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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형성된 종묘, 한양도성, 성균관, 서원 및 이언적의 독락당과 같은 유교적 건축물과 그 역사적·학문적 가치 doc_id PCY_201904040353587461_3

주제 (main_topic)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형성된 종묘, 한양도성, 성균관, 서원 및 이언적의 독락당과 같은 유교적 건축물과 그 역사적·학문적 가치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이러한 종묘의 내주렴과 격렴의 경우 현재 왕의 초상을 모신 진전에서도 확인된다. 태조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이나 조선 왕실의 마지막 진전이었던 신선원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주렴이 사용되었다. 왕의 초상을 모신 감실 앞이나 감실과 감실 사이의 칸을 격렴으로 막은 것이다. 왕릉은 조선의 선왕과 선왕후의 주검, 체백을 영원히 모신 사후 보처이다. 왕릉의 앞에는 정자각을 세워 그들에게 제향을 올리는데, 정자각 내부 북쪽에는 신어평상(神御平床)을 놓고 문[神門]을 낸다. 왕릉을 조성한 『의궤』에 의하면 이곳 신문에는 주렴을 걸어 이것을 신문주렴, 줄여서 신렴(神簾)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신렴은 종묘 신주 앞에 건 내주렴과 마찬가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신렴을 통해 왕릉 봉분에 있던 체백이 제향을 드리던 후손을 만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왕릉 정자각의 북쪽 신문에 신렴이 갖춰지지 않아 조선 왕의 체백을 우리가 본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조선시대 원형대로 신문에 신렴을 갖춰 원형대로 복원하고 신격화된 조선 선왕과 선왕후의 혼백을 기려 왕실의 존엄함을 유지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나라 안팎으로 혼란했던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를 열면서 도읍을 한양으로 정했다. 신흥무인세력과 신진사대부의 협력으로 세워진 조선은 성리학을 사회지도이념으로 삼았다. 한양도성을 설계한 정도전은 성리학 원리를 반영하여 종묘와 사직의 위치를 정하고 왕이 머무르는 경복궁의 모습과 각 전각의 위치와 이름을 정한다. 또한 도성 전체를 계획하면서 유교의 기본 덕목인 오상(인의예지신)을 중심이 되는 보신각과 더불어 네 방위의 성문에 배치하여 큰 틀을 세우고 통치이념과 도시구성원리를 하나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였다. 동쪽은 인을 넣어 흥인지문, 서쪽은 의를 넣어 돈의문, 남쪽은 예를 넣어 숭례문이라고 하였으나 북쪽은 지를 넣지 않고 숙청문이라 하였다. 정도전이 태조에게 지어 바친 새로운 왕조의 통치규범인 『조선경국전』이 그랬듯이 유교의 형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조선의 현실에 맞게 조정하여 적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대문 사이에 네 개의 작은 문을 두어 동북은 홍화문, 남동은 광희문, 남서는 소덕문, 북서는 창의문이라 하고 통틀어 사소문이라 부른다. 국보 제1호 숭례문은 경복궁의 축선에 있는 도성의 정문으로 경복궁과 같은 해 만들어졌다.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나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창건 당시의 원형을 보전 하고 있다. 한양도성이 조선의 물질적인 중심이라면 성균관은 정신적인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 숭유배불 정책을 국시로 채택하여 경복궁, 종묘, 사직단을 영조한 직후 공자를 모신 문묘와 성균관을 함께 조영한다. 조선 시대의 교육은 유학을 가르치는 동시에 성현의 몸가짐을 배워 몸소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 관학에는 반드시 문묘와 강학공간을 함께 건립하였다. 성균관처럼 앞에 문묘가 있고 뒤쪽에 교육기관이 있는 형태를 ‘전묘후학’ 배치라고 하는데 나주향교나 경주향교처럼 평지에 만들어진 향교들은 이와 같이 배치하고있으나 구릉지에 배치되는 경우 명륜당이 앞에 오는 ‘전학후묘’로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신령함은 하늘에서 산을 타고 내려온다는 우리의 전통적인 위계관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성균관은 대성전과 동무, 서무로 구성된 문묘 영역과 강학 영역인 명륜당, 동재, 서재 그리고 기타 부속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명륜당의 명륜 (明倫)은 ‘교육을 하는 것은 인륜을 밝히는 일’이라는 맹자의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총 18칸이다. 좌우에 있는 협실은 스승과 제자가 강학하는 데 사용되고 중앙의 넓은 마루는 성균관 유생들이 경서를 펴고 토론하기도 하고 왕이 직접 유생들에게 강연과 과거를 하는 등 중요 한 행사를 진행하였다. 한편 조선건국에 참가하지 않고 향촌으로 은거했던 신진사대부들이 성종 이후 정계에 진출하면서 사림을 형성하게 되어 독자적인 교육기관인 서원을 건립하게 된다.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으로 시작된 서원 건립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지방의 교육과 사림의 구심 역할을 담당한다. 서원의 정착과 보급에 많은 역할을 했던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은 퇴계가 벼슬에서 물러나 제자를 가르치던 도산서당 뒤쪽으로 제자들과 율곡 이이 등 유림들이 건립하자 선조가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 현판을 하사한다. 