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context)
북한의 제1차 핵실험과 중간선거 패배의 충격 속에 미국은 뒤늦게 노무현 정부의 관여정책을 수용하여 북미 직접협상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북한 핵시설의 동결과 불능화를 담은 2·13 합의와 10·3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으며, 마침내 2007년 6월 영변원자로의 냉각탑 폭파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하지만 2008년 12월 6자회담 수석대표회담에서 검증문제라는 벽에 부딪쳐 비핵화 단계로까지 진입하지는 못한 채, 한국과 미국의 정권교체로 이 문제는 새 정부의 숙제로 넘기게 되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초기에 북미 직접대화의 가능성을 거론하는 등 적극적 관여의 태도를 취했으나,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에 이어 2009년 5월 북한이 제2차 핵실험을 감행하자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는 이름으로 북한 핵문제를 대외정책의 후순위로 밀어놓았다. 그러는 사이에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시간을 벌게 되었고, 결국은 오늘날과 같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임박한 상황에 이르도록 방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계독해 질의응답 4건
| question_id | 질문 | 답변 불가 | 정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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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7321 | 뒤늦게 노무현 정부의 관여정책을 수용하여 북한과 직접협상에 뛰어든 나라는 어디야 | 가능 | 미국 |
| 1087322 | 어떤 나라가 뒤늦게 노무현 정부의 관여정책을 반영하여 북한과 직접협상에 뛰어들었어 | 가능 | 미국 |
| 1087323 | 노무현 정부의 관여정책을 어느 나라에서 늦게 받아들여 북한과 직접협상을 진행했니 | 가능 | 미국 |
| 1087324 | 뒤늦게 노무현 정부의 관여정책을 수용하여 중국과 직접협상에 뛰어든 나라가 어디지 | 불가 | 미국 |