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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평화 수호와 5·18 민주화운동의 가치 계승을 통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 doc_id PCY_202006190825509211_3

주제 (main_topic)
한반도의 평화 수호와 5·18 민주화운동의 가치 계승을 통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무엇보다 두 나라의 가장 큰 공통점은 평화에 대한 강한 의지입니다. 스웨덴 국민의 훌륭함은 단지 자국의 평화를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나라의 평화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스웨덴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인류사회를 보호하는 국제사회의 평화수호자가 되었습니다. 고통받는 인류를 향해 기꺼이 손을 내밀어온 스웨덴의 역사는 한반도의 완전한 평화를 꿈꾸는 대한민국 국민께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해 4월 스웨덴의 여름만큼 아름답고 화창한 봄날의 판문점을 세계인이 주시했습니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사상 최초로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남북 정상은 10년 만에 다시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다시는 전쟁으로 인한 불행을 겪지 않겠다’는 국민의 간절한 열망이 분단의 상징 판문점을 일순간에 평화의 산실로 되돌렸습니다. 어렵사리 만난 남과 북은 진심을 다해 대화했고, 평화와 번영, 공존의 새로운 길을 열기로 약속했습니다. 남북군사합의서를 체결하여 적대행위 중지, 비행금지구역 설정, DMZ 내 감시초소 철수와 공동유해발굴 등에 합의했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알바 뮈르달(Alva Myrdal) 여사는 바로 이 자리에서 전 세계 군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처음으로 선언했습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도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바로 이 자리에서 한반도 평화 비전을 재차 천명했습니다. 그로부터 19년이 흘렀는데, 한반도 평화에 얼마나 진전이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유서 깊은 스웨덴 의사당에서 연설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따뜻하게 반겨 주시고 연설 기회를 주신 스웨덴 국민과 국왕 내외분, 의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스웨덴은 대한민국의 오랜 친구입니다. 한국전쟁 때 야전병원단을 파견해 2만 5,000명의 유엔군과 포로를 치료하고, 한국의 국립중앙의료원 설립을 도왔습니다. 민간 의료진들은 전쟁 후에도 부산에 남아 수교도 맺지 않은 나라의 국민을 치료하고 위로했습니다. 스웨덴은 한국인에게 오랫동안 이상적인 나라였습니다. 한반도에 사는 누구나 자자손손 평화와 번영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군의 강한 힘이 그 꿈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평화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 군의 철통같은 안보가 대화와 협력을 뒷받침하고 항구적 평화를 향해 담대하게 걸을 수 있게 합니다. 우리 군의 용기와 헌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비무장지대 내 초소를 철거하고, JSA를 완전한 비무장 구역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국군의 유해를 발굴할 수 있었던 것도, 분단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이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사상 최초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남북 군사합의를 이끌어내고 실천한 군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나는 강한 국방력을 가진 우리 군을 믿고 지난 유엔총회에서 전쟁불용을 선언 할 수 있었습니다. 비무장지대로부터 새로운 평화의 길을 열어온 우리 군에 자부심을 갖고 비무장지대의 국제평화지대화를 제안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늠름한 국군의 모습을 보며, 한반도 평화와 번영에 대한 우리 국민의 자신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1980년 5월, 우리는 광주를 보았습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광주를 보았고, 철저히 고립된 광주를 보았고, 외롭게 죽어가는 광주를 보았습니다.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의 마지막 비명소리와 함께 광주의 5월은 우리에게 깊은 부채의식을 남겼습니다. 5월의 광주와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 학살당하는 광주를 방치했다는 사실이 같은 시대를 살던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아픔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광주를 함께 겪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디에 있었든, 5월의 광주를 일찍 알았든 늦게 알았든 상관없이 광주의 아픔을 함께 겪었습니다. 그 부채의식과 아픔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뿌리가 됐고, 광주시민의 외침이 마침 내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6월 민주항쟁은 5·18민주화운동의 전국적 확산이었습니다. 6·10민주항쟁 32주년이 되었습니다. 전국 곳곳 6월의 아스팔트는 민주주의의 함성과 함께 뜨겁게 달궈졌고 직업과 계층을 떠나 모든 국민이 항쟁에 참여했습니다. 6·10민주항쟁의 승리로 우리는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고, 국민의 힘으로 세상을 전진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날 우리 곁에 있었던, 우리들 모두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기념식을 하게 되어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그해 1월 14일, 이곳 509호에서 스물두 살 박종철 열사가 고문 끝에 숨졌습니다. “박종철을 살려내라.”