퇴계가 직접 지은 건물인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역락서재는 유정문, 절우사, 몽천 등 주변 자연경관과 함께 퇴계의 사상과 인품을 간직하고 있어 4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은은한 그 향기를 풍기고 있다. 이언적은 10살 때 아버지 이번이 사망하자 외가인 서백당에서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외삼촌 손중돈의 학풍을 이어받았고, 이때 형성된 건축적 영향이 이후 독락당을 지으면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서백당과 독락당은 건축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다가 24세(1514)에 옥산에 있던 정혜사를 드나들며 글공부에 전념하기 위한 공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듬해(1515)에 아버지가 지은 계정 자리에 ‘역락재(亦樂齊)’라는 삼 칸 초가를 지었다. 이때쯤(24세) 이언적은 문과에 급제를 했고 경주향교의 교관(25세)이 됐다. 그러던 중 27세(1517)에 그 유명한 손숙돈과 조한보의 무극태극설 논쟁에 의견을 펼치면서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두 사람을 모두 비판하여 “이단의 사설을 물리치고 성리학의 본원을 바로 세웠다”는 후대 학자들의 극찬을 받게 된다. 훗날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더불어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불리며 문묘에 종사된 대학자로서의 면모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이 지었다. 독락당이라는 이름은 중국 북송 때의 학자 사마광(1018~1086)의 이야기에서 비롯한다. 『자치통감』을 엮은 것으로 유명한 사마광은 왕안석의 개혁 정치에 반대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홀로 즐기는 집’인 독락원(獨樂園)을 짓고 은거했다. 사마광의 독락원처럼 이언적에게 독락당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마음을 수양하며 홀로 즐기는 집이었다. 이언적은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번(1461~1500)의 아들로 경주 양동마을의 서백당(송첨 종택)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손소(1433~1484)였고, 외삼촌은 대학자 손중돈(1464~1529)이었다. 독락당이 있는 옥산에 처음 발을 디딘 이는 아버지 이번이었다. 이번은 그가 살던 양동마을과 가깝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산수가 수려했던 옥산 땅을 택하고 계정을 지었다. 그때부터 41세(1531)까지 그는 여러 벼슬을 하며 승승장구했고 이상적인 도학 정치를 펼칠 경륜을 쌓았다. 그러나 41세 때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을 박탈당했다. 그는 낙향했지만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옥산동으로 들어가 독락당을 지었고 5년간 은거했다. 42세(1532)에 안채를 새로 짓고 남쪽에 위치한 사랑방을 역락재라 했고, 기존의 역락재를 계정으로 중수했다. 이때 사랑채인 독락당을 새로 지어 학문에 정진했다. 아버지 이번이 독락당을 휴식과 수양의 공간으로 삼았다면, 아들 이언적은 강학과 저술의 공간으로 삼았다. 독락당은 한 번에 조성된 것이 아니다. 아버지 이번이 처음 터를 잡은 후 이언적이 본격적으로 옥산별업을 경영했고, 그의 아들 이전인과 손자 이준에 걸쳐 주요 배치가 완성됐다. 그 후에도 독락당을 유지하기 위한 후손들의 노력이 18대에 걸쳐 이루어졌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성균관과 같이 앞에 문묘가 있고 뒤쪽에 교육기관이 있는 배치 방식을 무엇이라 부르며, 구릉지에 배치되는 향교의 경우 어떤 배치 형태를 보이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성균관의 배치 방식 명칭과 구릉지에 위치한 향교의 배치 형태를 묻는 질문임.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성균관의 배치 방식과 향교의 배치 유형에 관한 정보를 문맥에서 추출함.

    • 성균관처럼 앞에 문묘가 있고 뒤쪽에 교육기관이 있는 형태를 ‘전묘후학’ 배치라고 하는데
    • 구릉지에 배치되는 경우 명륜당이 앞에 오는 ‘전학후묘’로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전묘후학'과 '전학후묘' 문구를 선택함.

    • ‘전묘후학’ 배치
    • ‘전학후묘’로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성균관의 사례를 통해 '전묘후학'이라는 용어를 정의하고, 구릉지 향교의 특이 사례인 '전학후묘'를 연결함.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성균관의 배치는 '전묘후학'이며, 구릉지 향교는 '전학후묘' 배치를 보인다는 결론을 도출함.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추출된 용어를 사용하여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작성함.

최종 답변 (final_answer)
성균관처럼 앞에 문묘가 있고 뒤쪽에 교육기관이 있는 배치는 ‘전묘후학’ 배치라고 하며, 구릉지에 배치되는 향교는 명륜당이 앞에 오는 ‘전학후묘’로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문맥에 명시된 성균관의 '전묘후학' 배치 정의와 구릉지 향교의 '전학후묘' 배치 특성을 각각 찾아내어 답변을 구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