기 시작한 주체사상의 선전을 겸하고 있었다. 이것이 곧 현지 선주민들까지 포섭 대상으로 삼으며 6.25때 북한 전쟁영웅을 추모하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등 ‘민족주의적’ 편향성을 띠게 된다. ‘기통수’가 사할린주에 북한의 정기간행물과 서적, 선전물 등을 대규모로 정기 공급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부터였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1951년 말 기준, 사할린의 어업 노동자 중 집단생활을 하는 독신 노동자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1951년 말 사할린 어업 노동자 중 집단생활을 하는 독신 노동자의 구체적인 인원수를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1951년 말경 어업 노동자의 거주 형태와 인원수에 관한 데이터를 추출한다.

    • 1951년 말경에 어업 노동자의 70% 가량인 3천730명이 일본식 개별 주택(통상 땅집으로 불림)이나 소규모 집단 주택의 단독 공간에 거주하고 있었고
    • 집단생활을 하는 독신 노동자는 1천630명으로 오히려 소수가 됐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질문에서 요구하는 '집단생활을 하는 독신 노동자'에 해당하는 수치를 선택한다.

    • 집단생활을 하는 독신 노동자는 1천630명으로 오히려 소수가 됐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추출된 수치인 1,630명이 질문의 조건(1951년 말, 어업 노동자, 집단생활, 독신)과 일치함을 확인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1951년 말 사할린 어업 노동자 중 집단생활을 하는 독신 노동자는 1,630명이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1,630명이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1951년 말경 집단생활을 하는 독신 어업 노동자는 1천630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