라고 외치던 이한열 열사가 불과 5개월 뒤 모교 정문 앞에서 최루탄에 쓰러졌습니다. 두 청년의 죽음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각성시켰고 우리를 거리로 불러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인권유린과 죽음의 공간이었지만 32년 만에 우리는 이곳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꿔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광주에 너무나 큰 빚을 졌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같은 시대 같은 아픔을 겪었다면, 그리고 민주화의 열망을 함께 품고 살아왔다면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은 보수·진보로 나뉠 수가 없습니다. 광주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바로 자유이고 민주주의였기 때문입니다.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민주화운동을 다르게 볼 수가 없습니다. ‘광주사태’로 불렸던 5·18민주화운동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공식적으로 규정된 것은 1988년 노태우정부 때였습니다. 김영삼정부는 1995년 특별법에 의해 5·18민주화운동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고, 드디어 1997년 5·18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했습니다. 대법원 역시 신군부의 12·12군사쿠데타부터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압과정을 군사반란과 내란죄로 판결했고, 광주 학살의 주범들을 사법적으로 단죄했습니다. 당연히 정치권도 동참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모두 함께 광주의 명예를 지키고 남겨진 진실을 밝혀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이전 유신 시대와 5공 시대에 머무는 지체된 정치의식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새로운 시대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5월이 지켜낸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광주로부터 빚진 마음을 대한민국의 발전으로 갚아야 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 지난해 3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됐습니다. 핵심은 진상조사규명위원회를 설치하여 남겨진 진실을 낱낱이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위원회가 출범조차 못 하고 있습니다. 국회와 정치권이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해 주실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 정부는 국방부 자체 5·18민주화운동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통해 계엄군 헬기 사격, 성폭행과 추행, 성고문 등 여성인권 침해행위를 확인했고, 국방부 장관이 공식 사과했습니다. 정부는 특별법에 의한 진상조사규명위원회가 출범하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자료를 제공하고 적극 지원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5·18민주화운동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공식 규정되고 국가 기념일로 제정되기까지의 과정을 정부별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설명하시오.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5·18민주화운동의 명칭 공식 규정과 국가 기념일 제정 과정을 정부의 변화에 따라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정부별 시점과 사건을 추출한다.

    • ‘광주사태’로 불렸던 5·18민주화운동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공식적으로 규정된 것은 1988년 노태우정부 때였습니다.
    • 김영삼정부는 1995년 특별법에 의해 5·18민주화운동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고, 드디어 1997년 5·18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했습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요한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의 구체적인 조치 사항을 선택한다.

    • 1988년 노태우정부 때
    •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공식적으로 규정
    • 김영삼정부는 1995년 특별법에 의해 5·18민주화운동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
    • 1997년 5·18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추출된 정보를 시간적 흐름에 따라 결합한다. 1988년 노태우 정부에서 명칭이 공식 규정되었고, 이후 김영삼 정부에서 특별법을 통한 규정과 국가 기념일 제정이 이루어졌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정부별 주요 사건을 정리하여 최종 답변을 구성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5·18민주화운동이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공식 규정된 것은 1988년 노태우 정부 때이다. 이후 김영삼 정부는 1995년 특별법을 통해 이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였으며, 1997년에 이르러 5·18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5·18민주화운동은 1988년 노태우 정부 때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공식 규정되었고, 1995년 김영삼 정부의 특별법 제정을 거쳐 1997년 국가 기념일로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