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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철 생산과 경제적 역할, 청동기 거푸집의 제작 기술, 그리고 조선 화가 김명국의 예술 세계에 관한 고찰 doc_id PCY_201907310313467871_1

주제 (main_topic)
가야의 철 생산과 경제적 역할, 청동기 거푸집의 제작 기술, 그리고 조선 화가 김명국의 예술 세계에 관한 고찰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어떻게 철을 생산하였는가?’와 함께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도 생각해봐야 한다. 가야의 철을 웅변하는 것은 고분에서 출토되는 철기들이다. 3세기까지 김해와 경주에서 출토되는 철기 중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 신라 고 분에서 출토된 것보다 많다. 가야에서 생산된 철제품은 김해, 동래, 함안, 고령, 합천 등의 가야 고분에서도 출토되고 있으며, 가야에서 수출된 철은 신라와 왜의 고분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종류로는 도끼 모양의 납작도끼[板狀鐵斧]가 김해 양동리 162호 무덤을 비롯한 가야 고분에서 다량으로 출토 되었으며, 덩이쇠인 철정은 김해 대성동과 동래 복천동 고분군, 함안 도항리 고분군 등 가야의 주요 유적에 위치한 대형 고분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또한 수많은 갑옷과 무기들이 가야 무덤에서 발견되고 있다. 가야 제국이 일찍이 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경제적 배경의 하나가 바로 철의 생산이었던 것이다. 가야에서 생산된 철은 화폐로도 사용되었다. 가야 고분 에서 출토되는 판상철부(板狀鐵斧)와 덩이쇠[鐵鋌]는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져 교환에 사용되었고, 수출되어서는 여러 철기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가야는 또한 철의 생산을 통해 경제력을 구축했다. 『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가야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삼한과 낙랑군, 대방군, 그리고 왜나라까지 철을 수출했다고 한다. 특히 초기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는 철이 넘쳐났는데 금관가야는 이 철을 매개로 밖으로는 여러 나라와 교역 하고 안으로는 가야의 여러 정치체제를 통합하여 맹주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처럼 가야의 대표적 철 생산지라 할 수 있는 김해에는 근대까지 조업한 대동면의 상동광산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많은 철을 공납하고 있었다. 또 생철리와 같은 제철과 관련된 지명도 있고, 근년까지 전통적인 방식으로 쇠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후기에 들어서 맹주로 떠오른 고령 지역 대가야의 성장에 있어서도 철광 개발과 이를 통한 철의 생산이 큰 기반이 되었다. 즉 철을 통한 풍부한 경제적, 군사적 성장 이 대가야의 성장에 있어 주요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5~6세기 무렵 대가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야산 남서쪽에 분포하는 철산 개발을 통한 활발한 철의 제련과 이를 통한 철 생산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제련로에서 생산된 괴련철 혹은 부분적으로 선철이 함유된 괴련철을 소재로 하여 다시 정련하는 정련로(精鍊爐)가 필요하다. 정련로에는 단조 철기 생산에 필요한 제강 공정과 제련된 철괴를 장시간 가열하며 탄 소량을 높여 선철을 만드는 공정이 있다. 따라서 정련로에서 만들어진 선철을 용해하여 주조 작업을 하는 용해로(鎔解爐), 그리고 정련 과정에서 제강된 소재를 이용한 단조 작업의 단야로(鍛冶爐)를 둔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가풍 장치로 풀무와 송풍관이 사용됐다. 목탄을 연료로 인위적인 가풍을 하지 않고서는 제련 작업이 거의 불가능하다. 한편 최근 김해 봉황대 유적에서 제철에 사용된 송풍구 파편과 쇠똥(slag)이 출토되어 관심을 끌었다. 송풍구는 용광로에 꽂아 바람을 넣는 토제 관으로, 강한 불에 타 까맣게 변질된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쇠똥은 제철할 때 나오는 쇳물의 찌꺼기가 굳은 것이다. 또한 양산 물금을 중심으로 대규모 제철작업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김해 대성동, 동래 복천동 유적 등 여러 가야 유적에서는 철기 제작에 사용했던 철 집게와 망치 등 도구들이 출토되었다. 국보 거푸집을 비롯한 한국 청동기-초기 철기시대의 거푸집들은 대부분 활석(滑石)으로 만들어졌다. 왜 거푸집을 활석으로 만들었을까? 거푸집은 청동기물을 주조하는 물건으로 1000°C 이상의 고열을 순간적으로 받기 때문에 도중에 터지거나 깨져버릴 위험이 있다. 주조하는 도중에 거푸집이 파손되면 제대로 된 주물을 얻을 수 없다. 초창기 고고학자들은 활석으로 청동기 주조 실험을 하면서 거푸집이 터져버릴까 걱정하였다고 한다. 청동기물이 제대로 주조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고온의 쇳물이 튀면 사람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우려는 기우였다. 거푸집의 재료인 활석의 성질은 2013년에 필자가 활석과 각섬석암으로 각각 거푸집을 만들어 주조실험을 해 보면서 더 잘 알게 되었다. 활석은 우리나라 거푸집들이 대부분 활석이기 때문에 선택하였다. 각섬석암은 장수곱돌로 더 잘 알려진 돌인데, 일부 거푸집들의 재질이 이 돌로 알려져 있었을 뿐 아니라 이 돌은 열에 강해서 현재도 돌솥이나 고기구이판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활석과 각섬석암 거푸집에 각각 청동창의 주형을 새겼다. 국보 제231호 전 영암 거푸집 일괄(이하 국보 거푸집)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물로 11종 26점의 청동기 주형이 새겨져 있는데, 청동검(細 形銅劍), 청동꺾창(銅戈), 청동투겁창(銅矛), 도끼(有 肩銅斧), 장방형 도끼(長方形銅斧), 조갯날 도끼(蛤刃 銅斧), 끌(銅鑿), 지우개(ᕇ徣), 바늘(銅針), 낚싯바늘 (釣針), 거울(銅鏡) 등이다. 국보 거푸집은 현재 일괄 유물로 알려져 있지만 거푸집을 만드는 데 사용된 돌의 재질이나 주형(鑄型)의 설계·제도와 새김 방법을 보면,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우리나라 거푸집들은 두 짝을 맞춰서 사용하는 쌍 합범(雙合范)들이 많기 때문에 양쪽에 새겨진 기물의 주형이 꼭 들어맞아야만 청동기를 제대로 주조할 수 있다. 그래서 정밀한 설계·제도 기술이 필요하다. 국보 거푸집들을 보면, 돌의 색상이 흑청색과 흑갈색을 띠는 것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흑갈색 거푸집들은 흑청색 거푸집들보다 주형을 설계·제도할 때 자와 같은 도구를 사용한 빈도가 높아졌지만 좌우를 결합할 때의 정밀도는 떨어졌다. 그뿐 아니라 흑청색 거푸집들의 주형은 각진 새김이어서 가장자리 윤곽이 뚜렷하지만 흑갈색 거푸집들은 모죽임 새김을 선호해서 가장자리 윤곽이 덜 뚜렷하다. 안견 이후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연담 김명국(1600~?)은 최북이나 장승업에 비하면 존재가 그나마 역사에 흐릿한 윤곽을 새기고 있다. 도화서 화원으로 벼슬을 했고, 임진왜란 후 일본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두 차례 (1636년, 1643년)나 일본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그림 재능을 인정받았고, 그의 신필을 알아본 일본 관리들로부터 많은 주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선종화를 선호했던 일본의 취향이 선화에 능했던 김명국과 꼭 맞았던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김명국하면 일반인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중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 나왔던 <달마도>가 그의 작품이라면 ‘아, 그 그림’ 하고 기억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필력으로만 본다면 조선 회화사를 통틀어 그를 능가할 화가가 없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할 정도로 천재성이 보인다. 그만큼 기행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많다. 특히 술은 그에게 창작의 촉매제였다. 스스로 ‘취옹(醉 翁)’ 즉 ‘술 취한 늙은이’라는 아호를 지어 쓸 정도였으니까. 김명국 하면 역시 <달마도>다. 중국 선종을 창시했다고 알려진 달마 스님의 초상이다. 선종은 6세기경 중국으로 들어온 인도의 달마 스님이 9년간 면벽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서 알려졌다. 참선 수행하는 달마의 모습이나 얼굴만을 부각시켜 그린 것을 <달마도>라고 한다. <달마도>는 부릅뜬 눈을 강조한다. 눈에 힘이 없으면 달마도로서의 의미가 퇴색된다고 여겨진다. 달마 스님이 면벽 수도 중 졸음을 이기려고 눈꺼풀을 잘라버렸다는 일화에서 유래된 형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참선의 경지에서 깨달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를 담아야 하기 때문이리라. 불교의 한 종파로 1,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선종의 대표적 이미지인 <달마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권 여러 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제작돼왔다. 그중 가장 출중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이 김명국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강한 먹과 옅은 먹으로 농담을 조절해 강렬한 대비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얼굴은 옅은 먹으로 옷은 짙은 먹으로 그렸는데, 모두 한 호흡으로 그렸다. 옅은 먹선은 인간적 면모의 달마를, 짙은 먹선의 강렬한 표현의 옷은 정신적 의지를 보여준다. 붓의 속도에서 주저함이 전혀 보이지 않고 순식간에 그려야 나타날 수 있는 분위기가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김명국이 일본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참여하여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일본 관리들이 그에게 주문을 했던 구체적인 그림의 종류는 무엇인지 서술하시오.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질문은 김명국이 일본 방문 당시 일본 관리들로부터 주문받았던 '구체적인 그림의 종류'를 묻고 있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김명국이 일본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두 차례 일본을 다녀왔으며, 일본 관리들로부터 많은 주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추출한다.

    • 임진왜란 후 일본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두 차례 (1636년, 1643년)나 일본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 일본에서도 그림 재능을 인정받았고, 그의 신필을 알아본 일본 관리들로부터 많은 주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김명국이 일본에서 주문을 받았다는 근거는 있으나, 어떤 종류의 그림(예: 산수화, 풍속화, 달마도 등)을 주문받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명시는 없다.

    • 그의 신필을 알아본 일본 관리들로부터 많은 주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문맥을 통해 김명국이 일본에서 그림 주문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가 선종화(달마도 등)에 능했다는 점은 알 수 있지만, 일본 관리들이 실제로 주문한 그림의 종류가 무엇인지는 연결하여 도출할 수 없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질문이 요구하는 '주문받은 그림의 구체적 종류'는 문맥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답을 결정할 수 없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음을 최종 답변으로 결정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에는 김명국이 일본 관리들로부터 많은 그림 주문을 받았다는 사실은 언급되어 있으나, 주문받은 그림의 구체적인 종류에 대한 정보는 누락되어 있다. 따라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외부 지식이나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